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품으로 달려가는 개신교
정이철 (반석장로교회 목회)
어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을까? 역사학자들은 다음의 네 사람이 인류의 역사를 가장 크게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1)동서양에 이르는 거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56-323), (2)로마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여 종신독재관의 지위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44), (3)태평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몽골제국을 창시한 징기즈칸(A.D 1162-1227), (4)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마르틴 루터(A.D 1483-1546).
이 중에서 인류 역사에 가장 크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 한 사람을 고른다면 누구일까? 우리 보통 사람들은 손에 칼을 들고서 군대를 몰고 보이는 땅을 정복한 전쟁과 정복의 영웅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손에 칼을 들지 않고 성경 한 권을 들고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은 당시 천주교의 신부였던 독일사람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릇된 가르침 95개에 대한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매우 작았던 그 불이 유럽을 삼키고 온 세상을 달구는 엄청난 큰 불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역사, 정치, 문화, 경제, 사회 ... 인류의 삶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쳤다. 단 한 번도 칼을 들지 않았던 루터에게서 그러한 힘이 나왔다는 것은 재물과 떡보다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잃어버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류에게 선물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직까지 천주교와 교황의 거짓 종교의 압제하에 신음하면서 어두운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이렇게 쉽게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종교개혁의 유산이다. 그런데 최근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가 스스로 자신의 뿌리인 종교개혁 신앙을 천시하는 심각한 일들을 자행하였다. (1)1999년 독일 아우스부르크에서 체결된 루터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 (2)2006년 서울에서 체결된 감리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 (3)2013년 미국 Austin에서 4개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가 맺은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Common Agreement on Mutual Recognition of Baptism). (4)2014년 5월 서울에서 출범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
최근에 일어난 이 네 가지 사건은 개신교가 종교개혁 신앙을 부정하면서 교황의 품으로 뛰어가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는 사건들이다. 왜냐하면 천주교의 신앙에 있어서 의화교리와 세례는 결국 같은 것이고,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런 중대한 신앙 문제에 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 교단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천주교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으로 회귀하지 않았는데,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천주교와 신앙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런 일을 자행한 개신교 교단들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믿는 참된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런 일이 하루아침에 불쑥 나타난 것은 아니다. 1960년부터 천주교가 개신교를 다시 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서 개신교를 향해 대화를 쉬지 않고 걸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드디어 천주교와 교황이 그 열매를 따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개신교 안에서 ‘성령의 은사’, ‘하나님의 임재’ ... 이런 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은사주의자들이다. 옹알거리는 소리를 ‘영의 언어’라고 숭상하는 사람들이 개신교 안에 일찍 나타났고, 1960년대에부터 천주교에서도 나타났다. 그들이 ‘믿음과 교리는 달라도 같은 성령이 역사한다!’라고 하면서 ‘천주교-개신교 일치운동’을 무르익게 만들었다.
다음의 영상은 그런 사람들 중의 가장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은사주의자 케네쓰 코플랜드(Kenneth Copeland)가 교황을 칭송하고, 사람들에게 교황을 중심으로 일치하자고 선동하기 위해 2014년 1월에 개최한 집회의 영상이다. 교황은 천주교를 대표하여 토니 팔머(Tony Palmer, 2014년 7월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신부를 보내어 교황의 영상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다. 교황의 영상 메시지가 상영되기 전에 토니 팔머 신부가 했던 말을 들어보자.
토니 신부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해야 했던 사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1999년에 독일에서 체결된 루터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 그리고 2006년 서울의 금란교회에서 체결된 감리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를 그 근거로 들었다. 토니 신부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천주교에 대한 ‘항의’(protestant)가 이제 사라졌으므로, 개신교가 천주교와 교황의 품으로 달려오지 않고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발칙하게 설교를 전개했다. 그리고 토니 신부는 설교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께서 ‘다리를 세우는 자’를 찾아서 그를 지지하기를 요청합니다. ‘다리는 세우는 자’란 곧 교황을 뜻한다. 천주교에서 교황을 부를 때 더불어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호칭들이 있는데, 이 호칭들은 천주교의 중요한 문건 안에서 교황의 이름 앞에 표기되어 진다. 교황의 이름 앞에 들어가는 여러 종류의 공식적인 호칭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 (2)‘성스러운 아버지’’(the Holy Father), (3)‘최고의 제사장’(Pontifex Maximus).
이중에서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뜻의 라틴어 ‘Pontifex Maximus’를 직역하면 ‘다리를 만드는 위대한 사람’이다. 이 호칭은 고대의 로마가 숭배했던 신들과 로마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을 감당했던 사제집단의 최고위직 사제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면, ‘가장 높은 무당’이다. 우상의 최고 사제에게 전유되었던 이 호칭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행사한 최초의 종신 독재관 율리어스 카이사르에게 부여되었고, 이후의 모든 황제들이 이 호칭을 가지게 되었다. 375년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황제 그라시안(Gracian)이 이 호칭을 폐기하였다. 그러자 시간이 지난 후 교황이 이 호칭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토니 신부가 했던 설교의 핵심은 결국 교황을 중심으로 모두가 일치하자는 것이었다. 토니 신부의 설교가 끝나고,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교황의 영상 메시지가 상영되었다. 아주 진솔하고 소탈한 이미지를 풍기는 교황은 영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축복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교황의 영상 메시지가 끝나자 케네쓰 코플랜드(Kenneth Copeland)가 강단으로 나왔다. 교황이 부탁한 대로 코플랜드는 사람들에게 교황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자고 선동했다. 교황을 축복하는 기도를 한답시고 옹알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리더니 토니 신부에게 카메라를 들고 나와 자신과 사람들이 교황을 축복하는 장면을 촬영하여 교황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이런 일을 진행해 온 사람들이 최근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 일치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지금까지 해 온대로 천주교와 개신교가 좀 더 친하게 왕래하며 지내자는 것인가? 하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일이 아니다. 먼저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믿음(교리)의 차이를 무마하여 일치시키고, 더 나아가 양측의 직분과 제도까지 일치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말 그대로 개신교와 천주교의 대 통합이 실현되어진다. 이미 이루어진 의화교리 합의, 세례에 대한 상호인정 등으로 보이지 않는 신앙의 일치 작업이 상당히 이루어졌다. 남은 작업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직분과 제도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천주교의 교황을 모든 종교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절대로 변하지 않을 이들의 지상명제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교황이 개신교와 천주교,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를 대표하면서 다스리는 전 세계 통합종교의 수장의 위치를 확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개신교 교단들의 총회장과 천주교의 추기경들이 있게 될 것이고, 어쩌면 이런 직분과 호칭도 달라질 수 있다. 개신교의 목사 직분, 천주교의 신부 직분도 어느 것 하나로, 또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그 속으로 통폐합하려고 할 수도 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좀 더 큰 교회에 청빙되어 영전하는 것, 자기 교회의 사람들과 평화로이 지내면서 안전하게 지내면서 은퇴를 맞이하는 것, 자기 교회에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가입하여 목회(종교 사업)가 위축되지 않고 활력을 유지하는 것 ... 등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이 천주교와 세례를 상호간에 인정하기로 약속하는 협정문을 맺어도 그것에 관해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교인들을 설득하여 교단을 탈퇴하는 양심있는 목사를 무지한 목사라고 규탄하는 창피한 문건을 만들어서 돌리는 추태를 저지르기나 한다.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가 체결한 ‘의화교리 합의’와 ‘상호간의 세례인정에 대한 합의’는 종교개혁 정신을 무너뜨리고 종교통합운동을 크게 촉진시켰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개탄할 일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1.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의 의화(義化)교리 합의
루터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는 1999년에 이루어졌고, 감리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는 2006년에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의화’란 용어는 개신교의 ‘칭의’이다. 칭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심을 뜻한다. 칭의는 죄인의 하나님의 자녀됨,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의 영혼의 구원과 분리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루터교, 감리교가 천주교와 이것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는 것은 서로 같은 신앙을 처음부터 가졌거나, 이 합의서를 채택하는 순간부터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주교의 칭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매우 벗어나 있다. 천주교는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성화케하는 은총’(신화 은총)을 받았으나, 타락함으로 상실하였고,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상실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한다. 천주교는 죄인이 세례(영세)받을 때 ‘성화케하는 은총’이 죄인의 영혼 속으로 주입(infusion)된다고 한다. 세례를 받은 순간 원죄가 제거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천주교의 세례 교리이다.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지 않고서 하나님의 ‘의’를 얻어,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어떤 태아가 산모의 태중에서 죽어가면 주사기를 통해 세례를 베푼다. 천주교의 ‘의화된다’라는 개념은 이처럼 결국 최종적으로 세례를 통해 성화되게 만드는 은총을 주입받는 것이다.
천주교에서 어린이의 구원은 이와 같이 단지 세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알고 경험한 성인의 경우에는 다르다. 성인에게는 세례 이전에 하나님께서 ‘초기 도움의 은총’(현행 은총)을 베푸신다. 이건 구원을 주는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안 받을 것인지 인간이 생각하여 결단하도록 도움을 주는 하나님의 초기의 은총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이 주어진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른다면, 그는 그 이전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주시는 ‘초기 도움의 은총’이 임했을 때 스스로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사람이 거부했으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천주교는 초기 도움의 은총의 덕분에 세례를 받아 구원에 이르고자 소망하는 신자들에게 믿음과 선행으로 세례를 준비하도록 지도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워짐을 믿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천주교의 신조들과 교리들을 잘 배우고 학습받는 것이 이 시기에 매우 중시된다. 그리고 신자들이 자기 의지와 결단을 통해 신앙의 덕을 행하고, 이전에 지은 죄를 버리고 성결해지도록 회개하도록 교육한다.
신자에게서 믿음과 선행이 있음이 확인되면 신부에 의해 세례를 받는다. 모든 신자들은 세례를 받으므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원죄가 제거되고 ‘성화케하는 은총’(칭의)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주입된다고 믿게 된다. 이 수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배우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순간 어느 정도의 성화되게하는 은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입되는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가르친다. 그 사람이 세례를 받기까지 믿음과 선행을 많이 쌓았으면,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함이 더 넘치면 더 많은 은총이 주입된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스스로 믿음과 선행으로 자기를 의롭고 깨끗하게 만들었을 때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는 것이 천주교 신앙이다. 게 이것이 천주교의 세례와 칭의 신학이다.
그런대 개신교와 신앙일치를 추진하는 천주교의 표면적인 자세에서는 이러한 천주교의 속내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앞에서 본 영상에서 천주교의 토니 신부는 바티칸의 교황청 홈페이지에 게시된 루터교와 천주교의 의화교리 합의서에 명시된 내용을 읽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칭의란 ‘그리스도의 의’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령을 통해 공유한다. 천주교과 개신교(루터교)는 함께 믿고 고백하기를 ‘우리가 행하는 공로가 아닌 오직 은혜로, 즉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공로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드려지고 성령을 받으며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무장하고 부르신다.”
이 내용을 보면 천주교의 교리와 신학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이 루터의 항의에 대해 끝을 냈습니다.”라고 말하는 토니 신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교황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는 개신교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악된 집단으로 낙인찍히는 듯한 느낌이 생긴다. 정말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은 변했을까? 천주교는 트리엔트 종교회의를 통해 인간이 의지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저주하였다. 천주교의 이런 태도가 공식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믿음이 단지 그리스도를 인해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약 죄인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한다면, 즉 그가 의화의 은총을 얻는 데 다른 어떤 협력도 필요치 않다거나 그가 준비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움직여 마음에서 우러나올 필요가 있다는 것이 무의미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천주교가 최근에 보이는 모습을 보면 이들과 개신교 교단들이 의화교리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개념없고 한심한 짓인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의화’(칭의)는 영원히 죽어야 할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부여받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요 14:6)
그러므로 ‘의화’, ‘의화된다’, ‘의화되는 길’ ... 등에 대해서 말하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칭의를 주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의화에 논쟁과 토론과 합의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천주교는 개신교와 의화교리에 대한 합의를 만들기 위해 대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벌였다. 그 사례들을 열거해 보자.
A. 1986년부터 시작된 아시시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대회
천주교는 한편으로는 개신교에게 “우리는 같은 뿌리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분열하지 말고 일치하자!”라며 접근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을 천주교의 품안으로 품는 작업을 병행했다. 천주교는 1986년부터 세계 모든 종교들의 대표들을 이탈리아 아시시로 초대하여 세계 평화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는 행사를 시작했다. 첫 모임을 주관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참석한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우리는 모두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 이 모든 종교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평화를 이룹니다!”라고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우상숭배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고, 그들이 섬기는 신이 어떻게 성경의 하나님이겠는가? 이런 웃기는 개념을 가진 사람과 무슨 의화교리에 대한 합의를 볼 수 있겠으면, 또 그것을 이룬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B. 천주교는 이미 무슬림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무슬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집단이 아니고 동일하게 하나님을 숭상하는 신앙집단이라고 선언했다. 다음은 제 2 바티칸 공의회 문헌 1209번 항에 있는 무슬림에 대한 내용이다. “교회는 또한 무슬림도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유일신을 흠숭하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감추어진 뜻에 충심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에게서 이슬람 신앙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여 때로는 그분의 도움을 정성되이 간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어 공정하게 갚아 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다음은 가톨릭교회 교리서 841항에 기술된 무슬림에 대한 천주교의 공식입장이다. “이슬람 교인들과 교회의 관계. 구원의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이슬람 교인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무슬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예언자라고 믿는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구주로 믿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믿는 신앙으로는 결코 죄 사함, 하나님의 양자됨, 의롭다 하심 ... 등의 은혜를 얻을 수가 없다. 이사야, 예례미야 선지자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원수되게 만든 죄 사함이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엡 2:3)일 뿐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신앙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무슬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가 아니고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흠숭하는 종교집단이라고 선언하는 천주교에 과연 성경적 칭의 개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속내를 감추고 있는 천주교와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 교단들이 의화교리에 대한 합의에 이른다는 것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코메디이다.
C.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는 현재의 교황
현재의 교황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금의 천주교의 구원과 칭의에 대한 신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교황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천주교의 칭의과 구원에 대한 신학과 상반되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랍게도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자신이 즉위하던 해인 2013년 5월 바티칸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두란 카톨릭 신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합니다 ... 맞습니다.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 만나야 합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우리가 저곳(천국)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 1세)
천주교가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구원에 관한 바른 이해와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너무도 많다. 일부 개신교 교단들이 천주교와 의화교리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정말 바보짓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개신교 교회들의 신앙이 흐릿해졌기 때문이고, 천주교 지도자들이 보이는 말과 행동이 아주 감동적이기 때문이고, 천주교가 사용하는 말과 용어들 속에 간파하기 어려운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속았던 것이다.
2. 개신교 4개 교단들과 천주교의 세례협정문
미국의 주요 개신교 4개 교단이 지난 2013년 1월 미국 Texas 주 Austin에서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Common Agreement on Mutual Recognition of Baptism)에 서명했다. 이때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에 서명한 개신교단들은 다음과 같다. 북미주개혁교회(CRC), 미국장로교회(PCUSA), 그리스도연합교회(UCC), 미국개혁교회(RCA)
이상의 4개 교단들과 천주교는 7년 동안 진지한 협의 기간을 거친 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세례를 집행하는 조건 안에서 상호간의 세례를 인정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 이전까지 미국이나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서로의 세례가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좀 더 필요한 교육을 시행하는 선에서 천주교회의 세례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서로의 세례를 인정한다는 공식적 협약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천주교 신앙 체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세례에 대해 상호간에 공인하는 협약을 맺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천주교 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1960년부터 일관되게 추진한 ‘천주교-개신교 일치운동’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는 쾌거였다. 그러나 양심있는 개신교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신교회들이 종교개혁의 정신과 신앙을 배반하고 더 이상 기독교가 할 수 없는 천주교와 짝하는 지저분한 배교일 뿐이다. 왜 그러한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자.
1)구원파와 안식교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을 체결한 교단에 속한 목사들이 변명하는 주된 논리는 천주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삼위일제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할지라도 그들의 신앙내용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면 그들의 세례 또한 인정할 수가 없다. 한국 교회의 모든 목사들은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다.
그 실례가 구원파, 안식교의 세례에 대한 자세이다.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구원파의 세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8년간 구원파 교주의 통역 비서로 일했던 분에게 전화를 하여 구원파의 세례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물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 방식으로 시행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그 어떤 목사도 정통 교단과 구원파가 세례협정문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안식일 교회의 지도자에게 전화하여 안식교가 세례를 베푸는 방식에 대해서 문의했다. 안식교에서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침례를 시행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정통 교단에 속한 그 어떤 목사도 안식교와 세례협정문을 맺자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구원파와 안식교의 신앙이 성경에서 벗어난 이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안식교와 구원파에서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그들과 세례협정문을 맺도록 제가 주선할까요?”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을 맺은 것에 대해 반발하지 않는 목사들에게 내가 이렇게 놀렸을 때, 그 누구도 나에게 대답하지 못했다. 성부, 성자, 성령을 들먹이면서 세례를 준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신앙이 이단이면 그들의 세례를 상호간에 공인하다는 협정문을 맺는 것이 그릇되었다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목사들이 구원파에 대해서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파보다 더 악독한 이단인 천주교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다. 왜 구원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세와 감정을 그 보다 더 심각한 천주교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을까? 동일한 논리와 감정을 천주교에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내가 직접 조사하여 보니 구원파에게는 대략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과 이단성이 발견되었다. (1) 기존 교회에 구원이 없고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한다. (2) 구원에 관한 번쩍이는 깨달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보다는 중시하여 기독교를 왜곡한다. (3)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도생활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4) 신도들의 헌금과 노동력이 교주 일가족의 사치를 위해 착취된다. (5)기업가 정신이 결여된 교주 일가족이 운영하는 기업체로 인하여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 (6) 세월호 참사를 일으켜 수 백 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게했다.
천주교와 교황의 심각한 문제점들과 이단성은 다음과 같다.(1) 인간인 교황을 무오하다면서 그의 가르침을 성경과 같이 취급하고 그를 하나님과 같이 높인다. 천주교의 이러한 방침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악한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2) 죄인인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 ‘성스러운 아버지’, ‘최고의 제사장’이라고 높인다. (3) 예수님을 ‘중보자’(Medeator, 남자 중보자)라고 하고, 여인 마리아를 ‘중보 여인’((Mediatress, 여자 중보자)라고 하면서 동격화한다. (4) 여인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도 한다. 5)십자가 완전속죄를 부정한다. 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반복, 재현하는 ‘미사’(mass)를 진행한다. (6)사제가 축성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진짜 살과 피라고 가르친다. (7) 남은 빵을 보관하는 곳이 구약의 지성소같이 하나님이 현존하는 곳이라고 가르친다. (8) 모든 종교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다. (9) 미사를 통해 이미 죽은 사람도 구원할 수 있다고 한다. (10) 천주의 신부를 신약의 제사장이라고 한다. (11) 천주교와 교황에 의해 죽임당한 성도의 수는 세월호 참사로 죽은 시민들의 수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다.
천주교의 문제점들과 이단성의 크기가 공룡이라면, 구원파의 문제점들과 이단성은 생쥐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구원파를 벌레 취급하고, 그들이 베푼 세례를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서, 천주교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을 체결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이미 그 마음이 교황의 품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천주교의 세례는 원죄를 제거하고 ‘의’를 주입하는 수단
개신교가 천주교의 세례 신학에 동의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천주교에서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주입하는 수단이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받는 순간 원죄가 제거되고, 하나님의 성화케하는 은총이 주입된다고 한다. 신자가 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일은 오직 세례를 받은 순간에 벌어진다고 가르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에게 추후에 세례를 베풀어 공표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행위로 의를 이루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신자에게 최종적으로 세례를 통해 원죄를 제거하여 완전히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은 천주교의 세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5번 항에 기술된 애용이다.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성령 안에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
천주교 신자들은 죽기 전에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으면 무조건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을 믿음에서 구원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세례가 구원을 준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중에서 죽은 유아에게도 주사기를 통해 세례를 시행한다. 개신교 교단들이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런 천주교의 세례 사상을 인정한다는 것인데, 이는 정말 불가한 일이다.
개신교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었으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하여 천국가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개신교는 천주교처럼 세례를 통하여 죄인이 실제로 의로워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개신교의 칭의는 세례나 다른 무엇을 통한 ‘실제적 칭의’가 아니고 믿음에 근거한 ‘법정적 칭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게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고 하늘의 법정에서 판결하여 주시는 칭의이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을 맺은 사건은 무엇으로도 변명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교황의 품속으로 달려가며 배교하는 개신교의 비틀거림이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으니라.”(롬 4:2,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3)도나투스 논쟁이 세례협정문
천주교와의 세례협정문 체결에 관대한 자세를 보이는 목사들은 도나투스주의(Donatism)에 대한 어거스틴의 반박이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그릇된 적용이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핍박이 왔을 때, 믿음을 저버린 비겁한 지도자들에 의해 베풀어진 세례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세례를 베푸는 주체는 하나님이며, 세례 집례자는 단지 수단에 불과할 뿐이니, 세례 집례자가 핍박 중에 믿음의 변절을 보였다고 하여 세례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 어거스틴이 죽은 후 그의 주장이 정통 교회의 신학으로 인정되었다.
도나투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의 내용은 지금의 일부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의 상호간의 세례인정 협정문과는 전혀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때에는 핍박을 받는 중에 지도자 개인들이 신앙을 저버렸으나, 지금 로마 천주교 전체가 스스로 성경을 버리고 기독교와는 무관한 다른 종교로 전락한지 오래되었다. 세례를 집례한 어떤 신부가 개인적인 죄를 범하여 실덕하거나 직분을 상실한 그런 경우가 아니다. 천주교가 구원파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심각하게 성경을 떠난 다른 종교로 변질되었으므로, 비록 천주교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며 세례를 시행할지라도 그들의 세례를 구원파의 세례와 같이, 오히려 더 그릇되고 못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4) 그리스도인 신앙과 직제 일치협의회
개신교의 교황의 품으로 달려가는 배교운동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칭의교리 합의, 세례협정문 체결로 교리의 일치가 상당하게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겉의 제도와 직분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작업을 시작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2014년 5월에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가 출범되었다. 한국천주교회와 한국정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그리고 NCCK 회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구세군,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교회가 함께 모여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를 구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고, 하나의 교회를 원하십니다. 개신교뿐 아니라, 동방교회 등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교회들이 신앙을 확인하고, 같은 성사(聖事)를 거행하며, 주교직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입니다.”(발터 카스퍼 추기경)
2006년 루터교, 감리교와 의화교리 합의를 만들어 냈던 천주교 측의 중심인물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했던 말 속에 이미 1)‘신앙의 일치’(의화교리 합의), 2)‘세례에 관한 일치’(세례협정문), 3)마지막 단계로서 ‘직분과 제도에 대한 일치’를 이루어 갈 것이라는 천주교의 의도와 목표가 암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끈질기고 지속적인 노력과 전략대로 지금 개신교는 교황의 품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