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 팀 켈러
모든 이념과 권위를 거부하고 도덕적 상대주의를 긍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은 유효할까.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는 세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무엇일까.
‘시티 투 시티 코리아(CTCK·이사장 이인호 목사)’는 지난 5일부터 서울 서초구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2018 센터처치 콘퍼런스 복음, 도시,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콘퍼런스에 초청된 팀 켈러 목사는 콘퍼런스 둘째 날인 6일 오전 포스트모던 시대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연했다.
켈러 목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 속에서 복음을 각 시대 상황이 처한 문화적 맥락에 맞게 적용하는 작업을 ‘상황화(Contextualism)’라고 칭했다.
상황화가 필요한 까닭은 성경은 모든 상황에 답을 주는 백과사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배 시간의 길이나 형식, 찬송을 무엇으로 해야할 지 등에 대해 성경은 세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 성경을 적용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이 된다.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듯 인간은 문화를 자연스럽게 여기며 그 영향력 안에서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물이 물고기의 실존을 좌우하듯이 문화 역시 인간의 모든 인식과 언어, 행동, 생활 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켈러 목사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일과 복음의 본질을 전달하는 일에 있어 균형을 잘 잡는 게 상황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성경보다 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면 시대의 조류라는 우상에 휩쓸리고, 문화를 무시할 경우에는 성경을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황화를 잘 이해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방인을 위해 보냄 받은 사도 바울이다. 그가 전도 여행을 다녔던 지중해 일대는 오늘날만큼이나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던 문화의 용광로였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철학자와 다신론자,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 등 다양한 대상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화적 맥락에 치우치거나 성경만을 내세우면서 균형을 잃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팀 켈러 목사가 6일 서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열린 '2018 센터처치 콘퍼런스 복음, 도시, 운동'에서 참석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 속 복음의 상황화>
오늘 주제는 상황화(Contextualism)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한국교회 사역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사역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질문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할 문제는 바로 상황화다.
먼저 상황화와 관련해 말할 여섯 가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 상황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둘째, 상황화는 복잡하며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도전이 필요하다. 셋째, 상황화는 성경적이다. 넷째, 상황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다섯째, 상황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여섯째, 복음이 어떻게 상황화를 도와주는가. 이상이 우리가 오늘 살펴볼 것들이다.
1. 상황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는 일들 중 상당수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회 예배시간이 얼마나 돼야 하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예배 중 찬송이 어떻게 돼야 하고, 기도는 어떻게 해야하며, 설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교회 의사결정은 문화 속에서 이뤄진다. 우리는 문화에 적응해 있는 상태이며, 모든 사역은 이런 면에서 이미 상황화되고 있다. 즉 상황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설교에서 사용하는 예화나 특정한 단어 역시 상황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야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쓸 수도 있고 교육을 덜 받은 사람을 초점에 두고 설교할 수도 있다. 목회자가 설교에서 어떤 예화나 단어를 고를 때, 그는 이미 자기가 고수하고 있는 문화 위에서 다른 문화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상황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할 단계가 아니라 이미 상황화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상황화는 복잡하며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도전이 필요하다
성경보다 문화에 더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면 교회는 위험해진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상황화가 이뤄질 때 교회는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 잘못된 우상에 끌려가게 된다.
반대로 문화에 대해 신경을 끄면 교회는 고립된다. 충분히 상황화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교회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갈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다음으로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인 사람들끼리 만나 대화해야 한다.
미국 웨스터민스터대학교 교수 시절 얻은 교훈은 내가 속한 문화의 단점보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문화의 단점을 보는 게 더 쉽다는 것이다. 문화 속에 살고있는 우리에게는 문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에게 물에 대해 묻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물고기에게 물이 뭔지 물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특정한 문화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문화를 가진 교회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왜 그렇게 하나요?”같은 질문을 주고받아야 한다.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사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된다.
균형을 잡는 또 다른 방법은 성경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장로에 대한 구절들을 놓고 한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문화적 차이는 크다. 한국 교회가 장로의 권위를 보다 강조하는 편이라면 미국 교회는 대체로 회중의 권리를 중시한다. 같은 성경을 보고도 다른 결론이 나타난다. 이는 성경과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3. 상황화는 성경적이다
성경은 상황화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또한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9장은 좋은 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여러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한다. 그리고 이들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설교한다. 늘 같은 설교를 회중들에게 전한 게 아니다. 매번 다르게 설교했다. 바울의 설교는 목회자들이 매번 설교할 때마다 상황화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4. 상황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상황화는 문화가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을 주는 것이다. 단순한 사실이지만 각자 처한 문화마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은 다르다.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어떻게 하면 의무와 도리를 다할까, 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이 될까 등의 문제를 고민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문화에서는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까, 나 자신을 발견할까, 나만의 꿈을 이룰까를 고민한다.
이 모든 질문은 그 자체로 합당한 질문들이다. 우리는 성경에는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매번 설교를 달리 한 까닭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3장에서 유대인에게 설교한다. 14장에서는 바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부르는 다신론자들에게 설교를 전한다. 17장에서는 당대 학문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에게 설교한다. 그는 때때로 하나님을 창조자로 소개하고, 어떤 때는 약속을 지키는 주님으로 선포한다. 때로는 십자가보다 부활을 더 강조한다. 반대로 할 경우도 있다.
바울이 이처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해 문화에 따라 매번 다르게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설교를 상황화해서 한다는 것은, 시간을 갖고 전도하려는 사람들의 상황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말을 걸어서 하염없이 듣는 일은 아니다. 유념할 것은 상황화의 첫 번째 정의가 사람들이 문화 속에서 던지는 질문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주는 것이다. 그들이 듣고 싶은 답을 주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때때로 그들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을 줘야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질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5. 상황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상황화는 사람들이 문화를 통해 얻고자 열망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한 핵심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 행동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상대방의 문화를 ’긍정’한다. 그 다음에는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방향을 새롭게 인도해 ‘재조정’한다. 정리하자면 ‘긍정-비판-재조정’의 도식을 따르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 유대인은 표적과 능력을 추구한다. 헬라인은 철학과 지혜를 추구한다. 유대인들은 실용적이고, 헬라인들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이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각각 구하는 능력과 지혜는 모두 좋은 것이라고 긍정한다.
그 다음 바울은 이를 다시 비판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유대인 헬라인 모두에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고 헬라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생각했다.
끝으로 바울은 복음을 토대로 각 문화를 재수정한다. 바울은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와 능력이라고 한다. 헬라인처럼 지혜를 원한다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한다. 유대인처럼 능력을 원한다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영향력을 생각하라고 한다. 그는 희생적인 사랑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고 한다. 희생적인 사랑이 변화를 가져온다고 한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같은 방식으로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했다. 우리는 바울처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문화에 전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문화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으로 상황화를 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네 가지의 슬로건이 있다. 1. 나 자신에게 진실해라. 2. 내가 행복한 일을 해라. 3.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일을 해라. 4. 옳고 그른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없다.
이중 두 번째 ‘내가 행복한 일을 해라’로 ‘긍정-비판-재조정’ 도식을 따라 상황화를 해보자.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을 중시한다. 이건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다.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기성 세대의 경우 사회적 의무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강조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옳다.
이제 비판해보자. 가장 좋은 비판은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에 나온다. 루이스는 ‘행복’에 대해 사람들이 4가지 방식으로 대처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바보의 길이다. 보다 나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해진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가져도 만족할 수 없고 불안에 떠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따름이다. 둘째는 냉소주의자의 길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없애버린다. 불교가 이 부류다. 불교는 모든 욕심을 끊어내라고 한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한다. 셋째는 절망이다. 모든 상황에서 울고 낙담하고 절망한다. 마지막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루이스는 우주에서 아무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을 개인 혹은 사회에서만 찾는 한계를 벗어나 복음 안에서 발견하는 재조정이 일어난 것이다.
6. 복음이 어떻게 상황화를 도와주는가
복음이 우리의 상황화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상황화를 할 때 균형을 잡는 일은 어렵다. 우리는 문화에 대해 자신감을 너무 크게 갖거나 혹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 싶지 않아한다. 또는 우리가 새로운 문화를 너무 빨리 받아들여서 타협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각자의 문화를 정당화시키고 싶어한다. 문화적 차이를 도덕적 가치로 주장하고 싶어한다. 각자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단지 문화의 차이인데 도덕적 우월성을 말한다.
우리는 각자의 의를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각자가 더 낫다고 말한다. 하지만 복음은 이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가 구원 받은 죄인이라고 한다. 죄인이라서 누구보다도 낫지 않다고 한다. 죄인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우월감을 가질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의인이다.
상황화에 있어서 늘 예민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 간직한 문화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새로운 문화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여러분이 은혜로 구원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면 문화로부터 자존감을 얻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이는 복음이 주는 겸손함이다.
동시에 복음은 우리가 겸손해져셔 새로운 문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칭찬과 인정을 안 받아도 된다. 새로운 문화에 속한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가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겸손과 자신감의 균형이 잡힌 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합당한 방식으로 상황화를 이뤄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균형을 의미한다.
<국민일보> (2018.3.7.) 글·사진=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