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가장 어려운 계명
선교학 용어 가운데 ‘10/40 창문’이라는 것이 있다. 선교 신학자 루이스 부시가 기독교 선교가 가장 안 된 지역에 붙인 말이다. 지구의 북위 10도와 40도는 그 사이에 북 아프리카에서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해당한다.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이 여기에 있다. 필자는 수년 전 몇 차례에 걸쳐 동남아 지역에서 있은 세계선교컨퍼런스 강사로 참석하여 이곳을 둘러 본 적이 있다.
이 곳의 특징은 국민 연소득 미화 5백 불 미만의 극심한 빈곤이다. 짧은 평균수명에 유아사망률과 문맹률이 아주 높다. 이곳에 분포된 종교들은 주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자연숭배 토속종교, 무신론 등이다. 28개의 이슬람교 국가들(인구 약 14억 명), 2개의 힌두교 국가들(약 13억 명), 8개의 불교 국가들(약 3억 명)이 집결돼 있다.
가장 기독교 선교가 부진한 55개 국가들의 97퍼센트가 10/40 창문 지역에 위치해 있다. 부시가 이 지역을 ‘창문’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교 기회의 창문이 열려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지역 국가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다. 규제가 심하다. ‘저항지대’ (Resistant Belt)라고 불리기도 한다.
선교학에 ‘두 측면 분석’ (Two Dimensions Analysis) 이론이란 게 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지역과 배척한 지역을 비교분석 해 본 결과, 배척한 지역의 90퍼센트 이상이 빈곤과 재난을 훨씬 더 많이 겪고 있음을 통계학적으로 밝힌 이론이다. 이 이론을 반대하는 일부 학자도 있지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 지역의 비참한 빈곤을 외면하고 방관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잘 모른 채 사랑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가장 정점에 있는 장엄한 속성은 거룩성이며, 그 아래에 사랑과 공의가 두 갈래로 펼쳐 있어서 하나님의 주요 속성의 삼각형을 이룬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의 사랑에 대한 개념도 성경적으로 교정되어져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4-40).
무신론자들은 이러한 예수님 계명의 순서를 자기들 마음대로 바꾼다. 그리고는 첫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둘째 계명인 비참한 이웃을 동정하고 사랑한다는 구실로 이들을 방관하는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사랑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이요 그 다음이 이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는 마음에, 진실한 이웃 사랑이 있을 수 없다.
계명(Commandment)은 명령이라는 뜻이다. 인간 기분이나 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 존재를 논하지 말고 예수님의 명령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인간 기분이나 논리로 보자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불신할 이유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이같이 기독교 신앙에는 무조건성과 절대성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이 임의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순서를 바꾸면 사랑의 개념에 혼란이 온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때 진정한 이웃 사랑이 따를 수 있는데, 하나님 사랑을 제쳐놓고 이웃 사랑을 운운하면 소리 나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바른 기독인은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빈곤과 재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비평하기 전에 먼저 마음, 목숨,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만사를 어떻게 처리하시고 계시는지 그분의 심오한 뜻과 계획을 지켜본다. 그리고 불행한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실천한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기독인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깊은 신앙을 가진다. 열악한 환경의 이웃에게 복음의 빛을 전한다. 물질적 도움을 베풀라고 하신 선교명령을 지켜 나간다. 이것의 실천은 가장 어려운 계명이기에 인간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받아야만 가능하다(슥 4:6).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항상 돕는다.
황현조/ 커네티컷비전한인교회 담임목사, Peniel Academy of Theology 교수
뉴욕 중앙일보 목회칼럼 (201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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