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당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안셀무스(Anselmus of Bec, c. 1033-1109)는 중세교회가 낳은 탁월한 기독교사상가이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태어나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벡(Bec)수도원학교에서 수학했다. 강직한 성격과 탁월한 지력을 지닌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통스럽게 인식한 겸허한 사람이었다. 수도사로, 목회자로, 수도원장으로 봉사하다가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캔터버리 교구의 대감독으로 생을 마쳤다. 위대한 교사이며 영적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교황 힐데브란트(Hidebrand)가 활동했던 시대의 인물이었다.
안셀무스의 가장 탁월한 기여는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책과 그것이 제시한 구속론이다.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와 성육신(成肉身) 교리를 최초로 일관성 있게 체계화 한 것이다. 성육신의 필요성을 합리적으로 밝히고 원죄, 하나님의 사랑, 공의의 속성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까닭을 성경적에 충실하게 설명한다.
안셀무스는 위의 책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속죄의 성질과 필요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힌다. 속죄의 문제가 성육신의 성질과 필요성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주제를 기독론적으로 다룬다고 적고 있다.
1. 구속론: 만족설
안셀무스의 구속론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근거해 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한 전능자이다. 왜 하나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 수난, 죽음이라는 힘든 방법을 따르지 않고, 말씀 한마디로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대속제물(代贖祭物: ransom)을 요구하지 않고서도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 텐데, 왜 신이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고 하는 방법으로, 곧 중보사역을 행하는 방법을 택했는가?
속사도들과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의 목적이 인간을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주고 마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레네우스는 인간을 어둠의 권세에 매여 있는 존재로 보면서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하는 것이 구속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해방시켰다고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참 지식을 제공하고 사랑과 참된 의의 생활을 하도록 감동시키는 교사로 묘사하는 동시에 그의 죽음이 인간의 부채를 배상하는 속상물(贖償物)로 바친 것으로 이해했다. 오리겐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량제물로 바쳐 사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으로 생각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가 육을 입은 것은 인간을 신성화(deification)시키고, 모범을 보이고, 영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가르쳤다.
안셀무스는 이러한 교부들의 이론을 거부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목적이 일종의 빚을 갚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마귀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갚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희생의 필요성을 하나님의 속성에 기초하여 설명했다. “만족설”로 일컬어지는 그의 구속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딜레마에 봉착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인 동시에 의로운 신이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기 원하는 자비와 행한 바에 따라 보응하는 공의의 속성 때문에 죄책을 가진 인간에게 무제약적으로 자비를 행사할 수 없다.
2) 피조물인 인간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뜻에 순종할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반역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예를 더럽혔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예에 손상을 입힌 인간의 죄를 묵과하지 않는다. 죄를 탓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에 저촉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보지 못한 체 하려고 해도 자신이 부도덕한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죄를 벌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세상의 도덕질서가 와해되고 하나님의 영예가 더렵혀진다.
3) 하나님의 더럽혀진 영예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예와 세상의 도덕질서가 정상화 될 수 있는 길은 다만 인간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는 일이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전 세계보다 더 무겁다. 속죄물은 마땅히 그 무거운 죄에 비례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자면 인간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에 부합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배상물을 바쳐야 한다.
4) 그러나 보통사람은 죄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은 배상을 지불하기에 부족하다. 무한한 죄에 합당한 속죄물을 바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5) 하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길을 택했다. 인간이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속죄물을 바칠 자격을 가진 그 분 자신이 자기를 희생제물로 바치면 된다. 어떤 엄청난 가치를 가진 존재가 자신을 자발적으로 제물로 바치면 엄청난 죄를 위한 배상(reparation)이 될 수 있다. 자기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바쳐야 한다.
6)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자신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신하여 자기의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기에 합당한 속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7)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조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배상제물이 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인 동시에 죄책을 가진 인류의 일원이어야 한다. 그 사람은 무죄해야 한다. 인류의 일원이면서도 죄가 없는 존재, 다시 말하면 참 하나님이면서 참 사람이어야 한다.
8) 하나님께서 사람이 된 것은 인간이 저지른 무한한 죄에 대한 속죄물(ransom)로 바쳐지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이다.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God-Man)이다. 그에게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가 없다. 죄를 범하지도 않았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후예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우주의 도덕적 평형을 파괴하지 않고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당하고 죽음의 쓰디쓴 잔을 마셨다. 자발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죄 없는 그가 자발적으로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그의 생명은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생명을 다 합친 것 보다 더 가치 있다. 그의 속죄사역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는다. 인류의 죄책을 짊어지고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린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그 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켰다.
안셀무스의 구속론은 당대에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 후로 논의된 구속론은 안셀무스의 이론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서유럽 신학자들 대부분은 그의 이론을 따라 구속론을 전개했고, 설교자들은 그의 만족설을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교해 왔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도 그가 체계화 한 구속론―만족설은 강력하게 외쳐지고 있다.
2. 서양 공의체계에 입각한 이론인가?
안셀무스가 체계화 한 구속론의 가치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론을 명료하게 밝힌 것과 속죄의 필요성을 하나님의 불변하는 속성에 기초하여 설명한 데 있다. 하나님의 영예를 침해한 것에 대해 형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과 그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인간구원 파노라마를 정확히 소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곧장 벌하지 않고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는 보상을 받으시고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정확히 반영한다.
안셀무스의 이론을 거부한 사람도 있다. 스콜라주의를 괴멸시키는 단서를 제공한 존 던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 1265-1308)는 안셀무스의 구속론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로 그것을 만족스런 것으로 여겨 받아주었다고 생각했다. 유리창을 깬 가난한 집 아이의 어머니가 그 집주인에게 가져온 작은 선물이 비록 충분한 보상은 아닐지라도 그 정성을 보아서 더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구속론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공의를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쳤을 때는 그것에 상응하는 배상을 하도록 하는 서양사회의 공의체계(system of justice)를 이론화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법개념으로 이해하고 접근했다고 비판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공의의 원칙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고 자신을 속량제물로 바친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공의체계는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양사회에도 존재한다. 어느 나라든지 전쟁터에서 패전한 장수가 돌아오면 임금은 그의 공로를 먼저 확인한 후에 그의 과오를 따져 상응하는 벌을 내린다.
하나님은 형벌과 보상 중에서 반드시 그 어느 하나만을 택하는가? 옆집의 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다가 창문을 깨트렸다고 하자. 아이가 그 집주인에게 온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주인은 그 아이의 철없음을 고려하여 형벌이나 보상없이 그냥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형벌과 보상 중 그 어느 하나의 길만을 택하는 것으로 여겼다. 돌아온 탕자와 그를 용서한 아버지의 비유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말씀에 나타난 것은 안셀무스의 사고체계와는 달리 처벌이냐 속상물이냐 하는 양자택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무조건적이다.
안셀무스의 구속론은 중세기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목적을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주거나, 마귀에게 진 빚을 갚아 주려는 데 있다고 본 교부들의 이론을 부정하는 반면에, 그 빚을 하나님께 갚는다고 하면서 조공물을 바쳐야 신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출생에서 죽음까지 모두 구속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그의 전 생애가 구속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간과한다. 또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이 하나님의 영예를 회복하기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점에 초점을 둔 나머지 그것의 형벌적 대속사역의 의미를 간과한다. 후대에 등장한 형벌적 대속설(penal substitutionary doctrine)은 이 점을 보완한 것이다. 또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법적인 관계에서 죄인들에게 적용할 뿐,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있는 신비적 연합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
안셀무스는 기독교사상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신학자이며, 교회의 훌륭한 교사였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satisfaction)로 바쳐졌다고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중세수도사 안셀무스의 지도를 받고 있다. 그의 구속론―만족설은 세심한 탐구력을 가진 중세스콜라주의의 학풍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이 마귀를 무너뜨리지도 않고 마귀에게 짓밟힌 채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겠다고 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얼마나 더럽히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라. 이 승리는 사망의 협곡을 따라가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마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 안에서 잉태되고 태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승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안셀무스, Cur Deus homo, 1. 23).
위 글은 최덕성, <종교개혁전야>(서울: 본문현장사이, 2003), 317-326쪽을 각주 생략하고 옮긴 것이다. 이 책은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가능하도록 한 중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다룬다. 신앙의 권위가 교황에서 성경으로 전이되어 종교개혁운동의 바탕이 되었음을 다룬다. 실타래처럼 복잡한 중세기독교 역사와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아울러 내용과 직결된 컬러 그림, 지도 등을 담고 있다. 학문적이면서도 앤틱 스타일로 제작된 독특한 책이다.
독자는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 베들레헴의 드론뷰와 탄생교회당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까닭을 소개하는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다음을 클릭하면 나타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jYW3MbvcoHs&feature=emb_logo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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