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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교회론 연구

 

신원균 목사 (한마음개혁교회)

 

Ⅰ. 서론

책꽂이를 둘러본다. 눈에 띄는 것들 가운데 교회와 관련 있는 단어들을 살펴보았다. ‘교회 성장 세미나’, ‘영권 회복을 위한 기도 목회론’이라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능력 목회의 파도가 몰려온다’, ‘음악 목회’라는 제목들도 보인다. 도대체 이런 용어들은 언제부터 우리와 친숙해 진 것일까?

칼빈은 16세기 당시 교회 가운데 알 수 없는 용어들, 제도들, 예식들을 하나 하나 비판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먼저는 그러한 것들이 성경 말씀에 합당한 것인지를 확인하고, 나아가 고대 교회에 있었던 것인지를 늘 확인했다. 그래서 성경과 고대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들은, 즉 인위적인 것들은 교회 가운데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 중 좋은 본보기가 칠 성례에 관한 것이다. 칼빈은 당시 일곱 가지 성례라는 관념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예사로 오르내리며 모든 학파와 설교에 스며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때 까지도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칼빈은 칠 성례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 다섯 가지 의식들에 대해서 낱낱이 엄격하게 검토해서 그 기만을 벗기고, 단순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 진상을 폭로하며 당시까지 성례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밝힌다면 자신의 수고가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성경에서나 교회사 가운데 찾아볼 수 없던 많은 용어들과 제도들을 무작정 따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잘잘못을 찾아 가려야할 사명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을 하기 앞서 우리는 먼저 칼빈의 교회론을 통해서 바른 교회론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Ⅱ단원에서는 ‘교회 본질과 실천적 의미’, Ⅲ단원에서는 ‘기독교 강요 제Ⅳ권과 교회론’이라는 순서로 글을 진행하려 한다. Ⅱ단원에서는 칼빈이 가르치고자하는 교회론의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Ⅲ단원에서는 교회의 표지, 교회 정치 질서와 직제, 교회의 권위, 성례에 대한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로마 교회의 부패의 심각성이 자연스럽게 지적될 것이다.

Ⅱ. 교회의 본질과 실천적 의미

김영규 교수는 기독교 강요 초판에 대한 저자의 의도에 대해 “어떤 종교적 열심을 가진 자가 그것으로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어떤 견본(rudimenta)을 제공하는데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어서 좀더 특별한 실천적 의미를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다.

기독교 강요 출판의 특별한 성격은 근거없이 그리고 재판석에서의 경청함이 없이 순수한 교리(sans doctrina) 때문에 대적자들의 강포에 의해서 핍박받고 순교 당하는 자들을 대변하고 대적자들의 불과 칼에 대응하는 저항수단(confessio)으로서 책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대적자들이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진리로서 알아야 할 것을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난하고 하나님 앞에 곤비한 죄인들일지라도, 그들의 교리만은 세상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설 것이고 모든 권세 위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부가 왕으로 세웠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사명이나 종교적인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홀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섬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통치자가 아니라 도둑질하는 자가 된다고 감히 선포하고 있다. 그들 자신들은 그들의 대적자들의 폭력에 대해서 같은 무기로 싸우기를 원치 않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기도하고 있다.

이처럼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강포에 의해서 핍박받고 순교 당하는 이들의 대변서(代辯書)이었으며, 불과 칼에 저항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칼빈은 프란시스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주장이자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장을 지금 변호하려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당시 교회의 상황을 ‘가련하고 어린 교회는 잔인한 학살로 인하여 쇠잔해지고, 혹은 추방당하고, 혹은 위협과 공포에 압도되어 감히 입 한번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상습적인 분노와 광란으로 이미 흔들리고 있는 벽을 계속 쳐서 그들이 시작한 그 일을 기어코 끝장 내고야 맙니다. 한편 그러한 광포에 맞서서 교회를 변호하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묘사했다. 또한 당시 진리를 고집하려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쇠사슬에 결박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웃음거리로 질질 끌려 다니고, 인권을 박탈당하고,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달아난 자들도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그러한 때에 칼빈이 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이를 고집하다가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용기를 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좋은 예가 교회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르게 고치는 것이었다. 당시 대적자들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만을 인정하고 제한하려고 했기 때문에 칼빈은 어느 시대나 교회는 존재했고 또 존재한다는 것, 교회는 유형적인 교회(가시적 교회)뿐만 아니라 유형적인 형체 없가 없는 교회(비가시적 교회)가 있다는 것과, 그 형체는 대적자들이 어리석게 찬양하는 그런 외부적인 화려함에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어느 시대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교회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구원의 언약에 기초한 택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했으며, 교회의 표지는 유형적인 형체가 아닌 다른 표지가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전파성례의 합법적 시행임을 강조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가르침들이 당시 유형적 교회에서 추방당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1. 교회는 택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택자들의 모임이다’는 가르침을 통해서 로마카톨릭주의자들은 교회의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에서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사도신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선택받은 자의 전체 수, 천사들이나 사람들, 사람들 중에서는 죽은 자이든지 아직 살아 있는 자이든, 산 자들 중에서는 어느 땅에 살고 있든지, 혹 어느 민족 속에 흩어져 있든지 간에 이들이 한 교회요 사회이며, 하나님의 한 백성인 것을 믿는다”. 키프리아누스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하여 당시 주교정치 아래 있던 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을 교회 밖으로 추방하였다. 따라서 나그네와 같은 개혁자들에게는 마치 구원이 없는 것처럼 여겼지만 칼빈의 가르침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있다 …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교회를 숨겨두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왕상 19:18)”고 했다. 마치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당시 로마카톨릭주의자들이 듣기를 바라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또한 엘리야처럼 대적자의 칼을 피해 도망하는 동료들이 낙심하지 말고 힘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도 엿보인다. 칼빈은 교회의 기초가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는 것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기독교 강요 3권 21-24장에서 “선택론”을 앞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제네바 교리문답(1942)에 다음과 같이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93문 : 공동적 교회란 무엇입니까?

답 : 공동적 교회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하시고 선택하신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94문 : 이 조항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답 : 당연히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이미 언급된 모든 것들의 은혜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열매 없게 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당연히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기는 열매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95문 :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구원의 원인과 근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를 자비와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 주신 것과, 이 은혜가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견코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기에 대하여 한층 더 큰 확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그 모든 것의 실현과 성취가 제시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답 :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구원의 원인과 근거에 대해서 어떤 오해도 없게 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의 자리가 전혀 있을 수 없음을 보게 된다. 또한 선택론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은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는 밑거름인 것이다.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교황 레오10세의 면죄부 사건은 이런 교회 정의에서 볼 때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루터가 반박한 바와 같이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95개 반박문 중 21항). 또한 루터는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는 어리석은 저들의 설교와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27, 32항). 더욱이 루터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돈을 면죄증을 사는데 사용하라고 가르치지 말고 오히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할 것이라고 까지 말했다.

43 :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증을 사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5 :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 만체 지나쳐버리고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심지어 루터는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 주려고 해야 한다”(51항)고 했으며, 더 심하게는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 성당을 세울 수 있지 않은가”(86항)라고 되묻기도 했다.

이런 어리석은 짓들을 교회는 얼마나 오래 전부터 금지해 왔는지 모른다. 칼빈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대교회의 재산 운용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 칼빈은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고 하는 생각을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 저술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고 했으며,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기 소유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역자들은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을 할 정도로 많이 받지 말고 꼭 필요한 정도로만 받도록 규정했다고 한다. 특히 제롬은 부모의 재산으로 생활 할 수 있는 성직자들에게 만일 그대들이 빈민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모독 행위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용하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뿐 아니라 교회론의 잘못은 교회에 우상을 들여놓게 만드는 일들까지도 서슴지 않게 만든다. 교황은 팔로 장식된 십자가상(the cross set up among the insignia of the papal arms)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까지 말하며 어리석은 동상들로 교회를 장식하곤 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과 주교들이 교회에 어리석은 우상들로 장식하였지만 초기 교회에서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성직자의 예복과 교회 기물을 팔아 저들을 도와주었다고 칼빈은 가르친다.

처음에는 교회 성물을 장식하는데 비용을 아주 적게 들였으며, 후에 교회가 점점 풍부하게 됐을 때에도 이 점에서는 여전히 절제했다. 교회에 기부가 들어오면 빈민을 위해서 그대로 고스란히 보관해 두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방에 기근이 들어 달리 구제 방법이 없었을 때에 키릴루스는 교회의 기물과 예복들을 팔아서 그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 아미다의 감독 아카키우스도 무수한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사(餓死) 직전에 있을 때 자기 교회의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이 유명한 연설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잡수시거나 마시지 않으시므로 접시나 잔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기물을 녹여 그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을 사며 몸값을 치르게 했다.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칼빈 당시 로마 카톨릭주의자들과 개혁자들의 목회 방식과 교회 장식, 예배 및 재정운영 등 전반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교회론에 대한 실천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교회는 택자의 모임’이라고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 두 가지를 살펴보겠다.

2. 우리는 누가 택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없다

(판단의 한계)

칼빈은 기독교 강요(1559) 제3권 21장에서 예정론을 다루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첫째는 호기심의 거절이요, 둘째는 침묵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4권에서는 교회와 관련해서 누가 선택받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인류가 아담의 죄로 인해 시초부터 부패하고 그릇되어졌다 할지라도, 그 많은 사람이 오염된 상태 속에서 주님은 어떤 그릇들을 귀하게 성화시켜(롬 9:21) 모든 시대 가운데 그의 자비를 맛보지 않은 시대가 없도록 하셨다. 우리가 교회를 믿되 하나님의 선하심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믿는다면, 우리가 그의 택한 자의 한 부분으로서 그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고 이미 부분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붙들어서,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되고 성화되리라는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하자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불가해한 지혜를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또 누가 그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선택받았으며 또 누가 정죄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것을 조사할만한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칼빈의 로마서 11:4-5절의 주석을 참고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칠천이라고 하는 한정된 수를 무한정의 수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뜻하신 바는 큰 무리를 밝히 기록하려는 것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통탄할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처럼 크게 넘치는 까닭에,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경건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을 경솔하게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한편으로 온 세계 도처에 아무리 불경건이 가득하고, 가공할 만한 혼돈이 사방에서 우리를 짓누른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하나님의 날인 하에 안전하게 남아 있다는 이 진리가 우리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도록 해야 한다. …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경우를 자기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유사점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할 목적으로, 경건치 못한 것에 시선을 팔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들을 ‘남은 자’라고 칭하고 있다. 바울은 앞서 이사야서에서 인용했던 예언의 말씀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자가 남아 있기 때문에, 희미하고 혼돈하여 황폐한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여전히 비추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판단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 받게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19).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또 일상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든든히 서 있는 듯하던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과는 달리 교회사 가운데는 일찍이 택자와 유기자를 가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무리는 도나투스파이다. 도나투스파들은 교회를 성도들의 회중으로 보면서 언제나 소수의 남은 자들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17, 18세기의 경건주의자들과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성결은 교회의 구성원들의 성결에 근거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가 가라앉은 이후 배교한 자들이 교회로 다시금 복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3세기 중엽에 노바티안과 그의 추종자들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상황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도나투스파들의 분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들이 성결한 생활을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생활에서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설사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 때문에 그들의 성결 생활은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분파의 죄는 배교의 죄보다 더 무서운 죄라고 주장하였다. 교회 내의 선한 자와 악한 자는 심판 때에 가려지는 것이며, 교회의 성결은 교인들의 성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성결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도나투스파는 택자와 유기자를 자기들이 가려내려는 실수를 범한 동시에 가시적 교회를 경홀히 여기고 분리하려고 했다. 칼빈은 도나투스파 외에도 카타리파, 재세례파까지도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그릇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신념으로 교회를 분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고 했으며,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인자한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극단적인 엄격주의에 열중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을 발견한다. 즉 가시적 교회를 자기들의 기준에 의해 함부로 떠나거나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가시적 교회를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쯔빙글리이고, 근원적으로는 어거스틴까지 추적이 된다고 한다. 칼빈의 경우 처음부터 교회의 개념에 있어서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개념에 의해서 설명하지 않았고,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같은 구원의 서정에 의해서 모아지는 신구약의 모든 택자들의 수 혹은 택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를 정의하는데 강한 강조가 있었다고 한다.

A.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칼빈은 비가시적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란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고 했다.

가시적 교회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산재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가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직을 보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연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의 자녀로 간주될 것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다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적응시켜 주셨다. 우리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B. 교황제도 아래 있던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는 택자의 모임이다”는 가르침 때문에 가시적 교회를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누군가 ‘칼빈도 로마 교회를 떠나지 않았는가’라고 질문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자신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제 그들(교황주의자)로 하여금 그들의 교회를 떠난 우리는 이단이라고 외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가 떠난 유일한 원인은 진리를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들이 절대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사돌레토의 편지에 대한 답신에서 더욱 분명히 밝힌다.

저들이 제게 대해 늘 비난해 온 바 교회를 저버렸다고 하는 그 비난에 대하여는, 저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일 군대가 살육 당하며 자기의 계급을 버리고 흩어지는 것을 보고서 지도자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리고 또 그들에게 자기의 위치를 지키도록 외치는 자가 이탈자가 아닌 이상은 저 역시 이탈자일 수 없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당신의 종들이 흩어져 당신의 명령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기들의 지도자도, 자기들의 봉사도 또한 군대의 맹세도 거의 잊어버렸나이다. 그와 같이 흩어진 자들을 다시 한데 모으고자 저는 이방인의 깃발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의 대열에 들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당신의 그 고귀한 깃발을 들어올렸나이다. … 오, 주여! 말과 행동으로 저는 교회의 일치를 누구보다도 갈망하고 있음을 항상 주장해 왔나이다. 그러나 제가 바라는 교회의 일치는 당신과 함께 시작하여 당신 안에서 끝나는 그러한 것이었나이다.

이처럼 진리를 고집하고자 했던 개혁자들에게 대적자들은 화형과 검을 가지고 왔으며, 교수형을 준비해 두었다고 한다. 칼빈은 자신이 저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과 싸웠다고 하여 그것이 교회를 대적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무시하는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C. 가시적 교회에 대한 존중 정신

칼빈은 교회에 대한 존중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를 예로 들고 있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 방면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방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였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 1:2).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word)과 성례 집행(sacrament)은 반대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이러한 내용을 보아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떠나거나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큰 죄가 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교회를 떠나거나 분리하는 이유는 말씀과 성례에 그 기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교회의 표지라고 하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Ⅱ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Ⅲ. 기독교 강요(1559) 제 4권과 교회론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 강요 헌사, 1권 16장, 3권 21-24장의 예정론을 중심으로 칼빈의 교회론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4권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제 Ⅳ권의 제목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셨다고 말한다. 제 Ⅳ권 전체에 대한 요약을 1장 1항에서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부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전진시키려면 무지하고 태만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에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그리고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끝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선 성례를 제정하셔서 성례에 참가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강화하는 데 매우 유익한 보조수단임을 체험한다. 우리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적당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길을 지시하신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 다룰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신다은 것과 그에 따른 은혜의 수단들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칼빈은 제 Ⅳ권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 정치, 교회 직제,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는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민정부를 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말에 따라 본인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에 대해서는 1-2장, 교회 정치와 직제는 3-5장, 교회의 권위(권징과 맹세포함)는 6-13장, 성례에 대해서는 14-19장, 시민정부에 대해서(교회와 국가)는 20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1. 교회(표지)에 대해서(1-2장)

칼빈이 가르치는 교회에 대해서(교회의 본질)는 앞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씀을 교회의 표지를 삼는다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을 말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성례를 교회의 표지로 삼을 때는 성례에 대해서 주의 합법적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복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교회의 표지를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는 마귀들이 온 보편 교회의 통일을 분열시키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편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의 표지는 중요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리의 충실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의 표지와 관련하여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은 칼빈뿐만 아니라 당시 제네바 시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사돌레토 추기경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틈을 타서 제네바 시민에게 옛 신앙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야말로 1500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퍼져 인정받은 참교회라는 것이었다. 옛 신앙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제네바 시민들은 사돌레토 추기경이 제네바 시민에게 보낸 서한에 대한 답장을 써줄 것을 칼빈에게 부탁했다. 그 가운데 교회를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했다. 다음 내용은 사돌레토의 교회의 정의에 대해 칼빈의 지적이다.

그대(사돌레토)는 교회라는 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잘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가 교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도 있겠으나 올바로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당장에 밝히고자 합니다. … 그대는 교회를 과거나 현재, 혹은 지구상의 어느 지역에 있더라도, 그리스도와 한 마음으로 연합된 것이요, 언제 어디서나 한 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자신이 교회를 지적하여 말씀하실 때 교회의 가장 명확한 표지로 우리에게 자주 언급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리들을 검사하는 시금석과도 같으며, 성령은 교회가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밝혀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알고 있었고 또한 그것을 속이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결코 이 가장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문제로 도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만일 이제 그대가 교회에 대한 그대 자신의 정의보다 더욱 참된 정의를 용납할 수 있다면 앞으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바랍니다. 즉 교회란 전세계에 퍼져 있고 모든 시대에 걸쳐 존재하나 그리스도의 한 영과 교리에 의해 묶여져 있으며, 또한 신앙의 통일과 형제적 연합을 지키고 배향하는 모든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칼빈은 사돌레토가 참교회를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표지로 삼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 교회를 어떤 표지에 의해서 정의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교회는 말씀과 성령의 신비적 연합으로 묶여져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것은 새로운 교리를 밝혀주시기 위함이 아니요, 복음의 진리를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칼빈이 분명하게 지적해야만 했던 이유는 당시 교황재세례주의자들이 성령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묻어버리고 사장시키는 경향이 생겨나게 되고 또한 스스로 오류를 범할 여지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오류를 사돌레토도 범하였다는 것이 칼빈의 지적이다. 따라서 칼빈은 사돌레토에게 “그대는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리시켰고, 그로 인하여 성령을 모욕하는 형벌를 받았다” 라고 말했다.

2. 교회 정치 질서와 직제(3-5장)

칼빈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정치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직분에 대해서 말해야만 했다. 이는 로마카톨릭 주의자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바르게 시정하기 위함이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이 성경과 고대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다고 가르치지만 칼빈은 이에 대해 전혀 근거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3-5장은 교회 정치와 교직 제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3장에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바른 교회 정치와 직분들에 대해서, 4장에서는 고대 교회의 교회 정치와 직분들에 대해서 그리고 5장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교회 정치와 직분들을 논함으로써 그들이 성경과 고대 교회의 가르침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이 가운데 3장에 큰 비중을 둘 것이며 4-5장은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족히 여길 것이다.

A.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의해서 전해 온 교회 정치 질서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들(3장)

(1) 한 개인이 아니라 장로회(senate, unitas)에 의해 다스렸다.

어는 한 개인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장로회를 통해서 다스려졌다. 이러한 정치 원리에 대해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Ⅳ권 3장 8항과 11장 6항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교회의 권한을 어느 한 사람이 잡고 마음대로 행사한 것이 아니라 장로회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칼빈은 장로회와 교회와의 관계를 시의회와 시와의 관계로 비유하기도 했다. 칼빈에 의하면 키프리아누스는 당시에 이 권한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때 대개 성직자 전체를 감독과 관련 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키프리아누스는 ‘나는 감독이 된 후로 성직자들의 충고와 신자들의 찬성을 얻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까지 고백했다는 것이다. 장로회를 중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일반 신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형태가 아니라 더욱 존중하는 형태이다.

키프리아누스 시대에 장로회가 존중히 여겨진 반면에 암브로시우스 시대에는 점점 이 원칙이 타락하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고대의 회당과 그리고 그 이후의 교회에는 장로들이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떤 무관심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관습이 없어졌다. 아마 자기 혼자서 훌륭한 체하려는 지식인들이 나태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교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라고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칼빈 시대에는 극도로 타락해서 이러한 원칙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우선 주교는 법과 권리를 침범하면서 교회에 주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원로원을 축출하고 집정관이 단독으로 권위를 잡은 것과 같다. 그러나 주교가 다른 사람들보다 영예가 더 높은 것과 같이 회의의 권위는 개인의 권위보다 더 높음에도 저들은 공동체의 권한을 한 사람이 자기에게 옮기고 교회에 속한 것을 강탈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제정하신 회의를 억압하고 해산했던 것이다.

(2) 교직 제도에 대해서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 권위를 가져야 하겠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11),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에 연장(tool)을 쓰는 것과 같다.

칼빈이 연장에 비유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떤 공로도 내세울 수 없는 존재임을 잘 드러낸다. 그럼 이러한 직책을 누구에게 어떻게 맡기셨는가?

a. 교회 직원의 종류

칼빈은 교회 직원의 종류에 대해 에베소서 4:11절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사도(Apostle), 선지자(Prophet), 복음 전하는 자(Evangelist)는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일으키셨던 직원이다. 칼빈은 이와같은 직분을 가리켜 임식직(extraordinary)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비상직, 창설직이라고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칼빈은 목사(Pastor)와 교사(Teacher)를 가리켜 평상직(ordinary office), 혹은 항존직이라고 한다.

에베소서 4:11절을 근거로 하여 임시직과 항존직으로 구별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은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만을 고려했다고 칼빈은 가르친다. 그와는 달리 로마서 12:7-8절과 고린도전서 12:8절을 근거로 하여 다른 직분들을 제시하는데 그 직분이란 다음과 같다. 능력으로 병고치는 은사(gites of healing), 통역(interpretation), 다스리는 자(government), 구제하는 자(care of the poor)들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병고치는 은사와 통역에 대해서 칼빈은 길게 논할 가치가 없는 임시직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다스리는 자와 구제하는 자들은 영구적인 직분이라고 하였다. 다스리는 자는 목사와 장로가 여기에 해당되고 구제하는 자란 성경의 집사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①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신 명령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도들에게는 아무 제한도 가하시지 않고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고 하셨는데, 이는 각 국민 사이에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두루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들을 세웠노라고 한다(롬 15:19-20).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견된 목적은 반역하는 세상을 돌이켜 하나님께 올바르게 복종하게 만들며 복음을 전해서 세계 각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세계에 그 터를 닦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지자란,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엡 4:11).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복음전하는 자는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그들 다음에 처하면서 그들을 대신해서 활동한 사람들이고 생각한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 외의 비슷한 사람들이 전도자였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인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었을 것이다(눅 10:1)

② 교사와 목사

교사(Teacher)란 선지자의 직분은 계시에 대한 특별한 은사(the special gift of revelation)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지만 고대의 선지자에 해당한다고 가르친다. 교사의 직분도 선지자와 성격이 매우 비슷하며 목적이 똑같다.

목사란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사도는 전세계를 위해서 일하지만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한다)하고는 사도들과 똑같은 책임을 맡았다. 주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셨을 때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눅 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에게 신성 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과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전 4:1과 디도서 1:9절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들을 보아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례한다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목사와 교사의 차이점이 있다. 교사들은 훈련(discipline)이나 성례집행(th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이나 충고(admonitions)나 권면(exhortations)과 같은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와 달리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하였다.

③ 장로와 집사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 그리고 고대 교회도 사역자를 세 부류로 분배했다. 장로계열(the order of presbyters)에서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견책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다. 집사들(deacons)에게는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을 맡겼다.

집사들 가운데도 두 종류가 있다.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고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을, 두 번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집사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b.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역자는 아무나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칼빈 시대에는 이것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사역자들에게는 소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누가 선택할 것인가, 임명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다.

①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는 목사, 장로, 집사 모두 해당된다. 바울은 선하고 진정한 감독을 그려 보인 다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디모데에게 충고한다(딤전 5:22).

②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선택하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때에 품어야 할 종교적 경외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행 14:23). 그들은 무엇보다도 엄숙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드시 최고의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특히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간구했다.

③ 누가 선택할 것인가?

사역자를 선택하는 것은 교회 전체인가, 또는 그의 동료들과 도덕적 견책을 맡은 장로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의 권위로 임명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디도서 1:5절과 디모데전서 5:22절, 사도행전 14:23을 근거로 하여 모든 성도들이 투표하여 뽑는 방식을 옳게 여겼다.

c. 임명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도들이 사역자를 임명했을 때에 안수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안수함으로써 그들이 사역자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표시한다. 이 의식은 직분의 위엄을 교회에 알리는 표징으로서 유용한 동시에, 임명을 받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앞으로는 그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한 매인 몸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주의할 점은 첫째 이 의식을 미신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둘째 안수는 목사들만이 할 수 있다.

B.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교회 정치원리와 직제에 충실했다(4장).

칼빈에 의하면 고대교회들은 성경에 있는 원리에 충실했으며 다소 다른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날 만큼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각 도시에 있는 장로회가 이를 증명하고, 교회 안에 직원(직분)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나 교회 사역자를 교육시키고 선택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첫째, 고대 교회는 각 도시에 장로회가 있었고 그 장로회는 목사와 교사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권고하며 징계하는 직무를 이행했다. 이것은 바울이 감독들에게 명령한 일들이다(딛 1:9). 또 그들은 후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거룩한 단체에 들어온 청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각 도시에는 일정한 지역이 배당되어 그 지역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며 그 지역을 교회의 몸의 일부로 생각했다. 장로회는 교회의 조직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감독 밑에 있었다. 각 지방마다 대감독 한 사람이 있었으며, 니케아 회의에서 총대감독이 대감독보다 지위나 위엄이 더 높다고 결정한 것은 규율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칼빈은 교회는 계급식 교권제도(hierarchy)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고대 교회는 교회 직원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독경사(Readers)와 시제들(Acolytes)에게 성직자(clergy)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는 확실한 직분(office)을 표시하는 이름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일정한 일을 시켜 자기들의 임무를 잘 이해하도록 훈련시켰는데, 이것은 적당한 때가 오면 곧 직분을 맡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 재정에 관한 법을 정하여 그 가운데 한 부분은 구제를 위해 사용했는데 이를 집사들에게 맡겼다.

셋째, 고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한 모판을 남겨두기 위해서 부모의 승낙과 인정을 얻어 소년들을 영적 군대에 모집하여 보호하며 교육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년들을 훈련시켜서 직분을 맡게 될 때에 무식하거나 미숙하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훌륭한 예비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교회에 봉사하게 하였다.

넷째, 고대 교회는 사역자를 누가 임명하느냐에 대해서도 분명히 일반 성도들의 찬성 없이는 아무 성직자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임명식은 매년 일정한 날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신자들의 찬성이 없이 몰래 기어드는 사람이나 증인이 없이 너무 쉽게 승진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대체로 고대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했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이다.

C. 교황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 및 교회 직분을 완전히 전복시켰다(5장).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고대교회가 충실했던 반면에 교황제도 아래서는 이러한 원칙들이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장로회 원칙은 타락하여 교회의 권한이 한 개인(교황)에게 일임되었고, 교회 직원으로 고대 교회가 모르는 수도사를 두게 되었고, 교회 지도자들의 학식과 도덕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까지 타락하게 되었다. 임명식은 하나의 흉내일 뿐 일반 성도들의 의견은 전혀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당시 주교를 선택하는 광경을 보고 칼빈이 개탄을 금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했다.

수치심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 통상적으로 어떤 종류의 주교들이 선택되는가를 대답해 보기 바란다. 학식에 대하여 심사를 하던 관습은 확실히 너무도 구식이 되었다. 그러나 학식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법정에서 변호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한다. 확실히 지난 100년 동안 거룩한 학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주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이전 시대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때가 더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현대 교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도덕 생활을 평가한다면 고대 교회법이 무자격자라고 판단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술고래가 아니면 음행하는 자였고, 이런 죄가 없는 자는 노름꾼이난 사냥꾼이거나 또는 어딘가 생활에 방탕한 면이 있었다. 어떤 결점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라도 고대 교회법은 그런 사람을 감독직에서 제외했다.

음행과 노름, 방탕을 일삼는 자들이 주교를 맡고 있었다는 것은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보다 어리석은 짓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을 교황의 허락으로 주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그들의 파렴치와 우둔은 극도에 달해서 자연적인 감정으로 보아도 불쾌한, 이 해괴 망측한 죄악을 보고도 무서워할 줄 몰랐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예만으로 칼빈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당시 교황제도 아래 있던 자들의 타락상도 그려진다.

3. 교회의 권위(6-13장)

칼빈은 교회의 권위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진행하고 있다. 먼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권위에 대해서 다룬다. 6장에서는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the primacy)의 잘못을 지적했고, 7장에서는 로마 교황권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 다음 8-9장은 교리권, 10장은 입법권, 11-13장은 재판권을 다루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 Ⅳ권을 차지하고 있는 분량으로 볼 때 교회의 권위에 대한 내용은 적지 않다.

A.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은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B.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을 살펴보면 위조와 날조의 역사이다.

C. 교회의 교리권은 무한한 것이 아니며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D. 교회의 입법권은 교회의 질서를 형성하게 만든다.

E. 교회의 재판권은 영적인 것이다.

4. 성례에 대해서(14-19장)

기독교 강요 Ⅳ권 가운데 성례가 차지하는 분량이 약 1/3이 넘는 것을 봐서 우리는 칼빈이 이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초판에서도 이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했었다. 초판에서는 ‘Ⅰ. 율법, Ⅱ. 믿음, Ⅲ. 기도, Ⅳ. 성례, Ⅴ. 거짓 성례, Ⅵ. 기독교인의 자유’와 같은 순서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Ⅳ장에서는 바른 성례와 Ⅴ장에서는 거짓 성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최종판에서는 Ⅳ권 14-19장에 걸쳐 좀더 세밀하게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4-17장은 바른 성례에 대해서(14장은 성례, 15장은 세례, 16장은 유아세례, 17장은 성만찬), 18-19장은 거짓 성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분량상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내용을 모두 옮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에 강요의 순서에 따라 각 장의 중요한 몇 가지 핵심만을 살펴보려고 한다.

A. 성례에 대해서

(1)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외형적인 표이다.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두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단히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2)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성례는 집례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같이 생각해야 된다. 성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며, 이 점에서 우리는 성례를 집례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편지가 전해질 때 필적과 서명만 충분히 인정되면 전한 사람이 누구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면(마 28:19) 누가 집례하든지 세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만찬도 마찬가지로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B. 세례에 대해서

(1) 세례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entrance)이며 신앙생활의 입문(initiation)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the initiatory sign)을 세례하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에 세 가지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첫째,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는 것이다. 둘째,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는 것과 그의 안에서 새생명을 얻는 것을 알려 준다. 롬 6:4절의 말씀과 같이 사도는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분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셋째,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임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2) 세례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

a. 세례는 다시 받는 것이 아니다.

세례를 받은 후 몇 년동안 우리의 믿음에 따라 세례가 무효화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반대하여 칼빈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주장한다. 무지로 인해 처음 세례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잘못을 시정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사도들로부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를 받고도 3년 동안이나 더욱 순수한 교리를 조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과 한 믿음과 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이 세례도 하나뿐이며(엡 4:4-6) 이는 자주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해서 분배되어 일단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b. 사사로이 개인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과 여성에 의한 집례를 반대한다.

사사로이 개인이 세례를 준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경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데 칼빈은 그러한 것은 관습에 따른 것이며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병자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부정하였다.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여자들이나 모든 남자들에게 명령하지 않고 그가 임명하신 사도들에게만 이 일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카르타고 회의에서 여자는 일체 세례를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으며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교회 안에 일찍이 터툴리안과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같다고 한다.

c. 필요 이상의 의식을 삼가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초라하고 비천한 것처럼 여겨서 쓸데없는 것들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저들은 축복기도라기보다는 주문과 같은 것을 행하고 촛불과 성유(聖油)를 첨가했다.

칼빈은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자들에게 세례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권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좋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칼빈이 추천하는 세례의 ...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마음을 죽이는 화려한 연극을 세례에서 일체 제거한다면 세례가 얼마나 개선될 것인가! 세례 받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학습 교인이 배워야 할 신앙 고백문을 낭송하며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학습 교인에게 세례를 준다(마 28:19). 그리고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 이상한 오염에 파묻힘이 없이 그 완전한 광채를 나타낼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칼빈은 세례 받음에 있어서 ‘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부어 뿌리기만 하느냐 하는 이런 세밀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라가 다른 데 따라 교회가 자유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세례를 함에 있어서 간결하게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임을 알 수 있다.

C. 유아세례에 대해서

(1)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언약에 근거한다.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하는 문제가 발생함으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세례를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것임을 밝힌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기도 전에 저들을 택하셨다는 것, 둘째는 어린아이들도 은혜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신다고 언급하신다(선택).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창 17:7) 이런 뜻이다(은혜언약). 어린아이들의 구원은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그 자체만으로서 충분한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만큼 그렇게 불손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유아세례를 구약의 할례와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은혜언약의 백성들에게 행했던 할례의 대상에는 이미 유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할례를 베풀게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유아들도 참여케 하셨다(창 17:12). … 여호와께서는 조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 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시대 유대인의 유아들에게 못지 않게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고 했다.

D. 성만찬에 대해서

성례에 관한 내용이 기독교 강요 제 Ⅳ권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성만찬에 관한 내용이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그만큼 당시 성만찬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었고 이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한다.

(1)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신자인 가족에게 영적으로 먹이시는 계속되는 양식(the constant aliment)이다.

성만찬의 의미는 앞서 성례의 의미를 설명한 것에 다 포함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떡과 포도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기 위함인지 칼빈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자.

영적 삶 가운데 우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들고 썩어질 음식으로 육신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낫고 보다 귀한 음식으로 우리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우리 영혼을 보존하는 영적 음식, 즉 우리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이 바로 그 말씀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때로 그 이유를 덧붙이는 바, 그것은 말씀 안에서만 우리의 유일한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어지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우리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양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나 진실로 남는다. … 그런데 이 양식이 주님의 말씀으로 분배되기 때문에, 말씀은 또한 빵과 물이라고 불리운다. 바로 이 말씀에 대해 언급된 것이 정확히 성찬에도 맞아떨어진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인도하신다.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단순히 교훈과 설교만으로 제시될 때, 우리가 그를 마음의 참된 신뢰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아시고,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표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의 실체를 나타내신다)을 더해주시며 우리를 확고하게 하고 굳세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에서 건지시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비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선포를 통해 은혜를 더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도 은혜를 더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임을 깨닫는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참여함으로 힘을 회복하며 하늘 영생에 도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기운을 얻도록 하실 목적으로 이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이다.

(2) 성만찬에 관한 미신들을 주의해야 한다.

성찬과 관련하여 많은 미신이 발생했다고 한다. 성찬의 빵 앞에 부복하거나, 또 마치 그리스도가 그 빵에 포함되어 있는 듯이 빵 속에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상 숭배에 불과한 것이다. 그 외에도 일 년에 한번씩 거리로 성찬 행진을 한다든지, 어떤 때는 성체를 위한 장막을 짓는다든지, 그리고 마치 그것이 신이라도 되는 양 백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일 년 내내 벽장에 보관하는 것 등이다.

E. 거짓 성례에 대해서

칼빈은 제 Ⅳ권 18장에서는 미사에 대해서, 즉 미사의 문제점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19장에서는 성례가 아닌 5 가지의 거짓 성례의 문제점에 대해서 파헤치고 있다.

(1) 미사는 성찬을 더럽히고 말살하는 모독행위이다.

칼빈은 카톨릭교의 미사에 대해서 한마디로 ‘주님의 성찬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살하는 모독행위’라고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사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을 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자신의 후계자가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사제를 지정하여 매일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저들이 그리스도의 후계자와 대리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우편에서 그를 몰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심각한 죄를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둘째, 미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은혜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저들이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면(히 9:12) 이 희생의 힘과 효력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 하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소나 송아지 이상의 존경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셋째,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죽으신 사실을 말살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축출한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에서 유언자가 죽어야만 유언이 확정되는 것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유언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인하셨다(히 9:15-17). 그런데 미사는 드릴 때마다 죄의 새로운 용서와 의의 새로운 획득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우리가 인정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유익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는 점이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자기가 구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며, 새로운 용서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결국 로마 카톨릭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 기억하게 하신 성찬을 미사에 의해서 제거하고 파괴하게 만든다.

(2) 다섯 가지 의식(the five sacraments)은 거짓된 것이다.

다섯 가지 의식이란 견진, 고해, 혼배, 신품, 종부를 일컫는다. 하지만 칼빈에 의하면 이것들을 결코 성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다섯 가지 의식을 성례로 지정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저들은 이 의식에는 외형적인 표징과 말씀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이것을 성례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명령도 없고 약속도 없다면 우리는 그것들에게 반대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 … 성례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해서 신자의 양심에 용기와 위안을 주어야 한다. …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나 천사가 이것을 증거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과 함당한 권위로 증거하신다.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 또는 약속에 날인하는 인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례와 다른 의식을 구별해야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성례로 지정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더 이상 성례라고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의식을 성례로 인정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고대 교회에서 이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주장은 너무나 분명하다.

만일 그들이 고대 교회의 권위를 빌려서 우리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교회 저술가들 가운데서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숫자가 언제 잠입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라는 말을 아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사용했는가? 경건에 관한 모든 외형적인 의식과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로 만족했다.

Ⅳ. 결론

김영규 교수는 그의 설교 가운데 교회에 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분명히 밝히기를 나로부터 멀리 떠난 그 자를 내가 가까이 가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눈을 사용하시고, 귀를 사용하시고, 마음을 사용하셔서 그에 가까운 그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라고 했다. 바로 교회란 하나님이 스스로 감추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는 그것이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돈이나 건물도 아니다. 단지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의 교회론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이다. 당시 나그네와 같은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정의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택하셨는지, 택하지 않으셨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때마다 값없이 구원하신 그 은혜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닌 놀라우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찬양했다. 그러한 개혁자들에게 로마 카톨릭의 사상들,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가치 없게 만드는 저들의 사상들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린도는 매우 타락한 곳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 1:11, 3:3, 5:1, 6:7, 9:1),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 5: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깍아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 15:12). 이와 같은 중에도 교회는 존재했다(고전 1:2). 그들의 공로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다. 그분의 은혜와 값없으신 선택의 열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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