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독교, 도시의 종교가 되다
Alexander Chow, "Calvinist Public Theology in Urban China Today," IJPT 2014, 158-175.
글_ 김승환
2010년 3월 중국의 영자신문 China Daily에 상당히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가정교회들이 베이징에서 성장하고 있다’(House Churches Thrive in Beijing)는 내용이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China Daily가 중국내 불법으로 알려진 가정교회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국내의 민감한 이슈들을 거의 다루지 않았기에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다. 이 기사에서 언급된 Shouwan Church는 약 1천여 명 가까이 모이고, 정부 당국의 간섭이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뒤에 CNN, New York Times, BBC에서 그 교회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보게 된다.
Chow 교수가 주목한 것은 그 교회의 구성원들과 리더들이 매우 잘 교육받은 엘리트들로 베이징 최상의 대학 교수로부터 졸업생들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중국 기독교의 인상은 가난하고 잘 배우지 못한 약자들의 종교였지만, 중국 도시 안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특징은 urban intellectual church라는 점이다. 특별히 그 교회의 상당수가 장 칼뱅(John Calvin)의 가르침과 전통을 따르는 교회들로 수적인 증가와 함께 영향력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중국 기독교의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특별히 Chow 교수는 이들이 중국사회의 공적인 문제들에 관해 신앙과 신학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중국 기독교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1. 최근 30년간의 변화 과정
1978년 등샤오핑의 개방과 개혁정책으로 중국의 미래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상들이 자유롭게 제공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에서 종교적인 자유도 조금씩 허용되면서 공적인 예배모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Document 19로 잘 알려진 1982년에 작성된 ‘국가 사회주의 기간동안 종교문제에 대한 정책과 기본 관점’(The Basic Viewpoint and Policy on the Religious Question during Our County's Socialist Period) 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무신론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개신교로 회심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정부 문서에서 그 특징을 ‘4 many’라 정리했다. 나이가 많고, 여성들과 학식이 부족하고, 아픈 사람들이 주로 기독교로 회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개인적인 회심이었고 주로 국가가 인정한 교회들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80년대의 중국기독교를 다 설명한 것은 아닌데, 다른 보고서에는 상하이의 삼자교회 교인이 중국 기독교의 42%를 차지했으며 그들은 중등교육을 마치거나 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 또한 40세 이전의 세례자 수가 15%에서 90년대에는 27%로 급성장했다고 말한다. 즉, 80년대는 농어촌교회가 성장했다면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도시교회가 젊은층에서 고등교육자들의 참석률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이런 기독교의 성장에는 대학의 역할이 주요했는데, 80년대 후반 중국의 싱크탱크와 대학들이 기독교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학문적이고 성찰적인 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저장(Zhejiang) 대학의 Chen Cunfu는 두 가지 새로운 형태의 도시 기독교를 기술하면서 Boss Christians과 Intellectual elite Christians라 구분했는데 모두 90년대 사회주의 시장 경제 개혁과 관련이 있다. Boss Christians은 신앙을 가지면서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업인들과 화이트칼라의 전문인들을 말한다. Intellectual elite Christians은 대도시의 대학과 병원, 연구소에 근무하는 신앙인들을 지칭한다. Chen이 공산당 당원이기에 1989년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사건에 많은 기독교 지성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89년 6월 4일 군대의 탄압 이후로 많은 젊은 층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2. 중국에서 부활하는 칼뱅
칼뱅주의가 중국에 처음은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에 칼뱅주의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인민 공화국의 설립 이후 새로운 공산주의 정부가 예배를 통일시키면서 모든 개신교회들을 통제했고, 문화혁명 시기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로 개신교회들이 초교파적인 시대를 맞이하면서 칼뱅의 신학과 그의 지지자들이 삼자교회 안으로 혼합되어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8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칼뱅에 대한 연구들이 진행되는데, 등샤오핑의 개방정책에 따라 막스 베버의 경제연구에서 칼뱅주의의 영향력을 확인한 뒤 서구의 자본주의의 기반인 칼뱅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1956년에서 2010년까지 약 4300개의 아티클이 발간되었고, 특히 90년대 이전에는 400개가 되지 않았지만 2009년과 2010년에는 절정으로 약 1000여개의 연구문서들이 나오게 된다. 그럼 어떤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을까? Chow 교수는 크게 두 가지, 인권 문제와 건설적인 토론 방식을 꼬집었다.
도시 지식인들의 칼뱅주의에 대한 연구 주제 중의 하나가 인권이다.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법률가와 법학자들은 정부에 의해 억압받았던 개인들의 권리를 변호했다. 그 중에서도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인권 문제를 칼뱅 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했는데, 청두 대학의 법학교수 Wang Yi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는 후에 개혁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입헌주의의 개념을 연구하면서 중국의 법적 체계가 법의 통치보다, 법에 의한 통치를 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정부가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법을 남용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서구에서 법의 역할과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기독교의 가치를 지닌 서구의 입헌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칼뱅 신학을 계승한 청교도들의 계약적 공동체 개념을 지닌 북미가 종교와 국가의 분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정책과 권력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쳐왔음을 언급한다.
또 다른 주제는 “정부와 나누는 건설적인 대화로서 자율적인 사회 조직처럼 직접적으로 정부 당국의 파트너로서 사회조직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Jin Tianming 목사는 전통적인 가정교회가 칼뱅 시대의 재세례파와 같이 분리주의적인 성격을 띄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복음에 대한 타협없이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영적인 것에 집중해오던 과거의 교회에서 벗어나 사회에 선교적 차원에서 협력할 것을 주문하면서 2008년 스촨성 지진사태 때 NGO형태로 교회가 함께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칼뱅주의의 문화적 위임령을 따라 사회적 관심사항들에 함께하면서 공적 파트너로서 대화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베이징의 Renmin 대학 철학교수이자 Shouwang 교회의 장로인 Sun Yi은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참여하면서 그는 시민 사회를 향한 보다 활동적인 사역들을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교회와 신학의 공적 특성을 이해하면서 마태복음 5:14절을 토대로 교회는 세상의 빛이며 산 위의 도시들을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월터스토프가 말한대로 개혁신학은 세계 형성적이다.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고 세상을 바꾸어가는데 기여해야 한다. 대만에서 기독교는 민주주의의 시스템을 소개하고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기독교가 조금씩 쇠퇴하고 있지만, 경제성장과 도시화 과정에서 시민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의 에토스를 형성하며, 사회와 국가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이 중국 기독교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통적인 가정교회의 신앙을 유지하는 이들이 상당하며, 회심과 영적인 부분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최근 중국 도시 안에서 불고 있는 기독교 지성인들의 공적 역할에 대해 관심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