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수 6:25)
“나 도서관 갔다올게요.” 교회 다니는 걸 싫어하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예배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목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한 이런 경우의 거짓말을 보통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기분 좋게 해주려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해주거나, 실은 만나기 싫은 건데 괜히 “나 약속 있어요”, “나 바쁜 일 있어요”라고 다른 이유를 대는 경우, 내쫓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마음과는 다르게 말 안 듣는 자녀를 훈계하려고 “너 자꾸 그러면 집에서 내쫓을 거야”라고 괜한 엄포를 놓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이런 선의의 거짓말을 정당하다고 용인해줄까?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용인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전자에 속한 이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우길 좋아하는 실제 사례가 바로 라합의 거짓말이다. 여리고성을 정복하려고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군을 자기 집에 숨겨놓고도 여리고 왕이 보낸 병사들에게는 자기 집에 왔다가 다시 나갔다고 천연덕스러운 거짓말로 둘러댄 대목이다(수 2:1-6). 명백한 거짓말이긴 하지만 자기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 이웃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속한다.
라합은 그 일로 신약성경에서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이요(히 11:31) 행함 있는 믿음의 본(약 2:25)이 된다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여리고성이 멸망당할 때 라합과 온 가족은 그 성에서 유일하게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 엄청난 특혜도 누렸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수 6:25). 성경이 정탐군을 숨겨준 라합의 행동을 큰 보상이 주어질 만큼 잘한 일로 인정했다는 것은 그녀의 거짓말도 암묵적으로 용인했다고 볼 만하다.
라합의 거짓말이 타당했다고 보는 이들은 무엇보다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 벌어진 당시의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보통 전쟁중에는 몰래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활동을 하고 적진을 교란시키려고 라합의 거짓말 같은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게 용인된다. 여호수아도 적군 몰래 숨어 있는 매복을 명령한 것처럼(수 8:4), 전쟁에 가담한 나라들은 전쟁 중에 필요한 경우 의도적으로 적군을 유인해서 혼란에 빠뜨리는 전술을 펼치는데, 이걸 갖고 거짓말했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다.
이런 경우는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게임의 정당한 룰의 하나로 일종의 속임수를 사용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상황과 비슷하다. 축구 선수들이 공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가능하면 상대방을 따돌리고 속여 헷갈리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갖고 거짓말을 한다고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때에 따라 용인된 위장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재미와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 경기의 일종의 룰처럼 정당하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전쟁 중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이스라엘과 여리고성의 대치 국면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권자로 믿고 그분이 이미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알게 된(수 2:9-11) 라합이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신앙에서 이스라엘에 유리하도록 여리고성의 병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정당한 행동으로 인정해줄 만하다고 본다.
성경이 선의의 거짓말을 정당한 것으로 용인해준다고 보는 또 다른 근거는 십계명에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는 아홉 번째 계명의 내용 자체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냥 “거짓말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 거짓말의 대상을 지정하시면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네 이웃에 대하여”라는 말씀을 “네 이웃을 해하려고”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 계명은 이웃을 속여서 그 이웃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이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결국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는 선의의 거짓말은 십계명에서 금하는 거짓말에는 속하지 않는다고까지 여긴다. 이런 거짓말은 세상에서도 악의 없는 ‘하얀 거짓말’(white lie) 또는 ‘직무상의 거짓말’이라고 일컬어 부정적으로 안 본다.
따라서 위급한 상황에서 주권자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수행하려는 정탐군들을 보호하려고 그들을 잡으러 온 군인들을 속인 라합의 행위는 정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동참한 행동이라고 할 만하다.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문자적으로 거짓말하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해서 마냥 외면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진정으로 이웃을 돕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삶속에서도 때때로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한 상황이 있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선의의 거짓말이 덕을 세우는 데 지혜롭게 활용되어야 할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황에서 어떤 형태로든 거짓말은 잘못되거나 남용되기 쉬워서 거기에는 반드시 진리의 확고한 기준이 필요하다. 신자는 손쉽게 선의의 거짓말에 기대려 하기보다 성경과 양심을 통해서 성령님의 목소리를 민감하게 먼저 분별하려는 신중한 과정이 항상 우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성경은 선의의 거짓말이든 뭐든 어떤 형태의 거짓말도 정당하다고 용인해주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 안전하고 현실적이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도 하나님은 그 거짓말 자체를 인정하시진 않는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라합의 거짓말로 두 정탐군이 들키지 않고 도망갈 수 있었지만, 그러한 선한 결과만으로 라합의 속임수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는 게 성경의 원칙이다.
성경의 한 본문이나 사건은 항상 성경 전체의 메시지에 비추어서 해석하고 평가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성경은 전반적으로 찬성하고 있지 않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과 관련된 이야기 역시 윤리적인 규범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실제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 묘사하고 그 정황을 알리는 데 초점이 있다. 따라서 라합의 행위에서 윤리적인 일반 원리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는 무리하다.
여호수아 2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가나안땅에 살던 이방 사람들의 좋지 않은 풍습에 젖어 있어서인지 예기치 못한 위기상황을 맞았을 때 그냥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준을 따라서 전혀 주저함 없이 거짓말을 내뱉은 듯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정말 라합이 성경 속의 진실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깊이 알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받은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에 속하는 거짓말 금지 명령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쉽게 거짓말을 했을까 싶다.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다른 방책을 찾아보려고 했을 수도 있다.
지금과 같은 마지막때는 작은 거짓말을 포함해서 사소하다고 여기는 죄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삼가야 할 때다. 작은 거짓말도 중대한 거짓말과 비슷하게 심각한 죄가 될 수 있다고 느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안 하면 매사에 죄가 없다고 여겨 진실한 회개의 필요성 또한 내내 못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 현장에 와서 기도할 때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해서 그 기도를 안 듣겠다고 말씀하셨다(사 1:15). 이 말씀에는 죄를 지은 당사자들이 정작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모른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실제로 죄를 지을 때마다 피가 손에 조금씩이라도 엉기게 된다면 못 알아챌 리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고 할 만큼 심각하게 여기시는 죄는 보통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하는 작고 사소한 죄들이다. 평소에 자신이 손해를 안 보거나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 거의 반사적으로 거짓말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작고 사소한 거짓말도 예사로 하게 되기 쉽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고, 작은 거짓말이 나중에 큰 거짓말이 된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경계하듯(아 2:15) 평소에 이런 작은 죄도 용납하지 않아야 큰 죄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거의 동급으로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을 정죄하신다(계 21:8). 주의 장막과 성산에 거할 자의 첫 번째 자격 요건으로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시 15:2) 자를 꼽으신다.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게, 무조건 경직되게 원칙만 중시하는 꼰대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다. 작은 거짓말도 피하려 하면서 최대한 사실 그대로 말하되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보다 더 지혜롭고 따듯하게 상대방을 배려해줄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습관이 몸에 베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거룩은 바로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죄들을 삼가며 때마다 성령님께서 민감하게 자각하게 해주시는 올바른 지혜와 지식으로 반응하고자 하는 삶이다. 그럴 때 비로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마 10:16) 참 제자의 삶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다.
- 안환균, <주만나>(꿈이 있는 미래) 2022년 8월호 바이블 칼럼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