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코프와 한국교회 신학
이영규
“이제라도 한국장로교회는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 사상 회복해야”
한국장로교회에서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이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그의 생애에 있어서 신학적 논쟁들 중에서 세 가지 논쟁점들이 한국교회에 신학적 입장들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첫째, 모세오경 저작설과 성경 무오성의 변증에 있어서 칼빈신학대학에서 신약성경 연구들을 담당하였던 루이스 벌콥이 같은 동료인 구약연구 담당자인 얀센(Raph Janssen)과의 논쟁을 통해 초기 한국장로교회는 모세오경 저작설과 성경 무오성을 변명함에 있어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 진리를 지켜왔다는 점이다.
둘째, 루이스 벌콥이 속한 같은 교단 안에서 타교단 목사인 해리 불테마의 전천년주의 견해가 문제로 등장하였을 때, 루이스 벌콥이 그의 전천년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강하게 천년주의를 비판하였던 칼빈이래 개혁신학의 일반적인 입장을 지킨 일이다.
즉 동시대 인물들인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그들의 친근한 동료들인 워필드나 보스 등에 의해서도 대표되는 개혁신학의 균형잡인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입장을 지지해 준 점은 한국교회가 최근 이단들에 대한 판단에도 도움을 주었다.
셋째, 소위 헤르만 훽세마(Herman Hoeksema)와 헨리 댄호프(Henry Danhof)의 보편은혜 교리를 거절하는 입장에 대해서 그의 비판의 어떤 예가 신칼빈주의에 대한 한국에서의 우호적인 성격을 심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공헌들보다 루이스 벌콥이 한국장로교회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은 그의 조직신학 자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곧 벌콥이 미국의 칼빈신학대학에서 1926년부터 조직신학을 맡으면서 그 다음 해에 교본 형태로 작성되기 시작하여 1932년에 비로소 ‘개혁 교의학’(Reformed Dogmatics)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책이 그렇게 빨리 한국장로교회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한국교회에게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평양장로교 신학교에서 한국인 교수 중 여러 현대신학들과 싸워왔던 박형룡 교수가 해방 후 조선신학교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나온 신학생들을 가르치실 때부터 인쇄물로 루이스 벌콥의 책들이 소개되었다고 신복윤 교수가 증언한 것을 필자가 들은 적 있다.
더구나 평양장로교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서 이눌서(W.D.Reynolds) 박사를 계승하여 1937년부터 가르쳤던 내용들을 담은 구례인( J.C,Crane) 박사의 조직신학 저서(1954년)에서도 루이스 벌콥의 ‘개혁교의학’이 주된 참고문헌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한 권(1941년판)이 아닌 두 권으로 된 것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1932년 초판을 인용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 구례인의 책은 남미 장로교 신학자들인 댑니나 웹의 문헌들이 기초되었고 미국 장로교회의 고전적 신학자들인 챨스 하지, 쉐드, 워필드 등의 저서들이 주로 참고되었다고 서언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렇게 서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았어도 오히려 최근에 출판되고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루이스 벌콥의 저서가 주로 인용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한국교회의 신학적 바탕을 기초하는데 있어서 뜻 깊은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예정론의 유기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댑니와 웹의 입장들이 그 중심이 되어 잘 정리되었고, 유기의 원인이나 기초에 대해서도 훨씬 더 17세기 이전 정통개혁신학의 일반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그 전에는 확인할 수 없는 한국교회에 주어진 큰 복이라고 여겨진다.
이처럼 엄밀한 개혁신학의 신앙적 혹은 신학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 혹은 신학교 교육에 그 유산들에 대한 존중들이 전체적으로 아주 약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눌서 박사의 1921년의 삼위일체에 관한 변증에서 개혁신학의 건전한 입장들이 지금 세대의 신론에 대한 이해들보다 더 잘 소개되었다는 것도 부끄럼이 되지만, 이눌서 박사가 근대신학주의를 배도하는 일로서 비판하였던 그 비판들의 구체적 내용들을 한국교회가 그 당시 심도 있게 받아들었다면 일제시대에 남긴 교회의 실수는 물론 지금에도 반복되고 있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특별히 일찍이 이눌서 박사가 ‘부흥회의 장애는 무엇?’에서 경고한 교회 현상들에 대해서 교역자들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여 교회를 섬겼다면, 지금까지 한국사회나 교회 안에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눌서 박사의 ‘칼빈신학과 그 감화’에서 강조하였던 바른 신학에 대한 강조가 계속 장로교 안에 일어나고, 곽안련 박사의 ‘예정’에 대한 이해를 건전하게 보전하면서 가르쳐 왔더라면 개혁신학의 부재가 그 동안 교회 안에서 더 이상 탄식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신학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들은 사실 논쟁을 통해서 자랑하는 교만이 아니라 기독교 본질에 대한 바른 성경적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선언하고 싶은 바른 진리에 굶주린 자들의 울부짖음에 가깝다.
성경진리를 우리의 호기심으로부터 지켜내고 우리의 침묵으로부터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참된 성도들이나 참된 목자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교회가 실수한 것들을 아주 정확하게 들춰내서 냉철하게 비판하면서 모두 정리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문에 있어서 정직한 일보다 사실에 있어서
정직한 일은 더 어렵기 마련이다.
아마도 하나님
안에서만 그러한 정직이 구현이 된다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