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교수는 "십자군 전쟁이 유럽역사에서 서구와 이슬람세계의 갈등과 트라우마를 배태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 바라보는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먼저 이 교수는 무슬림들이 십자군 전쟁을 두 세계의 갈등 전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슬림들은 십자군 전쟁을 야만과 무지의 유럽세계가 교황을 중심으로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대학살과 약탈로 고귀한 생명들이 짓밟힌 인류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건으로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는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면서 프랑크인(유럽인)들이 성안에서 자행한 살육과 반인륜적 만행을 이슬람 역사는 생생히 기록 한다"고 했다.
또 이 교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무슬림들과 아랍인들의 인식은 유럽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셀주크 투르크인들의 박해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때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농민과 일부 기사들은 저마다 등과 가슴에 붉은 십자표시를 달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이는 1096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예루살렘은 638년 이슬람의 3대 칼리프 우마르가 정복한 이래 당시까지도 이슬람의 세력권에 있던 도시"라고 말하고, "이 도시는 이슬람의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메카, 메디아 다음으로 세 번 째 중요한 이슬람의 성지"라고 했다. 이어 "초기 무슬림들이 메카가 아닌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를 드렸을 정도로 애착이 강한 도시"라면서 "십자군 전쟁이 있을 때까지도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 유럽이나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더불어 "비록 이교도 수중에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순례는 보호됐고, 해마다 그 숫자가 늘어갈 정도로 평화가 유지됐다"면서 "그리스도인 순례자가 박해를 받는다는 종교적 호소는 다분히 교황청의 정략적인 발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희수 교수는 무슬림들이 "십자군 전쟁의 진짜 속셈은 셀주크 투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비옥한 소아시아와 오리엔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물자를 약탈하고자 하려는 정치적 경제적 동기로 본다"고 지적하고, "나아가 1071년 만지게르트 전쟁으로 아나톨리아에서 셀주크 제국이 비잔틴을 패퇴시킨 후 비잔틴 황제 알레시오스 콤네노스의 원병 요청을 구실로 동서교회를 통합하려는 교황청의 야욕으로 십자군 전쟁이 확산되었다고 인식한다" 했다.
또 이 교수는 십자군 전쟁의 아랍 장국 살라딘의 평가가 유럽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도 이야기 했다. 그는 "이슬람 역사에서 살라딘의 위치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이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그곳 사람들을 잔학하게 통치하지 않았던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행동이 유렵역사에서는 성인의 반열로 추켜세웠지만, 당시 불필요한 민간인 희생을 금했던 이슬람 군율에서 보면 당연한 정치행위로 비쳐졌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 대중과 무슬림,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전 방위적으로 만나면서 서구는 이슬람의 선진 문화에 자극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이 때 향료, 진귀한 상품, 오렌지, 레몬, 커피, 설탕, 면화와 그 재배법 등 다양한 물자들이 물밀듯이 유럽으로 들어갔다"면서 "학문까지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후일 유럽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단단한 지적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또 "십자군의 영어식 표현인 'Crusader'는 동시에 성전(聖戰)이란 의미로도 쓰인다"고 말하고, "십자군 전쟁은 우리 사회에 고착된 대표적인 서양 중심 역사의 모순을 표현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지난 1월 7일부터 시작된 양화진 역사강좌는 로마제국과 루터의 종교개혁, 나치제국 등을 살펴봤으며, 이슬람에 이어 일본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행사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에서 매주 목요일 7:30~9:30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