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충돌의 배경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2012년, 2014년 그리고 2022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번에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하마스와의 충돌은 미래에도 필연적이다.
이 분쟁의 직접적인 배경을 이해하려면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400년간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했던 오스만 터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면서 영국이 이 지역을 신탁 통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 승리를 위한 지지와 지원이 필요했던 영국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각각 팔레스타인에서의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이중 약속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이 공을 국제사회에 떠넘겼다. 이 문제를 두고 1947년 11월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여 두 국가를 세우도록 결정했다.
유대인들은 이 결정을 수용하고 그 결정에 근거하여 1948년 5월 14일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주어진 땅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대신 당시 60만 유대인들을 다 지중해로 내몰고 그 전체 땅에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이 시작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요르단의 통치로 넘어갔다. 1956년에는 수에즈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중동전쟁이 있었고, 1967년에는 6일 전쟁으로 알려지는 제3차 중동전쟁이 있었다.
이스라엘 공격을 준비하던 이집트와 요르단과 시리아를 선제 타격한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승리했다. 동 예루살렘을 회복 점령하고 오늘날 우리가 언론에서 접하는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1973년에는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은 초반에 많은 군인들을 잃었다.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은 아주 힘들었던 이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그 후 1982년에는 레바논 전쟁이 있었다.
1987년에 이르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웨스트뱅크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의 군 통치 20년 만에 인티파다(봉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봉기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측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즈음에 동유럽에서는 큰 변혁이 일어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구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중동에서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면서 걸프 전쟁이 발발했다. 석유 패권을 두고 중동지역에서 소련과 대치해오던 미국은 이 기회를 타서 중동에 대한 헤게모니는 항구화하려고 했다.
한 가지 걸림돌은 지속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었다. 미국은 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떠밀었다. 1991년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회담은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팔레스타인 국가가 1998년까지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건설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일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측은 1947년 국제사회가 제시했던 본래 팔레스타인 영토를 다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몇 차례의 중동전쟁을 겪으며 이스라엘 멸망을 시도했던 아랍 세계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자국의 생존과 안보가 보장되는 선에서 영토를 양보할 수 있다고 맞섰다.
이미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 안에 들어가 있었던 유대 정착촌의 문제도 풀어야 할 난제였다. 그 와중에 이 평화협정을 추진했던 이스라엘 수상이 이 변화를 거부했던 자국민에게 의해 암살당했다.
미국은 실패로 돌아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 협상을 회생시키기 위해 크게 노력했다. 2000년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 수상과 팔레스타인 수반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하여 양측이 협상을 마무리하고 최종 협정에 서명하도록 압박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의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들 것임을 직감했던 에후드 바락 수상은 최대한의 양보를 제안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안에 대하여 양측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아라파트가 회담장을 떠나면서 후대에 예루살렘을 포기한 팔레스타인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지 않다고 말함으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협상의 마지막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이 협상의 실패로 이스라엘에서는 강성 우파 정권이 들어섰고 좌절한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두 번째의 인티파다를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자폭테러를 포함한 수백 회의 테러 공격이 발생했다. 1,000여 명의 이스라엘 시민들과 3,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했다. 부상자의 수는 수천 명, 수만 명에 이르렀다.
아리엘 샤론 정부는 테러를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영토로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웨스트뱅크를 분리하는 보안 장벽을 건설했다. 2005년에는 가자 지구 안에 있던 유대 정착촌을 철수시키고 가자 지구를 봉쇄했다.
봉쇄된 가자 지구에서는 2006년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하마스가 정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하마스는 본격적으로 바깥 이스라엘 영토를 향하여 박격포탄과 사제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아이언 돔이라는 방공 시스템을 개발, 실전 배치하면서 이에 대응해 왔다.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이후 75년만에 일어났다.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 점령을 한 지는 56년째이다. 어떻게 보면 지난 과거의 시간 전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충돌과 갈등의 세월이었다.
2023년의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공격과 이스라엘의 응징은 지난 75년 사이에 벌어진 무력 충돌 가운데 가장 극심한 사태로 보인다.
이 글은 이스라엘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어느 한국인 선교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메모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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