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사모하라
마틴 로이드존스
부흥을 사모하라. 전심으로 부흥을 사모하라. 부흥을 사모하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저서 <부흥(생명의말씀사)>을 요약한 글을 소개한다.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것을 붙잡아 게재한다. 옮긴이가 문단을 적당히 나누고 의미변화 없는 범위 안에서 고쳐 썼다.
제1장 : 부흥의 긴박성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8~29)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설교는 부흥을 촉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부흥의 긴박성과 통별하고 직접적이며 명백한 관계가 있는 어떤 요점들. 첫째 섬뜩할 정도의 영적인 궁핍함이다. 1859년 위대한 부흥에 관심을 갖는 일은 교회 전체의 문제이지 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관심거리가 아님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아주 이례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시고, 반드시 목사들을 통해서 부흥을 일으키시고 촉진시키며 그 부흥의 열기를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첫번째 대답은 '이런 유'이다. 진단의 문제이다.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너희가 배워야 할 첫번째 요점은 경우마다 다른 차이점을 구분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유'와 제자들이 이제까지 다뤄왔던 유, 제자들이 그처럼 성공을 거두었던 유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귀신과 귀신에도 차이가 있다. 악한 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그 모든 것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사탄이다.
두번째 단계는 우리가 의뢰했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지탱시키는 지주로 사용했던 그 수많은 것들이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는것으로 판명났다. 제자들의 능력에 잘못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용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 변증학. 변증학은 '우리가 진실로 해야 할 일은 기독교 신앙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권하여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고학의 차원에서 이러한 일이 행해지고 있다. 이제는 방식의 문제로 사람들은 새로운 번역 성경이 나오는 것을 아주 대단한 일로 여기며 흥분한다는 것이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매체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기는 대중적인 복음 전도가 있다.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용하자는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내가 한 것은 내게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내게 주신 능력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필요를 인식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능력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 : 너희가 기도하되 정신을 차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를 충만케 하시기까지는 그런 유의 난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그 능력을 가졌음을 알면 권위 있게 나아가라.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이런 유'의 필요와 우리 자신의 모든 노력의 쓸데없음과 기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까지는 부흥과 관계가 없을 것이다.
제2장 : 부흥의 장애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세기 26:17~18)
이삭의 물 부족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다시 말하면 그것이 없이는 생명을 전혀 지탱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찾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오늘날 처한 상황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인식해야 할점은 바로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상황은 정말 긴박하다. 이삭이 '하지 않은'일을 주목해야 한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 이삭의 지혜는 매우 분명하고 명확하다. 아브라함의 특징 중 하나는 물을 찾고 우물을 파는 전문가였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역사를 읽고 그 역사가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당한 난제들은 새롭고 매우 독특하며 교회와 세상이 그전에는 이러한 난제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여전히 동일하시다. 사람도 역시 동일하다. 문제의 해결책도 역시 동일하다고 신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히 13:8) 과거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첫 번째 원리는 교회의 역사는 굴곡이 심한 역사였다. 과거의 역사를 읽어보면 생명력과 활력과 능력이 충만했던 시대가 있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교회는 생명력과 능력으로 충만하여 사회 전체가 그 영향을 받았다.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기, 재각성의 시기는 참으로 엄청나게 메마르고 죽어있고 무감각하며 생명 없는 시기 뒤에 왔다는 것이다. 무서운 굴곡이 있었다.
두 번째 원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이전에 얻었던 것으로 다시 돌아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음 원리는 블레셋 사람들이 흙과 여러 오물로 그 우물을 막은 일이다. 모든 거대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18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 어떠한 차이도 가져오지 못한다. 분리된 교회의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 연합의 필요성이다. 부흥처럼 영적인 연합을 촉진하는 것은 없었다. 또한 부흥은 늘 또 다른 효과를 발하는데 그것은 새롭고 생소한 또 하나의 분쟁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문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이 악질적인 소행이 그 우물을 막고 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과 하나님의 축복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증거와 임재하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자.
제3장 : 불신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세기 26:17~18).
오랜 교회 역사에서 이른바 하향세를 취하는 시대마다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진리들을 감추거나 기독교 진리의 어떤 면들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18세기 휘트필드나 웨슬리의 부흥 운동이 있기 전 이신론-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이후로는 관여하지 않으시고 뒤로 물러서 계신다-과 합리주의가 판을 쳤다. 1859년 위대한 부흥이전에는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아버지와 동등하거나 영원히 공존하는 이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둘째로 어떤 본질적인 진리를 부인하거나 무시한 시대에는 어떠한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셋째로 교회사를 보면 그러한 교회들은 부흥을 맞고 있는 자들을 반대하고 언제나 핍박했다는 것을 분명히 발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부흥에 관심을 갖는다면 부흥을 저해하는 것들을 알아야 한다. 가장 중대한 진리와 교리들을 막아 버린 것이 언제나 부흥을 저해했다. 마지막으로 예외없이 이러한 중추적인 교리들을 발견한 것이 궁극적으로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언제나 부흥 이전의 예비적인 조짐이 있기 마련이다. 프로테스탄트 부흥이 임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장엄한 진리를 개달은 후의 일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의 극악한 소행으로 인해 부인되고 감추어진 진리는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며 교회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삶의 과정을 주장하시는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살아계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이다. 하나님에 관한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감추어지는 또 다른 방식은 사람들이 소위 '내재성의 철학'이라 부르는 것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부흥의 역사를 읽어 보면, 그 부흥의 세기는 사람들이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의 모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무시당하는 크고 중추적인 믿음의 조항은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먼저 다른 무엇보다도 두 가지를 의식하게 된다. 하나는 자기들은 전적으로 쓸모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부흥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죄 가운데 빠진 사람의 불의와 소망 없음과 무력함이다.
제4장 : 오염된 교리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세기 26 : 17~18)
교회가 부흥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할 급선무는 블레셋 사람이 우물을 메운 잡동사니와 흙을 제거하고 물의 근원을 막아 버린 것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가 제거해야 할 첫번째 사항은 믿음의 결정적인 교리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이다. 가장 본질적인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위격)이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 그가 오실 약속, 그가 오셔서 행하실 일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 다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인식한다.
성령이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증거와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부흥의 기록들을 읽어 보면, 틀림없이 교회 생활의 중심은 그때마다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이유에 비추어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추적이고 중심적이며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거나 우리의 묵상과 삶과 생각과 기도가 그분을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부흥을 기대할 아무런 자격이 없음이 명백하다.
블레셋 사람들이 한 일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는 것, 어떻게 해서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몰아내고 다른 위치에 서게 하는 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소행이다.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들. 첫째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이요 영원성이다. 골로새서 1장 -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그로 인해 만물이 조성되었으며 그는 영원하시며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시다. 부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부흥이란 교회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중심 위치를 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그리스도의 속죄, 십자가에서의 죽음,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그 일이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고후 5:21. 보혈의 신학에 대해 조롱을 퍼붓는데 명석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설교자들은 블레셋 사람들처럼 모든 쓰레기와 흙과 잡동사니를 던져 넣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와 십자가의 복된 사실을 덮어 버렸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제나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감추는데 관심이 있다. 그 방식 중 하나는 성령을 망각하거나 아주 무시하는 것이다. 부흥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성령의 부어 주심이다. 성령께서 어떤 한 사람에게 또는 여러 사람들에게 동시적으로 능력있게 임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성령을 교회 전체에 부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부흥이요, 성령의 임재하심이요, 성령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역을 넘어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일이다.
제5장 : 결함 있는 전통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세기 26 : 17~18).
위대한 교리중 하나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크게 부각되지 않은 채 부흥이 일어났던 적이 없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갈망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시기마다 돌출되는 위대한 메시지이다. 또 다른 교리는 중생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다시금 성령의 역사의 절대적 필연성을 강조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하며, 사람이 새로운 본성을 받기까지는 어떠한 일도 의미가 없음을 깨우쳐 준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가 중생의 역사, 새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중생, 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났던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른 말로 해서 부흥에 대한 모든 것은 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러한 복음적인 교회에 임재하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도를 벗어난 정통.
문제는 인격 자신과 관계를 맺기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정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교리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에 관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해서, 그 삼위가 각각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일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다음 결함 있는 정통 항목은 주로 교리 자체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며, 교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경적인 참된 관점이 부족하고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교리를 나타내는 데도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단위는 언제나 교회였다. 지금은 노래 부를 때가 아니라 전도할 때요, 죄를 깨달아야 할 때이다. 부흥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일로 시작된다.
그릇된 영의 표시는 첫째 무엇보다도 교만함, 삶의 교만이다. 이생의 자랑, 지식의 자랑도 동등하게 나쁘다. 지식은 교만하게 만든다. 교만은 어떤 형태를 띄든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고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영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비판적이어서는 안 된다. 또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변론해야 할 뿐 아니라 전파해야 한다. 마귀가 모든 일에 낭패를 당하게 하고 엄청나게 억압하며 성령을 소멸하는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려 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로버트 맥세인(Robert McCheyne)이 던디에서 강단에 올라가 입을 열기 전부터 사람들은 흐느끼며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에게는 엄숙한 요소가 있었다. 어떠한 형태든지 죄는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임하는 것을 막는 주요한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제6장 : 죽은 전통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세기 26 : 17~18).
죽은 전통은 어떻게 나타날까? 첫째 죽은 전통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은 자만이다. 자기만족이다. 온통 변명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들은 안일을 추구하고 안보를 원한다. 일정의 낙하산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보편적인 메시지를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탐사당하고 간섭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교훈은 언제나 보편적이고 원근법적인 것이어야 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참 선지자들보다 언제나 더 인기가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이 전혀 없다. 주일 아침 예배가 관례요 습관이 되어 버렸다. 두 번째 특징은 열심을 싫어하는 것이다.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고 있다. 열심을 혐오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열심을 이처럼 반대하는 것이 부흥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들 중 가장 큰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바울이 이 주제를 다룬 장으로 즉시 읽어 보아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두 가지 위대한 원리. 첫 번째 모든 일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4:40).
첫째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어떠한 잘못, 혼돈을 범한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이다. 사도는 만일 동시에 방언을 말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듣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혼돈만 일으킬 뿐이며 복음 전체가 오도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사람이 말하다가도 다른 형제가 말할 것이 있는 줄 알면 멈추고 다른 형제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란이 자제할 수 있는 한 이렇게 해야 한다.
혼돈은 언제나 복음을 오도시킨다. 두 번째 요소는 흥분 또는 거짓된 기쁨의 의식이다. 흥분 상태는 육체에 속한 것이며 육신적인 기쁨이다. 사도는 이러한 일들을 적당하게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
세 번째 요소는 감정주의이다. 감정주의는 감정이 격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단순히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정죄한다. 신약 교회의 매우 중요란 특징은 자발성, 생명력, 생생함, 활력이었다. 침체기에 빠진 교회는 예배 의식에 있어서 더 형식적이 되고 예배 형식을 채용하여 공기도서나 의식서로 돌아가는 경향을 띈다. 우리는 너무 프로그램에 매여 있어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다.
마지막 요점은 감정주의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감정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거짓된 지성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흥의 가장 큰 장애 요소들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라. 예언하는 것을 멸시치 마라.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
제7장 : 영적 무력증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세기 26 : 17~18).
부흥이 막힌 또 다른 표증 중 하나는 진리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그러나 묵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늠하는 것은 그 깊이와 참된 이해이다. 그 깊이와 참된 이해를 얻는 것은 오직 묵상과 생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의 한 부분이다. 묵상은 언제나 참된 자기 성찰을 불러온다. 잘못된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영혼에 관해서만 기도하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상태에 대해서만 기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침체되거나 비참해져는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의 원리로 설정해 놓을 수 있다.
비참한 그리스도인이란 모순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침체된 상태에 자주 빠지는 이유는 그들이 성경에 비추어 자신들을 시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피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릇된 자들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이 분명하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행복한 삶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비결이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라. 중요한 것은 체험 자체가 아니다. 그를 체험하고 그를 아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이다. 죽은 전통의 또 다른 표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참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시금석은 마음속에 슬픔과 비통함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참다운 관심이 부족하게 된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짐이 되어야 한다. 부흥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예비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갈증,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부흥에 이르는 필수적인 예비 단계이다.
제8장 부흥에 대한 갈망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1~24).
오늘날 교회에 속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흥을 갈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본문처럼 망각하기 쉬운 성향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이다. 죄가 가져온 가장 강력한 영향 중 하나는 생각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기억을 흐려놓는 것이다. 망각의 주요한 원인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세대에 몰두하기 때문이며 특히 우리 자신의 활동에 몰두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일에 너무 바쁘다.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오늘날 복음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의 주된 문제는 성경을 지나치게 경건하게 너무 주관적으로만 읽으려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말했다. 이 돌들이 여기에 있는 것은 전에 일어났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이지 이론이 아니다. 사실이지 관념이 아니다. 부흥은 교회 생활에 비상한 축복과 생동감이 넘치던 시기이다. 어떤 것이 새롭게 되살아난다.
부흥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나며 신자들속에서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 정의는 부흥과 복음전도운동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준다. 복음전도운동은 교회가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부흥은 교회가 어떠한 일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 돌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100년 전 부흥의 나라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부흥은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흥의 보편적인 몇 가지 특징. 부흥의 진수는 성령께서 함께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한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부흥의 즉각적인 효과는 거기 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며 전에는 전혀 갖지 못했던 영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갖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거룩과 위엄과 영광을 인식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무섭고 깊은 죄 의식을 갖게되고 무서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들은 매우 무능한 존재들임을 인식하게 된다. 전적인 무능함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자신들을 내 맡긴다. 기도는 부흥의 때마다 나타났던 위대한 특징이다. 역사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전체 상황을 주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충만케 하고 계신다. 부흥이란 땅위에 임한 하늘의 날들을 뜻한다.
제9장 : 부흥의 성격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21 ~ 24).
부흥의 보편적인 특징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의식,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놀랍다는 의식, 다른 사람들도 그 구원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등이다. 부흥에 대한 어떠한 특정한 요점들. 첫째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부흥을 통해 영향을 받는다.
둘째 부흥이란 왔다가 잠시 동안 지속되다가 가 버린다. 부흥의 하나님의 한정된 역사임을 강조해 준다. 셋째 부흥의 결과로 회심한 사람들은 계속 남아있다. 넷째 하나님과 거룩에 관한 대단한 열심이 교회의 성원들이나 이처럼 회심한 사람들 속에 명백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는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마저도 감화를 받고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큰 복음 전도 운동이 벌어질 때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부흥의 특별한 변화. 부흥이 시작되는 방식, 집회 형태 등은 한계가 없다.
부흥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사람의 유형도 매우 다양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부흥이란 정의상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돌들을 세우라 말한 이유는 그 일은 주님의 능하신 손으로 행하신 것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사람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부흥은 이적에 속한 일이다. 이적은 설명할 수 없다. 이적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주권적이며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인 행위이다. 사람들은 그 부흥을 주도할 수 없다. 부흥의 모든 것은 모두 성령과 그 권능에 달려 있다. 이 돌들이 거기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의 손이 능하심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제10장 : 부흥의 목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1 ~ 24).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역사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 모든 백성들과 민족들이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부흥은 교회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해 주는가?
첫 번째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에 대한 비상한 의식을 교회에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교회에 일상생활에서 가장 주된 문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우리로 하여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임을 깨닫도록 인도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 모양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자기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첫째 학식과 학문을 의뢰한다. 둘째 조직을 의뢰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즉각 사라지게 된다. 너희 성도들아,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리하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요약하면 부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되, 그를 계속 바라보게 하며, 그를 의뢰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니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권능의 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해서 부흥을 일으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언제 그러한 부흥을 일으키십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큰 시련과 좌절의 기간이 있은 다음에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 같다.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일. 애굽의 기간이 끝난 다음, 광야의 체험을 겪은 다음 하나님은 부흥을 일으키신다. 두 번째 정말 절실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홍해와 요단강 처럼 매우 절망하며 낙담해 있을 때 언제나 그런 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한 순간에 역사하신다.
제11장 : 부흥의 결과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말하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사도행전 2:12~13).
부흥의 때에는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물리적(육체적)인 어떤 현상 - 무의식 상태, 머리를 얻어맞는 것 등 - 과 정신적인 현상 - 말의 은사, 유창한 기도 등 - 이 나타난다. 오늘날 소위 '세뇌'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흥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고 세뇌와 관련시켜 설명하려는 것은 부흥의 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흥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두 번째 설명 방식은 이것이 하나의 군중 히스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00여 년 전 북아일랜드 카슨(Carson)박사가 군중 히스테리라는 진단을 배제시키기에 충분해 보이는 다섯 가지 사항을 지적했다.
첫째로 사람들이 목에 무엇인가가 걸려있다고 느끼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히스테리 증상이다. 둘째로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웃거나 울거나 아니면 갑자기 울다가 금방 또 웃는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히스테리의 특징이다. 셋째로 히스테리를 나타내게 되면 거의 틀림없이 수족이나 말초 신경이 마구 움직이게 된다. 넷째로 히스테리는 거의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이 엄격한 의학적 사실이다. 다섯째로 여자들이 히스테리를 보인다 할지라도, 보통 히스테리를 보이는 여자들은 건강이 약하거나 허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부흥 시 나타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설명해 보려는 것이다. 네 번째 설명 방식은 이러한 현상은 모두 마귀의 장난이라는 것이다. 부흥의 결과 자체가 마귀의 역사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킨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도록 인도하는 영은 마귀에게 속한 영일 수 없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다.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둘째로 성령께서 온 인격을 감동시키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마다 마귀도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12장 : 부흥이 오는 방식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출 33:4)
본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려고 모세를 산으로 부르심.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섬김.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신을 결정할 권세가 있다고 떠벌린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계시에 복종하지 않으며, 자신을 계시의 판단자로 세웠고 그 계시가 어떠해야 함을 스스로 결정지었다. 교회는 성경보다 자신을 높이 세웠다. 철학이 계시의 자리를 차지했다.
부흥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궁핍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부흥을 위한 참된 기도와 중보를 기대할 수 없다. 다음 단계는 회개이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8-11).
참된 회개에 대한 완벽한 정의이다. 회개는 단순히 멈춰 서서 순리대로 일이 잘되지 않았으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의 섬뜩함을 인식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각성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지 않으렵니다' 하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총명의 진수이다. 참된 회개의 정의
제13장 : 기도와 부흥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 33장 7~11).
부흥의 진행 단계 중 다음 단계는 기도와 중보의 단계이다. 본문의 장막은 성전의 전조였다. 일종의 천막으로 모세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던 곳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가는 곳이었다. 회막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라는 것이다. 모세가 이러한 특별한 행동을 한 첫 번째 요점은 이것이 모세 자신이 취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위대한 부흥을 가져오는 첫 번째 일은 한 사람이나 어느 부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한 짐을 느끼고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은 매우 평범한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갑자기 이 짐을 느끼게 되었을 때였다. 본서를 읽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을 때 회개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그는 기도 처소를 세웠다. 겸손하게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상태에 경종을 울리는 문제는 우리는 조직부터 하려고 한다.
현 시점에서 매우 심각한 것 중 하나는 후원이다. 참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한 후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할 후원은 성령의 지원이다. 진 밖에 회막을 세우는데 있어서 모세의 또 다른 중요한 동기는 바로 헌신의 전체적인 개념이다. 헌신은 거룩으로의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 장막을 진 밖으로 멀리 옮겼다.
이것은 구별되어야 하고 거룩해져야 한다. 참되고 진정한 관심의 첫 번째 표시는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하며 부정한 가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별시켜야 한다. 이같이 엄청나게 악한 시대에 여러분은 예외적으로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어떤 방면에서 여러분을 구별시키는 의도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부흥의 첫 번째 조짐은 새롭게 소생하는 일이 나타난다. 여호수아를 그 장막에 머물게 하되 자기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머물게 하였다. 모세는 더욱 더 많은 것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4장 : 부흥을 위한 기도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 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애굽기 33장 12~17).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고 구름 기둥이 돌아왔다. 모세는 만족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바랐다. 그는 회막으로 다시 돌아와 계속 기도했다. 부흥은 가외의 것이다. 부흥이란 교회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며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모세는 가장 우선적으로 개인적인 확신을 위해서 기도했다. 자기가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나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있다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원했다. 부흥을 간구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거나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드러나 명백해지되 어떤 의심이나 어떤 주저함도 나타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모세의 기도 두 번째 사항은 능력을 위한 기도이다. 모세는 하나님 없이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없이는 나아가지 않으려 했다. 부흥의 시작은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로 그는 또한 당시의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특별한 확증을 요구하며 기도했다. 교회는 구별되어야 하고 독특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흥을 위한 기도는 교회가 다시 교회답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문제인가 사라진 것은 교회의 독특성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다.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부흥을 위한 기도는 어떤 사역에 대한 일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 기도는 항상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을 위한 기도는 그 일상적인 축복위에 특별한 것을 덧붙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특별한 것, 백성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과 그의 역사를 확증해 주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제 15장 :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기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 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출애굽기 33장 12~17).
어째서 무엇 때문에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첫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심이다. 13절 :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두 번째 동기는 교회 자체의 영예에 대한 관심이었다. 모세는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 축복에 관련될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32장 32절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참된 중보의 기도이다.
우리의 많은 기도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복음 전도나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과 그 영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기도한 세 번째 동기는 밖에 있는 이방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모세의 기도 방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모세의 기도 첫 번째 특징은 담대함과 확신이다. 거기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고 고요한 확신이 있다.
거룩한 담대함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승리했던 모든 기도의 위대한 특징이다. 두 번째 특징은 논리적으로 따지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논증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옳은가 주제 넘는 짓이 아닌가 '라고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이런 일들이 병행되어야 한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그처럼 많이 말한 히브리서 기자는 동시에 항상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렇게 함을 상기시킨다. 기도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점은, 기도의 질서와 목표이다. 분명한 간구를 드리라는 것이다. 즉 질서와 준비, 집중과 논증, 긴박감이 항상 있어야 한다.
제 16장 : 부흥의 내용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애굽기 33:17).
결국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심으로써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교회가 알았던 신앙 부흥의 모든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 오순절에 일어났던 것에 대한 일종의 반복이요, 그 기원과 시작할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요, 다시 소생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도 일어났다 (사도행전 11:12~15).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은 일회적인 사건이므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 오순절 사건은 단 한 번에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라 여러 일련의 사건 중 첫 번째일 뿐이다. 부흥의 때에 일어나는 일, 그것은 그의 성령을 부어 주시고 그의 백성들을 다시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계속 받을 책임이 있다.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거나 소멸시켜서는 안되며 성령께 순종해야 한다. 부흥의 때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그 능력을 의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이다. 다음의 요점은 교회가 큰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소는 예배의 요소, 감사의 요소, 다 같이 큰 자유로움을 누리는 요소이다. 또한 부흥 시에는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가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제 17장 : 부흥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18~23).
본문의 첫 번째 요점은 모세의 요청이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모세는 더 이상 하나님께 특별한 복락을 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서도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복락과 그가 받은 여러 은사들을 초월하여 이제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을 구하고 있다. 모세와 시편 기자는 단순히 복음의 약속들을 멀리서 쳐다본 사람들이다.
우리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에서 보는 첫 번째 사항은 부분적인 대답이라는 것이다.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보고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문제의 99.9%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데 있다. 모세는 자기가 구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어렴풋이 뵌 적이 있다(사 6:5).
사도 요한도 그 영광을 언뜻 보게 되었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매(계1:27)'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다소 사람 사울로서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갑자기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땅에 엎드려져 소경이 되었다. 제자들이 변화산상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있었을 때, 그 변모한 모습을 보며 깊이 잠들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며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그러한 상황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깊은 잠을 자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흥을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을 언뜻 보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언뜻 지나치면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이 부흥이다. 말하자면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그의 성령을 부어주시고 다시 올라가신다. 베드로전서 1:8,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잘 알고 너무나 사랑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까이 다가와 지나쳐 갈때 그들은 하나님의 등을 보고 정말로 정직하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작은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큰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 그가 소망을 주시면 믿음을 구하라. 믿음을 주시면 확신을 구하라. 확신을 얻었다면 충만한 확실을 구하라. 충만한 확신을 얻었으면 즐거움을 구하라. 즐거움을 얻었으면 영광 자체를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것을 분명히 주실 것이다.
제18장 : 부흥과 하나님의 선하심의 나타남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 33:18~23).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과 임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형상이라 부르신 것이 특별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무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놀랍지만 사실이다.
부흥의 때에 교회에 찾아오는 최상의 축복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선포하심으로써 그것을 알려주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친히 말씀하시는 것 '여호와로라, 여호와 하나님이로라, 여호와, 엘로힘'은 복합적인 이름이다. 이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창조주 하나님, 모든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칭호를 사용하셨다.
그 칭호는 복수명사로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암시하고, 또 특히 이 능력의 개념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그의 능력은 한이 없고 영원하다. 그는 전능하신 분이다. 그러면 그 이름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적인 성품을 계시히셨다. 왜냐하면 그 칭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는 존재한다. I am)라는 뜻이다. 우리의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해당되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그는 죄책을 결코 면제치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낼 것이다. 죄책을 그에게 담당시킬 것이다. 나는 그를 벌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죄책이 옮겨질 것이고 나는 그 죄책을 벗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롭고 은혜롭게 대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방식으로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출 33:19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값없고 주권적인 은혜이다. 이것은 큰 신비이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자신의 하잘것없는 지성으로 그것과 맞서 싸우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이 어미 모태에서 아직 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우리의 지성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자를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지성은 작을 뿐만 아니라 죄로 가득하고 꼬이고 삐뚤어졌으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는 토기장이요 나는 진흙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다른 민족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어째서 하나님만이 아신다. 우리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의 위대한 원리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의 최상의 표출이다.
제 19장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 33:18~23).
부흥의 때를 통해서 전달되는 보편적인 교훈들이 있다. 성령께서 특별하게 찾아오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행사 속에는 두 가지 주요한 원리가 있다. 첫 번째 원리는 계시하는 것과 감추는 것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축복해 주시면서 또한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광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계시의 첫 번째 요점은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라' 어떤 사람도 탐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말씀이다. 계시의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끝으로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그분을 보라. 그것은 영광의 베일이요, 절대적인 영광과 능력을 감춘 것이다.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원리는 보호하심이다. 하나님 자신의 거룩과 위엄, 영광, 죄에 대한 진노, 영원한 공의, 의에 상하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셨다. 우리는 또한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제20장 : 부흥에 대한 부담감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사야 62:6~7).
우리가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선지자의 관심이다. 선지자는 깊이 감동을 받았다. 예루살렘은 평범한 도성이 아닌 '하나님의 도성'이었다. 하나님의 도성,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것이 시온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존재케 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의 피와 죽음으로 값을 치르셨다.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는 버림받은 교회이다. 교회가 황무한 상태에 있다.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가능성들을 보아야 한다.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본래 의도한 대로의 예루살렘의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늘날도 그때처럼 파수꾼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고대하며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상시시켜 드려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일을 계속 해야 한다. 하나님이 쉬지 못하시게 하라. 그리고 우리도 쉬지 마라.
제21장 : 하나님의 개입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취하게 하고 그들의 선혈이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63:1~6).
에돔은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의미하고 대표한다. 에돔은 본래 에서로부터 나온 족속이다. 어둠의 나라, 지옥의 나라, 마귀의 나라, 이 세상의 나라들, 이것이 바로 에돔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 첫 번째는 이 사람의 영광이다. 바로 영광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전부이다. 선지자는 '이 자가 누구뇨 '라고 묻는다. 그가 대답하신다.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그는 의의 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거룩하시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의를 되찾기 위한 것이다(롬 3:25~26).
의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열망이며 그분이 하늘로부터 온 이유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귀를 변호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재건하러 오셨다. 성경 전체의 위대한 주제, 구원 사역은 전적으로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모두 다 혼자서 행하셨다. 혼자서 포도즙 틀을 밟으셨다.
제22장 : 부흥을 위한 이사야의 기도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이사야 63:7).
성경에 기록된 기도들은 언제나 체계와 조직이 있다. 분명한 질서와 순서가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침체기에 교회가 드려야 할 위대하고 전형적인 기도는 부흥을 위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하감하사 다시 한 번 찾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가 했던 첫 번째 일은 스스로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하나님께도 상기시켜 드린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기도의 비밀이다. 기도를 진정으로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 누군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심과 긍휼과 선하심과 인내하심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마귀가 와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며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다는 암시를 던질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어떤 의심이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스스로 상기한 다음,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관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지 않고 역사를 주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스스로 상기한 다음,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관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지 않고 역사를 주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다루셨으니 우리도 교훈을 배우자 하나님은 여전히 같으신 분이다.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원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이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자 함이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인식해야 하는 첫 번째 요점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의 제도가 아니다. 교회는 물과 말씀으로 하나님이 새롭게 지은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스라엘, 교회가 고통에 빠지고 황폐해지며 버림받는 것은 언제나 교회가 배역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기 때문이다. 원수들이 강하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낮아지고 패배당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이 배역하고 어리석고 하나님의 성령을 괴롭히고 근심시켰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만 한 가지 힘의 원천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다. 교회가 이것에 대해 등을 돌리고 반역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넘어지고 질 수밖에 없다.
제23장 : 부흥 기도의 열정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이사야 63:15~19).
우리가 지금 숙고할 것은 이 선지자와 민족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기도를 살펴보면서 인식해야 할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도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이다. 그 기도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긴박성과 끈질김이다. 그런 다음 그의 강렬한 감정을 주목하라. 그의 기도는 일종의 형식이 있다. 그는 참회와 탄원 사이를 오가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면 형식은 망각되고 공적인 기도서들은 필요 없어지며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신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경배와 탄원과 간구의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요소는 간청, 하나님과 논증하는 요소이다.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요소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의 죄악성과 부끄러움을 깊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따지고 열렬하게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관계이다. 그의 실제적인 간구를 살펴보자. 첫 번째 간구 제목은 함축성 있는 '주여 굽어 살피소서'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얼굴을 가장 필요로 한다. 선지가가 '하감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자기들을 하감하시고 미소를 보여주시기를 간청한다. 여기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우리 자신에서부터 출발하며 안 된다.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속성이다. 그 다음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 다음은 이 위대한 기도의 삼중적 탄원이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죄와 그 민족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 두 번째는 그들이 하나님께 요청할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셔서 긍휼과 자비와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 그가 탄원을 드리는 근거는 언약적인 관계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때 단순히 전통으로나, 조상들의 이름으로나, 우리 앞에 간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상들을 의지하는데 정말 심각한 위험이 있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비록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우셨지만 그들이 일어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제24장 : 부흥,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이사야 64:1).
우리의 본성 때문에 기도는 어렵고, 우리는 가르침을 필요로 한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이것은 부흥과 관련된 궁극적인 기도이다. 물론 하나님께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언제 바른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제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해 주실 뿐 아니라 직접 오시는 것이다.
첼턴함에서 아주 예외적인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설교 도중에 강림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흥 기간 동안 일어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백성들 가운데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것을 '지상에서의 하늘의 날'로 묘사한다. 출애굽기 19장 16~20의 말씀을 보면 실로 우리의 기도 문제의 절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선지자는 녹이는 불이 타올라서 물을 끓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2절). 이렇게 기도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 6:12)‘라고 말한다. 그럼 무엇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는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가 보는 것들은 단순한 졸개들이나 앞잡이들이나 도구들이나 통로에 불과하다. '주의 대적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귀와 지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기를 기도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대적들 가운데 알려지고 인정받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고통거리이다.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64:9~12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주님의 교회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말한다. 그러한 기도를 드리도록 격려하는 첫 번째 요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홍해, 반석, 요단강 등은 우리의 생각 밖에 있던 일들이다. 바로 그런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가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_약 4:8'.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기억한다. 이사야의 기도.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잠정적이요, 그의 긍휼은 영구하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인휼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더 깊음을 안다. 시편 기자의 시편 30:5, 언제나 밤만 계속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 시 출처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