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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교리의 핵심/ 클라스 스킬더


The Main Points Of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A Speech by Dr. K. Schilder (August 31, 1944)


아래의 글은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1944-1945년 사이에 분열할 때, 캄펀신학교 클라스 스킬더 박사가 1944년 8월 31일에 행한 연설문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제31조는 중세기적 교권을 막으려고 “성경이 명백히 금하는 것을 교회가 결정할 때 신자는 그 교회의 결정에서 자유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전쟁 중에 분열한 네덜란드 개혁교회 31조파 그룹은 자신들에 대하여 자유파(liberated, liberation)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분열의 주지 하나가 언약에 대한 관점이다. 스킬더는 자신과 그를 추종하는 동료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한다. 희미해져가는 성경적 언약 개념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도움을 주는 글이다. "31조파"는 예장 고신 교단과 자매관계이다. 아래의 글은 연설문 녹취록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아래의 한글역문은 역자미상, 사이버공간에서 발견한 것이다.  (최덕성)


스킽더 연설


이 발표에서 내가 논하려는 언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하나님과  다른 편으로 그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 곧 하나님과 신자들 및 그의 자녀들 혹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성경이 존재하고 우리의 삶과 사고가 거기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듯이  우리는 모두 언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차이가 그동안 나타났고  이 언약을 누구와 실제로 맺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이런 논쟁이 언약에 대한 관심을 제고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의견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이 적절치 못한 점 그리고 특정 언약 교리를 가지고 부당하게 공격한 점은 실망스럽다.


모든 종교는 언약에 따라 서거나 넘어진다. 바빙크에 의하면 종교는 항상 언약 관계를 가지고 있고 언약의 형태가 없다면 종교나 신을 숭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먼저 우리는 한 가지를 동의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언약의 실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교회는 말하길 우리가 언약을 말하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하나님과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언약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인과 어린애가 언약을 맺는 것이 어리석듯이 성인과 갓난아이가 결혼 언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동물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가? 동물과 이성적이고 도덕적 존재인 인간은 양립하는 상대가 아니다. 


물론 이 말은 옳은 말이다. 거인과 젖먹이 어린아이, 성인과 갓난아이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여전히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둘 다 피조물이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 차이는 여전히 유한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거인과 아이, 성인과 젖먹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보다  절대적으로 큰 것이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다른 구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바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실재하는 언약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다 성경에서 언약을 종종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유일 뿐이고 실제로 언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상대방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들을 가지고 우리는 스스로 실재에 대하여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것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며 그것들에 반대하는 말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차이를 없애는 언약 교리를 듣는다면 그 교리는 근본적인 오류일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이런 차이를 전적으로 갖지 않는 언약 교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약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언약은 실재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려졌으며 동시에 전적으로 경건한 말씀을 가지고 대답할 것이다. "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이 언약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에게 오시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주도하여 하나님과 나와 및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존재이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원인과 주도만이 언약을 원하시고 언약에 대해 말씀하시며 언약 관계를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행하셨는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그와 세우시는 언약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사람이 언약을 맺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만드신 것이다. 


언약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창조 의지로 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소송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미가 6장) 하나님은 자신의 법정, 곧 언약의 법정에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아, 내가 너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내가 어떻게 너희를 피곤하게 하였느냐? 나에게 대답하라" 우리 편에서 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송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만일 하나님 편에서 한편으로 하나님 자신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사람 사이에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면 그것은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법적인 관계가 성립하고 언약적 축복이나 언약적 저주가 생기게 되며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약속으로 끌어들이시거나 언약적 처벌로 위협하신다. 작은 아이가 거인을 초대하여 자신과 언약을 맺게 할 수는 없지만 거인이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나는 젖 먹는 가난 아이를 입양하고  그 아이에게 이해력, 의지, 성향 그리고 그런 행동들로 부터 나오는 것들을 불러 일으켜서 아이가 성장하였을 때 나의 상대편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능력의 빛을 보게 된다. "오 사람아 너는 내 곁에 선 상대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능력의 말씀이 나타난 교회를 통하여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 너를 지으신 이는 너의 남편이시니라"(사 54:4) 세상에 어떤 남자도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할 자가 없다. 


너의 창조자 , 너를 낳으신 이, 너를 지으신 이가 너의 남편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누구를 낳았다면 그는 아버지이고 그 두 사람은 서로 결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딸은 동등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고 오직 여기서 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 보다 수백 대 더 우리를 낳으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내가 너의 남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너를 만들었고 동시에 언약이라고 부르는 너와 나의 관계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초원의 소나 요람의 어린애, 교회안의 의자, 그리고 의자를 덮은 천이 실재하듯이 언약도 실재하는 이유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실제적이고 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말하는 것은 비유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언약이 비유적이라는 이론으로 부터 배울 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말하자면 언약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언약에 대하여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두 당사자는 작은 사람과 무한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므로 우리는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역시 스스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서 언약이 포함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정확히 전달하실 수 없으시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시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자신을 묶으시기 때문이다.


사람인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제한된 단어와 제한된 개념, 제한된 언어개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무한한 실재를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 가능성 사이의 선택 가운데 서 계신다. 하나는 하나님이 언약이 무엇인지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하고 순전하고 거룩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언어의 보물로 자신을 표현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렇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가능성을 택하시어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언어을 사용하시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독특한 관계에 대하여 독특하지 않은 언어로 말씀하셔야만 했다.


지상에는 많은 언약들이 맺어진다. 청년들은 결혼 언약을 맺으며 왕들은 공격과 방어의 조약에 서명을 한다. 국가들은 온갖 종류의 조약을 만든다. 사람들에게 오든 종류의 언약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이런 특별한 일에 스스로를 맞추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 이유이고 이제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전달하시려는 생각을 언약이라는 말로 성경이 고안해낸 것을 발견하고 따라가야 하는 이유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근거하여 언약에 대하여 정당한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언약에 대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이 질문을 시작하여야 한다. 통상적으로 언약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언약에서는 한편 이상의 상대가 나와서 둘 혹은 셋이나 그 이상의 상대가 서로 언약을 맺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계약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계약에서 자유롭게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렇다 내가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각 언약은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실제적인 언약이 된다. 가끔 언약이란 단어는 두 당사자 간에 "아무런 동의가 없는 문제를 구속하는 일에도 사용된다.


하나님은 이 땅과 곡식과 포도주와 비와 언약을 세우심으로 가진 자의 손에 풍성한 열매가 있게 하셨고 물이 다시는 땅을 엄몰하지 않게 하시고 불이 땅을 소멸하지 않게 하셨다. 그런 경우들에 언약이란 단어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언약 상대방인 땅, 곡식, 물, 불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시실 성경은 언약에 대하여 말하면서 생각과 말을 할 수 없는 창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에도 언약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비교의 수단으로 말씀을 하심으로  확실한 것이 결정되고 변할 수 없음을 나타내신다. 


알다시피 언약은 종이에 쓰고 선포되고 인장으로 인쳐짐으로 공적으로 확정된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은 땅과 해와 혹은 다른 것들과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것이 확립되어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는 이런 식으로 언약이 세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각 언약은 창조 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언약의 여지는 있었지만 언약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생긴 이후에 생겨났다. 이것이 언약이 창조 이후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시며 인도하신다. 이것이 요리문답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두 개념인 보존과 통치이다.


보존은 하나님이 창세기 1장 1절 이래로 오늘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붙드시는 것이다. 배수로의 물과 교회의 벽돌은 창세기 1장 1절의 계속이다. 왜냐하면 그 때 하나님이 물과 벽돌의 재료를 만드셨고 각각의 창조물이 창세기 1:1에 연관되어 오늘까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치란 창세기 1:1에서 창조된 것이 계시록 22:21의 목적지에 적절하게 도달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다. 보존이 알파에서 나온다면 통치는 오늘 존재하는 것이 오메가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섭리의 모든 행동은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행동이고 시작과 끝 사이의 행동이며 시작으로 부터 종말에 이르는 연결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기르시고 보전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언약은 창조 이후에 등장하였고 이미 존재하는 것 위에 세워진다. 이렇게 존재하는 세상에서 언약이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언약은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다. 소는 소로서 존재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존재한다. 소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책임이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은 사람의 책임과 관련된다. 언약을 추상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모든 추론들은- 여기에는 1944년 해방의 시대에 열린 많은 교회 회의가 포함 된다-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다. 언약에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하는 실재가 있으며 이 책임은 실재로 인식되어야만 하며 전적으로 숙고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충분히 그리고 편견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은 파괴될 것이다.


어떤 잡지는 죄근에 언급하길 우리(자유파-해방파)가 언약을 파괴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 언약을 더욱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책임을 지적할 때 그들은 우리가 언약을 도덕주의로 만든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언약의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주장하길 언약은 선택을 의미하며 언약을 깨뜨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위협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진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든 추론은 언약에서 책임으로 부르심을 강탈하는 것이며 언약을 전적으로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창조로 부터 나왔고 사람에게 있는 것을 가장 충분하게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약은 언약 상대방들로 하여금 그들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계약은 결혼으로 발전하고 거기서 남자는 아버지로 여자는 어머니로 발전하며 결혼은 양 당사자가 충만한 발전에 이를 때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이 한 편이 되시고 사람이 다른 한편이 되어 언약을 맺을 때도 발전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심, 거룩하심으로 인하여 당연히 변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사람의 눈앞에 자신을 드러내실 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신다. 언약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풍부하게 계시하게 만들며 그 안에서 창조주는 자신을 재창조자로, 아버지로 계시하심으로 그가 우리를 만드시고 깨뜨리실 수 있으시며 우리 죄로 빠진 수렁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다시는 우리를 깨뜨리지 않으시고 매일 우리에게 아름답게 나타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신다. 사람도 또한 언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나타난다. 언약 안에서 그가 하나님께 순종한 것 혹은 언약의 파기자로서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 드러나게 된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호의로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사람은  머리의 왕관으로 부터 그의 발의 발바닥까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만  자신의 정당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언약에서 당사자의 위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언약은 일방적이다. 그것은 양방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최종적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피조된 존재가 아니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동등하지 않다.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동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언약을 시작하시고 그 조건을 정하신다. 우리가 언약의 일방성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언약을 구상하시고 만드신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양방적 관계를 만드실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언약 관계 안에 두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는 언약을 양방적으로 만드실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합법적인 근본책임의 내용이다. 그렇지 않다면 언약은 창조이전으로 거슬러 가야하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언약을 양방적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비록 내가 그와 동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상대방으로 만드셨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시고 상대방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렇게 결정하시고 나를 책임을 가진 상대방으로 창조하셨고 나의 의지를 자극하여 이것을 알게 하시려고 낙원에서 조상 아담 안에서 나에게 선포하셨다. 이렇게 양방이 생긴 것이고 이것은 실재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통해서언약을 맺는 통상적인 관계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양방통행로이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에게 오는 길이 있고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있다. 언약이 일방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관계에서 일방길(하나님으로 부터 사람에게로 가는) 만 보고 그 반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 언약은 태양이나 봄과 맺어진 것이지 사람하고 맺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독립적 존재로서 독립적 사고를 따라서 행동해야하는 책임 있는 피조물, 즉 인격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의 그런  특성 때문에 언약은 양방길이 되어야 한다. 언약은 두 당사자로서 특징지어진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모든 언약에는 두 부분이 있다고 듣는다. 그 두 부분은 첫째는 약속이고 둘째는 의무이다. 이것은 결혼에서도 그렇다. 젊은이는 처녀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해야 하고 또 처녀에게 약속을 요구한다. 그리고 반대로 처녀는 남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남자가 약속한 것이고 남자가 요구한 약속이다. 갑이  을에게 어떤 것을 약속하고 을은 갑의 약속을 요구할 때, 동시에 을은 갑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갑은 을에게 그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언약은 양 당사자 사이에 맺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에게 언약은 이렇게 맺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약속하시고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 요구하게 된다.(시 8:1 “너의 입을 넓게 열라 내가 그것을 채우리라”)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언약은 죽은 것이 된다. 언약은 약속과 요구를 통하여서만 살아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요즘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길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자녀를 영원부터 택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셨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오직 거기에서만 인간은 실제로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언약은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있는데 내적인 면이 실제적인 언약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길 언약은 영원한 구원과 선택안의 완전한 선물로서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약속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여 요구를 제거하는 자들은 언약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하길 당신들은 언약을 파괴한다고 한다.--- 당신들은 사람들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수고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율법을 설교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언약을 율법의 설교나 도덕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혐의는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양측이 모두 언약을 파괴하는 셈이다. 약속을 가르치지만 그 바탕에 있는 요구를 제거하는 사람들이나 요구 때문에 약속의 달콤한 소리를 무시하는 사람들 모두가 언약에게 미끄러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붙여놓으신 것을 교회회의 안이든 밖이든 혹은 신학이든, 사람이 흩어버릴 수 없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 하나님이 언약으로 어떤 것을 약속하셨다면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요구도 하신다. 굴이 껍질 밖에서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속도 요구하는 껍질에서 벗겨질 수 없다. 그 반면에 하나님이 언약에서 결코 헛된 말씀이 아닌 요구를 하셨다면 하나님은 약속도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여호와니 너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니라" 하시며 이어서 큰 소리로  "너는.. 하라"는 열 가지 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너를  종 되었던 집에서, 억압의 집에서, 매여 있던 땅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부르심을 받는 언약에 대하여 말하길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택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 언약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약은 부분, 약속과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약속되었을 때, 상대방이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예" 라고 대답해야하는 어떤 것도 요구되는 것이다.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 뜻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을 말하거나 기록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선택된 자라고 부르는 때가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세례를 받을 때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그들에게 약속하시고 요구하신 형식을 따라서 한다. 모든 아이들에게 동일한 요구를 가진 오직 한 가지 형태의 세례가 있을 뿐이다. 


기록되고 선포된 성경 어디에도 선택된 특정한 사람에게만 말하는 별도의 약속이 없다.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을 섭리하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섭리하시며 하나님의 이런 섭리는 실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인 언약의 핵심이다. 그러나 세례 시에 하나님이 선택된 자녀인 특정한 사람과만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세례 시에 하나님이 택하신 특정한 사람에게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선택 안에서 언약을 생각하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약속이나 요구가 없다. 하나님의 계획은 기록되거나 말하여 지지 않는다.


만일 언약이 선택에 의존한다면 언약 자녀는 교회나 성경에서 언약의 자녀로서 그의 자격이 인정된 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택자에 대한 그런 약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기록된 약속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과 약속에 대한 파괴를 보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택자에 대한 약속에 대하여 말하고 이것이 실재하는 약속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마치 컴퍼스로 구름의 크기를 재려는 것과 같다. 사람과 세운 언약은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땅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시내산과 호렙에서 요구하셨으며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약속과 요구를 말씀하시고 기록하신다.


사람들이 실제적인 언약의 약속들은 비택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 약속은 택자와 관련해서만 고려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언약을 파괴하는 말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특정한 사람이 특별한 방식으로 택자로 불려지는 지 나에게 알려 달라. 나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약속되지 않은 어떤 약속도 상상할 수 없으니 그것은 오직 상상일 뿐인 생각이다.


우리의 사고는 약속과 요구가 모든 언약의 두 부분이라는 사실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언약은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세워지는데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 라고 대답하지 않는 자들이 있고 그리하여 그들이 떨어져 나감이 분명해지는 반면에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하여 차별적으로 대우하시는데 칼빈은 이것을 선택과 유기의 두려운 판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오직 후자만이 언약이고 그래서 모든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 실제적인 언약의 자녀인 것이다.


이방인 자녀에서 언약은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자녀는 언약의 은혜와 요구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그에게 허락되고 약속된 것이며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이미 그의 영원한 소유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람 편에서 또한 어떤 것을 행하여여 한다. 사람에게 조건이 부여된 것이 아닌가? 이것 때문에 최근에 이루어진 연설에 관한 어떤 논문에서 말하길 사람이 충족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을 가진 언약에 대한 제3의 관점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나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내가 말한 것은 모든 시대의 개혁 신학자들의 일관된 견해라고 말이다. 언약의 조건에 대한 그들의 교리를 가지고 이런 비판을 한 것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약속은 만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고 (내가 말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항론파(알미니우스주의)처럼 말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항론파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반응하는 것이다! 당신은 조심해야만 한다.


항론파는 사람은  구원의 기초로서 저것을 행하여야 하고 이런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하나님은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보신다) 우리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고안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내가 "예" 라고 말하게 하시고 나의 믿음도 만드신다. 나에게 오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에게만 온다.  그러나 우리는 조건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요구를-믿음은 첫 번째 요구이다- 충족하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리문답은 첫 번째 계명이 믿음을 요구한 것이고 두 번째도 믿음을, 그리고 세 번째도 믿음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약속과 요구는 매우 밀접하게 함께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명령으로서 "나는 너에게 약속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에게 구체적인 조건으로 말씀하시는데 즉각적으로 믿음의 요구가 앞에 제시된다. 약속과 요구는 함께 속한다. 그 둘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조건을 가진 말씀의 형태를 택하신다.  어떤 사람이 선택을 통하여 믿음을 받을 것인지 그리고 그 특정한 사람이 나중에 선택받은 것으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선택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전적으로 침묵하시지만 약속과 요구에 대하서는 생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씀하신다. 약속 안에 유익들이 있다. 네가 그 약속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너의 것이다. 


이 개념들의 순서는 매우 아름답다.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성령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씻음의 약속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그들은 의로움의 권리를 받으며 이제 성령은 그들을 계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예"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들이 그 관계 속에서 정당하게 배치되도록 하여야 하여 하나님이 조건적 방식으로 말씀하시도록 하여야 한다. 내가 선택 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결코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나의 선택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예" 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언약의 부분들의 통일성과 언약의 상대방의 연합성을 주장한다. 언약은 오직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마치 두개의 언약이 있는 것처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과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의 언약 안에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 로서 하나님과 친교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타락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하신다. 타락 이후에 사람 편에서 깨뜨린 언약을 유지하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을 회복하시는 재창조자로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길 "나는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키시며 언약과 요구를 배반한 형벌을 감당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다시금 영생의 약속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 때문에 죽으셨다. 이점에서 우리는 언약이 두려운 것임을 알게 된다. 골고다에서 언약 배반의 죄가 처벌된 것이다. 그러나 골고다는 영생을 다시 값없이 얻는 권리를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의 두 번째 국면은 은혜언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관계는 남아있다. 첫 번째 아담 이래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로서 하나님과 친구였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리스도"로서 첫 번째 아담 이래 하나님과 친구인 것이다.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더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타락 전에 창조주였던 하나님이 이제는 재창조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덕,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의로우신 거래의 덕이 더욱 풍성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정의의 모든 덕 가운데 계시되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고 1944년 교회 회의는 이런 생각을 강행하여 통과 시켰다. "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언약은 오직 친밀하신 하나님을 알 뿐이다.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것은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고 언약을 율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판결이라면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자비하시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언약이 오직 하나임을 알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정의가 없다면 하나님의 포용하시는 사랑도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을 주시는 정의의 시행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것이다. 은혜가 몇 퍼센트고 정의가 몇 퍼센트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백퍼센트 은혜이고 백퍼센트 정의이시다. 하나님의 속성을 퍼센트로 계산하려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고 하나님은 백퍼센트이시다. 하나님은 언약에서 은혜와 정의의 체계를 모두 망라하신다.


타락 후 언약의 두 번째 국면에서 은혜는 더욱 결정적으로 은혜가 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이 오시기까지 어떻게 은혜가 세워졌는지 보여준다. 은혜언약은 은혜를 시행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을 더럽히는 자에게 형벌이 더욱 큰 것이다. 심지어 지옥의 형벌이 은혜언약에서 결정된다. 이것은 약속과 요구가 두 부분이기 때문이다. 약속으로 발생하는 것이 있다면 요구로 발생하는 것도 있다. 약속으로 보상의 소망이 온다면 요구로 형벌의 위협이 오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것을 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울 것이다.


언약은 즐거운 말뿐 아니라 무서운 말도 사용한다. 우리는 언약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의 고상한 음악들을 듣지만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천둥소리도 듣는다. 이것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하늘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유리 바다에서 연기가 영원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할렐루야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유리를 통하여 연기를 보며 연기로 부터 분명히 나타나는 정의 때문에 할렐루야를 또한 외친다. 그들은 약속이 언약의 핵심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물론 그렇다고 말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와 그의 약속을 멸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이유이다.


종종 그들은 진노는 구약에서만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은 온갖 종류의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이스라엘인 시내산에서 시작하였고 언약이 거기서 모세아펭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아담부터 모세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없었는가? 성경은 모세로 부터 시작되지만 진노는 홍수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의 모든 덕이 새 언약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그것은 은혜와 진노를 포함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한다.(롬 22:20-22, 히 10:21-31, 히 12:25을 보라) 우리는 끄시는 상급과 위협하시는 형벌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둘은 율법과 복음에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도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서 나오는 빛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언약은 창조 후에 사람과의 최초의 교제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언약은 충만하게 발전하여 마지막 날이 이르면 역사의 종국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지옥에서도 언약은 하나님의 통치의 모든 자리에서 보존되고 나타날 것이다. 지옥에는 언약을 배반한 모든 자들이 있을 것이고 거기서도 언약의 배반자로 있을 것이다. 은혜 언약에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채찍으로 맞을 것이고 언약을 거절한 자는 더 많이 맞을 것이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계신다. 법과 질서가 있는 나라에서 감옥이 국가의 수장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그 나라의 수장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것이다. 지옥의 계시에 관해서 조차도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늘과 땅에서 언약은 창조의 흔적과 기억으로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능력있게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예"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사람에게 "예"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시다. 영원한 약속과 계속적인 요구가 함께 있을 것이다. 두 부분의 어떤 것도 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언약의 머리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교회와 하나님 자신의 눈앞에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그 시대에 누가 신자이고 그 후손인지 분명할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그리고 약속과 요구의 방식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도 분명하다. 


거기에서 언약은 유기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더 악화되고 택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더 크게 될 것이 계시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시간 안에서 언약을 수납한 자들에게는 천국으로 들어가면 옛 언약의 조항들 보다 더욱 풍성한 약속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새로운 것은 옛 것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한 말씀을 깨닫게 된다.  "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너의 창조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의 재창조자이시다. 


The Main Points Of The Doctrine of the Covenant

 

A Speech by Dr. K. Schilder (August 31, 1944)

Translated into English by T. vanLaar (1992)


This is a translation of a speech which was held in several places in the Netherlands during 1944 and 1945, the time of the liberation of the Gereformeerde Kerken from the so called Synodical Churches. one of the issues being debated at that time was the view of the covenant. In this speech Professor Dr. K. Schilder outlines what he and his reformed contemporaries confessed to be the Biblical view of the Covenant between God and man. As this topic is of constant interest, this speech has been translated from an uncorrected stenographic recording of Professor Dr. K. Schilder's speech as it was held at the Waalsche Kerk in Delft, the Netherlands on August 31, 1944. It very powerfully and insightfully presents the covenant as it is revealed by God in His Word. (T. vanLaar).


Schilder Begins:


What covenant are we intending to discuss in this presentation? It is the covenant between God on the one side and - roughly speaking - his people on the other side; between God and the believers and their children, or Abraham and his seed. We all know that the covenant exists, just as surely as we know that Scripture exists and that our living and thinking comes forth from it. Nevertheless a difference of opinion has appeared in the last while within the church about the question of with whom this covenant is actually made. We can be thankful that this debate has raised interest in the covenant, although it is disappointing that the way in which the differences have been resolved is not the proper one and that more than one back has undeservedly been struck with the stick of a particular covenant doctrine.


All religion stands or falls with the covenant. According to Dr. H. Bavinck religion is always a covenant relationship; there is no religion, and no service of God, possible if it is not practiced in the form of a covenant. Now we must first agree on one thing: we must believe in the reality of the covenant. Some say, also some in the Church, that we do speak of a covenant, but that it is not a real thing. This is because the great God and puny man cannot have a covenant. A giant and a child in a crib forming a covenant is foolishness, just as it is impossible for a grown man and a small newborn child to establish a marriage covenant. How can a man and a cow seal a covenant? An animal and (as is incorrectly said) a reasonable moral being such as man are not matched parties. 


We can react by saying that this is correct. There is indeed a difference between a giant and a suckling child, between a man and a newborn child, between a human and a cow. Yet these differences are still relative, because both are created and therefore dependent on God. They are created by God, are both creatures, and the difference is still measurable. Between God and man, on the other hand, (it is correctly pointed out to us) there is an immeasurable difference; this difference is infinitely greater than that between a giant and a youngster, between an adult and a suckling born child, between a man and a cow. Here we have a totally different distinction. Therefore, so it is said, it is foolishness to speak about a real covenant between God and man, who has been created by God, whose breath and deeds depend every moment on God. Man cannot be a party with God. Yes, it is said,. indeed, the covenant is often referred to in Scripture, but this is figurative; there is really no covenant because there are no parties.


With these questions we find ourselves right in the middle of reality. We say that those who speak as was described above are completely correct; we would not say a word against it. If we ever received a covenant doctrine which would diminish the difference between God and man, that doctrine would be fundamentally wrong. There may be no covenant doctrine which does not fully maintain this difference which determines each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Must we then, though, also say that the covenant is actually not real? No, the covenant is real! How can this be? This we answer with the well known and at the same time so thoroughly pious word: "What is impossible with man is possible with God." We cannot enter this covenant from our side; we can not say to God: "Come Thou to me; Thee and I and my children will, at my initiative, sit at the table to make an agreement with Thee." Away with that thought! God is in heaven and we are on earth.

It is impossible that people from their side present to God an agreement; on our invitation no covenant with God will ever come into being. But what is impossible with man is possible with God. God only, the initiative and reasons coming forth from Himself, wanted to and could speak of a covenant and create a covenant relationship. He did two things. He created man and also announced to that created man the covenant that He had established with him. It is not so that God created man and then those two (God and man) found it possible to establish a covenant, but God created man and also at the same time cre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Himself. 


The fact that the covenant is created, coming forth from God's will to create, is what makes the covenant possible. This also makes it possible that God can begin a lawsuit with man (Micha 6). He speaks to him before His tribunal, before the covenant court: "My people, what have I done to you? And how have I wearied you? Answer Me." Seen from our side it may seem absurd that God begins a lawsuit with us (a giant with a man), but if God from His side makes a covenant relationship between Himself on the one side and man on the other side, then it is possible.


Then there is a legal relationship, then there is blessing or (covenantal) curse, then He lures with promise or threatens with (covenantal) punishment. A small child can not invite a giant to work out a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m, but a giant can say: "that newborn suckling I adopt and therefore I will engender in that child an understanding, a will and an inclination, and flowing from these deeds, so that as the child grows it can become my other party." In this we see a flash of the power with which God says: "You, 0 man, are a party beside Me." Here we hear thundering through the church building the mighty word of the prophet: "Your maker is your husband." (Isaiah 54:4) Not a single man on this earth can say that of his wife.


Not one can say your creator, your begetter, your maker is your husband. When a man is a begetter, he is a father, and the two of them can not marry each other because father and daughter are not equal parties. It only occurs here and can only occur here; God is our Maker; He is hundreds of times more than a begetter than we can say a father is, and at the same time He can say "I am your Husband"; that is, I make you and at the same time make the relationship between you and Me, which is called covenant. That is why the covenant is just as real as a cow in the pasture and a child in a crib, and a bench in the church, and the cloth this chair is upholstered with; the bond is created by God and is therefore real and genuine.


Therefore we reject the idea that speaking about the covenant is figurative; at the same time though, we maintain that we can learn something from the theory that it is figurative; namely, that although the covenant is real and exists, we will never be able to say everything about it or to understand it thoroughly. Because the two parties here are the little man and the infinite God, we will not be able to explain it in human language completely and precisely. God can not do that Himself either. He can not use human language to convey completely and precisely all that is contained in the covenant. Why can He not do that? Because God has bound Himself to His own works. 


We people, with our finite understanding, can only know finite words, finite concepts, finite language constructs, so that we can never imagine or understand infinite reality. Thus God stood before a choice between two possibilities. The one is that He says in a perfect, pure and holy manner -- in His own manner -- what the covenant is; He can express Himself in an infinite treasure of words; He can do this in heaven. But, because we cannot understand heavenly language, He chose the other possibility and speaks to us in human language. That is why God in the Bible must use a word that we all know; because otherwise we would not understand. He must speak about this unique relationship with a non-unique word. 


On earth many covenants are sealed; young persons are engaged and seal a marriage; kings sign attack or defence treaties; countries make all kinds of agreements. Among people, covenants of all sorts are possible. God has, to allow us to understand, served Himself with the use of a common word about this extraordinary matter. That is why He used our language, and now we must try, led by what the Bible weaves around it, to draw out of the word covenant the idea God intends to convey; in this way we may come, on the ground of what the Bible says, to a proper covenant view.


With our view of the covenant we must begin with the question: what is normally the hallmark of a covenant? It is this: in a covenant more than one party comes forward -- two or three or more parties who bind each other in an agreement. We see this, for instance, in an engagement. In an engagement free people say to each other, "yes, I will!" There is a promise between two parties. Each covenant is only a real covenant when an agreement has been made between the parties. Sometimes the word covenant is also used about the binding of a matter in which no "yes" word is given between two parties. 


God sealed a covenant with the earth, with corn and wine, with the rain, that there will be much fruit in the hand of the owner, or that the water will not again destroy the earth, or the earth will be consumed by fire. In those cases the word covenant is used figuratively; the party earth, corn, water, fire, cannot say "yes". Indeed, the Bible also speaks of covenant when it is a matter between God and a created thing that cannot want, think or say yes. Here God speaks by means of a comparison to indicate something that is firm, is decided upon and cannot be changed.


A covenant, you see, is put on paper, established , sealed with a signet ring, and in every case officially confirmed. So at times God says that He makes a covenant with the earth, the sun, or some other thing, because it is something that is established and cannot be changed. With man this is not the case, because each covenant that God establishes comes after the creation. Before the creation there was room for the covenant in God's plans, but the sealing of the covenant comes only after there is something else that is not God. That is why the covenant is there only after creation. God maintains what He created and pushes it on that is the language of the Catechism: upholding and governing -- the two concepts of God's providence. 


Upholding is that God has upheld since Genesis 1: 1 all things that exist today. The water in the ditch and the bricks of the church are a continuation of Genesis 1: 1, because then God created the water and the materials for bricks; in each created thing there is today a link with Genesis 1:1 that is the upholding. Governing is God moving forth in such a way that what was created in Gen 1: 1 comes properly to its goal of Revelation 22:21. Upholding comes from alpha; governing means what is today goes to the omega; therefore each deed of providence is a deed between alpha and omega, between beginning and end; a connection from the beginning and a connection toward the consummation.


Now, God can never deny His work. He feeds and upholds and governs; each covenant which God makes, comes after creation and builds forth on what there already was. The covenant is thus really natural, in the sense that it joins itself in the world to what exists. A cow remains a cow, but a man also remains a man. A cow is made without responsibility to God's moral laws! Therefore the covenant between God and man has to be connected to man's responsibility. All reasoning which reduces the covenant to an abstraction -- and this includes that of many synodicals around the time of the liberation (1944) -- hollows out the covenant. In the covenant the reality is that we are responsible; this responsibility must be understood as real and must be taken fully into account. This must be done fully and generously; otherwise the covenant will be hollowed out. 


A magazine has recently stated that we (who are liberated) are hollowing out the covenant. However, those who say this are more inclined to do this themselves. When they point to our "responsibility" they say it becomes moralizing -- they know of no covenant blessing. They insist that the covenant means election and that one must not say that wrath is threatened when one breaks the covenant -- this wrath doesn't exist according to them. But we say that all such reasoning, which robs the covenant of its primary call to responsibility, is deval‍uating the covenant in its entirety, because the covenant comes forth out of the creation and it unfolds what is in man in its full riches.


Every covenant causes the parties to develop to their full glory; an engagement develops into a marriage, in which the man develops into a father and the woman into a mother, and the marriage comes to its purpose when both parties in their two/one-ship come to full development. When, now, God as party on the one side and man as party on the other side, come to a covenant, there is also development. God can, obviously, not develop because of His infinite, holy being, but He unfolds Himself in His revelation. 


In His uncovering Himself before man's eyes He is unfolding Himself. The covenant makes Him rich in His revelation, in which the Creator reveals Himself as the Recreation, the Father, Who can make us and break us, but Who pulls us out of the mire into which we have sunk through our sins and never breaks us again; everyday He becomes more beautiful to see. Man also unfolds himself in the covenant; out of him appears what lies in him; either saying "yes" to God, or revealing himself in his rebellion against God as covenant breaker. Only then does man stand in his own natural place when he, before the fall through God's favour and after the fall through God's unearned grace, from the crown of his head to the sole of his foot, is in a relationship with God.


This is actually the answer to the question with respect to what is the position of the parties in the covenant. The covenant is one sided, say some; it cannot be two-sided, they say, because God is always the last. Because God is God and cannot be a created being, God and man are not equal. The covenant must be a one-sided act of God: He begins with it, and establishes the terms, and so on. Far be it from us to deny the one sidedness of the covenant; we agree readily and totally that God alone devises and makes the covenant, but that is also why He can make it two-sided. I cannot do it. He can. God can make it two sided if it pleases Him to place me in the covenant relationship. That is the context of His constitutional primal-responsibility, otherwise the covenant would be brought back to before creation. which is impossible. 


The covenant is made two-sided by God; He makes me the other party, even though I am not His equal, because God has conceived of me and made me as a party. He has considered this in His decision before creation and has in creation made me a party with responsibility, and to stimulate my will has made this known to me in His declaration to me in father Adam in Paradise. Thus there are two parties: they are really there. Through His power and will there is that typical relationship that makes a covenant, a two way street; there is a way from Him to me, and from me to Him there is also a way. Those who say the covenant is one-sided only see one direction in this relationship (that from God to man), and not the reverse. That one-sided covenant has been made with the sun or with spring, but not with man.


If man is a responsible creature who has to act according to independent thought and as an independent being, which can be called a person, then the covenant becomes, because of the nature of man, a two way street. This covenant is characterized by two parts: at baptism we are told that in all covenants there are two parts. Those two parts (not parties) are: first the promise, second the obligation. Thus it is also in a marriage: the young man promises something to the girl, and demands something from her as well; and the reverse: the girl demands something from the man, which he has promised, and promises what he demands. When A promises something to B and B demands that of A, and at the same time B demands something from A and A promises that to B, the covenant has been sealed in both its parts. 


With God and me it is thus: God promises something to man and man may demand that from God (Psalm 8 1: Open your mouth wide, and I will fill it) and I must promise something to God, which He may demand of me; without that the covenant is a dead thing. The covenant lives only through promise plus demand: we may never separate those two. Today some are saying that God has chosen His covenant children from eternity. God promises them His grace, and only there where He pours out His grace, is man actually in the covenant. They say the covenant has an inward side and outward side; only the inward side is the real covenant. They say the covenant contains from the Lord's side, as a complete gift in election, eternal salvation: that is the covenant. No, say we, that we will never accept! Those people who describe the promise in this way so that it is stripped of the demand are gutting the covenant of its significance!


Now people are saying to us: yes, but you are hollowing out the covenant -- you are saying to the people "you must and you shall," you are singing the song of labor, you are making a preaching of laws out of it. If it is true that we are letting the covenant become a preaching of laws or a theory of morals, then that allegation is entirely just. Both groups are hollowing out the covenant: those who preach the promise and shove the demand into the background, and those who because of the demand neglect the sweet music of the promise; both have slipped away from the covenant.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man shall not cut asunder, neither inside nor outside of the Synod or the study. 


If God before or after the fall promises something in the context of a covenant, He immediately demands too. No less than an oyster grows outside its shell, no less may the promise be peeled out of the shell of the demand. on the other hand if God in a covenant poses a demand that is never an empty preaching, but He brings along the promise. He says "I am the LORD, your covenant God," and then He follows that with ten long words in which sound the booming music "You shall." First, however, He has said: Who has led you out of the land of bondage, out of the house of compulsion, out of the house of slavery.


Therefore we do not want to speak of a covenant which can only be called that because it touches only the elect. Such a covenant cannot exist because a covenant has two parts: the promise and the demand. When something is promised, then something is said to which the other must clearly and loudly answer "Yes". He who demands does not force his will on the other, but says or writes what he asks of the other. When is any specific person ever addressed as an elect or chosen person! Never! The children are baptized with a formula in which the Father, Son and the Holy Spirit promise them something and demand something from them. For all children there is only one Form for Baptism, with the same demand. 


There is no separate promise, either in spoken words or written with the ink of Scripture, which is only addressed to a specific person as elected. God does think about the elect; He thinks about them to their good and what He thinks is indeed bone and marrow of the covenant, His glorious promise. But what He says at baptism is not that He establishes His covenant with a specific person as an elect child. At baptism it is not said to a specific person that he is chosen or elect; this is only thought about in the election in God's counsel. The covenant does not originate in what He thinks; in His thinking there is no promise or demand. God's counsel is not spoken or written.


If the covenant depends on election a covenant child must be someone who is spoken to in the language of the church or of Scripture in his quality as covenant child. But such a promise to the elect does not exist; there is no promise written personally or individually to a specific person. Here we see the hollowing out of the covenant and also of the promise. People today speak of the promise to the elect, and say that is the real promise, it is as if they are trying to measure the size of the clouds with a pair of dividers. The covenant is with people on the earth. Here, on earth, God speaks, God demands on Sinai and Horeb, and Paul, from his prison table, writes his letters; here God speaks and writes His promise and His demand. 


That is why we must speak of hollowing out the covenant when people say that the actual covenant promises are not given to those who are not elect, but that the promise can really only be considered in connection with the elect. Please tell me when or where a specific person is addressed as elect, with a special formula, for I don't know. I cannot imagine any promise which has not been promised, but is only an imaginary idea.


Our thoughts must be led by the fact that promise and demand are two parts of every covenant. The covenant is established with the believers and their seed; that is according to God's own word! There are those who do not say "yes" to those words and by that become manifest as falling away, and there are others who do say "yes" (Yes, LORD, here I am). God has thought differently about them, according to what Calvin calls the awe-inspiring decree of election and reprobation, but what He thinks to Himself is for Him, what He says is for me! only the latter is the covenant and that is why all believers with their children are real covenant children, and they are really baptised; only if we accept that we can throw out the anchor into the river which is navigable for the church and have it catch in the firm bottom of God's spoken word. If a believer thinks "I am baptized, but of what use is that to me; it could have been a mistake, and not a real baptism (only some drops of water)", then he will never have rest. But what is promised and demanded you may consider as something that you have coming to you, as a right, and that gives certainty.


For a heathen child the covenant is something strange. However, a baptized child has that grace and that demand which he is allowed to have, which have been promised, and which, with his saying "yes" have already become his eternal possession. Yes, people say, but then man must again do something from his side. Isn't man addressed with a condition? Because of this a report in the paper of a recently held speech spoke of a third view of covenant which has one condition that man must meet. I answer quietly that what I have just said is the continuing view of all reformed theologians through the ages. These critics speak in their dogmatics of conditions of the covenant; by this they mean that the promise does not come to man if it is not accepted through faith. Now someone has said that actually you are speaking as a Remonstrant, because the Remonstrants teach that faith is the condition for salvation. No, no, we respond! You must watch out.


The Remonstrants teach that man must do that and make this good work the ground for salvation (faith seen beforehand by God is ground for salvation). We do not teach this. We say that God makes and devises everything. That God has also created my saying "yes" and my faith. Any good that comes from me is God's gift and is from Him alone! Yet we must speak of conditions: I will not receive it if I do not comply, with the demand - - faith is the first demand. The Catechism says about the first commandment that God demands faith, and for the second time faith, and for the third time faith. Promise and demand are, in the service of God, very closely connected together. God does not say "I promise you" as a special decree, but He speaks to me with a concrete condition: immediately the demand of faith is put forward. Promise and demand belong together; the two are one. Therefore God chooses the form of speaking with a condition; not that I earn salvation with my faith. No, God is silent about the question whether a specific person shall receive faith through election, and about the question whether that specific person shall appear later to have been elected. Totally silent about the question whether I am elected, He speaks to me with a living voice about promise and demand: the goods lay in the promise; if you accept the promise then it is for you.


The sequence in the concepts is so beautiful: the children are sanctified in Christ, the Holy Spirit will sanctify them. Through the promise of the washing through the blood of Christ they have the right to righteousness, and now the Spirit wishes to continuously sanctify them, so that they increasingly and all the more earnestly say "yes" to God. So we must let the things stand properly in their connection and let God speak in a conditional manner. Let us never speculate about the question of whether I am elected! My saying "yes" is evidence of my election, because that fruit, that simply saying "yes" is from Him. For these reasons we maintain the unity of the parties and the unity of the parts of the covenant. The covenant has only one history; we do speak of a covenant of works and a covenant of grace, as if there would be two covenants, but this is in fact not correct. God and man are in a covenant from the beginning through the creating decree of God.


In the beginning God and man stood in a relationship of friends without Christ as "Christ". Christ, with His shedding of blood, appears for the first time after the fall. When God wishes, after the fall, to maintain the covenant that has been broken from man's side, He appears as Re-creator by restoring the covenant through Jesus Christ. Christ says "I will stand in the breach by fulfilling the demand of the covenant, and the punishment for the breaking of the covenant and the demand," so that He gives man again the promise of eternal life. Jesus Christ has died because of the covenant. In this we see the covenant in its horror: on Golgotha the covenant breaking is punished. But Golgotha makes the right to eternal life free again and through Jesus Christ begins the second phase of the covenant, the covenant of grace. But the old relationship remains; God and man were friends; first without Christ as "Christ" over the first Adam, now through grace with Christ as "Christ" over the first Adam. Immediately God's revelation becomes richer, because that God, Who before the fall was Creator, is now apparent as the God of re-creation; He becomes richer in His virtue of grace and in His virtue of right and righteous dealings; God is revealed in all his virtues of grace and justice.


Some are saying, and the Synod (1944) is pushing this idea through, "No that is not true; the covenant knows only God from His friendly side; the covenant is a covenant of grace, and speaking of God's justice is hollowing out the covenant and making it a legal case." Yes, we say, of course it is so, as long as it is a Divine lawsuit. If God is justice and mercy, then because of that we know of only one covenant. If there is no justice, then the embracing love of God does not come to us either; however with the enforcement of justice, which gives to all children the promise, God is grace. God cannot be cut into pieces: so many percent grace, so many percent justice. God is always one hundred percent grace and one hundred percent justice. Woe to the poor person who calculates the attributes of God in percentages! Everything He is, He is one hundred percent: He encompasses the framework of justice, but also the framework of the grace of the covenant.


In the second phase of the covenant, after the fall, grace becomes more decisively grace; history shows us how grace is established until Christ and the Spirit of Pentecost. The covenant of grace administers grace. Therefore the punishment is that much greater for him who defile's this covenant. Even the hellish punishment is determined by the covenant of grace. This is because promise and demand are the two parts; with the promise comes something else, and with the demand too. With the promise comes as extra the prospect of a reward, and with the demand comes as extra a threat of punishment; do this and you shall live; don't do it and the wrath of the LORD will be terrible. 


The covenant uses pleasant words as well as harsh words; in it we hear the noble strings of God's mercy, but also the thunder of God's anger, and these are never to be separated. Not even in heaven, because in heaven, at the sea of glass, they sing Hallelujah when the smoke goes up in all eternity; through the glass we see there the smoke and say Hallelujah also because of the justice that is evident from the smoke. That is one hundred percent reverence for God in his unity. Men say unjustly that we hollow out the covenant; they say that the promise is the essence of the covenant, otherwise it is not a covenant of grace. We say, of course, but that is exactly why there is wrath for those who say "no" to God and disdain His promise.


They sometimes also say that the wrath only occurs in the Old Testament, and falls away in the New Testament; then, however, they get into all kinds of difficulties. For Israel only begins at Sinai and the covenant was there before Moses. Was there then no wrath from Adam to Moses? The Scripture begins with Moses, but wrath with the flood. The wrath of God becomes apparent in heaven, there every virtue is revealed in its indivisible nature by means of the New Testament, which makes everything richer, the grace and the wrath (see Romans 22:20-22, Heb 10:28-3 1, Heb 12:25). We must accept it all, the reward that lures, and the punishment which threatens. These two, in law and gospel, and both to the glory of God; God Who reaches His glory in the radiation from His Being. 


Thus the covenant comes into being in the first conversation with man after creation; and it shall find its fullness as it develops and comes to its historic end when the day of days comes. But even after that day it will remain and will appear then in all places of God's dominion: in the new heaven and on the new earth and in hell also. In hell will be all the covenant breakers, and each will be there as a covenant breaker. There are people who have had no contact with the covenant of grace; they will be beaten with stripes, but those who have rejected the covenant will be beaten with many. In Adam all people are covenant breakers, and the punishment of hell is covenant punishment. God is there as Covenant God, and just as in an country in which law and order exist the prison is the instrument by which the glory of the head of state of that country is seen and radiates forth, so also in hell will shine forth the glory of the Head of the State, of God Himself, Who is covenant God even with respect to the revelation of hell.


As far as heaven and earth are concerned, the covenant will exist there not only in traces and reminders of creation, but it will be living and powerful there; God, Who eternally says "yes", and man, who produces that "yes". There will be, together with each other, the permanent promise and the continuing demand; neither of the two parties will be able to bring about a breach! And the Head of the covenant there is God Himself, the LORD, and before the eyes of His surprised church, and of God Himself, Christ will be openly there as the Mediator of the covenant. In that age it will be evident who are the believers and their seed, but it will also be evident that God, in the way of promise and demand, through word and deed, fulfills His counsel. 


The covenant will appear there to be the revealed way along which God, for certain rejected people has made the curse the worse, and for all His chosen has made the blessing the greater.  We will also see there that for each of those who have accepted the covenant here in time the entry into heaven has brought still richer promises than the old covenant stipulations themselves, but on the other hand, all that is new was contained in the old, so that we may understand that faithful word: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says the LORD, the Almighty, your Creator and your Re-creator in Christ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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