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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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마치고 광주여고보 교장 장응신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학교로 돌아가는 모습(출처 독립기념관)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과 친일파

 

 

아래의 글은 <한계례> 2022.10.23.에 게시된 것이다. 2023.01.23.에 수정되었다. 원 제목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인 한상동이며 역사 정의가 무너진 그곳에서 장로교 분열이 시작되었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장로교회의 최초의 분열을 신사참배에 대한 과거사 청산의 부재로 설명하는 글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동력 한상동 목사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글은 친일파 전통이 강세인 한국교회 마당에 흔하지 않은 역사시각으로 쓴 것이기에 연구 목적으로 스크랩한다. <한계례>와 글쓴이 하성환 님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인 한상동

 

역사 정의가 무너진 그곳에서 장로교 분열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한 사건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신격화하여 그 후손?일왕을 ’()으로 숭배하게 강요한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신사참배는 () 이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기독교 제1계명을 어기는 행위였다. 그러함에도 제국주의 일본은 집집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단(神壇)을 만들게 했다. 게다가 학교와 공원에도 신사(神社)를 지어 아침저녁으로 참배를 강요했다.

 

 

신앙인에게 신사참배 문제는 일반 조선인에겐 바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는 문제와 같았다.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제국주의 일본 천황의 충량한 신하된 국민임을 읊조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지는 못할망정 제정신을 가진 조선인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자기 부정행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선 절대 다수 조선인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읊조렸고 성직자와 신자들은 신사를 참배했다.

 

 

일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직자들 중엔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미소기하라이라는 침례 의식조차 행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귀의한다는 의식이었다. 참으로 신앙인이라면 못할 짓이었다. 그러나 다수 성직자들이 행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일본화를 위해 첨병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앞잡이가 따로 없었다.

 

 

주기철 목사 사택을 방문한 평양형무소 출옥성도들(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안경 쓴 인물이 한상동 목사(출처 :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에서 글쓴이가 찍은 것임) 책의 표기와 다르게 실제 출옥성도들이 주기철 목사 사택을 방문한 날짜는 1945819일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극히 일부 성직자와 신도들이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며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했고 저항했다. 그리고 반역죄, 바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고 극심한 고초를 겼었다.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조수옥 전도사가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평양형무소에만 51명이 투옥돼 있었다. 그러나 예심이 종결되었을 때 21명이 남았고 해방 이틀 뒤 실제로 출옥한 성도는 17명뿐이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극악한 고문과 형편없는 식사로 영양실조 상태에서 옥사했다. 해방을 맞지 못하고 1944년 옥사한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최상림 목사가 대표적이다.

 

 

평양형무소 출옥성도들은 해방 이틀 뒤 밤 11시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이기선 목사, 이인재 전도사, 조수옥 전도사 역시 해방 이틀 뒤 평양형무소에서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출옥했다. 출소한 형무소만 다를 뿐 <종신형>을 선고받은 손양원 목사도 마찬가지다. 손양원 목사는 여순항쟁(1948. 10) 당시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양아들로 맞아들였다. 상상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손양원 목사를 기리며 자녀 손동희 님이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책 표지(출처 : 하성환)

 

 

손양원 목사의 본명은 손연준이다. 자신이 세운 <애양원>을 너무 사랑해 이름을 손양원으로 고쳤다. 손양원 목사는 평양형무소 출옥성도들과 전혀 달리, 해방 이틀 뒤 아무도 환영하는 신도들 없이 홀로 청주형무소에서 나왔다.

 

 

손양원 목사가 출소했을 때 모습을 자녀가 충격 속에 남긴 글을 읽어보자.

 

 

어느 황혼 녘, 거지 중 상거지 형상을 하고 아버지가 고아원에 오신 것이다. 아버지 행색은 차마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수염은 자랄 대로 자라 턱 밑까지 길게 흘러내렸고 얼굴빛은 폐결핵 말기 환자처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으며 눈은 10리는 들어간 듯 퀭하니 뚫려 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몸뚱이는 흡사 송장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신발은 다 떨어진 슬리퍼였고 옷은 푸른 죄수복 그대로였다. 그러나 움푹 패여 쑥 들어간 두 눈에서는 형언키 어려운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 손동희(1999)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아가페출판사에서 인용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한 신앙인 손양원 목사(출처 : 하성환) 1950928일 여수를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막내 동길을 안고 남편 손양원 목사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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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해방 뒤 교회 권력을 장악한 다수의 친일 목회자들이 출옥 성도들을 환대하기보단 배제시켰다는 데 있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한상동 목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 출옥성도들이 만든 교회가 부산 삼일교회다. 최초의 장로교 분열도 신사참배 문제에서 불거졌다. 역사 청산이 전혀 없었던 이 땅에서 기독교 교단 역시 마찬가지다. 뒤집힌 채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다. 1952년 장로교 최초의 분열인 고신파(고려신학파)가 분열하는 문제는 순전히 신사참배 문제, 바로 식민지 역사 청산 문제였다.

 

 

기독교 장로교와 예수교 장로교 분열(1957)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예수교 장로교 안에서 다시 합동(박형룡, 승동교회, 총신대)이니 통합(한경직, 연동교회, 장신대)이니 하면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 것도 모두 그 후 1959년에 발생한 일이다.

 

 

특히 친일파 목사 노진현은 예장 총회장으로서 예장 분열을 막을 위치에 있었음에도 합동 측에 서서 분열을 조장한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1959924일 제44회 예장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열렸다. 그러나 경기노회 총대 선출 건과 관련해서 험악한 분위기 탓에 총회 첫날 개회도 못했다. 며칠 뒤 열린 총회에선 야유와 환호가 뒤섞인 채로 회의장 의자를 뒤엎고 난투극을 벌이며 심지어 총회에 참석한 총대 목사들을 구타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59년 예장 합동/통합의 분열은 표면상으론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과 관련하여 보수주의 신학 대 자유주의 신학 간 신학 노선 논쟁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실상은 정통 보수를 자처한 박형룡 목사가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당시 학교 부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이사회 승인도 거치지 않은 채 교비를 횡령한 사건과 관련이 깊었다.

 

 

다시 말해 박형룡 교장은 기독교 윤리의식을 저버린 채 정치모리배를 통해 권력에 줄을 댔다. 정치권에 줄을 대면서 신학교 공금 3,000만환을 접대비, 교제비, 교통비로 제공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 사실이 드러나고 장로회 신학교 교장직을 사퇴하는 과정에서 분열을 촉발시켰다.

 

 

같은 프린스턴 신학교 동문으로 신학 이론상 덜 보수적인 한경직 목사와 정통 보수를 자처한 박형룡 목사 간 이전에 존재했던 해묵은 갈등이 이 사건을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교회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기노회 총대 선출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 예장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교단으로 확연히 갈라지게 했다.

 

 

2018년 현재 예수교 장로회(예장) 이름을 내건 교단만 300개가 넘게 분열돼 있다고 한다. 모두 종교계 역사정의가 무너진 결과다.

 

 

민족의식이 있든 없든 제국주의 총칼 앞에 절대 다수 조선인들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로 머리를 조아렸다. 일제의 강압을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사참배 거부 내지 반대운동은 구더기 들끓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거나 투옥되었고 학생의 경우엔 퇴학이었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해 삼천포에서 추방당하고 투옥된 조수옥 전도사의 증언을 들어보자.

 

 

경찰서 유치장은 정말 고통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악취가 코를 찌르고 내장 깊은 곳까지 악취가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더러운 상태 그대로 놓아두게 해서 유치장 속에 한 번 쳐넣어지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용기도, 자존심도, 의욕도 잃고 생존 그 자체를 포기해 버리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격이나 신념, 그 어떤 정신 같은 것을 잃어버리기를 기대하며 그토록 더럽게 해놓았던 것같아요. 그리되면 저항하고 투쟁하겠다는 정신도 내던지고 말 것이에요. 낮도 어둡고 밤도 어둡고 마루 바닥에는 배설물이 그대로 있어 거기서 썩고 냄새나고 구더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와 마루 바닥 전체가 구더기로 덮여 있고 심지어는 사람 몸으로 기어서 올라옵니다. 털고 쓸어도 계속 기어오르니 구더기와 같이 그 오물통 속에서 사는 거지요.” - 조수옥 증언, 와타나베 노부오 목사 기록, 김산덕 목사 옮김(2002).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동인출판사에서 인용.

 

 

문제는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간 뒤, 바로 해방을 맞은 조선이 직면한 상황이었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해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에 동참한 목회자들로 하여금 참회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고 일정한 시일이 지난 뒤에 다시 교회에서 시무하도록 권면했다. 해방 당시 한상동 목사의 권고는 절대 다수 신앙인들이 지지한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해방 직후 출옥 성직자들은 신사참배에 앞장선 친일 목회자들을 향해 교회 사역을 중단하고 죄를 고백하도록 강력히 권고했다. 그러자 그들은 시무하던 교회에서 물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최소 1개월 동안 자숙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그들 친일 교역자들은 자신들이 결의한 사항조차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출옥 성직자들이 제안한 권면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해방정국이 급변하면서 스스로 표변된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신사참배 논란은 모든 속죄와 회개의 과정이 없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은 속죄와 회개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이렇게 궤변을 내뱉었다. “당신들은 신앙을 지켰지만 우리는 교회를 지키지 않았는가? 이것이 훨씬 더 힘들고 중요한 일이 아닌가?” 친일 청산을 거부했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발생한 기괴한 발언이었다.

 

 

문제는 그런 철면피한 발언을 한상동 목사 면전에서 거리낌없이 발설했다는 데 있다. 한상동 목사는 그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 이는 목사 한상동 자신만이 겪는 충격이 아니라 조선 전체가 겪었던 충격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반민족행위를 일삼았던 친일 목회자들은 조직적으로 반격을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분열, 바로 장로교 고신파의 등장은 그렇게 시작됐다.

 

 

마치 해방 직후 친일 경찰들이 보인 행태와 똑같았다. 그들은 해방되자 스스로 경찰서에 출근하질 않았다. 경찰서 출근율이 20%에도 미치질 못했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점령군 미군이 진주하자 친일 경찰들은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설쳐댔다. 신사 참배한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다>고 강변하며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했다. 신앙인 한상동은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9개월 가까이 사역하다 월남하였다. 신앙인 한상동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른 주남선 목사, 손양원 목사와 함께 19465월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해 7월 부산 초량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러나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신앙인 한상동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역사에 지나지 않다일본화된 기독교를 강변했던 목회자가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되는 참담한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앙인 한상동은 그 자리에서 신사참배가 죄입니까? 아닙니까?”라고 절규하며 분노했다. 그러나 절대다수 목회자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했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회자들은 불과 두세 명에 지나지 않았다. 뒤집힌 정국을 배경으로 교회 역시 뒤집혔다. 한국교회는 과거 저지른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속죄하며 참회할 내면의 시간을 갖질 못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잘 보이기 위해서 앞장서 신사참배운동을 주도했던 일단의 무리들이 교회 권력을 다시 쥐락펴락했다.

 

 

기회주의가 교단 내에 극성을 부렸고 정치권력에 연줄을 맺으려는 교회 권력자들이 교계를 주물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타락하며 분열돼 갔다. 그들 교회 권력자들은 성직자라기보단 정치적 모사에 능한 인물들이었다. 이어서 경남노회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서 어느 목사는 자신의 신사참배 죄를 회개하는 신앙 간증을 했다.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추운 겨울날 알몸으로 바닷물 속에 머리까지 잠기도록 전신을 담갔다고 고백했다. 무려 일곱 번이나 온몸을 바닷물에 담가야 신사를 주관하는 제관이 될 수 있다하여 부끄러움도 없이 그 짓을 했다고 참회했다. 그러자 순간 노회에 참석한 목회자들이 숙연해졌고 노회를 참관하러 온 수많은 신도들은 울면서 참회하다가 돌연 장내가 울음바다로 돌변했다.

 

 

그 순간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운동을 가장 앞장서 외치며 미소기하라이동원 책임을 맡았던 경상남도 연성국장을 지낸 친일 목사가 미소기하라이가 도대체 무엇인고?”라며 나는 도대체 들어보지도 못한 말일세!”라고 떠들었다. 반민족행위를 맨 앞에서 저질렀던 거물급 친일 목사의 입에서 나온 참으로 가증스러운 언변이었다. 그렇게 장로교 경남노회는 망가져 갔다.

 

 

결국 노회의 분열은 초량교회에도 분란의 여파를 미쳤다. 신앙인 한상동은 교회공동체 내에서 다투는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절대다수 신도들이 신앙인 한상동을 지지했음에도 신앙인 한상동은 초량교회를 장로교 경남노회에 내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근처 삼일교회를 설립해 시무했다. 물론 수많은 초량교회 신도들이 신앙인 한상동 목사를 따라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날 첫 예배를 드리며 신앙인 한상동은 은퇴할 때까지 삼일교회에서 22년을 시무했고 197616일 소천했다.

 

 

부산역 앞을 나와 왼쪽으로 차이나타운 윗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바구길 입구가 나온다. 그곳에 올해로 130년 역사를 자랑하는 초량교회가 있다. 마찬가지로 부산역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큰길가에 정발 장군 동상이 있다. 정발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 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이다. 그 정발 장군 동상 뒤편에 위치한 교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한 한상동 목사가 세운 삼일교회다.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신앙인 한상동! 종교계 내 아름다운 영성이 사라지고 오히려 물질이 교회공동체를 잠식해가는 오늘의 상황에서 참된 목회자를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 더구나 신앙을 위해, 영적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목회자가 드문 현실은 교회 권력을 더 높게 쌓아 올려 넘을 수 없는 성벽을 마주하는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성벽을 높게 쌓아 올리고 교회 권력을 강화해 가는 모습을 연출하는 우리 사회 교회 현실은 우울한 풍경이다. 심지어 목회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종교 권력을 높게 쌓고 신격화하는 양상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교회 권력을 높게 쌓아 올릴수록 그곳에선 참된 신앙인도, 참된 목회자도, 그리고 참된 교회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출처 : 한겨레: (http://www.han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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