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질문에 답하다.
정주채 목사 (코닷)
그렇다. 요즘 교회들마다 교인들의 십일조헌금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단순히 경제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요즘보다 힘들었던 때가 과거에 많았기 때문이다. 십일조헌금에 대한 신앙의 약화가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신학자들 중에는 “십일조헌금은 구약시대의 제도이므로 신약시대에는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 그대로는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말 속에는 “십일조헌금의 폐지”가 담겨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아마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논란은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곧 율법시대에 속한 것인데 이것이 은혜의 시대인 지금에도 해당되는 성도의 의무인가?”라는 것일 것이다.
필자가 이 질문에 대해 모든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확실하고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해 이 헌금의 연원과 그 믿음과, 이를 행함으로 얻게 되는 신앙생활의 유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1. 우리의 신앙고백으로서의 십일조
1) 십일조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오는 자신을 영접하며 축복했던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 일을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는 율법도 없었고 이와 상응하는 아무런 요구도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오직 감사와 공경의 마음으로 드렸다. 이 멜기세덱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기독론적 접근을 하고 있고, 십일조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히 7:1-10).
즉 멜기세덱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현현된 인물이며, 아브라함이 그에게 드린 십일조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 드린 감사의 예물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제사장들이 그들의 형제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나 이는 영원히 사시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 드려진 것이고 그가 받으신 것이라고 말한다(히 7:8-10).
2) 예수님은 십일조 헌금을 폐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말씀하셨다. 십일조를 드리되 십일조 자체보다 그 가운데 있는 믿음과 정신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에 유익한 어떤 제도나 의식을 율법적인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폐지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정신을 십분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주일성수나 십일조헌금 등은 그 제정의 연원과 뜻을 살펴 그 목적하는 바를 더욱 적극적으로 성취해 나가야 한다.
3) 십일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신앙의 실제적인 표현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사화복의 주재자이십니다. 만물이 다 주께로부터 왔고, 지금 내가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십일조를 드리는 믿음에는 “오직 은혜”라는 신앙고백이 들어있다.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산다는 고백이 들어있다. 안식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을 선포하고 있듯이,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 속에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신앙고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우리가 천지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신앙고백을 입으로만 아니라 물질로, 실제적인 행위로 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하는 신앙고백에는 거짓이 있을 수 있다. 아무 힘들이지 않고, 아무 손해 볼 것도 없을 때는 누구나 쉽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현실적인 이익이 기대되는 신앙고백이라면 아무나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적지 않는 한 몫의 물질을 드리면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신앙의 진실성은 복을 받는 데서가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 믿어서 축복만 받을 때는 그의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 그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나타나게 된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물질에 손해를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때 그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일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검증하시고 또 그 믿음을 양육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 헌금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진실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아주 적절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실한 믿음 없이는 선뜻 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다. 누가 믿음 없이 수입의 십분 일을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께 선뜻 바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십일조 헌금은 신앙의 훈련과 확인을 위해 매우 유익하고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이다.(고후 8:1-4에 보면 연보를 은혜라고 했다.)
4) 십일조는 감사의 예물이다. 십일조는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는 물질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주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믿을 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한이 없는데,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는 말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를 알 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물론 감사는 말로도 할 수 있고, 찬송으로도 하고, 몸으로 봉사함으로 할 수도 있다. 물질로도 감사하는 것이다.
5) 십일조 헌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표이다. 십일조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공경하며, 자신의 몸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겠다는 헌신의 표로 드리는 것이다.십일조만 주님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십일조는 모든 소유를 대표하는 것일 뿐이다. 십일조를 드렸으니까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므로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표인 것이다. 물론 십일조가 단순히 헌신의 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자체가 바로 헌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내가 땀 흘려 얻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2. 십일조에 대한 Q&A
1) 가난해서 어려운데도 십일조는 해야 하는가? 모든 헌금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믿음으로 하고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지 율법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정 어려우면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하다 하더라도, 그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더 아름답게 보시지 않겠는가. 먹을 것조차도 없는데 헌금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가난을 핑계하고 감사가 없으면 끝내는 그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메마르고 말 것이다.
2) 빚진 상태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앞의 질문과 비슷한 문제이므로 앞에서 한 대답과 같다. 그런데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빚지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빚을 졌다면 무엇 때문에 졌는지 하나님 앞에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빚지는 것을 반대한다. 특별히 생산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욕심이나 허영 때문에 혹은 소비를 위해서 빚을 졌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빚을 졌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생활을 정돈해서 앞으로는 빚지는 생활이 아니라 감사하는 생활, 건전한 크리스천의 삶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3) 나는 사업을 하기 때문에 매달 십일조를 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경우 우선 분명해진 소득에서 하거나 생활비의 십일조를 하고 연말에 가서 정산해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십일조는 꼭 교회에 해야 하는가? 그렇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드림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교회에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교회가 아니어도 좋은 기독교 단체들이 있지 않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개인이 그런 단체들을 도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그런 단체들을 섬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요즘 항간에 교회가 봉사를 안 한다고 비판하는 말들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서 교회만큼 이웃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는 단체는 별로 없다. 물론 더 힘써 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신 곳이므로 교회가 힘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또 십일조를 가지고 개인이 자기 마음에 따라 이곳저곳에 헌금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부행위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십일조는 신앙고백과 예배의 행위이다.
그리고 헌금을 잘 사용한다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판단이 결코 교회보다 나을 수는 없다. 교회가 연보를 잘 못 쓴다고 생각해서 개인의 생각대로 한다면 더 잘못되거나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5) 어떤 분은 십일조 중에서 주일헌금이나 기타 헌금도 한다는데.....?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따라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색하지 말라고 하신다.
6) 배우자가 불신자인 경우, 또 불신자는 아니어도 한쪽의 신앙이 어려서 문제가 있는 경우는 어떤가? 이런 때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억지로 하거나 몰래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 헌금보다 배우자의 신앙이 성장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중에도 혹 자기에게 자유롭게 맡겨진 돈이 있다면 거기서 헌금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각 자 믿음대로 판단하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라. 연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다.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우리가 지금 율법시대가 아니라 은혜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감사생활을 훨씬 더 많이 하고 더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의 성도들과는 차원이 달라야 한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받은 은혜로 말하면 구약의 성도들과는 차원이 다른 온전한 감사를 드려야 백번 마땅하다. 그들은 소득의 십분 일만 드림으로써 율법에 순종하였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고서도 늘 부족한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래서 만약 누가 십일조가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십일조를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물어야 한다. 만일 십일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율법이라 말한다면 그는 정말 아직도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율법은 낮은 수준의 표준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처음 익은 열매”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시킨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농민들 뿐 아니라 모든 직업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십일조 헌금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얻게 된 모든 소득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십일조가 바로 “처음 익은 열매”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헌물이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감사하며 살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십일조 헌금을 실천하는 것으로 출발할 수 있다. 아직 못하시는 분들은 믿음으로 시작해 보라. 그리고 계속 해 오신 분들도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진정한 신앙고백과 함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을 항상 상기하면서 드리자.
믿음으로 십일조 생활을 하면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 함을 얻을 수 있다. 욕심에 끌리거나 재물에 끌려 다니지 않고 이제는 물질을 다스리고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또 십일조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기쁨이 있다. 어려워도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면 기쁨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생긴다. 이런 자들에게 삶의 풍성함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