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따로 노는 교회
“세상과 따로노는 교회, 우상의 종교언어 타파해야”
[특집대담] 연세대 ‘종교철학’ 개설 진두지휘한 정재현 교수(완결)
<베리타스> (2014.7.7.)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은 다음 학기부터 “종교철학” 전공을 개설한다. 신학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며 그 방법과 실제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개설 이유이다. 본지는 인문학의 죽음이 거론되고 있는 현 시점에 철학적 방법론을 신학 연구에 도입하려는 그와 같은 시도가 현재의 학문적 판도를 거스를 만한 타당성을 담보하고 있을 것이라 평가하고 그 타당성을 알아보기로 했다. 본지는 그 전공을 담당하게 될 신과대학의 정재현 교수와 대담함으로써 그 전공의 ‘철학적’ 타당성과 기대효과 등에 대한 정 교수의 견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대담의 내용은 질문에 대해 정 교수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분량상 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종교철학, 신앙과 인간 이해의 통로(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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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연세대 교수가 성경주의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신앙함에 있어 각자의 언어만 되뇌인다면 "대화가 아니라 독백의 교환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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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현재의 한국교회나 신학연구에 있어서 성경주의가 여전히 세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만일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론으로 접근했을 때 갈등을 예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러한 갈등을 이용하는 세력이 취하는 방식이 상당히 비철학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그 과정에는 아마도 대화를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개입할 가능성이 크지요. 물론 발전을 위한 진통이며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고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만, 혹시 바울사도를 언급한 것이 그런 의미를 가리키는지 잠깐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중에 가장 핵심적인 주제에 이르렀다고 느껴집니다. 사실 저희들이 종교철학전공을 구성하면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끼리 지적 유희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교회현장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현장도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을 공유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함께 연대할 것이지만 더 나아가 이러한 취지를 거부하는 종교적 입장에 있는 분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저희들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성경주의를 말씀하셨는데 성경주의도 교단이나 신학적 입장에 따라서 밀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목표는 이 취지에 공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저 극점에 있는 분들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먼저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만을 자꾸 읊어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저들의 언어가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하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 학기에 개설하는 과목이 <신앙성찰과 한국기독교분석>이라는 이름의 비판적 성찰입니다, 여기서 그 언어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엮여졌는지, 그 뿌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등을 분석해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할 것입니다. 신앙의 다른 입장에 따라 번역이 불가할 정도로 서로 매우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각자의 언어만 되뇌인다면 대화가 아니라 독백의 교환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이 문제를 과제로 삼는 것이 저희들의 입장이라면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까지 우리의 언어를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 저희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교회의 압도적인 다수는 아직도 문자주의적 성경주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도 아직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못해서 그렇지 무엇인가의 탈출구나 자구책을 모색해야겠다는 생각은 다 갖고 계실 것입니다. 눈앞의 숫자가 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교단의 인구 변동을 보면 개신교의 감소와 달리 가톨릭교회가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여러 기관의 통계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최근에 나온 자료를 보니 개신교가 750만이고 가톨릭이 550만이라고 합니다. 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큰 변화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러한 숫자가 현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에 우리나라를 다녀가면 개신교의 100만이 가톨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면 같이 650만이 되는 겁니다. 개신교는 비상이죠. 가톨릭도 기독교의 하나인데 싸우자는 말은 아닙니다. 새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진 상황에서 수평이동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지금 이중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신도들이 늘어나는 거지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분명한 것은 여태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거죠. 미래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30년이나 50년 정도가 지나면 개신교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요. 심각한 일입니다.
문: 그렇습니다. 숫자가 신앙의 진지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학의 깊이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는 할 것입니다. 이제 교수님께서 앞으로 종교철학을 통해서 펼치고 싶으신 포부가 이러한 현실과도 관련이 있고 또한 의지도 결연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한국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서 일찍이 시도되었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하는 일인데 때늦은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베리타스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방향과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희들도 측면 지원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문: 감사합니다. 아까도 잠깐 말씀하셨는데 이 종교철학 자체가 신학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현장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어떤 실천적인 통로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교에 해석학적 지평을 제시한다든지, 목회자와 신도들과의 관계, 신도들과 신도들의 관계, 아니면 교회들끼리의 관계 등과 관련하여 실용적인 실천 자료나 방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어떤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으신지요?
제가 학생들에게도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교실 안에서 머무르고 만다면 안 될 일이지요. 제가 홍보자료에도 썼습니다만 지금 국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를 들면, 가장 일상적이고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종교 현장의 분야로서는 설교를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설교에는 성서신학적 설교, 주석중심적 설교, 교리 중심의 설교, 조직신학적 설교, 상담적인 설교 등의 여러 유형이 있을 터인데 여기에 추가하여 종교철학적 또는 인문학적 설교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높은 호응을 받는 설교는 인문학적인 설교, 즉,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서 성서해석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국민의 민도가 아주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에게 요구되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상당한 수준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지고 그 토대 위에서 영적인 차원이 결합되어야 건전한 상식인들에게도 설득력을 지니는 신앙공동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밖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일반인들에게 말이 되고 뜻이 통하는 설교를 위해서도 인문학적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종교철학 분야가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문: 실존적인 고민이 설교의 바탕을 이루고 있을 때 성도들과 목회자가 용이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 바탕이 사실은 목회자가 의도하는 진정한 신앙의 방향으로 성도들을 잘 인도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죠? 즉, 인문학적인 토대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이해하겠습니다.
네. 또 하나 개인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장 소속 목사입니다. 기장 안에 보수적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운동회가 있는데, 거기에 속한 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수년 간 평신도 신학강의를 하면서 가지게 된 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서 제가 평소에 교실에서 학생들과 나누었던 소신들을 표현만 약간 바꾸었을 뿐 그대로 교회에서 교인들과도 다 나누었는데 호응이 매우 컸습니다. 그때 저는 일반 신자들도 지성적인 차원에 대한 요구와 정신적인 갈증이 매우 상당한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매주일 설교를 듣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정형화된 선포의 방식—물론 그것이 가지는 의미나 효과도 있고 위력도 있지만—에 대해서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것에 대해 물음도 있고 따져보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계속 눌러왔었다는 것이지요. 그때 제가 그들과 나눈 이러한 시도들이 그들의 갈증을 풀어줄 만한 이야기로 들렸던 겁니다. 제가 취한 방식은 하나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서부터 출발하자! 나한테서부터 시작하자! 라는 것이죠. 그게 인간의 자기읽기잖아요? 자기읽기, 그게 인문학 아닙니까? 나로부터 시작하니까, 굳이 문학, 사학, 철학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야기부터 가지고 가니까 자신의 삶의 차원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단계별로 진행해가니까 나중에는 호응도가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큰 교실로 옮기게 되었어요.
문: 인문학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종교철학도 신학의 한 분야로서 개설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서 여쭈기는 했지만, 인문학적 가치에 대응하여 신에 대한 신앙은 일종의 신학적 마지노선에 해당할 텐데, 이 점은 어떻게 접근하려고 생각하십니까?
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신에 대한 신앙은 당연한 전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으로 얘기해도 좋겠고, 일반적으로 얘기해도 좋겠는데, 소위 철학과 신학 사이의 부딪힘이나 이성과 신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라고 이해하고 답변을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양사에서 종교언어의 큰 전환이 있었던 시기는 근세와 현대입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종교언어의 전환이 있었지 않습니까? 루터가 데카르트보다 7-80년 앞서서 먼저 종교적 근대화를 외쳤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는 얼마 안가서 칼뱅이 개탄했다시피 목숨 걸고 파괴해 놓은 우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개혁을 통해 교회가 분리되고 이름은 바뀌었는데, 방식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고전적인 방식을 싸잡아 우상주의라고 매도할 수는 없지만 개혁의 대상이었던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은 우상주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종교적 파행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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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교수가 오늘날 한국교회 종교언어의 현실을 짚었다. 그는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종교언어로 되돌아가 계속해서 (그 언어를)반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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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도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전적인 종교언어로 되돌아가서는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고중세시대에서 예를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그렇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거기에 그렇게 선포되었고 성서는 이를 직접 기록한 것이니 따라서 설교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고전적 종교언어가 지닌 사고방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한다는 뜻에서 ‘대언’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명령조의 분위기를 지닌 ‘선포’라고 간주해 왔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자체야 그런 권위를 지니지만 이미 인간의 언어로 담겨진 성서,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설교가 곧 대언이나 선포로서의 위상을 자임하다보니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대화란 그러한 전통의 압제적 권위에 대한 항거였는데 교회는 아직도 전제군주적 언어에 대한 향수에 목회자와 신자들이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게다가 세상은 한 번 더 소용돌이를 거쳐 현대로 전환합니다. 근대의 항거가 엘리트시민들의 것이었다면 현대는 대중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오게 된 또 다른 시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가 이를 읽어내지 못하다 보니 세상과 따로 돌아가 유폐가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성서의 말씀이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전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교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는 근대 인식론적 반성을 거치고도 한 단계 더 나아간 해석학적 성찰의 시대인데 우리의 종교언어는 아직도 형이상학적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는 명제가 천문학자에게 새겨지는 뜻과 태어나자마자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붙들고 절규하면서 울부짖으면서 부르짖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뜻이 같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전통적 사고에 의하면 이게 같은 것으로 여겨져야 된다는 것이죠. 현대에 와서는 물음에 따라 대답이 하늘과 땅 차이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신 신앙에 대해서 마무리 짓는다면, 현대에는 형이상학적 신학의 사고방식, 즉,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라는 명제가 누구에게나 동일한 뜻이었다는 방식으로 종교언어를 정립하고 일방적으로 선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근대의 인식론을 거쳐 해석학적인 차원까지 두 단계나 거쳐 왔기 때문에 현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런 요구를 받고 있는 이 마당에 이성과 신앙의 관계가 과거와 같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그 옛날에는 이성과 신앙이 정면충돌하는 것으로 봤다가, 스콜라주의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수습해냈죠. 물론 그것이 그 시대의 기독교의 보편화를 위해서 크게 기여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의 크고도 소중한 유산이에요. 대표적으로 어거스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조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성찰의 방식이 달라진 오늘날,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엮어질 수는 없습니다. 앞서 논했던 것처럼 ‘무신론’이라고 불리어진 일련의 신 체험에 관해서 그렇게 예리한 분석의 과정들을 거치고 다시 시대적 성찰과 조응하여 나타난 현대의 해석학적 반응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신의 존재여부를 논하는 고전적 무신론과는 전혀 달리 세상에서 경험하는 신 부재체험에 대한 절규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신앙이 이성과 정면충돌하는 관계로 볼 일이 아닙니다. 이성은 신앙과 조응해야 될 실존의, 삶의 한 부분이고, 삶은 이성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성 이외의 다른 많은 것들로도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미분적 단일성으로서의 전인성, 즉, ‘통사람’이 성찰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엔 이성과 신앙을 천칭저울에 올려놓고 등가적인가를 따지고 또 어떻게 합칠까를 고민했다면, 오늘날은 이 신앙에 대하여 그것과 마주할 무게를 지닌 것이 이성이 아니라 이성이 그 안에 작은 부분으로 포함되는 삶, 또는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실존과 신앙 사이의 상호공속적인 구성관계가 현대 신학적 해석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성찰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심지어 종교와 과학의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이런 것들이 다 각자 자기의 영역이 있는 것이죠. 칸트 이후로 이미 인간의 작업들은 각 영역에 대해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좀 다른 방향으로 가서 근세의 끝자락에 과학주의까지 이르렀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현대에 와서 더 발달한 과학이 과학주의를 스스로 깨고 내려와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선언한 마당이거든요. 각 영역이 스스로에 대해서 점차로 더욱 심도 있는 주제파악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어디냐? 교회죠. 그러고도 잘 되어간다면 말할 것이 없겠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점차로 더욱 어려워지는 현실이라고 봅니다.
문: 그게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고전적 사고방식에서는 아주 합당하지요.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안타까워하듯이 한국교회는 아직도 형이상학적 신학에 대부분 머물러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하나님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지요. 그러다가 ‘하나님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저마다 다른 것’을 발견하고 되돌아보기 시작한 것이 근대의 인식론적인 성찰을 한 신학이에요. 그런데 ‘왜 저마다 다를까 그 이유를 파고들어가는 통찰’에서 해석학적 성찰의 필요성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이런 순서로 말할 때, 한국교회는 아직도 대부분이 형이상학적인 언어에 머물러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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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교수(우)는 한국교회의 인식론적 현실이 여전히 고전 형이상학적 신학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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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개신교의 역사에서 개신교가 인식론적인 성찰의 추동을 받아서 다양한 사조들을 엮어냈잖아요? 정통주의, 경건주의, 자유주의....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신정통주의 등등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거예요. 세속 사회는 성찰에 있어서 진도가 나가는데, 교회만 종래의 버전을 자꾸 반복하고 있으니까 점점 거리가 생기죠. 그런데 그 진도라는 게 무슨 유행을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지금 말씀드린 대로 인간이 점점 더 자기 한계를 긋고, 주제파악을 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인간답게, 의미 있게, 그리고 종래의 굴레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더욱 자유롭게 해방적으로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의 문명사적인 진화과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세속은 앎과 삶의 언어를 엮어 가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있음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종교철학은 이 갭을 줄이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 신앙의 문제 자체를 놓고 충돌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학의 언어를 업데이트를 시키자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주제파악이 된 우리의 이성은 인간 사고의 지극히 작은 영역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성으로만 신앙을 직접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성 아닌 다른 것들, 오성도 있고 감정도 있고 육체도 있고, 또 오늘날은 몸의 신학(theology of body)처럼 몸 이야기도 하니까 몸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영역을 배제하는 태도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전인성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성도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전인성입니다. 정신의 요소들인 지성, 감정, 의지를 통합하더라도 그것은 정신일 뿐이지요. 그 동안 지성에 의한 정통주의, 감정에 의한 경건주의, 의지에 의한 자유주의가 나타났지만 결국 정신의 한 요소만을 강조한 유행사조이었거든요. 그러나 신앙은 육체와 분리할 수 없는 전인성의 차원으로 확장, 심화되어야 된다는 것이 영성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영성이 잘못 논의되면 감정과 연루되어서 지성에 대하여 대조적인 구도로 자리 잡게 되지만, 그러면 안 되고, 당연히 감정, 신비, 지성 등을 아우르는 전인성의 영역을 지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개신교회에는 그런 전통이 없어서 가톨릭교회로 거슬러 찾아갔고 중세교회인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흔적을 그나마 부분적으로라도 간직하고 있는 동방정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상황 아닙니까? 거기에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이루는 기라성 같은 영성의 전통이 있잖습니까? 거기로 들어가면서 이제 창조영성의 길이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동방교회가 하나님의 창조를 열심히 강조했다면 서방교회는 상대적으로 타락과 죄를 강조했지요. 그래서 구원론이 발달했고 동방교회는 창조론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한 겁니다. 이제 영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이처럼 갈라졌던 전통들이 수렴하게 되었지요. 이 수렴의 과정은 교회사적으로 말하면 확장과 심화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한계를 인식하고 주제를 파악해서 이웃과 그렇게 소통해야 되겠다는 각성에 이르게 되죠. 한때는 그들도 싸웠지요. 가톨릭교회가 이슬람을 친다고 지나가다가 동방교회를 쳤지 않습니까? 하지만 결국 다 화해하고 이제는 영성의 전통을 공유하려는 단계까지 왔거든요.
이런 과정으로 세계기독교가 진행하고 있는데, 한국 개신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외면하고 가톨릭교회를 재단하면서 이단 시비를 했다가 가톨릭교회가 커지니까 딜레마에 빠져버렸어요. 안타깝죠. 그래서 이런 상황들이 좀 해소되어야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저희들의 사명을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정말 종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그래서 인문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거기서 신학과 종교언어가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으려는 것이 종교철학의 지향입니다. 이 지향이 구현된다면 세상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나가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의 말씀과 삶과 죽음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철학이 추구하고 있는 방법 사이에 전혀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 이상으로 절실한 방법이죠.
문: 절실하다는 말은 한편으로 인간을 훨씬 더 겸손하게 이해하겠다는 뜻이지요?
맞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쓴 책이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분도출판사)라는 책인데,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겸손한 책을 쓰셨습니까?’라고 묻곤 했습니다. 물론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제가 뭘 하겠습니까?’라는 뜻도 있지만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까불지 마라’라는 뜻도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한마디로 주제파악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나누면서 서로 어우러질 것이 더 커질 수 있겠지요. 이것이 저희들이 하려고 하는 종교철학이라는 인문학적 신학이 지니는 일상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 장시간 감사합니다.
끝.
[대담= 이인기 편집국장, 정리= 이가람·백결·최웅재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재학), 사진= 지유석 기자]
정재현 교수의 노력이 한국교회 부흥과 복음전도에 유익하기를 바란다.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지만, 연세대가 접근하는 방식이 지식인까리의 지적 유희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교회현장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