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회개한다

by dschoiword posted Dec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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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회개한다

 

서충원 목사 (총신대 신대원, 숭실대 대학원)

 

아래의 글은 대부분 참고할만하지만 진보신학의 영향을 받은 위험한 발상으로 보인다(편집자 주)

 

신앙을 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이성을 억압하고 이성적인 비판을 부정한다면 신앙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광신이 되고 신앙은 병들게 된다.

이성을 억압하면서 신앙을 맹종으로 만드는 태도가 근본주의적 태도이다. 성경의 근본원리를 지키는 것이란 의미라면 근본주의는 환영할만하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성경의 근본원리를 지킨다는 열정을 넘어 이성을 신앙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고 신앙의 이름으로 이성에 폭력을 가하고 이것을 영적이라 여긴다. 이는 영적인 것이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아이러니이다.

...

나는 총신에서 공부하고 합동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총신에서 공부하여 합동 교단 지방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쳐 왔다. 합동은 정통신학의 보수로 자타가 공인한다. 지금도 합동교단의 목사들은 이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나 역시 이런 교단의 분위기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합동교단의 목사로 사역한다.

 

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는 합동교단의 신학적 전통을 세운 분으로 존경을 받는다. 그분의 신학이 개혁파 신학의 전통을 합동측에 바로 세워주었는가? 그분은 자유주의 신학과의 싸움에서 복음진리, 개혁신학의 전통을 수호한 공헌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형적으로 근본주의 신학의 사고를 한국교회 안에 심어준 작지 않은 과오를 범했다. 자유주의를 배격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서 자유주의 신학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통합교단과의 분열을 정당화했다. 지금도 합동교단의 입장은 이 노선에 머물고 있다. 박형룡 박사를 비판하는 것은 금기이다. 아것이 합동측의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사고의 독단과 폐쇄성은 근본주의적 태도이고, 이는 정죄 받아 마땅한 죄이다. 나도 그 안에 지금까지 속해 있으면서 이런 교단의 문제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침묵한다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라 할 때 이런 교단의 적폐에 침묵한 것은 죄이다. 이런 근본주의적 사고의 양식에 대해 회개한다.

 

집단 안에 있으면 집단 내부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 더구나 근본주의적 사고에 길들여 있으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곧 자기의 신학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하게 되고 전투적으로 밖에 있는 적을 파괴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한국교회 안에, 합동교단 안에 이런 집단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

 

교회에 대한, 교단에 대한 비판은 곧 진리에 대한 비판으로 정죄된다. 타자의 다름, 타자의 옳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 이렇게 되어 자체 안의 비판세력은 박해를 받고 집단의 성원들의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고는 억압당한다. 그리고 진보적인 신학은 자유주의로 낙인찍히고 그 신학을 배제하는 것은 선이 된다. 교회분열의 배후에는 이런 근본주의 사고가 놓여 있다.

 

한국교회에서 합동측의 위상은 크다. 그 만큼 한국교회 내 근본주의의 폐습적 사고에 대한 책임이 크다. 이런 무비판적인 독선적인 신학의 입장은 교회의 목사들의 권위주의와 연결되어서 교회를 비민주주의적이고 반지성적이고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종교개혁은 독단적 사고의 틀을 성서로 비판한 전통이다. 한국교회에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합동교단에 근본주의적 폐습에서 벗어나는 종교개혁이 절실하다. 이제 근본주의라는 복음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리라.

 

서충원, 페이스북 글 옮김

 

비판이 아니라 용서를 해야 할까?

 

서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상대를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판하는 자들에게 먼저 너의 눈의 들보를 빼라고 하셨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고 돌로 치려하는 무리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 내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려 할 때 사람들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

지난 번 김찬주 대장이 장로로서 행한 갑질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이를 두둔하는 신학자를 비판했더니 한 페친이 비판하지 말라는 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나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며칠 전에도 내가 우리가 자신을 비판하고 남도 진리에 근거해서 비판해야 한다 했더니,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 했는데 어떤 이가 왜 당신은 자꾸 비판하려 하는냐, 우리는 서로간에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왜 교회를 비판하려 들면 알레르기 반응일까? 동성애에 대해서 비판하면 너무도 당연하고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비판하면 아멘으로 반응하고 기복신앙과 번영신학과 신비주의를 비판하면 진리를 위한 열정이라고 여기는데, 보다 실제적인 우리의 문제를 비판하면 이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성경구절을 들이대면서 비판을 위험하다고 보는 것일까? 동성애나 종교다원주의는 용납해서는 안 될 악이고 한국교회 내 권위주의나 근본주의는 용압해아 할 작은 흠이라고 인식해서일까? 정말 성경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성경이 아니면 성경을 믿는 것을 핑계로 자신의 두려움을 정당화하려 함이 아닐까?

 

비판한다는 것, 비판을 허용한다는 것은 싸움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비판이란 문제제기이고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의심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비판에 대해 관대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비판하기 시작하면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다. 비판은 사실상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비판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이들의 바닥 정서에는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 동안 하나 되어 있던 공동체에 잡음이 생기고 이로 인해서 관계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능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비판은 억압하고 모든 비판의 칼은 밖으로 향한다. 이것이 집단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비판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은 결국 집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집안 단속이다. 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 내에 수 많은 추문이 일어나는데 왜 목사들은 잠잠한가? 통합교단은 세습을 하는 대교회는 용인하고 동성애자는 신학대학에서 몰아내려 하는가? 합동교단은 성추문한 전목사는 용인하고 자유주의나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정죄하는가? 남에 대한 비판은 집단의 일치를 강화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은 공동체의 결속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이런 것을 진리의지라 했다. 진리를 말하지만 사실상 진리를 위함이 아니라 권력의지를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반기독교인 니체의 생각이 우리보다 성경에 가깝고 우리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비판이 필요할 때 용서를 말하는 것은 성경진리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지배권력가 만든 질서 아래서 안전하게 거하려는 유아적인 두려움 때문이다. 공동체의 평화가 깨어지고 갈등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이런 갈등을 하나님의 평화를 깨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평화를 주려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 오셨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인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 하셨다. 이런 상호모순적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우리로 혼란케 한다. 잘 구별해야 하고 잘 적용해야 한다. 주님이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검을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지혜를 요청하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싸움 없이는 없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비판은 평화를 깨뜨리지만 이것 없이는 진정한 공동체의 평화는 없다. 다른 공동체에 속한 남을 정죄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 또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 타인에 대한 경멸에 근거한 비판은 죄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침묵하고 방관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가 아니다. 죄에 대해서, 특히 대다수가 범하고 있는 죄, 중요한 지도자들이 범하는 죄에 대해서 용서 운운하는 것은 진리를 위함이 아니라 기존질서의 안정에 머물려는 태도이다.

 

비판이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가? 건강한 비판으로 깨어질 평화라면 깨어지게 하라! 그것이 깨지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과 화해는 없다. 사실상 자기비판이 없고 타자에 대한 정죄만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분열한 것이다. 이제 비판은 동성애나 이슬람이나 가톨릭이나 종교다원주의를 향하기에 앞서 우리 내부를 향해야 한다. 우리 안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야 한다. 서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한 풍토가 되어야 한다.

 

비판을 두려워하는 것은 유아적이고 병리적이다. 공격성을 받아내지 못하고 억압하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건강하지 못하다. 비판할 줄 모르는 성도들을 양산하는 한국교회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아주 병적이다. 물론 용서해야 하고 용납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이 억압되고 비판이 배제된 용서와 용납은 병적이다. 비판할 줄 모르는 신자들은 오늘의 기독교비판을 받아낼 건강한 정서도 지니지 못하고 이들의 비판을 제대로 방어하고 기독교 진리를 변증할 이성적인 능력도 키우지 못한다.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비판에 좋아요를 누르는 이들이 이제 동성애자에 대한 관용적인 관점을 표현하고 타종교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이들의 논리에 경청할 만큼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언제까지 집단논리에 매몰되어 자기비판을 혐오하고 타자비판에 열광해야 하겠는가?

 

서충원, 페이스북 글

 

성도가 목사를 비판할 수 있는 교회

 

성도가 목사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교회,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일까? 나는 이런 한국교회를 꿈꾼다. 목사가 더 이상 성도들 위에 군림해서 성도들을 지배하지 않는 교회, 성도가 목사를 자유롭게 비판하는 것을 목사 자신이 허용하고, 성도가 이에 대해서 저항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교회, 성도가 목사의 부당한 지시에 합리적으로 비판하면서 불복종할 수 있는 교회, 얼마나 멋진 주님의 교회인가? 이런 교회가 신본주의 교회인가? 아니면 인본주의 교회인가?

 

성도가 목사를 비판하면 인본주의로 공격빋고 목사의 권위를 존경하지 않고 인본주의 사고로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한국교회 현실은 참으로 참담하다. 성도가 자유롭게 목사의 부당한 지시에 대해서 부당성을 합리적으로 비판하면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공격을 받고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는 현상은 오늘의 민주사회에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한국교회 내 적폐 중 적폐이다.

 

한국교회는 사회의 민주화로 인해서 권위가 무너져 정체성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교회 내의 강고한 권위주의로 병들어 이미 정체성 위기에 처해 있다. 만일 권위를 부정하는 무신론적인 반권위주의가 교회에 들어온다면 이것은 오늘의 위험한 인본주의가 교회에 침투했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신본주의라고 하면서 목사를 하나님의 권위의 자리에 앉혀놓고 목사에 대한 비판을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이라면서 건강한 비판마저 억압하고 박해하였기에 들어온 악이다.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악이다. 그러나 목사가 권위로 성도를 억압하는 것도 동일하게 악이다.

 

권위는 선이나 권위주의는 악이다.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하고 이를 분리해야 한다.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권위주의는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것이야말로 인본주의이다. 권위를 부정하는 오늘의 흐름을 막으려면 교회는 민주적인 사고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영적으로 보아야 하고 권위주의는 이 시대의 인본주의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흠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목사들의 이런 궤변에 속지 말라. 권위주의 때문에 권위가 무너진 것이다. 권위주의라는 악을 통해서는 결코 권위라는 선이 보존되지 않는다. 목사가 권위주의로 성도들을 지배하는데 성도들은 무비판적으로 그 지배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불복종하고 사람에게 복종하는 불신앙이다. 권위주의라는 악이 허용되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촛불혁명으로 민주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흐름은 지극히 건강하고 바람직하다. 부당한 권위가 비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그가 구속 수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권위주의의 적폐가 청산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신호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의 건강한 흐름이 권위주의를 선으로 위장하여 가르쳐 온 목사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런 흐름의 귀결은 권위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올 것이다. 나는 현정권의 정책에 대해서 사회주의 운운하는 울산대 이정훈교수의 동영상이 빠르게 퍼져 나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권위를 부정하는 것과 혼동하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가 한국교회 목사들 안에 넓게 퍼져 있다.

 

종교개혁은 부당한 권위에 대한 비판이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의 진리를 발견하고서 이전의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에서 교회가 사제가 평신도 위에 군림하고, 교황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고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특권을 독점하는 것을 바벨론 포로에 비유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도가 목사를 성서 진리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 놓았다. 개신교는 목사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그 권위를 상대화하고 성서의 권위에 근거하여 목사를 비판하고 신학적 전통까지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개신교회는 가톨릭보다 더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다.

 

가톨릭은 성직자들에게 세 가지를 요구한다. 순명, 청빈, 순결이다. 순명이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권위에 대한 순복을 가르치는 가톨릭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한국천주교회 성직자들은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성도들은 목사 말을 하나님 말씀처럼 따라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 일인가? 지금은 우리가 가톨릭에게 배워서 개신교 종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진정한 권위를 세운 개신교는 권위주의로 전락하고 권위주의 때문에 진리를 부정한 가톨릭은 권위를 보존하면서 권위주의를 비판한다면 어디가 진리에 더 부합한가?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김동호 목사님이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섬길 때 한 성도에게 김목사님이 이것을 해 주십사 하고 부탁하자 그 성도가 그것을 내가 왜 해야 합니까, 하며 그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하면서 목사님은 여러분은 이런 성도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아니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멋진 일이 아닌가? 목사가 권위주의를 벗어 던지고 성도의 비판을 받아들일 때 그 권위가 사라지는가 아니면 높여지는가? 나의 친구 목사님이 말했다. '목사가 권위를 주장하면 그 권위는 권위주의이고 성도가 목사의 권위를 말하면 그것은 진정한 권위이다.' 옳은 말이다. 목사가 성도의 합리적 비판을 받아들일 때 목사의 권위는 올라가고 말씀의 권위는 보존된다.

 

이성적인 비판은 선이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부당한 권위에 대한 비판을 요구한다. 권위가 성서에 어긋난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할 때 이에 대해서 항의하고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이고, 종교개혁적이다. 비판을 악으로 규정하고 무신론이나 인본주의로 부정하는 것은 교회가 수구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목사가 앉아 성도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데 성도들은 어리석은 양처럼 복종하고 이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라 착각하는 일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목사들은 권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권장할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세속사회에 가서 배워야 한다. 이성적인 비판을 선으로 볼 수 없는 목사들의 영적인 무지와 이성적인 무능력을 극복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가 정체성 위기를 벗어날 길은 요원하다.

 

성도들이여, 성경을 읽고 깨어 기도하라. 그리고 목사들이 성경 위에 앉아서 교회를 자기의 교회로 만들고 권위주의로 영적인 횡포를 자행하는 것에 저항하라. 이것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바른 방식이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가장 현대적이기도 하다. 복음으로 돌아가면 이 시대의 건강한 흐름과 조화되고 이 흐름을 더 건강하게 세울 수 있다. 한국교회가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영적인 권위를 회복해야 교회는 사회의 희망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서충원 페이스북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