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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프레드리히 황관

 

 

폴리갑과 콘스탄틴, 기독인의 삶의 장엄함을 보여주다

 

신학대학원이 가르치는 정경론에는 정경확립의 기준 가운데 성경의 자증적(自證的) 권위라는 주제 안에 문체의 장엄함이란 내용이 있다. 하나님의 장엄하심, 자연계시인 창조세계의 장엄함, 구속사의 장엄함, 특별계시인 성경의 장엄함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당연하면서도 묵상할수록 소름 돋는 은혜의 정서적 기반이 되는 부분이다.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과정이 개설한 최덕성 교수의 초대교회사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장엄함이란 키워드가 떠올렸다. ‘성도의 삶의 장엄함은 주후 2세기 순교자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과 기독교 공인의 명성에 빛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삶은 장엄함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장엄하심은 다른 어디에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자체 발광하는 태양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밤을 비추어 생물들이 야간에도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달과 같은 그런 개념의 장엄함같은 거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주후 1세기에서 4세기 사이의 로마인들의 관점으로 기독교를 조망해 보자. 동시대에 문명사적으로 가장 앞서 있다는 그리스-로마문명의 신들은 사람을 닮은, 그리고 사람처럼 실수하고 배신하며 잔꾀를 부리고 시기 질투하는 세속적 캐릭터들이다.

 

그런 만들어진 신들이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빌미로 축제 때의 일탈을 즐기기 위함이거나 그것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은 정치가들을 위한 조작된 정치시스템 제공을 위함이었다. 지금 보면 참으로 엉성한 신들이지만 당시 그레코-로만들의 삶과 문화에 깊숙이 인이 박혀 있는 친숙한 캐릭터들이다.

 

조금 나은 부류들 중 철학의 시작 탈레스와 존재란 개념을 처음으로 생각한 파르메니데스, ‘존재를 정의한 소크라테스, ‘이데아시뮬라크르의 개념적 이해를 제공한 플라톤, ‘인문학과 거의 모든 분야의 학문의 시작아리스토텔레스 등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그 이치를 조금 맛본 인간들의 언어적 제한을 살짝 넘는 존재와 삶의 철학을 해명하는 작은 시도들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갑자기 근동의 작은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부터 너무도 혁신적이어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사상이 기독교란 이름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서구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포함한 오리엔탈리즘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로마제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노예들도 고위층이나 평민과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주인과 종이 기독교인이 되면 서로 형제자매라 부른다. 부의 대부분을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대에 각자의 모든 재산을 내어 놓아 모두가 사용하게 하고 전염병이 돌 때 두려움 없이 환자들을 돌본다. 로마제국 군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은 물론 콜로세움의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직전까지 찬송을 부르는 그들을 로마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만신전(萬神殿) 판테온이 표상하는 다신교 사회였던 로마는 교회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1세기 네로,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3세기 하드리아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는 제국의 통일성을 훼손, 황제숭배 거부, 정치적 목적(재해 원인을 뒤집어 씌움), 무신론자 등의 명목으로 시행되었고 많은 성도들이 순교했으며 교회 지도자들도 순교를 피할 수 없었고, 배교자도 있었지만 순교를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기쁨으로 감당한 교부와 감독들과 이름 없는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교회사에 서머나 교회와 관련된 유명한 두 지도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주후120년에 순교한 안디옥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이며 그가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될 때 서머나에 체류하며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4통의 편지를 썼다. 또 다른 사람은 주후 156년에 순교한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인데 둘 다 사도요한의 직계 제자였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한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캅을 노예로 사 왔는데 너무나 총명해서 그녀가 죽기 전 폴리캅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초대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젊은 시절 사도요한을 직접 만나 제자가 되었다. 폴리캅은 주후 115년에 서머나교회의 감독이 되어 주후 15686세의 나이로 순교할 때까지 40여 년간 교회를 섬기게 된다. 그의 성격은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사도바울 못지않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주후156년 로마 15대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 치세 시기 서머나에서 있었던 박해는 너무 참혹했다. 채찍에 온 몸이 찢기고, 창자가 터져 나오고, 세워 놓은 창끝에 눕혀졌고, 고문 후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

 

폴리캅은 자신을 체포하려 로마병사들이 왔을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엄하면서도 온유한 얼굴로 지친 그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권유하였으며, 자신에게는 한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총독 게르마니쿠스는 폴리갑이 워낙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 어떻게든 회유시켜 군중과 그리스도인들의 본보기를 삼으려 했고, 그가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지 말고 회심하라 충고했다. 그러나 폴리캅은 총독에게 나는 86년 동안을 그 분을 섬겨 왔는데, 그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라고 말했다.

 

폴리갑은 못 박히지도 않고(당시 형 집행 중 죄수가 못 견디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못으로 고정함, 폴리캅은 못 박지 않아도 주님께서 견딜 힘을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함) 말뚝에 묶인 채 마지막 기도를 하고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기도의 사람 폴리갑을 본 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기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으므로 그의 기도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많은 사람이 그렇게 훌륭하고 경건한 사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그가 기도가 끝나 갈 무렵 자신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대수롭지 않은 사람,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들을 위해 기도했다.’라고 전해진다. 참으로 장엄하지 아니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주후 272년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나이수스(, 세르비아 니시)출생이며, 사두정치(로마 4분할 통치기) 시기 서방 부제였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와 출신이 비천한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 태어났고, 유년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인으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탄생교회를 건축하는 등 신앙심이 깊은 여인이었다. 아버지의 권력 덕택에 서방 로마의 권력 중심으로 들어가는데 지휘력도 우수해 많은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주후 306년 콘스탄틴은 아버지 사망 후 그는 부하들에 의해 총독으로 추대되었고 312년 이탈리아 반도 통치자 막센티우스를 밀비아 다리 전투에서 물리쳤는데 그 전날 밤 꿈에 나타난 계시에 따라 군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문장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콘스탄틴은 주후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동 로마의 막시미누스 다이어와 리키니우스를 차례로 물리치고 통일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주후 321년 기독교 우대칙령, 주후324년 니케아 공의회 소집, 주후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로 향후 1000년의 동로마 제국의 기틀을 세운다.

 

이러한 대단한 업적에도 그는 첫 아내와 아들을 고문하여 죽이고 여러 악행을 저질렀으며, 세례는 죽기 전에 받는 등 내면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인이었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사의 대단한 업적 때문에 동방교회는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서방교회도 그를 칭송했다. 과연 그의 삶은 장엄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영리하고 노련한 정치인이자 정략적 기독교인이라 함이 적절할 것이다. 드높은 역사적 명예에 비하여 어딘가 간사하며 내면에 어두움이 조금 보이고, 세상 물정에 눈치 보며 기독교인에 대한 로마시민의 인기에 편승하려 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콘스탄틴은 종교 권력에 휘둘릴까 세례도 미루고 어쩌면 기독교를 정치에 활용하려 한 점도 없지 않다. 세속 세상과 영적 세계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 같은 면도 얼핏 보여준다. 어쨌든 그는 세상에서도 영적 영역에서도 성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별로 장엄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반면, 폴리갑은 영적으로 진중하며 삶에 깊이가 있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묵직한 영감을 주는 삶의 장엄함이 있다. 말씀에 집중하며 그대로 살아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실천하므로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그의 삶을 통해 반사시켰다. 밀라노 칙령 이전 수많은 박해 받는 신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쳐 승리할 수 있게 힘을 주었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한 주기철 목사님이나 여순사건에서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 삼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한국전쟁 때 순교한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의 삶이 장엄하다면, 목숨을 부지하려 신사참배를 하고 광복 후에도 또 교회권력에 접근하여 나름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편안히 영면한 교회 지도자의 삶을 장엄하다 할 수 있을까? 그 나마 대단히 존경받는 목사님으로 평생을 헌신하고도 젊은 시절의 신사참배를 가장 영광스런 순간에 고백하며 통회한 분이 계셔서 한국 교회에 희망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 백성 된 성도가 그저 그런 종교인으로 살 수는 없다. 청교도들의 신앙이 모태가 된 백악관 예배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사라진 이 시대에, 초대된 한인 목사님이 설교 말미에 기도하면서 하지 말라는 요청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하니 모인 무리가 은근히 감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은혜로운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속된 표현으로 찌질하게들린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어린 시절에 소돔 고모라의 때에 롯의 집을 방문한 하나님의 사자들(남성의 모습이었음)을 내어 놓으라고 외치는 군중들(남성들)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예순의 나이에 그런 삶을 청교도의 후예인 미국의 대부분의 주 정부들과 종교개혁에 빛나는 루터와 칼빈의 활동영역인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경쟁하듯이 합법화하는 사태가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성소수자들을 핍박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 심리적 육체적 치유가 필요한 문제이지 반드시 보편적 가치화 해야 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야 문명인이다라고 선포할 문제는 더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와 만유재신론, 자연신학의 이해할 수 없는 물결에 정통교회까지 맞장구를 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한 일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장엄하심, 장엄한 문체의 성경 말씀을 시시때때로 묵상하므로 천국 백성의 장엄함을 회복해야 한다. 로마 황제의 명을 받아 아리우스 이단으로 노선을 바꾸라며 병사들을 이끌고 교회로 쳐들어 온 황제의 친위대장을 맨몸으로 막아서서 호통치고, 막대한 헌금으로 회유하려는 황제에게 이 헌금을 받는 것이 교회가 그대에게 베푸는 큰 은혜인줄 알라일갈한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 바질과 같은 영적 호연지기의 회복이 필요하다.

 

콘스탄틴 대제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그와 같은 인재도 당연히 사용하실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나의 신앙, 오늘날 우리의 영성, 동시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포부가 어떠해야 할지 보여주는 샘플로는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이 시대의 성도들을 교묘하게 미혹하는 마귀의 궤계가 맥을 못 추게 하려면 롯과 같은 유약한 신앙보다는 아브라함 같은 우직한 신앙이 필요하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 같은 장엄한신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폴리갑은 장엄한 믿음의 모범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전능자이면서도 우직하게 언약을 지키기 위해 피조물의 형체를 입으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이겨냈다. 죽음을 당하므로 죄와 사망 아래 우리 죄의 값을 담당하고,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하므로 우리를 의롭다 칭함을 받게 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을 중보한다.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견인케 한다. 일방적 은혜로 주신 언약에도 장엄하게 이루어 가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 삼아 그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자들의 당연한 모습은 폴리갑이 보여준 장엄한믿음에 드러난다. 터툴리안이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너무나도 장엄하다.

 

박창신,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편집자 주] 이 글은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이 2024년 봄 학기에 1학년생들에게 개설한 초대교회사(최덕성 교수 담당)의 글쓰기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 글쓴이는 주장(논지)과 논거(주장의 근거)를 알차게 제시한다. 학술 에세이 쓰기의 모범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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