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과 밥그릇
이영진 목사(교수, 페이스북 글)
칭의와 성화는 단일한 것이다.
1. 기독교인의 구원은 ‘천당 행(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속성의 변화다.
2. 적어도 로마서에 따르면 인간은 단 한 번(ἐφάπαξ)의 변화로 그 궁극적 속성을 획득한다.
3. 다만 현실 속에서, 변화 받은 인간의 행실에서 오는 괴리감이 이 단번의 변화를 이중적 단계로 치장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로마서는 비교적 이 일회적 변화에 대하여 단호하다.
4.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5. 이 당혹스러움을 해소하기 위해 ‘유보적 칭의’ 또는 ‘제2의종교개혁’ 등 ‘성화’라는 일종의 수속들이 등장했지만, 그것은 칭의와 성화를 (재)조직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 변화의 대상이 되는 ‘죄(성)’에 대한 이해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6. 왜냐하면 적어도 이 변화의 체계를 일으키는 로마서의 핵심 장에서 ‘죄’를 표지하는 ἁμαρτία라는 용어를, 저자인 바울은 대단히 의식적으로 (그 의미와 본령을 알고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 대한 해득이 없는 한 이 구원의 교리는 끊임없이 조직당하고 말 것이다.
7. 내가 기독교가 뭔지 알기도 전 아주 어린 꼬맹이 시절에 집에는 어떤 부흥회 설교가 담긴 카세트 테이프가 몇 개 굴러다녔다. 하나님은 오묘하시다. 그 테이프 하나를 내가 왜 꽂고 들었을까? 기독교는 커녕 종교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인데 그 설교자의 이름을 지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오’자, ‘관’자, ‘석’자였을 것이다. 녹음기에서 들려오는 걸쭉한 그의 목소리는 이런 내용이었다. “여러분 요강 아시지요? 요강? 요강을 용광로에 넣고 녹였다가 주발을 만들면 뭐가 됩니까?” 사람들은 소리쳤다. “밥그릇이요!”
8. 비유가 좀 그렇지만 이 ‘요강’에서 ‘밥그릇’으로 변한 사실이야말로 이 속성의 변화에 대한 탁월한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요강’이었던 사실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또한 ‘밥그릇’으로 그 존재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실은 ‘밥그릇’이 천당 자리를 따 놓은 당상인 것도 아니다. 단지 신분상의 변화만 있을 뿐. 그 시절 3류 식당엔 ‘밥그릇’에 담뱃재를 떠는 인간들도 있었다. 요강만도 못한 가증한 처신인 셈이다.
9.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 단 한번의 변화로 너무 많은 크레딧을 기대하는가 하면, 또한 그 단 한 번의 변화가 가져오는 위력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기도 하다.
10. 명심할지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인 것이다. 그리고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인 것이다.
11. 다음은 로마서 주된 구조. 여러 학자나 주석들이 다 다르기도 비슷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런 구조가 살아 있어야 한다.
1) 인사말 (1:1-17)
2) 죄/정죄 (1:18-3:20)
-모든 사람의 죄 적용 (1:18-32)
-일반윤리에 대한 죄 적용 (2:1-16)
-유대인/율법의 죄 적용 (2:17-3:8)
-모든 인류의 죄 심판 (3:9-20)
3) 의(義)와 구원 (3:21-5:21) ㅡ칭의
-의에 대한 정의 (3:21-31)
-의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4:1-25)
아브라함 안에서 믿음 (4:1-21)
아브라함-예수 칭의 (4:22-5:11)
아담 안에서 범죄/사망 (5:12-14)
아담-예수 영생 (5:15-21)
4) 칭의(稱義)의 전개 (6:1-8:39) ㅡ성화
-전속(專屬)의 문제 (6:1-23)
-계속되는 죄의 문제
-율법의 문제 (7:1-25)
-죄의 의인화 (내 안에 내가 2개다?)
-율법이 죄를 짓게 한다?
-속사람의 갈등과 불일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성화/칭의의 능력 (8:1-39)
-해방/승화/기대/승리
5) 의(義)-섭리와 주권 (9-1-11:36)
6) 의(義)의 적용과 헌신 (12:1-15:13)
(7) 인사와 축복 (15:14-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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