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창 교장의 십계명
전영창 선생(全永昌, 1917~1976)은 거창고등학교 교장으로 봉사했고, 예장 고신교회와 관련을 가진 분이며, 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에 이바지한 분이다. 전영창의 감동적인 교훈은 '십계명'이다.
첫째,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째,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째,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째,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째,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째,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째,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째,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으니 의심하지 말고 가라.
열째,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전영창에 대한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의 기록은 아래와 같아.
전영창은 전라북도 무주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할아버지는 전치선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찾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위하여 일부러 선교사와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후 집안사람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전일봉(全日奉, 1896~?)으로, 1919년 4월 1일 무주읍 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여 체포된 후 8개월 동안 형을 살았다.
전영창은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 전일봉의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집에서 약 8㎞[20리] 떨어져 있는 안성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5년제인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 근로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1936년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무주의 초등학교 촉탁 선생이 되었으나 조선 역사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쫓겨났다.
1938년 신흥학교 교장 린턴의 배려로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12월 2일 사상이 불온하여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년간 징역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전영창은 복역 1년 만에 고향인 무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거 제한 처분을 받고 집행 유예 5년으로 풀려나 무주로 돌아왔다.
광복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평소에 익혀 온 회화 실력으로 미군 부대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였다. 1947년 브라운 소령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유학생 여권을 들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6·25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학장을 찾아가 즉시 귀국하여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에 감동한 교장이 귀국 하루 전인 1951년 1월 8일 졸업 시험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졸업장을 주어 귀국하였다.
한국에 돌아온 전영창은 부산에서 전쟁 피란민을 위한 구조 사업을 시작하였다. 1951년 5월 텐트를 치고 시작한 임시 병원에 이어 한상동 목사와 장기려(張起呂) 박사와 함께 부산 복음 병원(현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1953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콘코디아신학교에 다시 유학을 갔다가 1955년 12월 귀국하였다.
전영창은 좋은 직장이나 일자리를 마다하고 파산 직전의 거창 고등학교 제3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1958년 4월 전영창의 노력에도 학교가 빚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미국의 한 성도가 보낸 2,050달러로 부채를 갚게 되었다.
평생을 교육에 바친 전영창은 1976년 네덜란드 교회 연합회의 후원 기금으로 보도관을 건립하던 중 과로로 인한 담석증과 패혈증의 합병증으로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래는 디지털거창문화대전의 전영창 선생에 대한 기록이다.
전영창(全永昌)은 경상남도 거창에서 선구적인 기독교 전인 교육을 실천한 교육자이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유신 체제에 반대한 교육자이다.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삼가리 1594번지에서 태어나 안성 초등학교와 전주 신흥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 3월 신흥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초등학교 촉탁 교사, 야학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길러 주다 일제 경찰에게 탄압을 받았다.
1938년 4월 신흥 학교 교장 린턴의 후원으로 일본 고베 중앙 신학교에 입학한 전영창은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성경으로써 민족을 구원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전영창은 한글 신문 폐간, 신사 참배, 창씨개명 등을 비판하였으며,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1941년 12월 9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2년 10월 10일 기소되어 12월 3일 고베 재판소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어, 주거 제한 조건으로 귀향하였다.
전영창은 1945년 9월 미군 부대 통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미군 제24군단 제7사단 군종무실에 근무하던 중 미국인 군목의 도움으로 1947년 4월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하여 수학하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민족을 돕고자 조기 졸업장을 받고 귀국하였다.
1951년 5월에 부산에서 임시 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전신]을 설치하여 피난민들을 치료하였다. 1953년 콘코디아 신학대학원에 입학, 1955년 12월 10일에 학업을 마치고 1956년 2월 귀국하였다. 전영창은 1956년 4월 12일 거창 고등학교 제3대 교장으로 부임, 학생 8명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1961년 교사를 신축하였고, 학교를 명문으로 성장시키고 지역민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그 공로로 1967년 10월 18일 경향 신문사 주최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을 수상하였다. 이 상금으로 샛별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9년 6월 19일 거창 고등학교 학생들이 삼선 개헌 반대 시위를 일으켰을 때, 전영창은 경상남도 교육감의 주동 학생 처벌 요구를 거부하여 교장 승인이 취소되었다.
1970년 2월 26일 대구 고등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그해 12월 승소하였고, 1971년 4월 28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승소하여 교장으로 복귀하였다.
1972년 11월 군내 교사들을 동원한 어용 집회에 연사로 초빙된 전영창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강연하여 박정희 독재 정권을 비판하였다. 1973년 미국의 교회와 친우들의 후원으로 학교 교사를 신축하였고[현 거창 고등학교 교사], 1976년 네덜란드 교회 연합회의 후원으로 직업 보도관을 건축하던 중 1976년 5월 20일 과로와 폐혈증으로 숨졌다.
전영창은 경향 신문사 주최 ‘국민이 주는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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