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캐리가 사용하던 탁자, 세람포르대학
윌리엄 캐리, 현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인도에서 활동한 영국 침례교 선교사이다. 사회변혁가, 문화인류학자, 인도에서 최초로 학위를 수여하는 기독교 대학인 세람포르대학교의 설립자이다. 유럽의 아시아 식민주의 시대에 인도 서뱅골 지역에서 일생 헌신한 ‘현대선교의 아버지’이다.
캐리는 1793년에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으나 동인도회가가 추방시키자 덴마크 식민지역인 서뱅골로 옮겨갔고 거기서 약 40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다. 캐리의 좌우명은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이다.
캐리는 1761년 영국 노스햄프턴셔의 폴러스푸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직공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 스스로 학습했다. 정식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채 십대의 나이에 구두수선공이 되었다.
캐리의 어린 시절 여러 환경에서 우리는 그가 장래에 얻게 될 세계적인 명성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무색하게 한다. 그의 일생은 하나님께서 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믿음과 근면, 성실, 충성된 삶의 태도를 사용하셔서 엄청난 고난과 반대를 극복하고 어떻게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하시는기를 보여 주는 훌륭한 모범이다.
캐리는 17살 무렵, 어느 주일에서 설교를 들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들의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때부터 캐리의 가슴에는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으로 벅차올랐다. 그는 구두수선공으로 일하면서도 신약성경과 헬라어를 공부했다.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언제나 그를 자극했다.
캐리는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탐험보고서를 읽었다. 그것에 실린 다른 나라의 지도를 보았다. 읽고 보면서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어두운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전해주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꼈다.
캐리는 20세에 도로시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몄다. 여전히 가난했다. 종종 굶주리며 빚을 지기도 했다. 캐리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구두수선공 일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무엇을 가르쳤을까? 세계 지리를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세계지리를 가르치면서 세계에 대한 캐리의 비전은 더욱 확장되기 시작했다.지리 시간에 비기독교 국가들의 통계들을 제시하면서 간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캐리는 24살 때 드디어 고향에서 가까운 몰튼 지방의 작은 침례교회에서 전임 목회를 시작했다.가족 6명과 함께 작은 오두막에 살았디. 여전히 생활이 어려웠다. 목회 사례비로는 가정을 꾸려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작은 골방에 앉아서 구두를 수선하기 위해 가죽을 자르고 꿰매야 했다.
당시 영국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휘필드가 이끄는 영적 부흥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세계선교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캐리는 침례교 성직자 회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과 그것을 현대에 적용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어느 원로 목사는 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젊은이, 그만 열 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을 걸세.”
이 권면은 선교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곳에 모인 목회자들은 그의 주장을 현실성 없는 환상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캐리 안에 불붙은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성령의 불은 더욱 크게 타올랐다. 그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었다.
캐리는 몇 달 후 87쪽 분량의 해외선교를 위한 글을 썼다.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개종을 위한 수단을 사용해야 할 의무의 탐구"라는 긴 제목을 달았다.세계선교는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을 역설했다. 이 책은 훗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계선교 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엄 캐리의 죄우명, 세람포르대학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네 장막 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2,3)는 성경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여러 목사들에게 세계선교의 비전을 심었다. 그때부터 윌리엄 캐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에게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캐리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하여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것을 기대하고 시도하라면서 도전했다.
캐리가 목사로 장립을 받고서 이것을 7년 동안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척했다.
그러나 성실한 인내와 믿음으로 나아가는 윌리엄 캐리 앞에 드디어 위대한 기독교 선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메시지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이 선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했고 협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 영혼들을 향한 부상당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단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다. '미친놈!' 이라고 했다.
둘째는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문맹의 평범한 주부였고 평범한 삶을 살기 원했다. 당시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목회자의 충실한 아내였던 그녀는 결국 남편을 따라 인도로 향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다.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로 지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캐리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윌리엄 캐리는 마치 사도 바울처럼 벅찬 마음으로 인도를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격렬한 폭풍을 뚫고 5개월 만에 인도 땅에 도착했을 때, 캐리 눈에 비친 인도는 가난에 찌들었다. 카스트 제로를 말미암아 자멸해 가는 절망과 죽음의 나라였다.
인도인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그 부인이 함께 불에 타야했다. 갠지스 강가에선 ‘갠지스 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Gunga mai kai jai)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다.
캐리는 인도인들에 대한 동정을 느끼면서 선교사역에 뛰어들었다.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록 전도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재정은 바닥나고, 가족들이 모두 이질과 영양실조에 걸렸다. 캐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교 동역자 토마스와 그의 가족들은 도시에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캐리의 가족들은 캘커타 외곽의 말라리아가 만연하는 습지에서 살았다.
캐리 가족이 인도에 도착한지 1년 만에 5살 나이의 아들이 이질로 죽었다. 캐리의 아내는 마음의 상처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불안정했던 그녀의 정신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어느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완전히 정신착란상태에 빠져 극심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인도에 도착한 후 캐리는 그렇게 7년 동안 죽음과 싸우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7년 동안 단 한명의 개종자도 얻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충성되고 신실했던 윌리엄 캐리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 때가 1800년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캐리에게 추방령을 명했다. 그래서 캐리는 선교지를 덴마크 영역인 세람포르로 옮겼다. 이곳에서 캐리가 7년 동안 인도에서 흘린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다. 개종자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 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1803년까지 25명의 세례 받은 개종자가 생겨났다.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수천 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캐리는 선교를 위하여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인도인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의 주요 언어로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을 완역하였다.
한번은 캐리가 성경을 다 번역한 후 이를 출판하려고 영국에서 인쇄기를 도입하고 기술자들을 불러 조판을 완성했다. 그런데 출판 직전 캐리가 지방 순회전도를 나간 사이 불이 나서 인쇄기와 원고가 몽땅 불타버리고 말았다. 또 두 권의 문법책과 다국어 사전 등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캐리는 낙망하지 않고 잿더미 위에서 무릎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를 구했다.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 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다.
캐리는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미얀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다.
실패와 성공은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 있다. 믿는 자의 위대함은 실패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데 있다. 윌리엄 캐리는 수없이 실패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번역사업과 함께 캐리는 원주민이 운영하는 토착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이같은 그의 사역은 선교대상국가 국민들과 그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신념은 현대 선교사역의 기본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캐리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남녀공학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의료 진료소를 경영했다.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놀랍게 향상됐다. 캐리는 세람포르 대학을 세웠다. 이 학교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대학이다. 세람포르 대학은 오늘도 건재하다.
세람포르 대학에서 캐리의 지도하에 수십만 권의 성경과 복음서가 여러 언어와 방언으로 출판되었다. 그 과정애소 그는 수많은 문법서, 사전, 그리고 언어 학습서를 출판했다. 또한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함께 화형시키는 수티제도와 어린아이를 강물에 던지는 관습 등을 폐지시키는 데에 공헌했다.
이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세우고 진료소를 운영하며, 사회문제에 성심껏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농업 진흥에 선봉장으로 나선 캐리의 선교전략은 이후 세계선교 전략의 중심 가치가 되었다.
캐리의 부인 도로시는 12년 동안 정신병을 앓다가 마침내 18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캐리는 덴마크 여인 샤롯데 루모어와 재혼했다. 그녀는 건강하진 않았지만 캐리를 인정해 주는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샤롯데는 세람포르에서 13년간 행복한 가정생활을 보냈다.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1821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캐리의 자녀들을 캐리의 동역자로 세워주셨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역에 큰 협력자들이었다.
윌리엄 캐리가 처음 인도에 왔을 때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열정과 성실 외에는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는 시골뜨기 목회자였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노력 끝에 선교사가 되었다.
캐리는 40년 후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나라 인도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됐다. 교사, 언어학자, 사회개혁자, 선교사로 일하면서 인도의 소외당한 영혼들과 상한 심령을 치유했다. 인도인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영적인 갈급함으로 지쳐있는 인도인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고자 했던 그의 꿈은 죽음의 대륙에 소망을 주었다.
캐리의 업적은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런던선교회,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덜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위원회, 미국 침례교 선교협회, 미국 성서 공회 등이 창설되어 오늘날 세계 선교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캐리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지핀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다. 세계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인도의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는 유럽의 폭력적인 식민지주의 시대의 한 복판에서 현대선교의 문을 활짝 연 선교의 아버지였다.
오늘날, 인도에는 약 900명의 국적을 포기한 기독교 사역자들이 있다. 인도인의 2.5퍼센트에서 4퍼센트 정도, 즉 약 2천만 명에서 3천만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1986년 자료에 따르면, 인도 교회는 그 해에만 약 4,200명의 인도인들을 인도 전국에 전도자와 교회개척자로 파견했다. 그 이후로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인도는 민족과 문화가 상당히 복잡한 나라이다. 세계의 그 어느 지역도 이보다 더 다양하고 미전도 종족이 집중된 곳은 없다. 인도인은 세계 인구의 약 16퍼센트이다. 드디어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인도에는 4,635개의 다른 종족들이 있다. 인도인의 약 80 퍼센트가 힌두교도이고 12퍼센트는 무슬림, 약 2퍼센트는 시크교도이다.
윌리암 캐리는 1834년 73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시신은 인도 세람포르에 묻혔다.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수선공으로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도로 떠나 이후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서 죽음을 맞이했다. 인도사람들은 가장 위대한 성자라는 뜻의 "마하투마라"라는 칭호를 그에게 붙여주었다.
캐리는 평생 일기를 썼다. 어느 날 일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루 종일 뛰고 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벅저벅 집으로 걸어올 때면 좀 더 나은 내일이 있기를 기도했다. 우리는 지금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마음 속에 되새겨질 때마다 내 영혼과 몸은 다시 힘을 얻고 우린 절대로 실패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유업을 받을 자들이다. 자! 우리 함께 그날까지 인내함으로 견뎌보자.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최덕성, 브내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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