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강복선언)
복을 비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 축도는 목회자의 고유 권한
축도는 예배를 마감하는 예식으로서 그 중요성이 늘 강조돼 왔다. 하지만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해 평신도들도 축도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성경을 통해 축도의 유래와 행위자, 그리고 의미를 살펴본다.
정장복 교수
축도의 유래를 보면, 구약시대에 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전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허락하신 사역이다(민 6:24~26).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는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본다. 실제 예수님은 어린이에게 손을 올려 복을 주시고(막 10:16)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에게 축복하셨다(눅 24:50).
사도들에 이르러서는 일반 기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을 주어로 사용하는 구체화된 축도를 사용하였다(고후 13:14, 롬 15:5~6, 13, 엡 6:23~24, 살전 5:23, 살후 3:16~18, 히 13:20~21).
이렇게 시작된 축도는 성경에서 기도와 구분되었다. 구약에서 축도는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며 평강 주심을 알리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역사하심이 있음을 알리는 의미로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따라서 축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복을 선언하는 행위로, 강복선언(降福宣言)이다. 영어에서도 기도는 ‘prayer’로, 축도는 ‘benediction’으로 표현해서 둘을 구별한다. 축도를 한자로 해석해서 ‘복을 비는 기도’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복 선포하는 성례전
둘째,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축도는 사도적 전승을 받은 교회의 감독과 교부들이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사도적 전통으로 예배의 결론에서 사용되었다. 363년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이단들의 축도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교회에서 예배의 순서로 갖는 축도를 존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후기의 신학자들은 축도를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은사로 표현하였다.
중세의 교회를 비롯해 현재의 구교에서는 축도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사제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고 예배에서 실천하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예전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 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축도는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그 정신은 현대의 세계 개혁 교회에서 계승되어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계속되고 있다.
만인제사장 개념은 평신도들도 하나님께 직접 예배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축도의 주체 여부와 상관없다. 성경을 보면 목사도 장로와 같다. 하지만 평신도 장로는 치리의 기능을 갖고, 목사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집행하는 권한을 갖는다. 축도는 성례전에 속한다. 따라서 축도는 목회자만의 권한이다.
미국에서는 목사도 아닌데 축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가 있다. 미국의 축도자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읽는데, 평신도는 말미에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be with us(우리에게 함께 하기를)’라고 선언하는 반면에, 목사는 be with you(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라고 선언한다. 이 말의 차이가 축도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잘 구별해 준다.
셋째, 개신교의 축도는 개혁가들의 축도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루터나 칼빈은 예배의 끝부분에서 전통적으로 민수기 6장 24~26절의 아론의 축도를 사용하였고, 영국의 성공회와 같은 교회에서는 빌립보서 4장 7절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몇몇 개혁자들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사용한 바 있다. 지금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축도는 아론의 축도(민 6:24~26)다. 아론의 축도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사제의 신분으로서 백성을 위해 축도할 때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본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루터나 칼빈은 축도 순서에 아론의 축도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지금도 루터 교회를 비롯한 많은 개혁 교회들이 이 본문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축도란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심을 목사가 선언하는 행위로 이해했다.
이처럼 축도는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예전의 순서로, 예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결론이다. 축도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예배 전체가 무효가 된다는 것은 과장이지만, 소중한 것을 빠뜨려선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도가 아니라 성경을 선언하는 것
끝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축도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보자. 종교 개혁가들이 어떤 성구를 사용하여 축도를 했든지간에 그들은 순수하게 거기에 해당하는 성구를 그대로 읽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세계 어느 교회에서나 축도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읽는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 교회에서는 이 뜻을 알고 있는 교단이나 일부 목사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목사들이 축도를 하는 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어떤 목사들은 축도를 할 때 축도의 원문보다 훨씬 길고 많은 수식어를 사용한다. 또 어떤 목사들은 기도와 축도를 혼합하여 아예 기도를 한참 한 후에야 기도의 말미로서 축도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축도의 형태는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볼 수 없는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다. 세계의 개혁 교회나 정교회, 가톨릭 교회를 가 보아도 이러한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사들은 좀더 많은 수식어를 사용하여 길게 축도를 해야 더 좋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
축도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예배하는 자녀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심을, 목사로 하여금 선언하게 하는 예전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와 지식, 표현 등으로 대치할 수 없다. 또한 목사가 단순하게 복을 빌어 주는 기도의 행위도 아니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선언하는 것이 타당하다.
페북친구 나영균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