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 대하여
아, 화 있을 지어다, 인간 풍습의 급류여! 누가 너의 흐름을 막을 수 있겠느냐? 네가 말라붙을 날이 언제이겠느냐? 언제까지 너는 하와의 자녀들을 저 넓고 무서운 바다로 휘몰아 넣으려고 하느냐? 나무 방주에 오른 자들도 그 바다를 건너가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느냐? 때로는 악한 자에게 벼락을 치고 때로는 자신이 간음을 하는 주피터의 이야기를 내가 너에게서 읽지 않느냐?
이 두 가지를 그가 동시에 할 수는 없다. 그가 이 두 가지를 다 했다고 하나 실은 벼락이라는 속임수로 간음을 모방하도록 충동을 주려고 인간이 만든 허구 이야기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어떤이가 ‘이것은 호메루스가 꾸민 이야기다. 그는 인간들의 잘못을 신들에게로 옮겨 놓았다. 그가 신들의 하는 일을 인간들에게 옮겨 놓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고 말한다면 어떨까? 긴 가운을 입은 선생님들 가운데서 이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할 것이다. 곧 “이것들은 사실 호메루스가 꾸민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신의 속성을 죄를 지은 인간들의 속성처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범한 범행이 신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 범죄를 범죄로 간주하지 않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절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 지옥의 급류여! 인간은 자녀들이 그러한 학문을 배운다고 하여 사례금을 바치고 그들을 너의 속으로 던져지는구나. 더욱 이것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특히 공개 광장에서 가르칠 때 법이 정해 준 봉급을 받고, 또한 사례금 이외에도 더 많은 이윤을 얻는구나.
그리하여 너는 바위를 치며 소리 지르기를 ‘여기는 말을 가르치는 곳이다, 네가 생각한 대로 사람을 설득하고 조종하는 데 필요한 웅변을 통달할 수 있게 하는 곳이다, 너의 의견을 토로하는 데 아주 적절한 곳이다’라고 하는구나.
그들은 말하기를 테렌티우스(Terrentius)의 글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는 다음과 같은 말, 곧 ‘황금비, 여인의 품, 하늘의 신전’ 등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테렌티우스는 자기의 글에서 간음의 본보기로 주피터 신을 따르려는 한 청년을 등장시켜 벽에 붙은 한 그림을 보게 한다. 그 그림은 주피터 신이 다나애(Danae)의 품에 황금비를 내려 순진한 그 여인을 속여 낸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 청년이 그 그림을 보고 마치 하늘의 권위를 얻은 것처럼 자기의 정욕을 어떻게 발작시켰는지 보라.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신을 내가 본뜰 것인가? 하늘의 신전을 큰 소리로 뒤흔드는 그 신인가? 그렇다면 나와 같은 불쌍한 인간이라고 해서 그런 짓을 못할까? 나는 벌써 그런 짓을 했어! 아주 즐겁게!”
이런 추행에서 배우는 것은 절대로 그러한 말만은 아니다. 그런 말에서 그와 같은 추행이 더욱 떳떳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말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말이란 귀하게 가려낸 좋은 그릇이다.
그러나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술 취한 선생님들에 의해서 우리들의 그릇에 부어진 오류의 술이다. 우리가 그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매를 맞았고 식별력이 있는 재판장에게 호소할 수 있는 자유마저 빼앗겼다.
오, 하나님, 그러나 나는 이제 당신의 면전에서 옛 이야기를 상기하며 말해도 별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이런 것을 불행하게도 즐겨 배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더러 소망이 있는 소년이라 했습니다.
Augustine, Confessiones (397-400), Book 1, chapter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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