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십니까?
김요환/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학생
역사비평학 문제와 자유주의 신학의 결함 그리고 개혁신학을 빙자한 이단사냥꾼들의 편협함 등이 사회통신망( SNS)에서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정중하게 학문적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터무니없는 말로 공격을 합니다. 제가 느낀 점은 사회통신망에 글을 올리고 논박하는 일을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주제를 간과할 수 없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심각성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신앙의 기본 교리인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다른 종교들을 타종교라고 불러선 안 되며, 이웃종교라고 불러야할까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 전체에 편재해있기에 기독교만의 구원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배타적이고 편협한 것인가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과연 종교다원주의라고 봐야 합니까? 예수는 구원자이지만 유일한 구원자가 아닌가요?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은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입니다(행 4:12; 요 14:6; 딤전 2:5). 타종교를 이웃종교라고 불러야 한다면, 바알과 아세라 신앙도 이웃종교라고 불러줄 수 있습니까? 기득권에 아부하고, 물질만능,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을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말하는 이웃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지역사회를 섬기고 선행을 행하면 이단이라도 포용해야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기독교 선교의 이유와 목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이라는 신앙의 고결함을 위해 순교한 분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저는 종교다원주의를 지행하는 기독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싶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사도 하나의 종교이니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웃종교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참배하길 바랍니다. 또한 예수 외에도 그리스도가 많으며, 타종교에도 메시아가 많다고 주장하십시오. 그러나 묻고 싶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교부들, 종교개혁자들, 경건주의신학자들입니까? 아니면 성경에 근거하여 주장합니까? 자신들의 환상에 근거합니까?
제가 알기로 사도들과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과 경건주의자들은 “옛날 임금 다윗 성의 낮은 마구”에서 태어나고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살았고, 33세의 나이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분이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믿는 줄로 압니다. 이 불변하는 신앙 가치를 곡해하고 왜곡시키는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요 1:12). 그렇다면 다시 따져봅시다. 누구든지 영접하면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해주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는 예수님이 편협한 분입니까? 아니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편협합니까?
둘째,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자기 종교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답변합니다. 순교자들은 자기 종교에 대한 강한 자심감이 없기에 죽은 것입니까?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세상에서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세상은 종교 간의 화합, 일치, 관용, 평화를 이야기하면 판단력을 상실하고 무조건으로 칭찬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독선주의자, 원리주의자 그리고 근본주의자라고 매도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타종교와 대화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웃종교와 대화하기 전에 기독교 안에서 충분히 대화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의와 불법은 함께할 수 없고, 바알과 하나님의 성전이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고후6:14-17).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에 의문을 품고 도전하면서 자신은 복음적이고, 또 자신이 사회 구원과 해방에 투철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내면이 정의롭다고 볼 수 있을까요?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종교도 그 종교 나름의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답합니다. 바울이 그렇다면 왜 아레오바고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서 설명합니까? 그들은 그냥 철학적 방법이나, 신화적 전승을 통해 그 안에 편재하시고 내재하신 그리스도를 깨달아 구원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내린 결론은 성경 본문에 근거하거나, 교회의 전통이나, 합리적인 논증과 이성으로 접근해도 종교다원주의의 또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이 내세우는 비유에 대한 반론입니다. 그들의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산은 하나인데, 정상으로 가는 길이 다를 뿐이다. 즉 구원은 하나인데 종교라는 여러 등산로가 있을 뿐이다,” “진돗개도 개이고 푸들도 개다. 그렇기에 진돗개만 개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종교고 이슬람도 종교인데, 기독교만 옳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
사실이 이러한 유비 속에는 논리가 없습니다. 감정적인 수긍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야간에 배가 안착하려고 등대 조명이 하나를 의지하여 부두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등대가 수십 개가 동시에 다른 곳을 향해 조명해주고 있다면, 배는 표류하다 암초에 부딪혀 좌초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정박지를 비춰주는 유일한 등대입니다. 다른 등대는 없습니다. 배는 부두로 인도하는 등대의 불빛이 하나일 때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피카소의 그림도 그림이고, 동네 꼬마 철수 그림도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그림이니깐 피카소 그림의 가격을 주고 동네 꼬마 철수 그림을 구입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카소의 그림은 그 가치를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작품인데 반해 동네 꼬마 철수의 그림은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이르는 유일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다 읽고 분개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성도들이 당신들이 펼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여러분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도. WCC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WCC 총회에서 이화여자대학교 정현경 교수가 초혼제를 지내고 이른바 ‘구천을 떠도는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혼들’을 불러들인 뒤에 해방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정현경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곧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에 대하여 예수께서 실수했다“(Jesus has mistaken)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미국 유니온신학교의 교수로 초빙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무아비타불 아멘”이나, “노동자와 농민들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이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현경의 초혼제가 개인적인 견해이지 대표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대표성이 없는 사람이 WCC라는 큰 행사의 개막식 행사를 맡아 진행했을까요? 이런 궁색한 변명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의 글에 대하여 “학문이 부족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세뇌되어 이따위 소리 하네”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에게 감히 묻겠습니다. 당신의 학문은 어느 정도 점검 받았습니까? 당신들을 누구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세뇌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심히 부족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 세뇌되길 원합니다.
(김요환의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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