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를 다녀와서
1박 2일의 학회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육신적 피곤함과 함께 정신적 자괴감이 몰려온다. 나 자신의 초라함을 경험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이 모인 학회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학벌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누가 누가 잘 하나, 자랑하는 시간 같아서 늘 소외감이 들었다.
나는 저곳에 왜 간 거지? 어떻게 해서 저분들은 저토록 공부를 많이 했으며, 저 많은 사람들이 금(金)수저로 가득 차 있을까? 놀라운 것은 왜 저토록 놀라운 금수저들이 가난을 말하고, 고난을 말하며, 사회의 문제들을 짚어내는 것일까? 왜 저들의 많은 고민들 중에는 나 같은 사람의 실질적 문제들가 없으며 다루지 않는 것일까?
예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자라고 주장한 안병무 선생께서는 서울대 출신이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 하면, 고급 승용차를 타셨다고 들었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르즈는 국립의과대학 출신이며, 좋은 학교들을 몇 군데씩이나 다녔던 것 같다. 농노를 말하며, 혁명이라든가, 민중이라고 하는 주제의 문학의 세계로 알려진 레오 톨스토이는 어마어마한 저택에서 살았던 러시아의 귀족이었다. 타자를 위한 신학을 주장한 디트리히 본훼퍼는 대학 교수의 아들이었다. 가진 재산을 팔아 의미 있는 곳에 써버린 비트겐슈타인은 재벌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간 알버트 쉬바이처는 박사학위만 무려 4개를 가졌다고 한다. 아마 성 프랜시스코도 원래는 부잣집 아들이었지?
어제 학회의 주 강연에서 헬조선을 말하며, 금수저니, 흙수저니, 똥수저이니 말했던 그 학회의 주(主) 강사도 서울대 출신이다.
민중신학은 부유하고 많이 배운 분, 그 시대에 이미 독일 유학까지 갔다온 분의 신학일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미국 유학까지 했던 분의 신학이었다. 가난한 민중은 있어도 가난하고 못 배운 민중신학자는 없는 것일까?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배움의 기회들을 갖지 못한 자, 교회에서 쫓겨나는 자, 신학교에 등록금을 내느라 혼줄 나는 자, 아무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오로지 지도교수 한분을 바라보며 졸졸 따라다니며 그래도 시간강사라도 하나 얻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대학원 학생들 등등 일 듯하다.
어느 목사님은 여기저기로 임지를 옮겨 다니다가 은퇴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사님의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사모의 죽음은 과연 자연사(死)일까? 내 생각에는 산업재해 같다. 그러나 의학적 판단은 산업재해로 판명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 목사님은 민중신학자도 아니고, 유명하신 분은 더 더욱 아니며, 서울대를 다닌 것도 아닐 것이다. 그냥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시다가 은퇴하셨다.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도 고함도 못치고, 신음 소리도 내기 힘든 분들을 학회에 모셔서 그분들의 실질적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까? 학회는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 헬조선 시대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주제로 모였는데, 그 주(主) 강사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신 분이다. 한국 사람들 기죽이고 싶어 오셨을까?
이런 식이면 시골목회지나 작은 교회의 목회직을 서울대 출신들이나 해외 유학파들이 장악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야 그 충분한 의의(意義)를 실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주에 학회가 두 곳에서 있었고, 두 곳 모두 다녀왔다. 한 곳에서는 한나절동안 진행했는데, 학회의 발제자 네 명 중, 세 명이 서울대 출신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는데, 참으로 놀랍다. 그 학회는 보수적인 학회였다. 그리고 다른 학회, 즉 한국기독교학회는 진보적인 모양이던데, 세 명의 주 강사 가운데 두 분은 미국에서 교수를 하는 분들이다.
이러지 말고, 목사 하다가 트럭 운전하는 목사 모셔서, 현장은 어떤지 직접 들으면 안 될까?
목사(牧師)가 무엇일까? 내가 아버지한테 듣기로 목사는 빌어먹는 사람이다.
신명기 24장 19-21절을 따르면 다음과 같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다시 말하면, 부스러기를 다 거두어 가지 말고, 없는 자들을 위하여 남겨 두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불쌍한 자들이 굶어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시대의 재산 없는 계층 중, 한 족속은 레위인들이었다. 제사장 지파에게는 별 다른 분깃 없이 십일조를 받아 생활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지파로부터 빌어먹어야 했다.
엘리야가 방황하여 배고플 때에 그를 먹여 살린 생물은 까마귀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신 것이다. 까마귀로도 먹여 살리는데 하물며 사람으로 못하실까? 어릴 때의 일이라 다 기억은 못하지만, 아버지의 고백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예배당 건물은 8평이고, 지붕은 함석(양철)이었다. 비가 새며, 교회당의 기둥은 비에 젖어 썩어 있었다. 황토로 된 벽은 비를 맞아 흙이 떨어져 속이 보였다. 지붕 위에는 동네 아이들이 던진 크고 작은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교회의 마당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분탕 치며 살았다. 화장실이 있기는 했는데, 용변을 보기 힘든 곳이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교회당보다 화장실 건축이 더 급했다. 교인들은 온전하게 다 믿으며 교회를 출석하는 가정은 한 집도 없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 병들어 주저앉은 사람들, 흩어진 교인들 등 주인 없는 집 같았다. 그 당시에는 학원에 가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들에 나가고 아이들은 학교 다녀오면, 교회의 마당으로 와서 분탕 친다. 아버지는 동네의 아이들을 위한 목회를 구상했다.(중략)
어머니는 아무리 돈이 없어 어려워도 외상으로는 쌀이나 생필품을 가져오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굶게 될 상황이면 굶고, “하나님께서 안 주시는 것 어찌합니까?”라는 믿음으로 나갔다.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간을 쌀 한 톨, 국수 한단이 없어, 무/배추만 먹고 지냈다. 둘째 아들 은배(어릴 때 하늘나라로 간 내 동생)는 배탈이 났다. “아버지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는데 배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배 아픈 것이 아버지 때문이란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느 분이 국수공장에 다니는데, 그 불신자 아저씨가 국수 한 궤짝을 가져왔다. 너무 고마웠다. 어느 날 우리 집에 국수를 갖다 준 분은 교회 다니지 않는 분이셨다.
자랑하고 싶어 하는 고백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경험들을 가진 분들이 있을 듯하다. 눈물 젖은 밥을 먹으며, 피 눈물을 흘리며 교회에 애정(愛情)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학회는 이와 같은 분들의 의견들을 듣지 않는가? 서울대 졸업생이 아니기 때문인가? 해외 유학 필증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비트겐슈타인처럼 철강재벌의 아들이 아니어서 인가?
영국 유학이나 옥스퍼드로의 유학 경험이 없어서인가? 독일에서 귄터 보른캄에게 배운 학자가 아니어서 부르지 않는 것인가? 국립 의대를 다닌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대학교 교수의 아들이 아니어서 인가? 타자를 위한 신학을 수준 높게 설명한 신학자가 아니어서 인가? 서울대나 이화여대를 다닌 학자가 아니어서 부르지 않는 것인가? 왜 부르지 않는 것인가?
공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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