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 로마가톨릭 칭의론 IV
맺음말: 새 관점학파와 관련하여
(원제: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 김세윤과 관련하여)
칭의교령은 마무리 말에서 그 교령을 성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칭의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칭의교령을 확고하게 지지하지 않는 기독인은 칭의를 상실한다고 한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의 제3의 조건을 제시한다. 칭의교령(1547) 엄수를 의롭게 되는 조건으로 삼는다. 성경이 한 가지만을 칭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과 대조된다(롬 5:1).
칭의교령에 첨부된 법규(canon)는 파문(anathema) 조건 32가지를 담고 있다. 칼빈은 6개 항 곧 1항, 2항, 3항, 8항, 19항, 22항을 “아멘” 하고 긍정하고, 나머지 항목들은 앞의 논의한 것을 정리하여 간명하게 반박한다. “트렌트공의회를 존중하지 말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 저 확고한 신앙을 간직하자”고 호소한다.
종교개혁신학자 멜랑톤과 부써도 트렌트공의회를 반박하는 글을 내놓았지만, 칼빈의 작품이 더 정확하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칼빈은 치밀한 논리, 화려한 수사, 예리한 신학적 통찰로 칭의교령의 논리적 모순, 비성경적 주장, 자가당착을 밝힌다. 과격한 용어와 우화적인 비유를 사용한다. 칼빈의 칭의론과 칭의교령에 대한 반박은 성경적이며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칼빈의 트렌트공의회 구성원들에 대한 표현은 매우 거칠다. 칭의교령과 법규의 어조는 냉혹하고 살벌하다. 당시의 신학충돌과 적대감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칼빈은 트렌트공의회 칭의교령에 참을 수 없는 세 가지 오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되기 전까지 부정하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행위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로부터 그 가치를 빌릴 때 비로소 하나님이 부성애적인 사면으로 우리의 사악한 모든 행위를 용서하는 진리를 고백하지 않는다. 둘째, 구원과 칭의에 대한 인간 공로의 무가치함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 안에 있는 아무리 선한 것, 고상한 윤리실천, 인간성숙도 하나님의 구원의 눈높이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공로가 영원한 죽음 신분에 대한 죄책을 만회할 수 없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진리를 거부한다. 셋째, 심판 날까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믿음의 토대를 허물고, 유일한 중보자에 대한 신앙 자체를 헛되게 만든다(롬 4:14).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지속되어 오던 칭의론 대화의 결실을 얻어 “칭의론 합의문서”(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the Justification, 1997)에 동의했다. 양측 의견을 좁히려고 시도한 레겐스부르크회담(1541)이 실패로 끝난 지 458년 만에, 에큐메니칼운동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공유하는 “복음”을 확인하고 그것에 견주어 볼 때 차이점들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구원론 합의를 도출했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공동의 신앙, 그러므로 루터교 사람들과 로마가톨릭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의인이면서도 동시에 죄인으로 함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합의된 것을 교황권의 교도적 권위를 가진 신앙 문서로 여기지 않는다. 루터교회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개 교회 차원에서 활용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중도 노선을 취하는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은 새 관점학파와 관련된 현대 칭의론자들의 주장과 여러 면에서 일치하거나 궤를 같이한다. 구원의 절반은 하나님의 은혜에, 절반은 신망애를 포함한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있는 것으로 본다. ① 칭의와 구원의 탈락 가능성, ②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 ③ 행함 있는 믿음으로의 구원, ④ 칭의와 성화의 동일시, ⑤ 계명준수 또는 윤리적 실천을 통한 칭의의 완성 등을 주창한다.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는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유보되었다”고 주장한다. 칭의와 성화를 한 묶음으로 여긴다.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역설한다. 윤리적 실천을 통한 칭의의 완성을 주창한다. 김세윤이 물세례와 칭의를 결속시키는 것은 인상적이다. 아래의 주장은 현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로 공식 수납되고 있는 트렌트공의회 칭의론을 고스란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성화와 칭의는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중략) 이 둘은 세례 때 함께 일어납니다. 세례 때 우리가 받는 구원을 ‘죄(죄책, guilt)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이라는 관점’에서는 ‘칭의’라고 하고, ‘죄(오염) 씻음을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비쳐짐’으로 볼 때는 ‘성화’라고 합니다.”
칼빈은 새 관점학파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rmism)와 경솔한 믿음주의(easy believism) 곧 구원을 받은 자 또는 구원을 확신하는 자는 어떤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따위의 이론이 등장하기 전에 살았다. 칼빈이 현대 칭의론 논의가 제기하는 모둔 질문에 답을 제공하리라 기대할 수 없지만, 그가 칭의론 1세대 신학자 루터에 이어 칭의가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선물이며, 전가되는 것이며, 단번에 이루어지며, 완전한 것이라고 한 점은 성경적이고 합리적이라 판단된다.
김세윤은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inaugurated but not yet consumed)라는 개념을 칭의와 성화 논의에 동원하여 ‘유보적 칭의론’을 정당화한다. 신학자들은 이 공식을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날을 설명하는데 사용해 왔다. 새관점학파 신학자들과 김세윤은 ‘이미와 아직 아니’ 개념을 종말론적 예약(eschatological reservation)이라면서 이를 구원의 탈락가능성, 칭의의 상실가능성, 칭의와 성화의 동일성 주장에 적용한다. 이미 시작된 구원과 칭의가 종말론적 유보 과정과 윤리 실천을 거쳐 완성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인간의 구원이 행함에 달렸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미와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를 칭의론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칭의가 불완전한 것이 되고, 칭의를 윤리적 행위로 완성시켜야 얻어지는 무엇으로 전락시킨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칭의를 미완성의 불완전한 실체로 간주하게 된다. 김세윤의 논리에 따르면, '이미와 아직 아니'는 칭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효한 부름, 회심, 믿음, 중생, 양자됨에도 적용되어 합리성을 상실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신 32:3; 민 23:19; 딛 1:2; 삼상 15: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름에는 후회함이 없다(롬 11:29; 민 23:19). 구원의 탈락 가능성, 칭의의 상실 가능성, 칭의의 윤리적 완성 등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칭의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선언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 아니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른다. 구원과 칭의의 공로 일부를 인간에 돌리고, 윤리 결핍의 원인과 해결책을 칭의론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도전이며 신성모독이다.
칼빈의 해독문은 트렌트공의회의 칭의론이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성령 역사의 위대성 이해를 방해한다는데 초점이 있다. 인간의 완전타락과 이신칭의의 중요성,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루터에 견주어 성화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다. 칭의와 성화를 구별한다. 칭의와 성화가 결합되어 있고, 칭의가 주어지면 성화와 쇄신이 뒤따른다고 한다.
중생된 자도 의지가 약하고 행위가 완전하지 않은 탓으로 불완전한 믿음을 가진 자처럼 보일 수 있다. 믿음에 합당한 완전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기독인이라고 자처하고 자신이 기독인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악을 거듭 행하고 윤리적 열매와 무관한 자가 있을 수 있다. 계속 악을 행하거나 성화가 없는 삶을 지속하는 ‘기독인’은 명목상의 신자일 뿐 칭의와 무관한 자일 가능성이 크다. 성례에 참여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불결한 생활을 하는 이름뿐인(titulo tenus) 기독인들,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있다. 즉각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분의 의를 전가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 날에 칭의받지 못한 자를 기다리는 것은 형벌 심판이며, 기독인을 기다리는 것은 상급 심판이다.
어린이는 출생으로 이미 완전한 사람이다. 사람다운 성숙과정을 거친 뒤에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 아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도 이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성령의 역사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한국교회에 기독교의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까닭은 칭의교리, 복음진리를 선명하게 가르치지 않은 탓 아닌가? 성경을 윤리실천의 결여라는 콘텍스트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다. 어린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고 하다고 아이까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교각살우(矯角殺牛) 곧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것과 같다.
최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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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박사의 <칭의와 하나님 나라> 라는 새 책이 나왔다. 전에 그가 쓴 <칭의와 성화>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들이 엿보인다.
1. 칭의가 종말까지 유보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받은 후라서 그런지 유보 라는 명시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비판에 대응하여 자신의 입장을 상당히 다듬은 것 같다.
2. <칭의와 성화>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같은 패턴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거의 같은 의미라고 보았는데 새 책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함께 병행된다고 보지만 둘을 의미상 동일시하는 것 같지 않다.
3. 종말 때의 칭의는 꼭 성화의 열매에 근거하여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보지 않는다. 비록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데 실패했어도 예수님의 중보로만 의롭다함을 얻음을 인정한다(140).
4. 김 박사가 주장하는 행위대로 심판받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들(공로)을 통해 우리의 칭의를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판에 대한 말씀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만의 칭의론에 굳게 서서 죄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며 의로운 삶을 살도록 독려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141).
5. 김박사는 새 관점의 대표주자인 제임스 던과도 거리를 둔다. 바울의 칭의론은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사회문화적인 갈등이 야기되는 선교적인 상황에서 그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교리라는 던의 주장을 배격하고 칭의론은 바울이 원래 확신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6. 김박사는 새 관점을 꽃피게 한 톰 라이트와도 선을 긋는다. 제 2성전기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기가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다는 라이트의 주장도 점검해보아야 한다고 했다(175). 더 나아가 톰 라이트가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관계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박사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톰 라이트가 칭의론을 아브라함과의 언약 성취라는 맥락에서 해석한 나머지 그보다 더 큰 틀인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적인 칭의를 아브라함의 언약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칭의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삶과 긴밀하게 연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174-183).
그럼에도 김박사의 견해가 여전히 전통적인 칭의론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1. 칭의를 무죄선언이라는 법정적인 의미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 즉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감이라는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 칭의는 무죄선언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롭다는 선언이라고 본다. 죄만 사해진 윤리적인 중립상태를 의롭다고 볼 수는 없지 않는가. 칭의가 단순히 무죄선언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롭다함의 선언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로움의 전가를 전제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성경신학자들처럼 김 박사도 전통적인 전가 개념이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한 교리적인 비약으로 보는 것 같다(물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니 단정할 수는 없다). 김 박사가 오래 전에 쓴 구원이라는 책에서는 전통적인 전가 개념을 그대로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이 순종하신 것을 마치 우리가 순종한 것으로 여겨주신다고 했는데 더 이상 그런 입장을 견지하지 않는 것 같다.
2. 개혁신학에서는 김 박사가 칭의의 한 요소로 본 것,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예수의 빛의 왕국으로 옮겨짐을 결정적인 성화(근본적인 성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갔기에 거룩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성화와 칭의는 동시적이고 하나로 연합되어있다. 다만 그 특성상 논리적으로 구별해서 이해할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법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동시에 결정적으로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다. 근본적인 성화라는 개념은 점진적인 성화의 확실한 바탕을 제공하는 동시에 칭의가 거룩한 삶을 부정하는 교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준다.
3. 김박사의 책에서 논리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의문들이 많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그는 “종말 때의 칭의는 세례 때 받은 칭의의 확인” 이라고 말한다. 그 점에서는 전통적인 입장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는 바로 이어서 그것은 “칭의의 현재 과정의 완성이라”고 한다(141). 김박사는 이제 유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지만 칭의를 계속 현재적인 과정으로 말한다. 그가 성화처럼 칭의도 발전 과정을 통해 완성됨을 뜻하는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김 박사는 무죄선언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의 상태를 견지함을 뜻하는 듯 한데 명확한 설명은 없다. 이와 맞물린 의문은 칭의와 성화는 같이 병행된다는데 서로 어떤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
4. 김 박사는 칭의론이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과 분리되는 것을 우려해서 칭의를 무죄선언이라는 법정적인 의미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겨짐이라는 관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에서도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실제적인 갱신을 의미하는 다양한 구원개념을 강조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중생과 회심, 칭의와 양자됨, 성화, 견인과 영화가 한데 연결된 것으로 본다. 이렇게 구원의 여러 가지 측면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부요하며 풍성한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구원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구원의 다양한 측면에서 칭의만을 달랑 떼어내어 그것이 구원의 모든 것인양 가르치기에 윤리적인 방종을 야기하는 것이다.
5. 성경신학과 교리(조직) 신학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 속에서 발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참 아쉽다. 조직신학자들은 성경 신학의 연구결과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그 자료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교리화 작업을 해야 한다. 성경신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물을 최종 결론으로 고집함보다 교회의 역사적 가르침과 현교회의 상황적 맥락에서 논리적으로 숙고해야 할 여러 과제가 남아있음을 알고 조직신학이나 목회신학의 역할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6. 앞으로 구원론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라는 큰 틀 속에서 구원의 다양한 측면을 한데 아우르며 구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괄하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가르친다면 오늘날 칭의론이 남용되는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아름답고 위대한 구원 사역을 더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김 박사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단편적이고 주관적이라 많이 미흡함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