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
김현승(金顯承)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음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발표지: [문예](1953. 6)
▶발표자: 김현승은 기독교 신자이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강인한 의지와 민족적 낭만주의 경향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타협을 거부하여 붓을 꺾고 10년의 세월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는 종래의 생경한 수사(修辭) 취미가 사라진 대신, 완숙한 경지의 서정성과 사물의 본질을 깊이 보려는 경향으로 쓴 김현승 문학의 제2기의 작품이다. 플라타너스라는 가로수를 '너'라는 단수 개념으로 의인화시켜 인생의 반려(伴侶)로 삼아 생에 대한 고독과 우수, 그리고 꿈을 간직한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간결한 시어의 구사로 시상을 압축, 리듬감 있는 운율로 시적 감각을 최대로 살리고 있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의인화하여 꿈과 덕성을 지닌 존재로 예찬하고, 그러한 자세로 삶의 길을 함께 가고자 하는 뜻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정서를 표출해 온 우리 시가의 전통을 계승했다. 플라타너스를 단순한 식물로서 바라보지 않고, 인간과 같은 생의 반려로 형상화하였다.
▶주제 : 고독한 영혼의 반려를 염원함, 생의 반려(伴侶)로서의 플라타너스
▶해설
김현승의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고독한 삶의 행로를 함께 걸어갈 동반자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머 리 위에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자기 삶의 동반자로 격상시키고 있다. 그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하찮은 사물이 아니라 시적 자아와 꿈을 나누면서 고독한 삶의 행로를 함께 걸어 왔고 앞으로도 길이 함께 하고 싶은 이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등장하는'플라타너스'는 자신과 함께 살아갈 삶의 반려자가 갖추어야 할 어떤 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시적 자아의 진술을 가감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이다. 요란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내가 걸어가는 삶의 길을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지켜 보아주는 동반자를 가진다는 것이 더 없는 삶의 기쁨이라는 절에서 동의한다면,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친 채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야말로 가장 적합한 삶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걸어온 길 옆의 대지에 깊이 뿌리박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넉넉한 자태에서 그와 같은 동반자의 모습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김현승의 시는 대체로 딱딱한 한자어나 단단한 물체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은 생경(生硬)한 수사(修辭) 취미가 있고, 그것은 논리적인 지적 스타일을 띠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서정적이며, 사물의 본질을 깊이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이시는 플라타너스라는 가로수를 시인의 반려로 하여 생에 대한 고독과 우수(憂愁), 꿈을 가진 자의 영원을 노래하고 있다.
흔히 인생을 고독한 나그네라 하고, 생의 본질을 비극적으로 보기가 일쑤다. 이 시에서도 시인의 인생관은 고독한 여정(旅程)으로 뒷받침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한 그루 플라타너스에서 유정有情)한 시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인데, 이것이 이 시의 탁월한 점이라 하겠다.
인간에게는 반려가 필요하다. 현실적인 반려가 없으면 정신적인 반려라도 필요하다. 그것이 애인이건, 친구이건, 동지이건, 또는 일정한 이상이건, 하다못해 자기 자신의 고독이건, 자기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고, 알아주는 반려가 필요하다.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하여 작가의 고독한, 그러나 꿈을 가진 삶의 반려를 노래하고 있다.
가로수 플라타너스는 반려의 소재로 사용되기 매우 적절하다. 그 모습과 그 풍치와 그 품위 있는 무늬는 인간으로 친다면, 우아한 귀족풍에 알맞다.
사람은 혼자여서만 외로운 것은 아니다. 연인이 있고, 처자(妻子)가 있고, 부모 형제가 있고, 벗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다. 또 많은 군중 속에 있을수록 더욱 고독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찾는다. 이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자연 사물에 대한 애정이요, 인식이요, 이해다. 작가는 플라타너스의 싱그러운 모습, 푸른 하늘을 향해 치솟은 그 의젓한 자세와, 짙은 그늘에 감동하고, 애정을 느끼며, 그 인간과는 다른 생명에서 위안을 받고, 고독을 잊는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생애를 통해 아주 고정 관념화된다. 일종의 신앙 같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만 보면, 작가는 마음의 괴로움을 잊고, 새로운 꿈과 생활을 향해 출발할 수 있다. 또 이러한 꿈과 생활이 있는 곳에는 늘 플라타너스가 함께 있어서 항상 인생의 일부이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인간 이상의 차원에서, 즉 자연 사물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시인은 ‘고독의 시인’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고독을 많이 주제로 다루고 있으나, 그 고독은 항상 근원적인 고독이다.
해설자: 권웅 , <한국의 명시해설>(보성출판사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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