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의 신비 다시 읽기
역사가 칼라일은 “욥기는 인간의 펜으로 쓰인 것 중에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신학자들은 욥기를 고금 전체의 “최고의 시편”이라고 칭한다. 그 정도로 욥기 안에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가 절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욥기복음”이라 불려 지기도 한다.
욥기는 성경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 졌다. 창세기 저자인 모세이전 아브라함 시대의 저술이다. 인류 최초의 시인으로 불리는 희랍의 호머보다도 1천년이나 앞선 것이다.
근래에 이르러 욥기에 함축되어 있는 여러 가지 과학적 진리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3천 5백 년 전 욥기가 쓰여 진 청동기시대의 고대인들은 지구가 우주 공간에 떠돌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지구는 그저 평평한 땅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욥기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욥 26:7). 이것은 17세기의 뉴톤이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증명하기 전까지 과학이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밖에도 근대에 와서 과학이 발견한 지구 중심 내부에 뜨거운 불바다가 있다는 사실도 욥기 26:5-6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음령(Dead Soul)들이 큰물과 수족 밑에서 떠나니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여기서 “밑에서(미트하트)”는 뜨거운 음부를 가리킨다.
또한 태양열에 의해 바다, 강, 호수에서 막대한 수증기가 하늘로 증발하여 안개, 비, 눈으로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는 “물의 순환” 원리도 욥기 36:27-28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 즉 그것이 안개가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욥기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 고난이 있으며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가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순전한 의인이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견디기 힘든 무서운 시련이 찾아왔다. 그것은 “영원한 의문”(Eternal Why?)이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욥이 고통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들은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로함과 동시에 욥의 고통의 원인도 자기들 나름대로 분석하였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욥이 교만하고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욥을 회개시키려 했다. 그러나 욥기는 그 친구들의 접근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욥기가 여기서 말하는 주제는 인과응보나 상선징악이 성경교리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욥과 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잘 믿는 착한 성도가 왜 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응보의 원리만을 들이대며 위로를 한다면서 정죄를 함께 말하는 욥의 세 친구들의 말들은 욥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욥이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다 나를 번뇌케 하는 위로자로다”(욥16:2)라고 했겠는가? 세상 친구들의 위로는 한계가 있었고 도리어 번뇌만 더해 줄 뿐 아무런 문제 해결책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욥은 모든 인생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성(Absolute Sovereignty)을 인정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좋은 것이라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기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을 찬양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자요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욥1:21).
이와 같이 욥은 인생사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달려있음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에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그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셨다면 그 주어진 고통을 통해 무언가 하나님의 신비한 뜻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굳이 선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분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함에도 그는 가장 참혹한 고통을 당하셨다. 하지만 선하신 그분께서 최악의 극심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욥을 언급한 책은 야고보서이다. 야고보서 기자는 고통을 당할 때 욥의 인내를 본받아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한다. 언제나 궁극적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과 섭리를 믿으라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느니라”(약 5:11).
모범적인 기독인은 욥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산다. 비록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고 산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갖고 살면, 때로는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결코 “피해자”(Victim)가 되지 않고 항상 “승리자”(Victor)로 살 수 있다.
WorldGospelTimes (20220616)
황현조 박사(미국 콘네티커트주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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