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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생각 바꾸기

 

 

최덕성 교수님의 성령론은 여러 면에서 충격이었다방언에 대한 신학강의를 처음으로 접하면서 오랫동안 방언 곧 방언 기도를 해 온 나의 신앙 생활을 검토했다. 나는 방언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받는 영적인 은사이며, 신앙성숙의 지표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언 강의를 듣고나서 나는 장차 공적 예배나 기도회에서 방언 또는 방언 기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이며, 따라서 나 홀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시간에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성령론 강의는 방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하였다.

 

 

방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방언은 자기 덕을 세우는 수단이 아니며, 실력 자랑의 수단도 아니며, 영적 성숙의 표지도 아니다. 따라서 방언능력을 과시하거나 그것을 자랑하거나 영적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

 

 

최 교수님은 방언이 사람과 사람 간의 의사소통의 수단 곧 '말하기'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가르침이 특히 내게 충격을 주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동안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리 기도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언이 방언기도가 아니라 의사소통 목적의 말하기라는 사실은 나의 생각 바꾸기의 출발점이었다.

 

 

방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꾼 최 교수님의 강의 요점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구약시대의 방언은 아람 방언, 이스라엘 방언, 히브리 방언, 애급 방언 등을 일컫는다. 방언은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한 표현이었다. 바벨탑 사건 때 생겼다. 방언이 마냥 아름답고 감미롭게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선례와 방언에 관한 가르침을 자세히 언급한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방언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의사소통이었다. 맑은 정신으로 또렷한 인식 기능으로 언어 체계를 따라 통역이나 번역이 가능한 언어로 말하거나 알아듣는 초자연적 현상이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여러 지방에서 온 나그네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를 자기들의 자라고 살고 있는 지역의 언어 곧 방언으로 알아들었다. 베드로는 그 메시지를 알아듣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이처럼 예루살렘에 주어진 방언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형태의 방언이 아니었다. 기도 방언이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고린도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쓴 바울의 서신이다. 고린도전서는 교정 서신이다. 고린도는 상업도시 무역도시였다.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파당, 교회 분열, 십자가 오해, 성경 계시 무지, 근친상간, 음행 등이었다. 성도 간의 법정 고소가 성행했으며 도덕적으로 태만하는 것과 육체 부활을 불신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방언은 교정이 필요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는 요점은 방언을 할 때에 회중이 알아듣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해하도록 통역을 세우라고 했다.

 

 

바울은 여러 가지 방언들을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 언어 길리기아와 헬라어 그리고 그가 통달한 유대교 언어인 히브리어와 당시 공용어인 아람어 등을 구사하는 능력을 지녔다. 바울은 헬라어로 여러 교회들에게 서신들을 써 보냈다. 이는 그가 헬라어에도 능통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많이 말한다고 했다. 방언으로 말하려고 하면 통역을 대동하라고 한다. 통역이 없을 때는 입을 닫으라고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기도할 때 자기도 알지 못하고 타인도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42절에서 언급하는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과 자신과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방언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반어법적으로 또는 부정 형태로, 곧 비꼬기 형태로 자신도 모르고 타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고린도의 신전에서 유행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권하는 가르침에서 그러한 방언을 하면서 변명하는 자들의 주장을 도입하여 인용한다.

 

 

얼핏 보기에 고리도전서 142절은 현대 방언, 곧 방언 기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도 알지 못하고 타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현대 방언을 지지하는 것 같이 여겨진다. 방언하는 자들이 자신의 그 방언을 신에게 말하고 영으로 말하므로 따라서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2절에서 언급하는 방언은 이른바 뜻을 알지 못하는 오늘날의 방언 또는 방언 기도가 아니다.

 

 

바울이 고린전서 142절에서 인용하는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고린도의 이교풍 방언에 대한 반어법적 거절이다. 고린도 교회 일부 신자들이 영어로 신에게 비밀로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을 바울은 질책하고 의중하고 경계하면서 142절을 인용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고린도 신전에서 유행하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자면 만트라 형태의 방언을 경계하려고 142절을 도입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방언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바울은 의사소통의 수단인 외국어로 말을 하려거든 통역자를 대동하라고 한다. 바울이 언급하는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인 언어이다. 통역을 언급한 것은 그 언어를 통역하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고린도의 이교 풍 방언을 하는 자들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로 말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가르침에서 그 주장을 반전시킨다. 바울은 무아지경에서 황홀경을 체험하는 형태의 이교 풍 방언을 금한다.

 

 

바울이 긍정적이지만 제한적으로 언급하는 방언은 회중이 알아듣는 범위 안에서 하는 외국어 말하기이다. 회중이 알아듣지 못하면 하지 말고, 꼭 하려고 하면 통역을 세우라고 가르친다. 형편상 통력을 세우지 못할 때는 입을 닫으라고 가르친다.

 

 

최 교수님은 이상의 요점을 설명한 뒤에 오늘날의 방언 곧 방언 기도가 신앙생활에 유익한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유익한 면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방언, 방언기도가 성령이 주신 것인지, 마귀가 준 것인지, 심리적인 결과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고 한다. 판단할 권위를 가진 자가 전무하다고 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판단의 최종 권위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합리적 이해뿐이라고 한다.

 

 

현대 방언 또는 방언기도 지지자들은 방언 기도 덕분에 자신이 자신의 영적 성숙 단계에 도달하고, 영적 성숙의 가속도가 증가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기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방언기도를 하면 마음의 쓴 뿌리가 제거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만짐이 있으며, 영적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방언 기도를 통해 얻는 영적 성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덕적 삶을 살면서 이웃에 대한 관심,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방언,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성령 세례와 동일시한다. 방언이라는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영적 높은 단계로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영적 성숙은 방언과 방언 기도와 같은 인간의 육체나 정신이나 심리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전인적인 인격적 관계에서 자란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회개하고 중생하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데서 출발한다. 영적 성숙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재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의미한다. 영적 성숙의 마지막 단계에 오른 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이 왼손이 모르게 하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주고, 원수를 사랑하며 나아가 그를 위해 기도하는 단계까지 진입한다.

 

 

현대 방언 지지자들은 방언 기도를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영적인 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방언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임했던 방언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방언의 근거를 사도행전 2장에서 찾는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주어진 방언과 오늘날의 방언은 동일하지 않다. 전혀 다르다. 이 두 가지 방어는 성격, 특징, 목적, 의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방어는 초자연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었다.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알아듣는 초자연적인 기적이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 복음, 복음의 비밀 그것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듣고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방언 또는 방언 기도는 전혀 쓸모자기가 없는가? 최 교수님에 따르면 현대방언은 순전한 성령의 은사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사랑하여 억눌림에서 해방하도록 현대의 방언을 은사로 주실 수 있다. 고통, 불안, 억눌림에서 탈출하도록 주신 은사일 수 있다.

 

 

최 교수님은 이러한 종류의 방언이 성경이나 초대교회에 나타나지 않음을 강조했다. 만약 이러한 종류의 방언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그것은 특별 은사가 아니라 일반적인 은사의 차원에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주신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때 마귀가 방언 또는 방언 기도하는 자에게 침투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이다.

 

 

따라서 방언, 방언, 기도 모두가 성령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마귀가 주는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방언의 진정성과 허구성을 분별하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점검해 봐야 하는 것이 명확해 졌다.

 

 

기독교 신앙의 최종 권위는 성경이다. 성경에 근거한 종합적인 판단을 믿음의 기준으로 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의 태도이다.

 

 

최 교수님은 성경이 현대 방언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언어의 장벽이 높은 고린도 지역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덧입음으로 방언 곧 외국어를 잘 말하는 현상을 방언으로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말하는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기도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방언 기도는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이 방언을 더 말하지만, 교회에서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1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선언한다.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을 더 강조한 본질적인 이유는 그 방언의 내용에 대한 깨달음이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맹목적이며, 참 믿음이 아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 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하는 복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오래 동안 방언을 해 왔다. 실제로 방언 기도를 해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에 따라 방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방언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나를 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데 잘 사용하여지기를 바란다. 나는 방언 곧 방언기도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주신 은사라고 생각한다.

 

 

최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그동안 별 생각 없이 방언 곧 방언 기도를 해온 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성령론 강의는 방언에 대한 나의 기존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는 공적 예배나 기도회에서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른바 방언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 자신조차 무엇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그런 유형의 방언히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에 덕을 끼치는 일이라는 신학적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 홀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로 나아가는 시간에만 방언을 하리라 생각한다.

 

 

최 교수님은 신학 수업이 일종의 조율(Tuning) 과정이라고 했다. 다양한 교회 배경과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진 신학도들이 강의실에서 진지하게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활동이라고 했다. 방언, 방언, 기도의 유익과 체험을 가진 신학도가 자기 책임을 성경이나 합리성보다 더 앞세움은 신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모범적인 신학도는 자기 체험을 성경의 모범과 가르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합리적 지적 이해보다 앞세우지 않는다고 했다. 겸허히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경험을 뒤로 제쳐놓는다고 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 성경에 대한 합리적 이해 활동을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나의 경험보다 성경과 성경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제공해 준 최덕성 교수님께 감사하면서 방언을 매우 조심스럽게 하려고 한다.

 

 

최연이,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 2학년 

 

[편집자 주이 글은 브니엘신학교 신학대학원이 2023년 봄학기애 2학년생들에게 개설한 성령론(최덕성 교수 담당)의 글쓰기 과제로 제출한 학술 에세이이다논지는 나는 방언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최덕성 교수의 강의 논점들이 일일이 옳기 때문이다"라는 것이강의에서 배운 것을 간명히 정리하여 그것을 자기 주장의 논거로 삼는다글쓴이의 주장(논지)과 논거(주장의 근거)는 일치한다학술 에세이 쓰기의 모범적인 글이다.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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