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아타나시우스 1: 진주와 조개껍질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c. 298-373)가 이단에 맞서지 않았으면 예수신앙공동체는 진주를 버리고 조개껍질만을 가진 생명 없는 종교집단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가 진리를 파수하는 용기, 결기, 투지를 발휘하지 않았거나 진리가 평화공존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역사적 기독교는 이 땅에서 사라졌거나 하나님의 구원과 무관한 껍떼기뿐인 종교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 동시에 성부·성자·성령 각각의 위격(person)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 최초의 에큐메니칼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325)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규명했다. 성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 시작이 없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계급적이 아니며, 종속적이지도 않다. 위격이 구분되지만 대등하며 본질상 동일하다. 공의회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 곧 성부와 성자가 종속적 관계이며, 서로 다른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이라고 단정하고 정죄했다.
공의회가 끝난 뒤 아리우스주의 추종자들은 세속권력을 등에 업고 정통신앙을 공격했다. 정통과 이단 논쟁의 판도는 로마제국 황제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달라졌다.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 황제와 감독, 성과 속, 이단과 정통이 뒤엉켜 치열하게 싸웠다. 교회의 갈등 양상은 장로교회 신자와 여호와증인회 신자가 같은 교회 안에서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아타나시우스는 4세기 교회사 무대에 등장한 거성(巨星)이다. 아리우스주의의 확산을 막고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이라는 신앙공식과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라는 교리를 교회가 신봉하도록 힘썼다. 고난과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진리투쟁에 투신했다. 백절불굴의 의지로 이단과 이단을 지지하는 정치권력에 맞섰다. 정통신앙이 승리의 월계관을 쓰도록 했다.
아리우스파는 세속정치의 힘을 확보하고서 아타나시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했고, 붙잡아 처형하려고 했다. ‘이단자’ 아타나시우스는 대감독 직을 맡은 46년 동안, 다섯 번 감독직에서 쫓겨났다. 거의 20년 동안 파면, 도피, 망명, 은거, 유배를 당했다. 존경과 박해, 영광과 굴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거세게 몰아치는 이단의 풍랑을 이겨냈다. 빛나는 지성과 인내력을 발휘했다. 잦은 단식과 모진 고생으로 허리가 휘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과 이집트 사막 수도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정통신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었다
1.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동남 편 나일 강 입구에 있는 도시이다. 주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다. 그곳에는 상업과 교역이 흥왕하고 학문과 예술이 꽃피고 동서가 교차하고 융합했다.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서른아홉 나이의 농염한 미모로 적장을 유혹해 왕국의 안녕을 꾀하다가 실패한, 세기적 사랑과 비극의 무대였다.1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둘러싸고서 치열하게 맞선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목회를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타나시우스는 그 도시의 대감독 알렉산더(재임 312-328)의 집사―부제로 일했다. 통역사 겸 연설문 작성 담당 비서였다.2 아울러 교회의 살림을 총괄하고, 성경봉독, 봉헌예물 수전, 기도문 낭독, 성찬을 전달했다. 감독의 허락을 받아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대감독 알렉산더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이며,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존재했다고 가르쳤다. 로고스 곧 성자는 존재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성육하기 전에도 성부와 함께 영원히 계셨고, 창조되지 않았고, 피조세계와 구별된 존재라고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휘하에서 일하는 바우칼리스의 감독 아리우스는 알렉산더의 정통신앙을 공격했다. 성자는 만물의 첫 피조물로 태어났으며, 시작이 있었다고 했다. 성자는 그 시작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만물의 으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다르다고 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계급적으로, 종속적으로 이해했다.3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알렉산더가 기독교의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비판했다.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이면 결국은 두 신들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선제공격을 했다.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에게 반격했다. 로고스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시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피조물을 예배해 왔다는 말인가. 예수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일을 당장 중단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이집트와 리비아 지역의 감독들과 사제 100여 명을 소집하여 지역 교회회의―총회(Synod, 320)를 열고서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파문했다. 위험한 이단 사상을 초기에 뿌리 뽑으려고 했다. 니케아공의회가 열리기 다섯 해 전이었다. 알렉산더의 비서 아타나시우스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공의회의 결정에 굴복하지 않았다. 황궁 도시 니코메디아에서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감독들을 규합했다.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를 자기 교구의 감독으로 받아들이고, 아리우스를 대신하여 아리우스주의를 선전, 확산시켰다.
아리우스는 대중을 감동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성부와 성자의 차별성, 상이본질을 강조하는 시와 노래를 술집, 거리, 시장, 목수, 상인, 여행자들에게 파급했다. 대중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 자체를 아버지의 우월성을 담고 있는 말로 이해하는 점을 이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리우스에게 갈채를 보냈다. 아리우스는 조직력과 ‘오빠부대’를 동원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여인네들의 아우성”4을 연출했다.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은 교회들에 서신을 보내어 알렉산더의 기독론이 오류라고 알렸다. 신학충돌로 말미암아 교회와 제국에 분열 조짐이 드러났다.
니코메니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얻어 로마제국의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부임(339)했다. 그는 새 황제로 등극한 콘스탄티누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통파 감독들을 축출했다. 지역 총회를 열어 아리우스를 정통신앙으로 인정하고 니케아 정통신앙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아리우스를 감독직에 복귀시키라고 이집트교회에 통보했다.
가이사라의 감독 유세비우스는 논쟁 초기에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교회사가인 그는 니케아공의회에 참석하여 정통파를 지지했다. 나중에는 중도파를 이끌었고, 아리우스주의에 편들어주었다. 그가 주도한 가이사라교회회의-총회는 아리우스를 지지했다. 유세비우스의 변덕은 당시의 대부분의 감독들이 신학충돌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학논쟁은 로마제국 전역에 번졌다. 감독과 감독이 대결하고, 교구와 교구가 맞섰다. 갈등은 동방지역에서 더 심했다. 빵가게 주인에게 “빵이 맛있느냐?” 하고 물으면 “아버지는 아들보다 위대하다”고 답했다.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아들은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상점 주인에게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면 대뜸 “아들이 태어난 존재인지 창조된 존재인지를 토론하자”5고 덤볐다. 카파도키아 신학자 니사의 그레고리가 들려주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동방 기독교인들 다수가 아리우스주의를 지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리우스주의는 동방교회를 장악하고 로마제국을 신학논쟁 전쟁터로 삼았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모든 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 324년에는 로마제국을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었다. 아리우스주의 신학논쟁을 쓸모없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점차 이 사안 때문에 제국의 일치가 깨뜨려질 조짐이 드러나자 직접 논쟁에 개입했다. 제국 안의 모든 감독들에게 정중하게 서한을 보내어 니케아에 모이라고 했다. 최초의 보편공의회―니케아공의회(325)는 황제의 여름 별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두 달 동안 진행되었다.6
2. 니케아공의회
약 200명의 감독들이 니케아에 운집했다. 오순절을 방불케 했다. 참석자 가운데는 그리스어권 동방교회 감독들이 많았다. 서방교회에서는 7명이 참석했다.7 참석자 가운데는 박해시대에 받은 상흔들을 훈장처럼 지닌 자들도 있었다. 한 눈이 뽑히고, 두 손이 잘린 자들도 있었다. 감독들은 대부분 사제나 부제―집사와 동반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알렉산더는 부제 아타나시우스와 함께 참석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를 받지 않은 신분이었지만 임석하여 공의회를 주재했다. 황제는 정중히 “하나님의 교회 안에 내분이 생기는 것은 전쟁보다 더 나쁘고 위험스럽다”8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회의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주장, 반박, 비난, 힐난이 쏟아졌다. 감독들은 정통파, 아리우스파, 중도파로 나누어졌다. 정통파의 대표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였다. 중도파의 수장은 가이사라의 감독 유세비우스였다. 아리우스파의 대표자는 니코메니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였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논쟁의 쟁점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승리하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니코메니아의 감독 유세비우스가 아리우스주의의 주장을 분명하고 극단적인 형식으로 해석하여 공의회에서 낭독했다. 자기의 신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면 참석자들이 모두 동의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측과 달랐다. 로고스―성자가 결국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자 감독들은 격분했다. ‘신성모독,’ ‘이단,’ ‘거짓말쟁이’라고 외치면서 유세비우스를 단상에서 끌어내렸다.
아타나시우스의 당시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공의회 석상의 난상토론과 불붙는 논리게임을 지켜보고, 오고가는 발언을 경청했다. 신학논쟁의 핵심을 간파하고, 주장들의 오류를 판별했다. ‘동일본질’과 ‘상이본질’의 개념을 이해했다. 장차 정통신앙을 수호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9
니케아공의회는 신학논쟁을 마무리하고 신경을 작성하여 참석한 감독들의 서명을 받았다. 정통신앙의 상징이 된 니케아신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일본질’(homoousios―consubstance)이라는 문구였다. “성자는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성부와 본질에서 동일하다”고 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셨지만(proceeded) 창조된 존재, 지음을 받은 존재 곧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고 확증했다. ‘동일본질’이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황제가 이 단어 사용을 제안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武人)이 삼위일체 신론 논쟁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을 것 같지 않다. 황제의 신학 고문이 그렇게 하라고 제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황제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제국의 통일과 교회의 통일을 획득했다.
성부와 성자의 대등관계를 설명하는 ‘동일본질’은 성부 성자의 구별성을 다소 모호하게 만들고, 사벨리우스주의―양태론(樣態論)에 다가가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나중에 정통파 신학자들은 이 단어가 유사본질(homoiusios―similar substance)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논의를 일단락 지었다.
황제는 니케아신경에 서명하지 않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추방했다. 아리우스주의자 유세비우스는 얼마 뒤에 니케아신경을 받아들인다는 각서를 제출하고 사면, 복권되었다. 아리우스와 함께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 두 명의 감독은 제국의 변방으로 추방되었다.
아리우스주의 이단정죄와 후속 조처는 종교 문제를 국가가 처벌한 최초의 사례다. 교회에 대한 범죄가 국가에 대한 범죄로 간주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니케아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했다. 이것도 정치와 종교의 결탁, 국가와 교회의 결합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예수신앙공동체는 박해를 벗어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지 10년 쯤 지났을 무렵, 점차 황제의 종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국가와 교회 관계의 첫 단추가 잘못 끼인 것이다.
알렉산더는 임종(328)하면서,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후보자로 천거했다. 아리우스파의 방해를 의식한 감독들은 서둘러 그를 후임 대감독으로 선출했다. 감독 조건 최소 나이인 서른 살에 대감독으로 취임했다. 알렉산드리아 대감독좌는 전체 교회의 다섯 대감독좌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젊은 아타나시우스가 그 직책을 맡기에 버거웠다.10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은 나일 강 상·하류의 이집트 전역과 리비아 등지의 교회들을 관장했다. 교구 안에는 이집트 사막과 나일 강 인근에서 강렬한 영적 체험과 신앙의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사들이 많았다. 박해시대에도 수도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뒤 순교적 열정과 영성을 사막의 고독, 고행, 절제에 쏟아 붓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도사들은 정통신앙 수호에 불타는 젊은 대감독 아타나시우스를 적극 지지했다. (계속)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3장 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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