항왜 1만 명
임진왜란은 패한 전쟁인가? 이긴 전쟁인가? 아니면 누구도 이기지도 패하지도 않은 전쟁인가?
아마도 나와 같은 50대 이후의 사람들은 조선이 패한 전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역사를 배우는 세대들은 승리한 전쟁으로 배운다고 한다.
왜군에게 형편없이 당한 것으로 배운 50대 이후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오해들이 한둘이 아니다. 요즘에 들어 이런저런 사정들을 알고 그런 오해들을 하나 둘씩 풀면서 예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과 역사 인식들을 생각하면 참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새로이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귀순한 왜군이 무려 일 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전투 중에 포로로 잡힌 숫자 얘기가 아니고 비 전투시에 스스로 일본국적을 버리고 조선으로 귀화한 왜병이 그렇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시에 왜군은 19만 8천명이 참전하여 이중 8만8천명이 전사한다. 또 정유재란 시에는 14만 1천 명 중에 3만 명이 전사 한다. 임진왜란 때 참전한 왜군이 다시 정유재란 때 참전하였다고 가정해 볼 때 임진, 정유 양란 시에 일본에 살아 돌아간 왜군은 약 10만 명에 불과 한다. 그런 중에 무려 1만여 명이 조선에 귀순하였다 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참 혼란스럽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패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10여 만 명에 이르는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포로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투 중에 어느 쪽이 많이 죽었는가 하는 것으로는 전쟁의 승패를 따지기 어렵다. 양 쪽 다 40%~50%에 가까운 손실률이니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누가 더 땅을 많이 빼았는가로 따지자면 일본이 빼앗으러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으니 왜군의 패배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누가 많이 죽였는가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피장파장이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가 누가 포로를 많이 잡아 갔는가 인데… 이 점에서는 우리가 할 말이 없다. 무려 10만 명의 포로와 많은 문화재들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조선이 승리했다기 보다는 조선이 당했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런데 전쟁 중에 귀순한 왜병 즉, 항왜(降倭)가 일만 명에 달한다니 생각이 달라진다. 귀순은 포로와 엄연히 다르다. 포로는 강제로 끌려간 거고, 귀순은 스스로 판단해서 투항해 온 것이다. 국가 통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국가 구성원을 행복하게 하여 통치자의 명예를 후세까지 떨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전쟁의 목표도 종국의 목적은 남의 나라를 병탄하여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과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그저 남의 나라를 침범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불태우고 포로를 잡아 노예로 부리고 하는 목적으로 한다면 그런 전쟁에 나설 부하들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부도덕한 대장을 따를 신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테러분자 같은 생각을 가지고서는 일국의 지도자가 될 수도 없을 뿐 더러 설령, 되었다 하더라도 대의명분이 없는 전쟁은 수행하기가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고금의 역사를 통해 이미 알려진 바다.
풍신수길이 일부의 해석처럼 전쟁광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인배임에 분명하다. 그에 동원된 죄 없는 부하들만 불쌍한 존재다. 그게 아니고 그가 말한 대로 명나라, 인도 까지 병탄하여 천하를 통일하여 위대한 일본인으로 후세에 남고자 했다면, 소위 천하통일이 전쟁의 대의명분이었다면 일만에 달하는 항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인도, 명나라는 고사하고 자기들이 명나라로 가는 길목이라고 생각하였던 조선조차도 점령하지 못하였으며 하물며 보낸 군사들이 조선에 열명 중에 한명이 귀순하였다고 하면 풍신수길의 전쟁은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판명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귀순을 실행한 왜군이 이 정도면 마음속으로는 귀순을 생각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왜군은 그보다 두 배는 많았을 것임을 생각하면 더욱이나 더 그렇다.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들의 병사들마저 제 발로 걸어 자신을 떠났다고 하면 이미 풍신수길은 패한 것이다. 이렇듯 행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항왜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먼저, 조선에 귀순한 왜군이 실제 일 만 명이나 되었을까에 대해 알아보자. 선조실록 권율의 서장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선군과 접촉한 왜군간의 대화내용이다. 『왜인이 말하길 ‘일본에서 꺼리는 점은 항복한 왜인이다. 그 숫자가 이미 만 명에 이르고 있는데, 이 왜인들은 반드시 우리 일본의 용병술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다.
조선에서 산성을 쌓고 있는 것도 역시 이 왜인들의 지휘일 것이다. 지금 조선에 항복한 왜인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다른 곳에 나누어 둔 숫자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우리 우병사가 거느린 수가 거의 천여 명에 이르는데 이들 모두에게 상으로 벼슬이 내려지고 의관이며 전마가 주어지고 아내를 얻어 풍족하게 살고 있다’라고 하였더니, 왜인이 ‘항왜를 발탁하기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 우리들도 투항하고자 하나 중로에 살해될 지의 여부를 몰라 주저하다가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조선이 올 때에 강화의 기별이 있으면 항복하는 자들이 줄어들겠지만 전투를 벌인다는 기별이 전해진다면 항복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다. 조선이 후대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어찌 다만 우리들뿐이겠는가? 그대가 다시 와서 우리들을 인솔해 가도록 하라’ 하였다』
내용을 보면 왜군 스스로가 항왜를 이미 만 명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조선이 왜군의 귀순을 장려하고 있음을 알고 실제 귀순한 왜인 이외에도 귀순을 생각하고 있는 왜군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음으로는 왜군의 귀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전쟁 발발 초기에는 왜군의 일방적 승리로 인해 조선측에 투항한 항왜는 거의 없었다. 생포된 왜군들만 다소 존재 하였다 한다.
발발 1년 후인 1593년 5월에 이르러 백여 명의 항왜가 처음으로 발생한다. 4월18일 왜군이 한성에서 남해안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병들고 부상당한 왜병이 용산에 잔류하고 있다가 중국군에 투항한다. 이들이 투항하기 시작한 이유를 왜군측 선교사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식량과 탄약은 다 떨어졌고 히데요시의 원조는 항해가 불가능한 겨울 바다로도 육지로도 여름이 될 때 까지는 가능이 없는 상태였다. 또한 실전을 통해서 현실의 중국군은 지금까지 예상했던 중국군과는 상당히 달리 강대한 것을 알았고, 그들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이 것을 보면 추위와 보급 곤란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하였으며, 싸움에서도 자신이 없어진 것이 항복한 이유였음을 알 수가 있다.
처음에 조선은 항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항왜를 모두 죽였다. 그래서 명군에 항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은 우선 왜군에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왜군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조선의 내실을 정탐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죽이는 정책을 쓴 것이다. 그러나 전쟁 시에 항상 강,온 양책을 병행하는 명군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당연히 항왜를 부추키고 환영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항왜는 명군에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조선의 태도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변화한다. 선조실록에 보면 선조는 『전일 투항한 왜병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불평하는 말도 많았는데 나만이 그렇지 않다고 밝히면서 많은 인원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군신들의 저지를 받아 끝내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항왜들이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역전하여 적병을 많이 죽이고 심지어는 자기 몸이 부상당해도 돌아보지 않고 있으니,.. 』 라 한다. 군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 자신이 항왜를 수용하는 것으로 변경시킨 것을 알 수 가있다.
이처럼 1593년부터 1594년 중반까지 전란의 중반시기에는 추위와 굶주림, 적군에 대한 공포, 조선과 명군의 회유책 등의 이유로 귀순한다.
이후 1594년 9월부터 1597년 까지 명과 일본과의 강화교섭기간에는 주로 노역과 굶주림이 귀순의 주요 사유가 된다. 왜군은 이 시기에 남해안에 15개의 왜성을 축조 하였다. 그러다가 명과의 강화협상이 진행 되면서 강화 교섭의 한 방책으로 10개의 왜성을 5개로 축소한다. 이 과정에서 10개의 성을 파괴한다. 그러다 강화가 결렬되자 다시 울산성, 순천성, 사천성, 양산성 등 주요한 성들을 급히 축조 하였는바, 이 과정에서 심한 노역을 견디다 못한 왜병들이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1597년 8월 이후에 정유재란이 발발되자 이번에는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느낀 왜병들이 대량 귀순한다.
한편 전란기간중의 기록을 보면 ‘왜노가 덕의를 사모해서 항복해 온다’ 라는 부분이 종종 나오는데 가토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참전하여 동래성 상륙 다음날 바로 귀순한 김충선(金忠善, 일본명 사야카)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귀순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사야카는 상당한 지위의 사무라이로 유학 등 학문을 알고 있는 경우다. 그가 말한 덕의야 말로 진짜 덕의일 것이다. 그러나 학문을 모르는 일반 병졸 등의 경우는 혹독한 노역과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 당했던 엄한 군율을 피해 도망한 경우로 그들에 있어 덕의는 조선의 환대와 편안한 삶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왜란 중에 조선에 귀순한 항왜는 일 만 명이나 된다. 이들은 김씨 등 새로운 성을 받고 대부분 함경도 평안도 등으로 이주되어 조선인으로 정착한다. 왜군이 일 만 명씩이나 귀순하고 그 보다 훨씬 많은 왜군이 귀순의 의사를 가졌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귀순은 포로와 다르다. 귀순은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즉 일본 내의 가족과 재산, 명예를 모두 포기해야 가능한 것이다. 웬만해서는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수가 귀순하였다 하는 것은 왜군이 전쟁에서 패하고 있으며 십 중 팔구 전장에서 전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는 달리 왜군 스스로는 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 보다는 패할 가능성을 훨씬 높게 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전쟁을 일본에서 직접 지휘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후대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5살 난 어린 아들만 하나 남기고 갑자기 사망하여 정권을 도쿠카와 이에야스에 빼앗기고 만다. 선봉으로 조선에 상륙했던 가토기요마사도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거의 죽다가 살아났으며 노량해전에서도 간신히 이순신을 피해 탈출에 성공 한다. 또 다른 선봉 고니시 유끼나가는 일본으로 돌아 갔으나 세력이 기울어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여담이지만, 일제 36년 기간 동안에 친일파들이 많았던 것에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것 같기도 하다.
김충선 (金忠善, 일본명 사야카)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의 우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조선의 수준 높은 문물을 보고 흠모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동래성으로 상륙한 지 바로 다음 날 항복한 뒤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사야카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 당상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카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가선대부를 하사 받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하인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 5남 1녀를 두었으며 가훈, 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사성 김씨는 족보에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 받은 김충선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 순천왜성터, 정유재란시 순천성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왜군은 임진,정유 양란 시에 이런 왜성을 남해안에 18개나 축조했는데 이런 중에 패전의 두려움과 힘든 노역을 피해 많은 왜군들이 조선에 귀순한다.
작자 미상 (가정호 페이스북에서, 가정호는 자신이 항청 후예라고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