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고신신학의 좌표
박종칠 목사 (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구약신학)
고신교단 총회 신학부 실행위원으로 목사후보생 강도사 사정 임무를 가지고 고려신학대학원(천안, 2003.1.)에 갔을 때 최덕성 교수가 “하기오그래피와 역사관점”이라는 제목의 자그마한 책을 주었다. 자신의 사관 및 역사기술에 관한 글이었다. 그가 저술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이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 대상(大賞)을 수상(受賞)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소책자를 읽으면서 위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서평자는 고신교단 총회 신학부로부터 목사 후보생들을 대상으로 “고신교단의 정신”을 강의하라는 부탁을 받은 상태였다. 책을 구하여 읽어보니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고신교단의 배태기, 출범기의 한국교회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학문적 쾌거이며, 매우 큰 성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도자는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 지어다”(전 9:10)고 했다. 논평자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직을 그만 두고 10년 넘게 교회 일을 하는 사람으로, 고신교단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가를 알리고 싶어 이 서평 논문을 쓰기로 했다.
위 책의 부피는 참고목록을 제외하고도 588쪽(초판-편집자 주)에 이른다. 단번에 읽기가 쉽지 않은 분량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관련된 교회 지도자들과 한국교회가 반드시 읽고 자신을 성찰을 하고, 자기가 소속한 교단과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고신교단에 속한 신자가 이 책을 읽으면 선조들이 물려준 고귀한 신앙전통을 확인할 수 있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1. 한국교회의 실상과 저술동기
책을 저술할 때는 일련의 저술 동기, 배경,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1989년부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 교회사, 교리-신조사 과목들을 가르치고, 몇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2000), 『양심선언과 역사의식』(2000),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신학선언』(2000) 등이다. 한국교회사에 대한 저자 나름의 어떤 통찰과 확신을 반영한다. 위 책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 교회의 공적 결의로 신사참배라고 하는 우상숭배와 배교의 죄를 지었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혹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일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솔선수범”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민족도 포함) 앞에서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광복 후에 그 죄를 공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참회고백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수난(守眞受難) 성도들을 온갖 악한 수식어, 예컨대 독선주의, 바리새주의, 율법주의 등의 용어로 뒤집어씌우고, 나쁜 사람들로 매장했다. 일제의 앞잡이들을 엉뚱하게도 한국교회의 모범적인 인물로, 민족지도자로 둔갑시켰다(p.550). 죄상가죄(罪上加罪)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곧 저자가 학문활동을 왕성하게 할 무렵, 한국교회 안에 주기철목사증후군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시기를 틈타 교회들(당회, 노회, 총회)과 신학교수들은 “얼토당토” 않은 발상을 표출했다. 예컨대, 통합측 노회, 총회의 “주기철 목사복권”(1997), 장신대의 주기철 복적사건(1997), 한부선 목사 해벌 사건(1950), 신사참배 취소 성명서 사건(1954), 한신대학의 역사날조(1990), 김수환 추기경의 안중근 교인권 회복선언(1994) 등이다. 자기가 죄를 지어 놓고는 자기 스스로 용서하는 식의 뻔뻔스러운 무치(無恥)의 행위를 보인 사건들이다. 죄인들이 “의인들”을 파면한 그 결정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세계교회는 성공적 미래를 마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하나님과 피의자들에게 참회고백문과 사죄문을 발표했다. 예컨대 독일교회 참회고백(1945),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1995), 심지어 프랑스가톨릭교회 추기경의 유대인에 대한 참회선언(1997), 교황 바오로 2세의 직접적인 공적참회 선언(2000)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참회고백을 하지 않은 채 출옥성도들을 몰아내고, 교회분열을 조장하는 죄상가죄의 행악을 저질렀다.
또 다른 하나의 가증스럽고도 부조리한 현상은 이러한 엄청난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채 자기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사회참여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일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연합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언저리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동기가 있어 보인다. 고신교단의 일부 핵심 인사들이 고신의 아름다운 전통을 폄하, 왜곡하고, 범죄행각을 반성하지 않은 가운데서 그저 교회의 기구적인 연합과 축제에 열을 올리는 일에 덩달아 동참하는 것을 보고서 분노를 느낀 것 같다. 이런 몇 가지 동기들로 인하여 저자는 불가피하게 “역사 바로 세우기”(40장)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2. 고신정체성과 그것을 폄하하는 무리들
1) 오늘의 교회상과 어제의 까닭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한국교회사의 흐름에서 “고신정신”이 어떻게 자라왔는가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저술한 것이다. 제2장과 제3장은 오늘의 우리에게 현장감 있는 사건들 곧 김홍도 목사 사건, 옷 로비 사건, 한경직 목사 도덕적 양심선언 등을 다룬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도덕 불감증의 전통은 일제시대에 저지른 “배교, 우상숭배, 백귀난행(白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와 같은 참회고백이나 역사청산 없이 뒤틀린 가치관으로 흘러 온 “까닭”(p.33)을 다룬다. 저자는 한경직 목사가 템플턴 상을 수상할 때 양심선언을 하기는 했으나 한국교회가 온갖 분탕질을 당한 후의 일이라 “한국교회의 뒤틀린 가치관 바로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p.40)고 본다.
2) 당회, 노회, 총회, 개인의 뒤틀린 교회관
제4장부터 제10장까지는 한국교회(당회, 노회, 총회, 개인)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이 성경적, 교회치리적 전통에 따르기보다는 로마가톨릭교회 전통에 따른다는 것을 논한다. 장로교 제33회 총회(1947)가 열렸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한부선 선교사가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 나는 치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총회는 훗날(1950) 특별위원회를 통해 “해벌통보”를 하는가 하면, 1957년의 총회는 그 해벌이 정당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제43회 총회(1958)는 “해벌 통지만으로써 다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한국장로교 총회가 저지른 것을 단지 행정상의 실수(mistake)로만 본다는 것이다. 총회만이 아니라 순천중앙교회와 같은 개 당회도 우상숭배 거부로 징역살이를 한 장로를 장기결석 한다는 이유로 제명처분을 해 놓고서 광복이 되자 그 당회가 “복직시키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의 모순된 정신에서 온 그릇된 판단이다(4장).
서울동노회가 중심이 되어, 예장 통합측 총회가 옛날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를 파면한 것(1939)을 목사복직(1957)시킨 일은 첫째, 일본신도교로 개종한 종교기구가 파면한 것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처사이다. 둘째, 조선장로교 헌법(1934) 권징조례(제1장 1조 3절: 치리 대상은 살아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한다)에 어긋난다(5장). 셋째, 헌법(1934)의 질서 곧 당해 치리회가 관장해야 한다는 규정에 맞지 않다. 평양노회가 파면한 것을 서울동노회가 복권시키는 것은 교회법 위반이다(9장). 넷째, “죽은 자에 대한 치리권”(6장) 행사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베드로의 열쇠를 가지고 직분을 “작위”처럼 수여하는 식의 발상에서 기인한다. 성경적 교훈을 따른 것이 아니다. 다섯째, “더러운 창녀”(a foul harlot)가 된 교회의 전통 계승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그러한 교회의 그 결정에는 불복종할 수 있다(8장)고 한다.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제도적으로 (법에)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 목사복직과 복권을 “덥석”(서평자의 말) 받음으로써 “자신의 아버지를 면직한 그 발상에 죽은 아버지를 다시 제물로 갖다 바친 셈”(p.138)이 되었다. 저자는 그가 “표류하는 순교정신”을 보여주었다(10장)고 한다.
3) 신학교들의 가소로운 작태
어리석은 일은 교회(당회, 노회, 총회, 개인)만이 아니라 그 교회를 계도할 책임이 있는 신학교들도 저질렀다. 장신대 교수회가 “제19회 졸업생인 소양 주기철 목사”의 이름을 학적부에 “만장일치로 재 등재키로 결의”한 것과 목사복권식과 함께 복적식도 함께 성대히 거행했다. 주기철은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가 아니라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사자(死者)이다. 두 학교는 별개이다. 주기철과 역사적 관련이 없는 장신대가 일방적으로 주기철에게 그러한 ‘선심’(서평자의 말)을 쓴 이유는 주기철을 이용하여 자파의 위상을 높이고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동기로 약삭빠른 짓을 한 것이다. 이런 가당치 않은 몇 가지 의문이 있음에도(12장), “통합측 교단총회와 서울동노회, 장신대 교수회, 주기철 기념사업회는 모두 주기철이 목숨을 걸고 싸웠고, 그의 아내 오정모가 배설물로 여긴 것을 붙잡으려고 애썼다”(p.183, 13장).
이런 일들을 볼 때 과연 “정통성과 유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기구적 계승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고백적 계승에 달려 있다(14장). 그러므로 “주기철을 위한답시고 성대히 거행하는 복권 복적 행사는 실상 주기철의 정통신앙과 장로교신학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교회, 즉 신앙공동체의 기초를 허물고 치리회의 질서를 위반한 사건”(p.215)이다. 주기철 목사는 한국교회의 죄책 고발자로 서 있다(15장).
제16장부터 제22장까지는 신학교와 신학교수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시각으로 수진수난성도들을 폄하한 일들을 논한다. 장신대 교수들(이종성, 문희석)과 그 신학교의 신앙노선(16-17장), 한신대 교수들(김재준, 정하은)의 신학(18장)과 그 신학교의 역사날조(21장) 그리고 감신대 윤성범 교수의 ‘우상숭배’의 신학(19장)을 다룬다. 이들이 한결같이 수진수난 성도들의 수난과 순교를 폐쇄된 “근본주의라는 사상체계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을 하지 않는 피안적 신앙 때문이다,” “신앙이 강한 자는 신사에 가담했다” 등 기막힌 궤변을 늘어놓았다. 복장(腹腸) 터지는 신학을 펼쳤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옥중성도들은 검사가 묻지도 않은 기독교 도리들을 소개하면서 형무소를 실천신학의 현장으로 보는 반면, 일제의 주구, 배신자들은 3.1운동 당시의 조선의 독립을 위한 애국활동을 한 전과를 씻고자 사회참여, 예컨대 일본 “신도교” 신학교육에 열을 올리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후자에게서는 양심적인 참회고백을 찾아 볼 수 없다(22장).
4) 과거사 청산 방법
제23장부터 제28장까지는 광복 후에 총노회 차원의 과거사 청산문제를 다룬다. 제23장과 제24장은 제39회 총회(1954년, 안동교회) 때 발생한 일련의 문제를 다룬다. 권연호 목사의 제안으로 과거사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총의”에 따라 친일파 인사들에 대한 시벌 안을 폐하기로 하고, “신사참배 교역자와 신학자와 혹은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나 학교나 각 기관에 명하여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제39회 총회록, p.264)했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취소성명서의 부당성을 일곱 가지로 구분하여 날카롭게 지적한다(pp.341-347). 한국교회가 엄청난 과거 죄악에 대해 “취소성명”으로 매듭지으므로 인해, 모처럼 한국교회에 부흥을 통해 세워진 철저한 권징체계와 도덕성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몸의 근육이 풀어지므로 인해 온갖 질병이 한국교회에 생겼다고 진단한다(25장).
홍택기 목사(제27회 총회장)는 과거사 청산방법에 대해 “각인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으로 단정한다. 공적으로 범죄한 것이니 만큼 공적으로, 성경대로 회개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경대로 하자고 하면 “독선주의”라고 하고, 헌법대로 하자면 “율법주의”라고 하고, 양심적으로 참회고백을 하고 권징을 시행하자고 하면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몰각한 바리새주의자”라고 하는 등의 적반하장격의 덮어씌우기를 해 왔다. 이런 억지 풍토가 한국교회 안에 고착되었다(26항).
이러한 투쟁이 신랄하게 나타난 곳은 경남노회였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란 제47회(1945.11.) 노회부터 진해읍, 진주 봉래동,구포제일, 부산항서, 부산 광복동, 마산 문창, 그리고 문창교회당에서 열린 제51회 노회 등, 정기 및 임시 노회를 거치면서 경남노회는 친일파 인사들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세속주의 교권주의자들은 제 갈 길로 가고, 고신은 평신도들의 의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게 된다(27장). 그러나 문제는 친일파가 주름잡고 있는 중앙의 총회가 “신앙”이 맞지 않다고 하여 노회를 분리해 나간 경남지방의 친일파들 인사들의 손을 들어주므로 “민족사적으로 정통성을 갖지 못한 교회가 한국기독교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p.429). 여기에는 한국 사회 안에서 친일파가 승리한 것의 영향이 크다(28장).
5) 고신파의 배태(胚胎)과정에 대한 독 뿌리기
제29장에서 제32장까지는 고신파의 배태 과정에서 그 정체성을 논한다. 반대파들이 자기 허물을 감추기 위해 남을 헐뜯는 식의 우물에 독 뿌리기에 항거하여 (1) 고신파는 총회로부터 제거 당한 후에 불가피하게 설립된 교단이기에, 분리해 나가서 독자적인 교단을 세운 메이첸파 교단과는 그 출발이 다르다. 다만 신앙고백이 같고 신사참배 반대 때문에 옥고를 치룬 그런 신정(信情)으로 두 그룹은 연결된 것이다(29장). (2) 중앙 친일파 총회가 지방 친일파 노회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고장 난 도량형기” 때문이다. 고장 난 저울눈으로 만사를 보는 탓으로 교회의 본질을 오해한다. 어두운 그 눈이 밝아지려면 회개를 해야 한다(30장). (3) 고신은 끝까지 교회일치를 노력했다. 다른 교파를 창설하거나 조장할 의사가 없었다. 한부선, 이약신, 주남선, 한상동 등의 성명서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4) 고신파는 변질된 교회라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개혁하고 일치를 도모했다. 이 사실을 무시한 채 고신을 3세기의 노바투스주의자, 도나투스주의자와 동일하게 보는 것은 범주착각이며 논점일탈의 오류이다(31장, 32장).
6) 세상보다 못한 교회
저자는 한국교회가 범죄한 것을 참회하는 일에는 사회보다 못하고(33장), 감리교 감독이었다가 광복 후에 천주교회로 개종한 정춘수만도 못하다고 지적한다(34장). 죄에 죄를 더하며(35장), 유호준은 “착종논리”(36장)를 펼치면서 자기 나라를 일본으로 여기고 친일행각을 변명한다. 이는 언어도단이다. 세계교회들의 양심선언에 비추어 보면 한국교회 죄악상은 더욱 두드러진다(38장). 이런 전통을 물려받은 우리들은 ‘역사바로세우기’를 해야 하며(40장), 진정한 교회일치의 조건이 무엇인지(39장) 생각할 때라고 한다.
3. 저자의 공헌
저자는 고신파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있는 시기에 한국교회가 물려받은 고신교단 초기의 정신과 정체성을 잘 소개하고 있다. 서평자는 그 전통이 참으로 존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까지 “진리에 살고 진리에 죽자”고 외쳤던 우리의 선조들의 그 신앙적 열정과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어느 교수는 고신교단이 한국교회의 변두리에 있는 교단으로 전락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면서, 고신교단에 속한 두 명의 어느 장로들(이만열, 손봉호를 일컬음, 편집자 주)이 한국교회의 주류에 서 있는 반면에 고신은 그렇지 않고, 불의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으며,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마당에 저자는 고신교단이 역사적으로, 신앙고백적으로 한국교회의 정로(正路)에 서 있고 타 교단들이나 신학교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그 동안 고신의 초창기 진리수호자들이 외쳤던, 잊혀 진 역사를 알게 하고 날조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면서, 고신교단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의미의 “장자교단”이라고 밝힌 것은 장한 일이다.
저자가 장신대, 한신대, 감신대 교수들과 교권주의자들이 왜 고신의 신앙 선조들을 그토록 폄하하고 공격했는가를 밝히는 데서 그의 학문성이 돋보인다. 고신 조상들에 대한 사실호도와 역사왜곡은 자유주의 신학, 칼 바르트 신학, 현실 참여주의신학, 심지어 “우상숭배의 신학”의 잣대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장 난 도량형기”로 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6-21장).
저자는 기독교 친일파 인사들이 옥중성도들을 폄하하고, 자신들은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기도 하고, 정치와 유착하는가 하며, 광복 직후 서둘러 경남노회를 재건한 것에 대해 저들이 과거에 친일행각으로 더럽혀진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한 의식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한다. 광복한 조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한다(p.316, 397). 반면에 출옥성도들은 세상에 대한 무명의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유명의 의지(p.200)만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저자의 탁월성은 친일파들의 죄과를 드러내면서 서양교회의 사건들과 비교하거나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데서 드러난다. 저자의 글을 좀 더 소개해 보자. 먼저 저자는 대조법으로 친일자들의 죄악을 파악한다. 다음과 같다. (1) 한국교회는 위에 서술한 대로 죄상가죄하는 식으로 나아가는데 반하여 일본기독교회와 메이지학원과 독일교회는 참회고백을 했다. (2) 한경직 목사의 제5공화국과의 유착태도와 엘살바도르의 로마가톨릭 사제 오스카 로메르는 군부에 협력하지 않으므로 살해 된 것도 대조적이다. (3) 한국교회가 1998년에 베드로, 바울, 안드레 셔츠 입는 운동을 전개한 것과 달리 청교도들은 1558년에 로마식 가운(Vestment Debate)을 거부했다. (4) 한국교회의 직분서열 개념은 공자에서 받은 것으로,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친 만인제사장 직분 개념과는 다르다. (5) 친일파가 주도한 한국교회의 배교와 이단성은 고대 이단 마르시온주의를 능가했다. (6)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천조대신의 교회였다. 그 변질의 정도는 칼빈이 로마가톨릭을 “더러운 창녀”라고 하면서도 교회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으니,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교회보다 부패와 무질서의 정도가 더 심했다(p.282)고 한다.
저자는 대조법으로 한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나 세상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설명한다. (1) 주기철 목사직 복권은 김수환 추기경이 죽은 안중근의 교인권을 회복한 것과 로마가톨릭교회가 죽어 무덤에 있는 위크리프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이단자로 규정한 것과 같다. 갈릴레이 갈릴레오에게 내린 저주를 철회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2) 배교하여 “더러운 창녀”가 된 한국교회가 정통성이 없다고 하여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이 불복종한 것과 칼빈이 로마가톨릭교회에 불복종한 것은 비교된다. (3) 주기철 목사복권은 한국교회 헌법 권징조례 제6장 제44항에 해당노회가 치리하도록 되어 있는데 평양노회가 파면한 것을 서울동노회가 결정하고 통합측 총회장 이름으로 복권시킨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가이샤라에서 오리겐을 안수한 것과 같다. (4) 19세기의 미국의 찰스 피니, 웨일즈의 이반 로버츠의 부흥운동이 죄에 대한 공적고백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것과 1907년에 일어난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과 고려신학교의 회개운동(1950.4.)은 비교된다. 그러나 친일파 인사들은 서양교회와 달리 참회고백과 권징을 마다했다(p.379). (5) 제48회 경남노회에서 친일파가 득세하여 “다시는 신사참배 문제 거론치 않기로 하다”고 결정한 것과 인노센트 3세가 제4차 레이터란 종교회의에서 개혁을 금지시킨 일(p.408)은 비교된다. 저자는 이처럼 한국교회의 사건들과 세계 교회의 사건들을 대조, 비교하여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의 교회들과 로마가톨릭교회, 심지어 세상만도 못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과거사 청산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당사자 한국교단들과 신학교들은 저자의 요구에 마땅히 답해야 한다. 장신대 교정에 세워진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비”에 대해서 저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번지수가 잘못된, 엉뚱한 곳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p.228)고 한다. 장신대의 답변이 요청된다. 저자는 한신대의 역사날조에 대해 학교당국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한다. 해당 학교는 속히 답을 내 놓아야 할 것이다. “신사참배결의취소”(제39회 총회, 안동)에 대해 저자는 일곱 가지 점에서 죄상가죄했다고 지적한다. 과거청산 30가지 과제(결론)를 제시한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성찰을 하면서 마땅히 답을 해야 한다.
4. 서평자가 말하고 싶은 것들
저자는 고신교단이 배태되어, 한국교회 안에서 유산(流産)되지 않고 투쟁해 나가는 과정을 신학적, 교회헌법적, 치리적, 역사적 흐름에서 살핀다. 그러나 친일파에 대항하여 공격하는 고신교단에 소속한 사람들의 힘찬 모습,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은 노력을 충분히 기술하지는 못한 것 같다. 거짓 역사와 연결되어 있는 장신의 야경(p.149)을 보여주면서 그 신학을 다루고, 고신교단에 비판의 비수를 찌르는 한신대의 교정(p. 283)을 보여주고 그 신학을 다루며, 또 반민족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감신대 교정에 사람이 서 있는 생동감 있는 모습(p.529)을 담은 사진을 싣고 이 학교의 신학을 다룬다. 반면에 친일 주구들에 맞서 싸웠던 고려신학교의 초기의 불타는 정열의 신학에 는 침묵하고, 적막과 수심이 가득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정 사진(p 158)을 보여준다. 서평자는 저자 최덕성 교수에게 다음의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1) 친일파 인사들이 고려신학교를 없애려고 한 까닭을 아는가?
고신교단은 신학교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신학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친일파 인사들이 고려신학교 자체를 없애려고 한 까닭이 있다. 그것은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
(1) 1950년대의 난관
저자는 친일파 인사들이 경남노회, 총회, 개인(박형룡 박사 등)에 대해 궁극적으로 기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는 직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려신학교 존재 자체였다. “보따리 신학교”가 무슨 탐낼만한 건물이나 재산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고신파의 “그 신학”이 자신들에 대한 장애물이었다. 저자는 “참회고백과 과거사 청산 문제는 고려신학교의 존립과 출옥성도들의 장로교단 내에서의 존립문제로 비화했다”(p.449)고 지적한다. 이것을 지적할 때 저자는 겸손히 왜 서평자의 글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서평자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고려파의 의의”(22면)라는 글에서, “이 때부터 한국장로교회는 신사참배문제 시비에서 고려신학교 존재에 대한 문제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친일파 인사들에게는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자 “고발의 신학”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광복 후에도 일제 주구들이 지배하는 노회와 총회를 부추겨 고려신학교를 말살하려고 했던 그 근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친일 주구들이 고신공동체 배태 과정에서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있는 고신파 신학교를 인준하지 않으려고 난동을 부리는 상태에서 경남노회는 그 인준 결정을 거듭 취소했다. 제48회(1946.12.3.)와 제49회(1947.9.1.) 그리고 제50회(48.12.7.) 경남노회가 그 인정을 취소하는 등의 끈질긴 공격이 모자라서, 총무 김관식은 총회 차원의 교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제34회(1948.5.) 총회 때 막무가내식의 발언을 했다. “그 신학교는 총회와 관련 없다”고 했다. 제35회 총회(1949.4.23.)는 “거년 총회 결정대로” 하기로 했으며, 제36회(1950.4.21.)는 “고려신학교와 관계없는 것을 성명한자만 총대로 한정”했으며, 제37회 총회는(1952.4.23.) “고려신학과 그 관계 단체는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결정했다.
고려신학교가 총회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말씀,” “그 신학”으로 자기들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 듣기 싫었던 것이다. 그 때는 다름 아닌 6·25의 동란 중이었다. 나라의 운명이 어찌됐던 상관없이 신사참배를 했던 무리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발하고 자기들의 신학 곧 자유주의 신학, 진보신학 등에 장애가 되는 고려신학교를 없애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2) 신학의 중심 성경관
광복 후 한국교회의 중심신학은 신론, 기독론, 교회론이 아니었다. 김재준의 성경비평학에 반대하는 박윤선의 축자영감을 기초로 한 성경론이었다. 그 당시의 평신도들이 발표한 성명서나 교계 성명서의 첫 구호는 성경에 관한 것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신학교를 설립한 동기에 대해 “출옥 이후 이북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남한에 와서 보니 신학교가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일본시대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신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의 주인이 되어 신학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교회는 저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결론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윤선은 고려파가 생긴 과정의 특징 몇 가지 중 그 첫 번째가 “고려신학교 확립을 통한 정통신학을 교회의 근간으로 삼으려는 목표”였다고 말했다.
(3) 1960년대 초의 위기
사탄은 고신파 혹은 고려신학교를 말살하려고 했다. 이 공격은 1960년대에도 계속 되었다. 예장 승동측과 고신교단이 합동을 할 때(1960.12.13) 고려신학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그 합동의 기본으로 하는 “일원화 원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합동 후 겨우 한 해가 지날 무렵, 교권주의자들은 고려신학교 자체를 없애려고 신학교 “단일화 원칙”으로 바꾸었다(1961.12.28.).
여기서 교권주의자들은 우상숭배 죄 고발자인 고려신학교와 그 정열의 신학을 견디지 못하고 고려신학교를 총회 밖으로 쫓아내려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사탄은 고신이 자신의 정체성에 방심할 때에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교권주의에 물든 총회 신학 안으로 흡수되도록 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겪은 시련은 공통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고신교단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나갈 때에는 외부에서 오는 시험이 아무리 강열하고 교묘해도 이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승동측과 합동하여 고려신학교가 사라지려고 할 즈음에 신학교의 복교도 가능했다(1962.10.17). 고신교단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무형의 그러나 확실한 정박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도, 신학교가 먼저 복교되고, 복교된 고신신학에 대한 향수와 확실한 정박지를 중심으로 교회들이 다시 환원하므로 교단이 형성되었고 고려파가 계속 존속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고신파 안에서 장중보옥같이 주목하고 본 것이 다름 아닌 이 학교의 신학이었다. 고신파 정체성의 핵심은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둔 바로 “그 신학”이었다.
(4) 1990년대의 사탄의 공격
사탄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공격수단으로는 사용하던 방법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자 고신파 정체성의 가장 핵심인 “그 신학”을 내부로부터 오염시키는 시험을 시도했다. 1960년대 초부터 이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여건들이 조금씩 형성되어 왔다. 고신파의 지도급 인사들이 하나님 말씀보다는 세상, 즉 자리, 명예, 물질을 탐했다. 개혁주의라고 하는 거창한 구호에 가려진 고신신학을 사탄은 간교한 방법으로 탈선시켰다. 사탄은 고신파 정체성의 핵심인 성경관이 무너지면 고신파는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5) 낙타가 텐트를 박살내는 교훈
친일파 신학자들이 유지했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고려신학교파의 정체성의 핵심은 성경관이다. 고신파를 단지 행정적, 치리적, 정치적, 도덕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고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고신의 출범 과정과 최후의 보루는 신학이며, 성경관이다. 저자도 이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반세기 동안 다른 교단과의 차별성을 강조해 온 고신교단은 아이러니컬하게 여타의 교단과 별다를 바 없게 되었다”(p.371)고 한다. 고신교회의 권징 이완 상태이며 도덕성 상태가 다른 교단과 다른 바가 없다는 문맥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 권징의 근본인 성경은 간과할 것인가?
고신의 뿌리와 근간은 성경영감교리와 역사성이다. 교회보다 신학교가 먼저 태동된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반세기 동안” 권징의 이완상태를 염려하는 반면에 고신의 핵심적인 교리, 즉 도발적으로 나타나는 모 교수의 성경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고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무감각,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저자가 한상동 목사를 분리주의자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한다. 그러나 고려신학대학원의 동료 이성구 교수가 창세기의 역사성, 모세 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며, 아모스서의 편집설을 주장하고, 행위구원을 말함으로써 고신 정체성의 핵심을 침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왜 침묵하는가?
저자는 사막의 낙타 그림으로 예를 들면서 “사막의 낙타는 점차 비집고 들어가 나중에는 텐트를 완전히 박살낸다”(p.244)고 한다. 이러한 현실이 다름 아닌 자기가 속한 교단 안에 있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는가? 저자가 인용한 존 리이스(John Leith)의 “개혁주의 신학은 결코 교회의 존재를 교회정치에 의존시키지 않는다”(p.142)고 하는 그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저자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주기철의 “신앙고백적 순종”(a confessional response, p.204)은 어디에 있는가? 고신교단 선조들이 한탄한 바대로 “산에서 고기를 찾아야” 하는가? 고려신학교의 가장 중요한 이념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또 장로회 원본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리대로 교회와 신학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 생활의 순결과 순교적 이념을 가진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저자가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듯하다.
왜 저자는 동료 교수가 성경의 내용이 신화이며 전설이라고 말하든 말든 그것은 상관하지 않고, 성경의 영감교리를 부정하든 말든 보고만 있는 것인가? 고신교단 인사들이 총회장, 이사장, 총장, 신학대학원장과 같은 자리를 “가룟 유다의 은전”처럼 나누어 먹으려고 하는 탐욕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저자도 은전 몇 푼이 혹시 자기에게 떨어질까 하여, 한 자리 고위보직을 줄까 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서평자는 1990년도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일원으로 이성구 교수의 철학박사 학위 논문이 담고 있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을 글로 지적했다. 그때 저자는 신임교수지만 교수회에 참여, 동석하고 있었다.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이성구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을 모를 리가 없다.
저자 자신이 고신파의 정체성을 그처럼 철저히 드러내고자 했다면, 왜 고신파 신학의 핵심인 성경관에 관한 문제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피하고 있는가? 저자가 동료 교수의 신학사상 문제에 침묵하면서도 감히 “일제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한국교회의 맥이 장로교 고신파에 연결되어 있다”(p.197)고 말할 수 있는가?
고신파 초창기에는 친일파의 자유주의 사상에 맞선 불타는 성경관 투쟁이 꽃 봉우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저자가 이것을 안다면 그의 책 중에 한두 장은 이 주제에 할애했어야 한다. 고귀한 고신파 전통을 기구적 연합과 일치 그리고 축제와 맞바꾸는 현실에 대해서는 지적하면서, 그 근원인 그릇된 성경관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39장)
2) 왜 원수의 말을 방어무기로 삼는가?
저자는 “정통성과 유전”(14장)을 논하는 글에서 에밀 부르너가 “전통이 없이는 복음이 없다”(p.192)고 한 말과 칼 바르트가 “종교적 이념이 지닌 정신과 철학을 수용하지 않고서 오직 성경만이 신빙성 있게 말하도록 자신의 가르침에서 실제로 허용하는 성경연구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한 말을 인용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초대회장 후프트(W. Hooft)가 개혁주의 신학자였다고 한다. 코넬리우스 밴틸(C. Van Til)이 바르트를 바르게 이해했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고 한다. 저자가 바르트 신학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서평자가 관심을 두는 것은 초기 고신파, 특히 박윤선 박사가 바르트신학에 반대하고 정통신앙을 파수했다는 사실이다. 신학적 견해가 다른 신학자의 말을 인용할 수 있고 그것을 자기의 정통사상에 그것을 용해하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저자가 고신 전통과 정통성을 드러내는 글에서 고신 적들의 말을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번지수가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 자신이 타 신학교 교수들이 바르트 신학을 갖고 수진수난자들의 순교를 폄하한다고 논하지 않았던가! 또한 바르트적 변증법적인 사고를 갖고는 고신의 신앙선조들의 항거와 순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저자도 인정하고 있다. 풍성한 지식을 표출하는 자리일수록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학문적으로 잘 헤아려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지식정보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그런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3) 제사장적 참회의식(儀式)에 대해서는 모르는가?
저자는 “고신교단과 국경 밖의 만주 봉천교회는 참회고백행사를 가진 바 있다”(p.358)고 언급한다. 고신교단이 출범하면서 제사장처럼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죄악을 고백한 것은 고신 정체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지 않는다. 배역한 한국교회와 진리를 거역한 교권적 “총의”(24장)를 무섭게 고발하고,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무거운 짐을 독자에게 제시(40장)하면서도, 저자 자신은 고신교단 출범기에 고신 인사들이 한국교회를 위한 성례전(sacrament)적인 제사장 기능을 행한 사건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는다.
저자가 지적하는 한국교회의 무거운 짐들과 죄과는 저자 자신이 참여하는 학술적 토론만으로 해결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가느다란 소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신교단 총회가 출범하면서 제사장적 참회행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고신교단의 제1회 총노회가 첫 번째로 다룬 것은 바로 그 주제였다. 나의 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고려파의 의의”(29-33)가 이 문제를 다룬다.
고신교단 제1회 총회록은 고신교단의 대제사장적 참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자숙할 자: 전국 목사 장로 남여 전도사, ② 참회기간: 1952년 9월 22일-10월 12일, 3주간, ③ 회개할 내용: 공범죄와 자범죄, ④ 회개방법: 예배인도와 공중기도 성찬참여 하지 않음, ⑤ 마친 후 3일 동안(10월 13일-15일) 부산에서 부흥회하고, 총노회 선포식을 하기로 하다.”
4) 교회고백사와 세상정치사는 구분되어야 하지 않는가?
저자는 위 책에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는 여러 가지 삽화들을 싣고 코멘트를 달아 책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저자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광주시민 항쟁”(p.491), “장로교 총회장 노진현 목사와 감리교 김종필 감독”의 자유당 인물들 취임식 참석 모습(p.371), “장로교 통합측 총대들이 정치권력에 유착하는” 모습(p.513), “부정선거에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p.531), “부산시문화원 방화사건”(p.534), “광주사태의 모습”(p.536) 등의 한국 정치사 관련 사진들이 실려 있다. 서평자는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제33장은 “민족정기 회복의 실패”를 다루면서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의 실패와 한국교회의 과거사 청산의 실패를 비교하고 있다. 사회에서 친일파가 승리한 것처럼 교회에서도 친일파가 승리했다”(p.514)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김일성)은 이데올로기적인 동기로 수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역사 청산을 확실히 했다고 한다”(p.580)라고 하고, “과거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민족적인 대 과제인 통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나 교회를 말살하고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한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지적은 섬뜩한 느낌을 준다. 과연 친일파 전통이 우리 사회의 “원죄”이며 “첫 단추”(p.498)인가? 어느 곳에서든지 교회가 강한 핍박을 받던 시대를 연구해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슷한 현상은 있기 마련이다. 교회사와 세속사와의 관심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혼돈을 가져올 수 있다.
서평자는 민경배 씨(연세대 교수)가 중생하지 못한 세상(민족)과 중생 단계를 거친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동일시하는 역사안목을 가졌다고 본다. 이와 달리 저자는 신앙고백공동체와 세상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 구분이 빈약해 보인다.
5)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구조 속에서 역사를 보아야 하지 않는가?
저자는 한국교회가 경험한 1907년 대부흥운동과, 6·25 사변 전후의 회개운동들을 언급한다. 고려신학교의 경건회 때 일어났으며, 그 시기를 “이른 봄 어느 날”(p.362)로 기록한다. 그 날짜를 “1950년 4월 경”이라고 기술하여 명시해 주어야만 박윤선 박사가 “우리로 하여금 환난(6·25-서평자 주)을 대비하도록 하신 귀한 섭리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기독공보』(1954.5.3)가 “교회가 분열되고 동족상잔이 전란이 일어난 까닭이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데 있다”고 증언(p.423)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들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1949년 초에 한상동 목사가 “현하 대한교회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회개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진노가 무섭게“ 임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안이숙은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이러한 예감을 5, 6년 동안의 감옥살이에서 주님과 교제한 출옥한 성도들이 한국의 산천을 처음 대할 때 무언가 축 늘어져 있고 근심에 쌓인 기운을 느꼈다고 하는 말로 소개한다. 조국의 광복과 자유가 진리를 위한(for) 것이며, 그 진리를 대항(against)할 때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다.
서평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고려신학대학원의 구약신학 교수 이성구의 사상과 그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이 저자가 한탄하는 친일파 전통과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성구 교수의 존재는 고려신학대학원 안에도 친일파 전통이 온존하고 있는 증거이다. 만약 고신교단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야합하여 “고신파 가룟 유다 은전” 나누기 식으로 나가면 고신파의 정체성은 유실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 교회사를 역사신학 또는 교회론적으로 접근하면서 교회 헌법적 헌정, 광범위한 자료 정보적 스펙트럼, 치리적 과정, 도덕적 상식의 시각으로 살펴본다. 서평자가 보기에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언약적 구조 속에서(신명기 28장 등)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언약적 규정에 따라 평가되고 기술되는 역사가 타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빛 아래에서 직접 논술하는 것이 교회론이나 신학이나 헌법에 입각하여 추궁하는 것보다 더 호소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독인은 진리를 말할 때 ‘사랑’ 가운데 말해야 하고(엡 4:15) ‘온유’함을 가지는 것이 지혜롭다(약 3:13). 저자는 직접적으로 핵심 인물에 해당하는 당사자들의 이름을 거명한다. 이는 학자로서 진리의 정로를 규명하는 차원에서 온 것이지 마음속에 있는 “시기와 다툼”(약 3:14)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친일파라는 제목의 책에 이름이 거명되는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은 이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5. 결론
하나님께서 고신파 초창기에 부어주신 특별한 은총과 역사(役事)는 너무나 위대한 것들이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고신파의 근본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저자가 한국교회의 배교한 죄악을 학문적으로, 원리적으로, 폭넓은 자료들의 스펙트럼으로 살피는 것은 훌륭한 작업이다. 한국교회에 진언을 하고 역사바로세우기를 요청을 한 것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가 1년에 한 명에게 주는 “신학자대상-학술상”(2001)을 저자에게 수여한 것은 그의 풍성한 자료지식과 그것들을 상호 연관시키고 동일한 원리들을 적용하면서 서로 다른 주제들을 연결시켜 가는 학문적 탁월성 때문일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고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고신교단 역사와 정체를 밝히고 고신의 신앙노선을 규명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점은 크게 돋보인다.
서평은 가능한 저자의 의도를 찬사하고, 비평할 점은 부드럽게 하는 것이 예의이다. 그런데도 서평자가 저자를 심하게 비판한 것은 고신 정체성을 다루는 주제의 책이 핵심인 성경관을 다루지 않고 비켜 가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른 교단들에만 친일파 전통이 남아 있고 고신교단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보는가?
이상규 교수가 한상동 목사를 분리주의자라고 단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릇된 판단이다. 어떤 의미로 그렇게 하였는지 더 살펴보아야 하겠고, 그가 신문지상에서 공개사과 했다고 하니 다행으로 생각한다. 설령 이상규 교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했다고 할지라도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교수의 문제이다. 고신교단 신학의 근본적 정체성을 허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려신학대학원 태동의 신학적 의미와 고신교단 총회의 제사장적 기능을 다루지 않고 그에 따른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의 신학을 심도 있게 서술하지 않으면서 친일파 전통에 맞선 고신 공동체의 진정한 정체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덕성 교수의 걸작인 이 책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한국 기독교인들과 특히 고신교단 교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한국교회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고, 이 책의 지도에 따라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를 바란다.
저자가 “친일파 전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품격 있는 양질의 책을 쓰기까지에는 많은 수고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동료 교수들이 이러한 그의 수고를 알고 치하할 것으로 생각한다. 좌우편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있으면 희망하는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 고려신학대학원이 진리 안에 서고 올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주께서 쓰시는 신학교로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개혁되는 것이 급선무이다.
[편집자 주: 이 글은 2003년 초에 쓴 것이다. 최덕성의 불로거(2007.04.15.)에서 옮겨 수록한다. 고신교단 출범기의 역사와 2000-2010 사이의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교단을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고신교단 정체성 폄훼와 이성구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 등 고신교단 안에 내재된 갈등 요인을 알려주는 교회사적 가치를 지닌 글이다. 글쓴이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The first battlefield is the re-writing of history!"-- Karl Marx. 이 글은 <최덕성 교수 고희기념논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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