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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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환경을 바라보는 신학적 입장

 

기후 환경위원회 보고서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기후환경위원회

 (총회가 받아들인 위원회 보고서, 2024. 9. )

 

 

I. 기후환경을 바라보는 신학적 입장

 

 

1. 문제

 

 

오늘날 기후 변화 문제는 모두가 날마다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다. 각종 측정 자료도 지구 온난화 사실을 입증하며, 갈수록 과격해지는 날씨가 앞으로의 대재앙을 맛보기처럼 보여 주고 있다. 개인이나 국가의 이익이나 이념을 넘어 이제 전 지구인이 함께 최악의 경우를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상황이다. 오랜 연구를 통해 온난화의 주범이 탄소 중심의 온실가스임이 밝혀져 유엔을 중심으로 세계 모든 나라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후 문제는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위협이 되므로 기후위기 대처는 인류의 생존과 지속을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고신 총회는 지금까지 기후환경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실로 중요한 영역을 오랜 기간 목회자나 성도 개인에게 맡겨두었었는데, 이제라도 총회가 이끌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총회 기후환경위원회가 이제 첫 해를 마감했다. 한 해 동안 여러 전문가를 통해 기후변화 및 환경 문제의 현황을 파악하고 교회가 해야 할 올바른 접근 방법에 대해서도 모색해 보았다. 앞으로 총회의 모든 자원과 역량을 모아 우선 문제를 잘 파악하고 성경과 성경적 세계관으로 정확하게 분석하여 올바른 이해와 실천 방안을 성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 고신 성도들은 기후환경에 대처하는 그 일에서도 하나님을 바로 믿고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2. 현황

 

 

기후환경 문제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대기나 수질 오염도 수많은 사람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온실효과로 인한 지구 온난화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지구 온도가 약 1°C 오른 것으로 본다. 지난 40년간 매 10년에 0.18°C 올랐는데 증가 속도가 해마다 빨라지고 있다. 지난 2023년이 인류 역사상 가장 더운 한 해였고 올 2024년은 지금까지 작년보다 더 높은 기온을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와 첨단 장비를 통한 예측에 따르면 지구의 온도 상승을 1.5°C 이내로 막지 못하면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쳐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된다.

 

 

지구 온난화는 온실가스가 일으키는데 수증기와 여러 가스가 태양 에너지를 지구에 가두어 대기, 지표, 해양의 온도를 높인다. 온실 가스 중에서도 주범은 이산화탄소다. 이산화탄소는 주로 화석연료 연소로 발생하므로 내연기관, 난방이나 요리, 전력 발전, 공장 가동 등의 운영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거나 아예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지금 유엔이 1988년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Intergovernmental Panel onr Climate Change, IPCC)의 주도 아래 각 나라 정부와 주요 기업체가 함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5년 체결한 파리협정이 지금 국제법이 되어 전 세계의 동참을 요구하고 있으며 RE100 등 민간 차원의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목표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반으로 줄이고 2050년까지 순제로 배출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상황이 심각하다. 세계 7위의 온실가스 배출 국가인데 재생에너지 의존도는 6.7%로 세계 꼴찌 수준이다. 정부가 탄소 감축안을 거듭 발표하지만 현실성도 강제력도 없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탄소 배출 문제로 국가적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지구 온난화를 적정선으로 제한할 이산화탄소 최대 배출량을 2020년 이후 5천억 톤으로 보는데 이를 탄소 예산이라 부른다. 한국은 335천만 톤인데 2026년까지 배출을 제로로 만들어야 예산에 맞출 수 있다. 하지만 탄소 배출량이 지금도 늘고 있고 2030년까지 예산을 훨씬 초과한 593천만 톤을 쓸 것으로 예상한다. 정부의 정책이 너무 안이하다고 본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미래 생존권을 우려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해 지금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3. 교회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는 사실 정부와 여러 사회기관이 주도하는 문제로 교회가 직접 담당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도와야 하며 특히 전문 지식이 필요한 영역의 경우 그런 책임이 더 커진다. 신학교를 운영해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도 그런 과제의 하나며 국내외 선교, 주일학교 교육, SFC 사역, 다양한 사회 참여, 세계관 연구 및 교육도 그런 부분에 속한다. 기후변화 문제 역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므로 교회가 성경적 기초 위에서 전문가들의 연구와 자료를 참고하여 바른 원리를 세우고 성도들에게 바른 지침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선교학 차원에서 성도들에게 기후환경 위기에 대처하도록 도울 수 있다. 검소한 삶으로 자원을 아끼고 또 정부와 지자체가 주관하는 재활용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 실천이 전도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이 지구가 다음 세대가 살아갈 터전임을 고려한다면 기후환경 문제에 대처하는 일은 인류의 미래와 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이 되어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일은 사실 이웃 사랑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돌보라는 명령을 창조주로부터 받았으므로 자원 절약이나 재활용 행위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방법이 된다. 그렇게 볼 때 이 과제에는 성경신학적, 조직신학적 연구와 토대가 필요하다. 모두가 지구를 아끼고 온난화를 막으려 애쓰지만 우리 개혁신앙인은 출발점과 목표가 달라야 하고 따라서 그 일을 추진하는 방법과 태도까지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을 하는 일은 국민으로 또 지구인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같은 일이라도 말씀과 고백의 기초에서 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4. 과제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 말씀으로 분석하고 말씀의 인도를 받는 일이다. 지구가 더워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기후 위기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이 가운데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우리가 할 일은 어디까지인지도 파악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우리와 다른 동기와 원리로 이 일에 매진하는 사람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우리의 거룩함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음식물 쓰레기를 구분해 버리는 행위 하나도 나를 돌아보고, 이웃을 배려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행동이 될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신학적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출발점은 당연히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다. 창조에 관한 말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에 관한 말씀, 종말에 관한 가르침 등등 우리가 익히 알아 온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상황에 주는 뜻이 무엇인지 찾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맞은 위기가 전대미문의 것인 만큼 선배들이 직접 연구해 놓은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전반적인 연구가 토대가 되어야 하므로 성경 연구와 신학적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의 연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지 않는 사람, 인간과 피조물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지구와 우주와 인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 확실하게 다를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따라서 바른 대안을 마련할 때도 우리는 성경 진리에 토대를 둔 가장 올바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우리 인간, 특히 그리스도인의 잘잘못은 무엇인지 살피고, 오늘 도덕적 부패와 세계관적 위기로 분투하고 있는 교회에게 새롭게 주어진 이 과제는 우리에게 어떤 겸손을 요구하며 어떤 회개의 열매를 요구하는지 잘 살펴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해야 한다.

 

 

II. 기후환경을 바라보는 성경적이며 기독론적인 입장

 

 

서론: 기후 환경이 교회의 관심으로 들어오는 근거는 무엇인가?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조직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에게 일차적인 관심을 둔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는 삶은 세상이란 자연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연 환경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괴리되어 독립되어 있지 않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진술하고 또한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인 재앙이나 재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며 행동하여 왔다. 구약 시대에는 질병과 기근 그리고 지진과 홍수 등을 통해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심판하시는 뜻을 알렸다. 신약에 와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이 종말을 알리는 신호로 역할을 하고, 계시록에서도 기근과 흉년 그리고 지진과 태풍과 산과 섬이 자리를 옮기는 지각 변동(이상 계6장 일곱 인의 재앙)등이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으로 제시된다. 또한 우박과 산불, 지각변동, 쓴물, 해와 달과 별의 기능 상실, 화산 폭발, 메뚜기의 재해,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등도 심판의 도구로 제시된다(8-9, 일곱 나팔의 재앙). 또한 일곱 대접의 재앙들도 질병과 바다와 강과 물 근원의 오염과 해의 뜨거워짐, 어두워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와 큰 지진으로 변화들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16).

 

 

현재 기후 환경의 문제는 전인류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거쳐 이제는 지구가 끓고 있다고 한다. 이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지난 2023727일에 유엔의 사무총장이 지적하였다. 앞으로 5년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상승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속히 1.5도 상승을 저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 세상은 고온 현상을 겪는 일을 언론을 통해 매일 듣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의 기후환경이 최근 급격히 변화하면서 이 원인이 화석연료의 사용량의 증가와 연결되어 인간의 행위 결과로 보는 입장과 수증기의 증가와 태양의 흑점 활동 결과로 보는 불가항력적 입장 등이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기후환경이 심각하게 변화되고 있고, 이를 억제하고 대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기후 환경의 문제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것이 인류에게 재앙의 상태로 몰고 갈수 있는 상황에서 세계 각국은 탄소 중립과 재생에너지 100%(RE100) 사용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노력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자발적으로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서 목표치를 설정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역시 2050탄소 중립 정책을 마련해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세상과 구별되면서도 세상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도 전지구적인 위기인 기후환경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교회적 관심사로 수용하기 위해서 성경적이며 기독교 세계관적인 관심사와 신학적 관심 특히 기독론적 관심아래 적용가능한 주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신총회 기후환경위원회는 기후환경의 문제를 성경적이며, 기독론적 수용이 가능한 대안을 찾기 위해 이 보고서를 총회에 연구 제출하고자 한다.

 

 

1. 우리가 사는 환경인 세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1:1).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이 거주하도록 하기 위함이다(45:18). 거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이 이를 다스리게 하셨다(1:26-28).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 광명체는 낮과 밤을 주관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또한 물과 뭍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작용하여 결실하게 한다. 이렇게 결실을 맺는 푸른 풀과 채소와 과일나무들로 인해 사람들은 먹을 것을 공급받아 거주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 이런 거주할 수 있는 세상을 잘 관리하도록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스리는 역할을 맡기셨다. 이런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계속해서 인간과 피조물들이 살아 갈 수 있는 세상, 특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현재 기후와 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산업화 이후 대량생산과 연결한다. 그리고 화석연료를 사용한 결과로 본다. 태양 흑점의 활동과 수증기의 증가와 같은 요인들도 있지만 현재의 위기는 이산화탄소의 증가와 연결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탄소 중립과 재생에너지 사용이란 해결책을 세상이 제시하고 있다. 비록 타락한 세상이지만 사람과 자연 환경의 상호 생존을 위해 양심에 호소하는 반성의 수단이 작동하고 있다.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이를 재생할 자연환경을 만들고, 현대문명을 가동시키는 에너지 생산을 재생에너지로 채우자는 생존전략이 작동하고 있다. 국가들이 중심이 되고, 기업과 사회 그리고 단체와 개인들까지 협력하고 있다.

 

 

산업화 이후 인간 사회는 인구 증가뿐 아니라 개인당 소비가 크게 증가하였다. 대량생산이 소비를 증진시키는 효과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소비의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의 바람과 편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탐욕이 함께 상승 작용을 한다고 본다. 이익과 탐욕 이것은 서로가 사는 세상이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보다는 기업과 인간 각자의 편리함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과다한 생산과 과도한 소비로 표현되는, 이익과 탐욕이란 인간 본질적인 측면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기후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결국 이익과 탐욕은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인 발현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오늘의 기후위기 현상의 배후에는 인간의 죄성이 있다. 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 선한 세상이 이렇게 위기의 세상으로 변화된 것인가?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전쟁이나 인간관계 속에 있는 미움과 다툼 등의 관계나 사회적이며 국가적 질서의 파괴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까지도 파괴하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그래서 인간들 서로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인간이 공격하고 파괴한 결과 이제 자연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하나님이 보기시게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지 못한 인간 다스림의 결과이다.

 

 

오늘의 기후환경 위기를 바라보는 성경적 시각은 분명하다. 인간의 이윤 추구적인 기업의 경쟁적인 활동과 인간 개인의 편리 추구와 탐욕의 극대화가 상호 작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 기후 환경의 위기이다. 오늘의 기후환경의 위기를 맞은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역방향의 길을 가고 있고, 이는 잘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 받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그 역할을 충분하게 잘 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2. 열심히 일한 인간 활동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다스리는 구체적인 역할을 한 첫 번째 장은 에덴이다. 에덴은 물과 사람이 있는 곳으로 경작가능한 곳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 두시면서 경작하고 지키게 하였다. 경작은 일함으로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지키는 것은 보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창2장의 문맥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선악과로 표현한다. 섬기되 지켜라.

 

 

경작하는 행위는 동산의 각종 실과들이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것이고, 또한 이를 먹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을 함께 두었다. 바로 선악과이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다. 왜 먹을 것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을 두었을까?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먹을 것인가? 먹으면 악이 되고, 먹지 않으면 선이 되는 것이 선악과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 선한 세상은 먹을 것이 다른 사람과 동물들에게 공급되는 세상이라고 창1:29-30절은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다스림이 구현된 세상은 타인과 동물들에게 먹을 것이 제공되는 세상이다. 이것이 그대로 되었다(1:30b).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좋았다(1:31). 여기서 선은 먹을 것이 인간의 다스림을 통해 타인과 짐승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그대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악은 유추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악은 인간의 다스림을 통해 먹을 것이 타인에게 주어지지 못하는 상태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되지 않는 상태이다.

 

 

2장의 선악과를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으로 악과 선을 구별하는 것을 창1장의 선악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선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공급되는 인간의 다스림이 있을 때이다. 반대로 선악과를 먹는 악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공급되지 못하는 인간의 다스림의 상태이다. 따라서 선악과는 다른 사람의 먹을 것이 된다. 타인의 먹거리로서 선악과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에 두어 경작하고 지키는 삶을 살도록 하셨다. 경작은 먹을 것을 만드는 삶이다. 지키는 삶은 먹을 것은 먹고,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먹지 않는 삶이다. 선악과를 지켜 내는 삶이다. 선악과는 타인의 먹거리라고 규정했다.

 

 

성경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먹을 것과 함께 율법을 함께 주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제시한다.

 

 

마라 물가에서 먹지 못하는 쓴 물을 달게 하면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 여호와의 말을 듣고 순종하며 의를 행하고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애굽의 모든 질병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격려하신다(15:26).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이스라엘은 거듭 원망한다. 그때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다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지를 시험하신다고 말씀하신다(16:4).

 

 

광야 40년의 삶 전체를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말씀)으로 산다고 규정한다. 떡과 함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율법이다. 바로 경작하여 일하는 것에는 지켜야 할 하나님의 율법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에덴에서 인간의 삶은 경작하면서 동시에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경작하는 삶에는 성실했지만 그러나 지키는 삶에는 성실하지 못했다. 사탄 뱀의 유혹은 인간의 탐욕을 건드렸고, 결국 먹지 않아야 하는 타인의 음식인 선악과를 먹고 말았다.

 

 

실제로 아담의 자손인 가인이 경작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열납되지 못한 이유를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4:7). 그런데 가인이 행하지 않은 선은 무엇인가? 선은 타인의 음식을 공급하지 않은 행위이다. 이런 관점을 70인역은 더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네가 바르게 나누지 않았기에(ορθως δε μη διελης)라고 분명히 적시한다. 열심히 경작하지만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받지 않으신다.

 

 

인간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문명을 일으키고 발전시켜왔다. 1차 산업혁명인 농사를 짓는 일과 2차 산업혁명인 증기기관의 발명은 대량생산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일하면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도록 했다. 인류는 지속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연구하고 삶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인류는 지켜야 하는 일에 성실했는가? 즉 타인의 먹거리에 성실했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타인의 먹거리란 표현을 함께 타인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인간이 노력했는가? 대량생산과 함께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일을 만들어 주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일에 기여했지만, 그러나 그 결과 세상은 부의 쏠림 현상과 양극화를 만들기도 했다. 나아가 인간이 사는 기후 환경의 질이 저하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와 이윤과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수고하고 경작하였다. 그러나 이런 수고가운데 다른 사람의 삶, 그리고 함께 사는 삶, 주변을 배려하는 지키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자원을 이용하여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함으로 이윤과 편리함의 극대화를 추구하다가 현재의 기후 위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린 인간의 삶은 스스로 재난을 맞이하게 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음으로 언약적 저주로서 재난을 맞은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인류가 맞고 있다. 열심히 사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다. 경작하면서도 지키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바른 통치 행위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형상다움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열심히 일하지만 오늘의 기후 위기와 같은 심각한 현실을 맞은 원인을 일을 하여 생산하고 이윤을 얻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욕망을 채우는 일에 우선적인 노력을 한 것은 다른 사람이나 삶의 환경을 지키는 일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결과라고 보았다. 이렇게 나의 이윤추구와 욕심을 넘어서서 타인의 관심과 먹거리와 우리 모두의 삶의 환경을 고려하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깊이 연결되었다고 볼 수있다.

 

 

 

 

3. 제한된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은 서로 돕는 이의 삶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만드시는 과정을 에덴에서 제시한다.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에덴에 두시면서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 그리고 돕는 이(배필)가 없는 현실이 좋지 않다고 평가하신다. 그래서 이름을 짓는 일(다스리는 일, 경작하는 것)을 위해 돕는 이를 만드신다. 여자의 탄생이다.

 

 

창조하신 세상은 혼자 있으면 좋은 세상이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함께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다른 인간을 만드셨다. 여자이다. 첫 사람이 있고 나서 다른 사람이 등장하면서,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처음 대할 때, 그를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인간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그 처음 대면하는 나 아닌 타인을 성경은 돕는 이(helper)로 번역하고 있다. 돕는 배필은 아담과 하와가 부부였기에 그에 상응하는 한국적 이해를 반영한 번역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도우미 혹은 돕는 이로 번역한다(helper).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로 규정된다. 서로를 착취하거나 억압하거나, 나의 필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보다는 그의 편에서 서서 돕는 이가 되는 관계가 인간 관계이어야 한다.

 

 

기후환경 문제를 다룰 때 하나님의 형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돕는 이의 관계는 철저히 배제된다. 선진국이나 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생산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산화탄소의 배출량과 에너지 사용이 가난한 나라와 비교할 수 없다.

 

 

나의 이익과 나의 편리를 추구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자연과 짐승들에게 해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다른 이를 고통에 던지는 행위를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고 불의하며 선하지도 않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타인의 고통과 부족과 결핍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태도는 함께 돕는 이로 서서 서로의 결핍을 채우고,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가 함께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세상을 이루는 일에 함께 협력하며 도와야 한다.

 

 

4. 자연과 인간과의 갈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을 하나님은 뱀에게 종속된 상태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뱀과의 갈등 혹은 원수 됨을 통해 자신의 첫 번째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3:15). 사탄인 뱀과의 원수됨 만이 아니다. 여자와 남자도 각각 자녀 생산과 먹을 것을 생산하는 일에 고통이 증가하게 된다. 동시에 남자와 여자가 단순하게 돕는 이의 관계로만 규정되지 못하는 현실이 된다.

 

 

여자가 준 선악과를 먹음으로 남자도 범죄하게 된 현실은 서로를 돕는 방식에 문제가 생겼음을 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관계도 갈등이 있어야 필요하다고 말한다. 너는(여자) 남자를 원하나 그는(남자) 너를 다스릴 것이다(3:16). 둘 사이의 관계에 갈등이 필요함을 선언한 말씀이다. 이것과 같은 형태의 구조가 창4:7절에 있다. 죄가 너를(가인)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와 갈등 관계를 가져야 정당하다는 것을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도 때론 선악과를 먹으라는 것과 같은 요구 앞에 정당한 갈등관계가 있는 것이 서로의 구원을 이루는 것에 유익함을 말한다.

 

 

나아가 여자가 아이를 낳는 과정과 함께 남자가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하는 것을 통해 번성하고, 번성한 가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일을 하게 된다. 둘 다 고통을 수반한다.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면서 싸우는 고통을 통해 번성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리는 존재가 된다.

 

 

땀 흘리는 수고와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는 고통이 주어진 것은 먹지 말아야 하는 선악과를 다시는 먹지 않기 위해서이다. 선악과를 다른 사람의 음식이라고 본 입장의 일관성을 유지하여 남자에게 주어진 저주를 이해해보자. 여자의 말을 듣고 먹지 말라고 명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기에 이제부터는 땅이 저주를 받아 그 저주를 헤쳐 나가기 위해 수고를 해서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한다(3:17).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의 말을 따라 간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고난의 떡을 먹어야 한다. 하나님이 경작하고 지키라고 한 것을 경작은 했는지 모르지만 지키지 않았다. 땅이 저주 받아 먹을 것을 내는 것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서 감당해야 한다. 사람이 먹을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 속에 땅이 주는 고통이 있다. 땅과 먹을 것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삶의 환경 전체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존이 먹을 것과 연결된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 땅인 기후와 환경은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인간이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이 고통의 현실을 극복하여 먹을 것도 확보하고 가족들이 번성하도록 보호할 책임을 부여 받았다.

 

 

역사에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문명을 여기까지 만들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이윤과 편리의 극대화로 표현되는 인간 탐욕의 결과가 기후환경의 문제를 다시 맞고 있다. 땅 혹은 이런 자연환경과의 갈등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도록 부르고 있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 우리의 이웃을 위해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우리를 우리의 기후환경과 갈등하게 하면서 수고하게 한다.

 

 

5. 구속의 목적으로서 창조의 회복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 사람과 자연과의 갈등이 존재한다. 땅이 받은 저주로 인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데, 이를 제거하는 땀 흘리는 수고를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 지키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수고가 탐욕과 윤택함을 증대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만나는 어려움 중에 하나가 기후 환경의 위기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을 위한 수고가 창조의 회복이란 과제를 이루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다스리는 역할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결과물을 내는 과제를 이루어야 한다. 모두의 세상을 위해 수고와 지키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상의 재난과 어려움을 극복한 사례는 다양하지만 우리는 창세기의 결론에 등장하는 요셉을 다루려고 한다.

 

 

6. 재난을 극복한 요셉의 지혜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형제들보다 더 받은 결과,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37:4). 편안은 샬롬이다. 샬롬을 목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적대적이었다는 표현이다. 가인이 아벨과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함에 기름을 부은 것이 요셉의 꿈이다. 요셉의 꿈을 살펴본다.

 

 

1) 요셉의 꿈과 일차적인 해석

 

 

요셉 기사는 두 번 연속된 꿈이 세 가지가 나온다. 요셉 자신의 연속된 꿈, 그리고 애굽의 바로를 섬기는 두 관원장이 각기 꾼 두 꿈, 그리고 바로가 꾼 두 번의 꿈이다. 세 가지의 꿈은 전체 요셉 기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그 출발이 요셉의 꿈이다. 요셉의 첫 번째 꿈은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 중에 요셉의 단은 일어나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것이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꿈에 대해서 요셉은 꿈의 내용만을 제시하고, 해석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해석을 하는 이는 첫 번째 꿈은 형제들이고, 두 번째 꿈은 아버지이다.

 

 

첫째 꿈에 대한 형제들의 해석은 이러했다. 요셉! 네가 진짜 우리의 왕이 될 것인가? 우리를 다스리겠는가? 12형제들 중에서 요셉이 최고의 존재가 되어 다스린다고 이해했다. 하나님이 야곱의 집에 주신 약속이 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민족, , 이름). 그리고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35:11).

 

 

둘째 꿈에 대해서는 형제들은 가만히 있고, 아버지 야곱이 개입하여 해석한다. 야곱이 요셉을 일단 꾸짖는다. 그리고 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야곱)와 너의 어머니(라헬 혹은 서모 빌하)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너에게(요셉) 절하겠느냐? 왜 야곱이 꾸짖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을까? 그리고 왜 형들은 말이 없을까? 형들은 첫 번째 꿈이나 두 번째 꿈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 야곱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꾸짖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계속 네가 이런 꿈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뭐냐? 불순하다. 혹은 오만하다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형제들이 절하는 것을 넘어서 해와 달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이해하고 야곱은 자신도 너에게 절한다고 해석을 했다.

 

 

2) 요셉의 두 꿈의 차이와 숫자 해석

 

 

요셉의 두 꿈에 대한 형제들과 아버지의 해석의 공통점은 요셉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형제들과 부모들조차 그에게 엎드린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두 꿈을 살펴보면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 꿈은 요셉의 곡식 단이 일어나고,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을 한다. 그런데 두 번째 꿈에서는 해와 달과 11별이 요셉의 별이 아니라 요셉에게 절을 한다. 그러므로 두 꿈은 다른 성격의 해석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기 때문에 요셉이 높아진다는 것은 옳은 해석일 수 있다. 그런데 형제들이나 아버지가 말하려는 핵심은 요셉이 이스라엘의 집에 왕이 되는가에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집의 왕은 요셉의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 이는 창49장에서 분명하게 야곱이 예언한다(49:10, 통치자의 지팡이). 그래서 형제들의 해석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해석도 요셉이 왕이 된다는 의미로 보았다면 틀린 해석이다.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형제들의 곡식 단에는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형제들의 숫자는 베냐민이 태어났다면 11명이고, 안 태어난 상황이면 10명이고, 요셉의 단을 포함하면 11명이 된다. 그러나 숫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꿈은 분명하게 숫자를 포함하고 있다. 해와 달과 11개의 별들이다. 이것을 모두 더하면 13의 숫자가 된다. 모두를 더하는 이유는 해와 달과 11별들 모두가 요셉에게 절하기 때문이다.

 

 

요셉 기사 전체에서 세 가지의 꿈이 나올 때마다 숫자가 나온다. 두 관원장의 꿈에서 포도나무 3가지가 나오고, 머리 위에 3개의 광주리가 있다. 이 숫자를 요셉은 시간으로 해석했다. 모두 삼 일이란 시간으로 해석했다. 삼일 후 바로의 생일에 하나는 복직하고, 하나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바로의 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로의 꿈에는 7이란 숫자가 등장한다. 살찐 소 일곱과 마른 소 일곱이다. 튼실한 이삭 일곱과 마른 일곱 이삭이다. 요셉은 마찬가지로 7이란 숫자를 시간으로 보고 7년이라고 해석했다. 요셉은 일관성 있게 꿈에 나오는 숫자를 시간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요셉 자신의 꿈에 나오는 숫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해와 달과 11별은 모두 13을 가리킨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시간으로 보지 않고 요셉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해석을 한 것이 야곱의 해석이다. 요셉의 첫 번째 해석은 숫자를 제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술했다. 흥미롭다. 그래서 숫자를 알 수 있는 두 번째 꿈을 보게 된다. 13이란 숫자를 사람의 숫자로 보지 않고 시간으로 보면 13년이 된다.

 

 

요셉은 현재 17세의 청년이다(37:2). 그런데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시점이 30세이다(41:30). 성경에 나오는 나이나 숫자는 굉장히 의도적이다. 13이란 숫자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시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요셉 자신도 처음에 그것을 정확히 알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이 가면서 꿈들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렴풋하던 꿈들이 분명해 졌을 것이다.

 

 

해와 달과 11별에 대해서 13년이란 숫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해와 달의 2와 열 한 별의 11을 구별할 수도 있다. 요셉이 애굽의 바로에게 나아가서 꿈을 해석하고 총리가 된 시점은 술 맡은 관원장의 복직 후 2년이 지난 시점이다(41:1). 그래서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것이 팔려 간 후 11년 되는 시점이고, 그때로부터 2년이 더 지나서 바로의 꿈을 해석한다. 모두 13년은 같지만 두 시점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3) 곡식단과 해와 달과 별은 무엇을 말하는가?

 

 

요셉 기사에서 일련의 꿈을 해석하는 원칙은 숫자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체 대상들이 의미하는 바다. 요셉의 꿈에서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 절을 한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11별이 요셉에게 절을 한다. 각기 무엇을 말하는가?

 

 

요셉의 높아짐과 연결된다는 것은 그것이 절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런데 첫 번째 꿈은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곡식 단에 절을 한다. 이것은 요셉의 곡식이 형제들의 곡식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본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과의 관계를 정리할 때, 항상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나를 애굽에 보냈고 애굽의 주로 삼았다고 말한다. 결코 형제들의 주가 되도록 애굽에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애굽의 주가 되고, 통치자가 되어서(45:8-9), 남은 흉년의 오년 동안 형제들이 부족함이 없도록 양식을 주어 온전하게 하겠다고 말한다(45:11). 나중에 바로에게 소개할 때도 목축하는 자로서 살기에 충분한 땅 고센에 살도록 조치한다(46:33-34). 그리고 애굽에 정착할 때도 요셉은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다(47:12).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도 동생이 형보다 큰 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약속의 땅으로 갈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형제들의 주가 되고 왕이 되어 다스린다는 형들의 해석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서 형제들이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면서 아버지의 유언을 언급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또한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 될 것을 말한다(50:18). 그러나 요셉은 이를 거절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보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50:20). 요셉이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겠다고 응답한다. 기른다는 말은 양식과 모든 필요를 공급한다는 의미이다. 기른다는 단어는 앞서 언급한 요셉의 두 번의 봉양한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45:11, 47:12, 50:21). 요셉은 철저히 자신이 형제들의 양식과 필요를 공급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위치를 한정한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첫 번째 꿈의 실체이다. 요셉은 높아진다. 애굽의 주가 된다. 그러나 그 높아짐이 자신의 형제들 위에 높아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형제들 위에 높아짐은 유다에게 속한 일이라고 야곱이 예언한다(49:10).

 

 

그러면 요셉의 두 번째 꿈에 나온 해와 달과 별들은 무엇인가? 해와 달과 별들은 고대 시대에 신들과 같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해와 달과 별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신들이 아니고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비신화화 하는 작업을 한다. 애굽의 바로는 태양신()과 동격이었다. 이렇게 해와 달과 별들이 신이 된 이유는 그들이 주는 능력 때문에, 그것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때문이다. 햇빛과 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여 농사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치지 때문이다. 그래서 풍년을 기대하면서 기우제를 드리게 되며, 해와 달과 별들을 신격화하게 된다. 해와 달과 별들이 사람에 불과한 요셉에게 절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신들이 아니라는 선언이 일차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먹을 것을 얻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막대한 힘을 가지는데, 그러나 그것들이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그 힘을 제어하는 권세와 능력이 요셉에게 있음을 선언한다. 요셉은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한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리고 그의 율법을 따라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지혜로운 자이다. 요셉의 지혜는 해와 달과 별이 만들어 내는 자연의 질서 풍년과 흉년을 극복해 내는 힘을 가졌음을 말한다. 해와 달과 별들을 제어하여 풍년과 흉년을 극복하는 것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지혜임을 두 번째 꿈은 말하고 있다.

 

 

요셉의 꿈은 명백하다. 요셉이 애굽의 주로 높아지는 13년 후를 지향한다. 그리고 요셉이 자신의 형제들에게 하는 역할은 그들의 주가 아니라 그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역할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것에 영향력을 미치는 해와 달과 별들이 만들어 내는 풍년과 흉년의 결과들을 제어하는 요셉의 지혜 앞에 굴복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요셉의 두 번의 꿈이다.

 

 

요셉의 지혜는 오늘날 기후 환경의 위기 앞에서도 의미가 있다. 태양의 흑점이 폭발을 한 것이던지, 아니면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이 과도한 탓인지 간에 자연의 질서를 정당한 사람의 생존과 필요 앞에 굴복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의 지혜이고 몫이다.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려는 열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제어하며 창조의 선함을 이루어 간다.

 

 

7. 기독론적 문제 제기

 

 

요셉의 예를 통한 성경적 이해와 적용만으로 기후 문제가 기독교적 과제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독론적 접근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교회적 과제로 인식된다.

 

 

1) 마라의 물 변화 사건: 치유하시는 하나님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전쟁을 지나 수르 광야에서 마라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자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한다. 이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다. 이 사건은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는 어려움을 극복한 사건이다. 물이 없는 어려운 상황들을 광야를 지나면서 한두 번 만나지 않는다. 그때 마다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라고 가르친다.

 

 

물을 달게 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은 거기서 그들 출애굽한 백성들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15:25). 그리고 시험하시면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순종하고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겠다고 하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15:26)

 

 

하나님은 물이 필요한 백성들에게 물을 해결하는 길이 원망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청종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기 때문이다(8:3). 그리고 여호와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과 같은 위기를 만날 때 마다, 원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순종할 때,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약속하신다.

 

 

또한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기근과 같은 상황이다. 광야는 먹을 것이 생산되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서 물을 먹지 못할 때와 같이 백성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 즉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신다고 선언하신다. 만나를 주면서 동시에 율법을 주시고 있다(16:4). 이는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방식이 아니라(16:6-13) 여호와의 율법을 잘 순종하는 길을 걸어갈 때, 먹을 것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말한다.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과 여호와의 율법이 연결되는 방식은 물이 필요할 때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붙잡는 것과 연결된다.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만난 재난과 질병 그리고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언약에 성실한 백성들이 그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을 만나게 된다.

 

 

2) 모든 병을 짊어지신 고난 받는 종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치료하시는 여호와를 만났다. 애굽에서 만난 열 가지 재앙의 다양한 재난을 치료하신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깨닫도록 했다. 그래서 향후에 만나는 다양한 재앙을 극복하는 동력이 언약의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치료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등장한다.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유명한 종의 노래 중에 하나인 사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있다. 관심부분은 4-5절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고난당하는 종이 질고와 슬픔을 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벌과 고난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고,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한 것임을 선언한다. 왜 고난당하는 종이 우리의 이런 죄를 짊어진 계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 때문이다(53:6). 이것이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는 방식이다(53:10).

 

 

고난당하는 종이 누구인가? 바벨론에 포로 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홀로 담당하는 그는 누구인가? 메시아를 제외하고 이를 담당할 자가 있을까?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사역을 하는 근거를 사53:4절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마8:17절을 살펴본다.

 

 

3) 예수님의 성육신과 병을 짊어지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을 마태는 이렇게 정리한다. 4:23절과 9:35절이다.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셨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의 사역은 실제로 두 가지이다. 가르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고치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이다.

 

 

가르치는 것과 고치는 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가운데에 두고 싸고 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구성이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보다 두 가지의 사역을 제시한다.

 

 

가르치는 사역은 마5:1-7:29이다. 5:2절과 7:28절에 가르친다는 단어가 수미쌍관으로 나온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가르침으로 전파한다. 그리고 8:1-9:36절은 예수님의 병 고침의 사역들을 모아서 마태가 제시한다. 이는 병을 고치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가르침과 병 고침이란 두 가지 수단을 제시한다.

 

 

가르침은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천국 복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병 고침은 종말의 메시아가 와서 치료하는 목자임을 보여준다(참고 겔34:4, 16 대조). 거짓 지도자들이 목자가 되어 양들인 백성들이 병들어도 치료하지 않고 오히려 들짐승의 밥이 되도록 해서 결국 멸망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다윗의 한 목자가 와서 병든 양들을 치료하고 흩어진 자들을 모아 좋은 꼴을 먹이면서 치료하고 회복하는 역할을 메시아의 역할로 제시한다(34:23). 이사야 선지자도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기 백성들의 모습을 병자들이 회복되는 모습으로 묘사한다(35:5-6). 이는 고난 받는 종이 그들의 질고를 짊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53:4).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이고, 동시에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마태는 소개한다(1:21, 17). 따라서 예수님이 율법에 성실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 바른 하나님의 뜻을 율법을 해석하여 가르치면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는 현실에서 병들고 터진 상태를 치료하여 나음을 주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다. 천국이 도래했음을 선포하셨다.

 

 

53:4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을 뒷받침하는 마태의 입장을 더 살펴보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상황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병을 짊어지는 메시아로 이해하면서 사53:4를 인용한다. 구약의 인용할 때, 흔히 하듯 70인역을 인용하지 않고, 마태는 병을 고치는 문맥에 적합하게 적용해서 번역을 했다. 칠십인역(LXX)은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졌고, 우리의 고통에 대해서도 (가져갔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히브리어(MT)는 우리의 병을 담당하고, 우리의 고통도 짊어졌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는 그가 우리의 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고 번역한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침과 동시에 병을 고치면서 천국을 전파하시는 문맥에 특화하여 번역하였다고 본다.

 

 

마태가 사53:4절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을 설명한 것은, 예수님이 특정시대에 특정한 인물들의 병만을 고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병과 질병을 짊어지시는 종말의 목자이신 다윗의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모든 병을 일일이 고치지 않아도 모든 시대에 주님의 복음을 듣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짊어지신 질병을 통해 그들의 질병과 연약도 나음을 얻게 됨을 보여준다. 특히나 죄의 결과로 인한 질병을 주님이 모두 짊어지셨기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질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질병이 죄로 인한 저주의 질병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질병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와 같이 우리를 천국의 백성으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한다. 죄로 인한 질병과 고통은 모두 주님이 다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장모도 다시 병에 걸려 결국은 죽음의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주님의 천국 복음의 은혜를 누리면서 약함과 질병을 은혜의 수단으로 여기면서 그 길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질병을 짊어지신 사건은 종말의 메시아가 목자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거짓 목자들과 대조되는 참된 목자로서 역할을 하심이다. 또한 이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서 천국 즉 선한 세상을 이 땅에 가지고 온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자기 백성을 위한 목자로서 메시아의 사역으로 감당하며 이를 적용해 내었다. 병은 짊어지는 것과 치료하는 것이 동사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다른 성격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어려움, 재난, 등을 광야에서는 율법이나 법도와 규례를 순종함으로 극복하는 길을 얻는다(참고 신7:14-5). 포로가 되어 병들고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제2의 출애굽을 견인하는 참 목자가 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그 백성의 죄의 결과인 질병과 고통을 짊어지시는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나음과 치유를 베풀어 주신다.

 

 

마감하면서

 

 

기후환경 문제를 우리는 인간의 이윤과 편리를 극대화하려는 탐욕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며 이에 대한 경고로 보았다.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도우미가 되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망치고 병들게 하고 죽이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인간 죄성의 발현으로 이해한다. 구체적으로 기후환경의 변화가 온난화를 거쳐 지구를 끓게 만들고, 우리 자신과 많은 이웃들이 재난을 당할 위험에 직면하며 이미 위험 속에 놓이게 하고 있다.

 

 

기후 환경의 위협이 가진 죄의 속성을 인식하면서 이로부터 건짐이나 치료 그리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구원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은혜를 물을 달게 하는 과정이나 병 고침의 과정에서 치유의 언어로 번역하여,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나 병을 짊어지시는 모습의 예수님으로 만나게 된다. 기후 환경의 어려움도 물의 문제, 식량의 문제, 질병의 문제, 고통의 문제들을 동반하며 이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수습하는 과정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복음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병을 짊어지는 메시아인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기후환경의 위기가 주는 어려움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고 믿으며, 이 시대에 기후환경의 위기를 짊어지시는 예수님을 적용해서 읽을 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전인류적인 재앙의 조짐을 가진 기후 환경의 위기를 죄가 주는 경고로서 받아들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구속의 은혜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여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켰듯, 오늘날에도 치료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행하는 행위들을 통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선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을 확인한다. 기후 환경의 문제를 이상과 같이 치료 가능한 교회적 과제로 수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본위원회는 총회 앞에 보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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