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 초대 총장의 역전 드라마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불행은 행복의 통로일 수 있다
숙명여자대학교는 1906년에 출범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족여성사학이다. 이 학교는 조선 임금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가 1906년에 세운 명신여학교를 모체로 출범했다. 1909년에 숙명고등여학교로 개칭했다가 1911년에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바꾸었다.
재단법인 숙명학원은 1912년에 설립되어 1912년에 경선궁과 영친왕이 하사한 토지의 수익금으로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운영했다. 1938년에 현재의 대학 부지에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55년에 종합대학 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했다. 2006년 창학 1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숙명고등여학교의 초대 교장 직은 이정숙이 맡았고, 1935년에 일본인 오다 쇼고가 후임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 학교는 1944년 일제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될 무렵, 교명을 여자청년연성지도양성소로 바꾸었다. 소수의 제외한 조선인 교사를 모두 해임시켰다.신사참배에 솔선수범했을 것은 불은 보듯 뻔하다.
해방 후 이 학원은 1945년 11월 숙명여자전문학교로 다시 개교했다.1948년 5월 미군 군정청으로부터 대학 승격을 인가 받았다. 한국 전쟁 동안 부산 동대신동에 가교사를 짓고 수업을 계속하다가 1953년에 서울로 복귀했다. 1955년에 현재의 종합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숙명학원은 초대 총장으로 임숙재(任淑宰, 1989-1961)를 임명했다. <중앙일보>(2023.09.10)는 다음과 같은 “숙명여대 초대총장 임숙재 이야기”를 실었다.
충남 예산에 꽃다운 처녀가 있었다. 이 꽃다운 처녀가 17살에 연지곤지 찍고 시집을 갔는데 갑자기 신랑이 죽어 채 피지도 못한 19살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볼 때마다 “불쌍해서 어쩌노~ 나이가 아깝네” 하면서 위로해 주었다. 19살 과부는 죽은 서방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서러워 많이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젊은 과부는 마음을 고쳐먹고 거울 앞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젊은 과부가 마을 어른들로부터 듣는 동정의 말들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헤쳐나 갈 방도를 곰곰이 생각한 결단이었다.
서방도 없고 자식도 없는 시댁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친정으로 돌아간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낯설고 물 설은 서울 생활이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남의 집 빨래도 하며 차츰 차츰 서울 물정에 눈을 떴을 무렵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어느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그 집에서 밤낮으로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그러자 마음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 인정을 받았다. 어느 날 주인 어르신께서 나이도 젊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두 가지를 말씀 드렸다. 하나는 “야간 학교에라도 가서 늦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갈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 어르신은 정말 기특한 생각을 했다며 젊은 과부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주인어른의 후광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에 틈틈이 배운 신학문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주일날에는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갈 수 있었다.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녀는 주인어른의 큰 은혜에 감읍하여 낮에는 집에서 가정부일을 두 배로 더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장학생이 되었고, 학교로 부터 실력과 성품을 인정받았다. 22세 되던 해(1913년)에 나이들어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였다.임숙재가 26살 때인 1917년에 모교는 그를 일본에 유학을 보내 주었다.실력과 성품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유학생이 된 젊은 과부는 너무도 기뻤고 감사했다, 주인어른께도 감사했고 학교에도 감사했다.하나님께도 감사했다. 26살 젊은 과부는 감사가 차고 넘쳤다고 술회했다.
그녀는 도쿄여자사범대에 입학하여 밤낮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영광스런 졸업장을 들고 귀국했다. 그때 젊은 과부 나이는 30세였다.
부관 연락선을 타고 부산 포구에 내린 젊은 과부는 옛날의 여인이 아니었다. 예산 땅 젊은 과부가 영화배우 윤심덕처럼 멋쟁이가 되어 돌아 온 것이다.
윤덕심은 일제강점기의 성악가, 가수, 배우로 활약한 여인이다. 도쿄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순회공연을 하면서 성악가로 명성을 떨쳤고, 배우로 활약했다. 일본에 레코드를 취입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연락선에서 애안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에 투신 정사(情死)했다.
과부 임숙재는 모교 숙명고등여자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녀는 더 열심히 공부하며 후배들을 가르쳤다.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교수로 임용된지 6년 만에 그녀는 교장이 되었다. 전공은 의상 재봉이었다. 한복과 양장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해방과 함께 숙명여자전문학교는 전문대학교로 승격되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숙명여자대학교로 바뀌었다. 19살 젊은 과부로 숙명과 인연을 맺은 임숙재는 초대 총장으로 부임했다.
임숙재는 제자들에게 “성공하기를 원하나요? 그럼 자신의 환경을 다스리세요!”라고 가르쳤다. 이상이 중앙일보의 보도 내용이다.
19세 시골 출신 과부가 식모살이에서 대학총장으로 승승장구한 임숙재의 사연이야 말로 위기는 기회일 수 있고, 불행이 행운의 통로일 수 있음을 알려 준다. “고난을 잘 이겨내야 무슨 일이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산 증인이다.
숙명여대 초대 총장 임숙재 이야기는 환경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희망을 가져야 할 까닭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위기란 것은 도리어 기회일 수 있고, 불행은 성공의 통로일 수 있다. 만약 임숙재가 시골 주부로 평탄하게 살았거나, 19살에 청상과부가 되지 않았거나, 주어진 불행에 순응하면서 살았다면 그저 평범한 시골 아줌마로 일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과 다윗 등 많은 인물들이 임숙재가 경험한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임숙재 (1891-1961, 향년 71세)
● 충남 예산 출신
● 1913 숙명고등여학교 졸업
● 1917 일본 유학
● 1921 일본에서 귀국 후 숙명여고, 대구 경북고등학교 교사 근무
● 1939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
● 1945 숙명여전 교장
● 1955 숙명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 1958 숙명여자대학교 명예총장
최덕성, 리포르만다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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