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수태 교리의 진수
크리스마스ㅡ성탄절은 단순한 생일이 아니라 대강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과 함께 기독교 세계에서 여섯 명절 중 하나다. 흔히 성탄절이 태양절에서 유래했다 하여 경시하는 풍조가 있으나, 여섯 절기는 “유대인의 구주가 세상의 구주임을 알게 되었다”(요 4:42)는 차순의 신조나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이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라는 차순의 선교 관행에 따라 유대인의 절기와 이방인의 절기가 하나의 시간 동심축을 구성한다는 데 의의를 갖는 교회사적 유산이다.
더러 ‘절기보다는 주일’(부활을 기념하는)이라는 신조가 강조되기도 하나, 주일 단위 개념이 이방의 태양력에 의존한 관행임을 생각한다면 상기의 절기를 아예 부정한다는 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태양력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달이 안 뜰 때 마다 리셋되는 미개한 고대 월력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여섯 개의 절기는 그래서 계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산물 같지만, 이들에겐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바로 에피파니(Epiphany)이다.
에피파니란 신 또는 신성한 어떤 것과의 만남-알현을 뜻하는 말이다. ‘나타냄’을 뜻하는 희랍어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에서 온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나타내주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램프의 요정 지니 불러내듯 주님을 불러내는 목회자는 주의해야 한다.)
에피파니는 이른 바 주현절을 아예 따로 구별해 지정하지만, 사실은 부활이나 성령강림도 에피파니의 일환이다. 이를테면 바울이 경험한 주님 에피파니는 부활(절)에 의존적인가 오순절/성령강림에 의존적인가. 500인의 부활 목격자는 오순절과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도 상기하자. (여러분의 에피파니는 언제이셨나?)
그런데 그 명시적 에피파니로서의 첫 순번인 주현에 대한 기념을 동방 교회의 경우 그리스도의 세례일로 기념하고, 서방교회는 그리스도의 세례가 아닌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 전승과 연결 지어 발전하게 된다는 차이, 사이에 성탄절이 끼어 있다.
그래서 주현절인 1월 6일이 서방교회 전통에는 동방박사 방문 기념일이고, 동방교회 전통 안에서는 주님의 세례 기념일이다. (참고로 루터는 주현절을 주님 세례일인 동시에 동방박사 기념일로 보았다). 즉 성탄절이란 서방교회(가톨릭과 개신교)의 영향 하에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성탄절의 핵심 메시지는 성육신 탄생의 신비이다. (동방 교회와는 달리) 성육신 탄생의 신비로써 주현을 조명하는 것이다.(중요!)
그러므로 이 날을 단지 이교도의 명절로 격하시킬 것이 아니라, 그 현현의 가치와 그것을 기꺼이 수용해 받든 신앙인들의 신앙을 기념하고 전수하는 것이 보다 건강한 태도일 것이다.
이 탄생의 신비, 성육신을 계시로 수용한 주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역시 모친 마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처녀가 생물학적 남성 없이 수태했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여성으로서 모진 고초는 이 땅에서 수많은 여성이 겪어야 했던(지금의 페미니즘 시대와는 다른 시대) 고난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성성을 지닌 이 땅의 교회가 현재 뒤집어 쓴 부도덕의 오명을 표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젊은 여자’ 마리아에 대한 소개를 다음과 같이 복기한다:
젊은 여자 알마(עַלְמָה), 처녀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 동정녀(virgin) 수태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임마누엘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 가운데서 “처녀”가 본래는 히브리어로 일반적인 젊은 여자를 뜻하는 알마(עַלְמָה)였으나, 이것을 70인역에서 동정녀를 뜻하는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로 오역했고, 여기에서 초기 교회의 동정녀 교리로 와전된 것이라는 주장에 천착한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 같은 사람은 20년 전부터 “예수는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다”고 떠들어 대도 신학교 선생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가 처녀를 뜻하는 베툴라(בְּתוּלָה)라는 단어를 놔두고 왜 알마(עַלְמָה)를 썼을까. 이런 것을 궁금해 하기 전에, 이 예언의 발화자인 이사야가 어떤 배경 속에 임마누엘 예언을 하게 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때는 아하스가 다스리던 시기이며 연대기로는 BC 8세기 중반쯤 넘어선 시기이다. 아하스는 분열 이스라엘의 유다측(우리로 치면 남측) 왕이었다. 북 이스라엘(우리로 치면 북측)의 왕과 강대국 시리아(우리 시대로 치면 중국)의 왕 르신이 이 아하스 왕을 폐위시키려고 위협을 가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아하스가 겁먹고 있던 때이다.
이사야가 이때 찾아갔다. 그러고서 보자마자 “처녀가...” 이런 말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먼저 이런 말을 꺼낸다. “왕이시여. 징조를 구하십시오.” “처녀가...”, “임마누엘...” 이런 키워드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왜냐하면 징조를 구하라고 하자, “싫다.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라고 거절하기 때문이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라니, 이 정서 상태가 바로 그 시대 나라 안팍의 모든 정서 상태라 보면 무리 없다. 우리는 임마누엘이 보통여자 알마(עַלְמָה)냐, 처녀 베툴라(בְּתוּלָה)냐, 혹은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냐를 따지기 전에, 당시 이사야가 말한 알마 또는 파르테노스가 누구를 말한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추상적인 상징을 지목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 여자가 이사야의 젊은 부인이었을 것이다... 또는 아하스의 아내였을 것이다. 실제로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지를 밝히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잉태를 전면 거부하는 당대의 모상(母像)을 표지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당시는 잉태를 거부하는 정서의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라가 재앙의 흑암으로 뒤덮여 있는데, 누가 잉태/임신을 하고자 한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징조를 거부함”의 의미이다. 나다나엘의 심기라고나 할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싫다.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 다 같은 의미이며, 유감스럽게도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만연한 정서로서 잉태할 엄두를 못내는 출산율 제로/마이너스를 향해 가는 우리 사회의 지표이기도 하다. 낙태율은 방치하면서 출산율은 걱정하는 이 재앙의 시대 우리 심성을 반영한다. (출산율 마이너스인 우리나라가 유아 수출 1등 국가라고 한다),
따라서, 비록 이사야가 베툴라가 아닌 알마로 임마누엘을 예언했지만, 임신을 전면 거부하는 재앙이 임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생명의 잉태를 명하는 계시라는 점에서 70인역과 신약성서 저자들의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 처녀로 읽어냄은 결코 오역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동정녀 수태 교리의 진수이며, 재앙이 덮친 시대를 뚫고 나가는 믿음의 교리이다. ‘젊은 여자’(라기보다는 ‘어린 여자’였던)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 오명의 징조를 고스란히 몸으로 수용한 믿음의 인물이었음을 상기할 것이다. “징조를 거부한다”와 “잉태를 거부한다”는 다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이영진 교수(호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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