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원제: 언어게임,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변선환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지닌 의의와 한계에 대한 비판적 고찰
Ⅰ. 들어가는 말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변선환 박사는 감리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의 주재로 열린 종교재판 끝에 교단에서 출교 당한다. 당시 재판에 제시된 기소장은 변선환의 신학을 ‘종교다원주의’라고 규정한 뒤, 이러한 신학이 ‘포스트모던 신학’과 마찬가지로 성경과 감리교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 사상이라고 지적하였다.2
변선환 추모 20주기를 맞이한 오늘날의 한국 감리교회는 점차 중요성을 더해가는 ‘종교 간 대화’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그의 신학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본고는 변선환의 신학에 대한 이와 같은 최근의 재조명이 그 신학에 이단적 사상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도록 만든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본고는 이 두 가지 논의의 뿌리에 있는 언어 ‘화용론(pragmatics)’에 대한 현대철학의 핵심적인 논의들을 고찰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배경을 해명하고, 이를 통해 변선환의 신학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본고는 먼저 후기 비트겐슈타인 이후 현대철학 내부에서 강조된 언어에 대한 ‘화용론적’ 접근들이 어떻게 ‘메타서사(metanarrative)’를 공격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를 이끌어내었는지 해명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타종교를 신학의 ‘주체’로써 이야기하는 변선환의 ‘타종교의 신학’이 정당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평가할 것이다(Ⅲ). 하지만 변선환 역시 ‘신중심적 다원주의(theocentric pluralism)’를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에 내재된 급진성을 일관적으로 주장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비판할 것이다(Ⅳ).
Ⅱ. 언어 화용론과 메타서사의 붕괴: 언어게임,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1953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유작인 『철학적 탐구』가 출간된 이래로 ‘언어게임(language-game)’이라는 개념은 놀라운 파급력을 지니고서 철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의 각 분야로 퍼져나갔다. 언어의 의미를 원자적 명제와 원자적 사실 사이의 1:1 대응에서 찾으려고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과 달리,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철학은 우리의 언어사용을 게임의 상황에 비유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언어를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언어들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논리 규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언어들은 그 언어가 사용되는 개별적인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에 맥락초월적인 규칙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다. 언어의 이러한 특성은 게임의 특성과도 유사하다. 축구 게임, 야구 게임, 체스 게임, 카드 점치기 게임 등과 같은 개별 게임들은 각자의 규칙에 따라 진행될 뿐이다. 축구 게임의 규칙을 야구 게임에 적용할 수가 없고, 체스 게임의 규칙으로 카드 점치기 게임을 진행할 수는 없다. 각 규칙은 자신의 게임 상황 내부에서 의미를 지니는 고유한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역시 그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규칙을 획득하게 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언어게임의 규칙은 다른 언어게임의 규칙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모든 언어게임을 포괄하는 보편적 규칙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진술하는 대신, 나는 이러한 현상들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모두에 대해 같은 낱말을 사용하게 만드는 어떤 일자(one thing)가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것들은 서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근친적(related)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친성(relationship) 또는 근칭성들(relationships)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언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3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은 언어를 행위와 관련지어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용론적(pragmatic)’이다. ‘화용론’은 문법적 구조나 단어의 사전적 정의와 같은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언어사용의 상황으로부터 언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사실 화용론에 대한 연구 자체는 이미 퍼스(C. S. Pierce)의 기호학에서부터 제시되었지만, 이 분야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공헌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학문적 발전의 과정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비트겐슈타인은 퍼스와 달리 화용론을 단순히 언어에 대한 여러 접근법들 중 하나로서 병렬적으로 두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분야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사용의 상황을 벗어난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어사용 자체가 발화자들 사이의 맥락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화용론은 언어 연구의 근본적인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정보전달의 역할을 넘어서 발화자들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고 행위를 일으키는 수행적(performative)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관련된 오늘날의 논의들은 언어에 대한 화용론적 접근방식이 리오타르(J. F. Lyotard)에 의해 사회 연구에 적용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언어 화용론적 연구방법을 도입하여 후기산업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메타서사(metanarrative)의 붕괴를 설명하고 있다.4 리오타르에 따르면, 인간은 전통 사회에서부터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의 컴퓨터화된 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사(narrative)’의 형식을 통하여 지식을 형성하였다. 각 사회는 자신의 정당성을 근거지우는 ‘신화’와 같은 종류의 거대한 이야기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들과 여러 종류의 지식들은 이 이야기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이래로 개별 담론들을 밑에서 떠받쳐주는 거대한 서사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리오타르는 메타서사에 대한 의심을 통해 사회가 점차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감각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적 국면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그는 현대사회에 대한 자신의 진단을 정당화하고 포스트모던적 변화를 옹호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언어게임 이론은 각각의 개별적 언어게임들을 포괄하는 거대한 보편적 언어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메타서사를 비판한다. 즉, 언어게임의 일종으로서 개별 담론들은, 더 근본적인 서사에 의해 근거지어질 필요 없이, 그 개별 담론이 속한 공동체의 게임 규칙 속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거대한 서사를 제시함으로써 특정 위계질서를 절대화하고 개별 언어게임들을 그 속에 위치 지으려는 시도는 각 공동체들의 언어게임 규칙을 파괴하는 일종의 테러 행위라고 비판받는다.5 따라서 리오타르는 이러한 테러 행위에 반대하기 위해 메타서사에 대한 현대사회의 의심을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그는 사회가 보다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존중하는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이란 바로 거대한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이다.6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계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는 주제 역시 언어게임 이론으로부터 발원된 포스트모던적 문제의식들과 무관하지 않다. 문화 전체의 양상이 차이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됨에 따라 종교 다원주의 역시 보다 튼튼한 사회적, 학문적 기반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메타서사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였던 언어게임 이론의 논리는 이제 그리스도교 신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만일 메타서사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뒤에는 서로 이질적인 개별 언어게임들만이 남게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배타주의적 주장이 그 설득력을 상실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종교전통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L. Newbigin)이 지적한 대로,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의 배후에는 ‘도그마(dogma)에 대한 반발’, 곧 메타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7
변선환은 현대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을 의식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종교 다원주의 신학을 옹호하였다. 변선환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그가 1993년 세계종교대회 백주년 기념대회 즈음에 쓴 논문인 「종교간의 대화 백년과 전망: 세계종교대회를 중심하여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타종교를 대하는 그리스도교 태도가 기존의 배타주의적 입장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 성취설(아퀴나스, 리치) 및 보편설(라너, 한스 큉) 같은 포괄주의적 입장 또한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8 특별히 변선환은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하는 한스 큉(H. K ng) 입장을 반박하며, 큉의 포괄주의적 입장이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에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큉은 종교 다원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철저하게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전히 타종교에 대해 기독교 우월적인 위계질서를 강요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변선환은 포괄주의 신학을 ‘숨겨진 종교 제국주의’와 ‘소프트 배타주의’라는 용어로 묘사함으로써, 큉의 신학적 구상이 충분히 포스트모던적인 것이 아니라 “모던적인 너무나도 모던적인” 것이었다고 비판한다.9 그는 포괄주의보다는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욱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보편성과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에큐메니칼 신학에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큉의 신학은 정말 스스로부터 성실하고 철저하게 패러다임 전환을 하고 있을까 큉은 계속 종교 다원주의 신학에 대한 소아병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고백을 포기하도록 하게 하는 무관심주의, 상대주의, 무차별주의,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유한성과 문화와 역사의 제약성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도 한계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원주의 패러다임은 포괄주의 패러다임보다는 에큐메니칼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훨씬 합리적이며 설득력을 갖고 있는 사유의 틀인 것만은 틀림없다.10
언어게임 이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큉의 포괄주의적 패러다임에는 언어게임들을 근거 짓는 거대한 메타서사에 대한 믿음이 여전히 전제되어 있다. 큉은 개별 종교들의 언어게임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게임의 규칙이 존재하며, 바로 기독교가 이러한 규칙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리오타르가 정의한 대로 ‘포스트모던’을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해할 경우 큉의 신학이 충분히 포스트모던적이지 못하다는 변선환의 지적은 타당하다. 오히려 포괄주의조차 거부한 채 철저한 종교 다원주의적 전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변선환의 신학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적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따르면, 각 종교의 언어게임 규칙들은 기독교와 동등하게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즉, “타종교는 더 이상 기독교에 의하여 저주받고 정복되며 흡수(용해) 통합되기 위한 존재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타종교는 ‘복음에로의 준비(preparatio evangelica)’를 위해서 존재하는 단순한 ‘몽학선생’(갈, 3,24)이 아니다.”11 언어게임을 통합할 수 있는 근거인 메타서사가 사라지게 되었으므로, 개별 언어게임의 규칙들이 그들만의 고유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Ⅲ. 기독교 신학의 주체로서 타종교: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 다원주의의 상황 속에서 언어게임들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다양성을 철저하게 해명할 수 있는 보편적 규칙의 존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언어게임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즉, 언어게임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개별 언어게임들을 근거지우는 메타서사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논거로 작용한다. 사실 언어의 의미가 개별적인 언어사용의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는 주장만으로는 메타서사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 아직 부족하다.
만일 우리가 모든 언어사용의 맥락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개별 언어게임의 다양한 규칙들을 완전히 포괄하는 메타서사를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어게임이 결코 완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으로 인해 언어게임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언어게임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 앞에 개방된 상태로 남겨져 있으므로, 우리는 결코 특정 시점의 규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절대화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들이 존재하는가 가령 주장, 물음, 그리고 명령 이런 종류는 무수히 많다: 우리가 “기호들”, “낱말들”, “문장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무수히 많은 상이한 종류의 사용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고정된 것, 딱 잘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새로운 유형들, 새로운 언어게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고, 다른 것들은 낡은 것이 되어 잊어진다.12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 G. Gadamer)는 언어가 미래에 대한 개방성 속에서 변해가는 과정을 ‘역사성(historic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이질적인 언어와의 만남 속에서 부단히 수정된다. 과거의 언어사용은 현재에 새롭게 다가오는 언어사용과 마주치는 과정을 통해 갱신되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렇듯 역사의 진행 가운데 과거와 현재가 충돌함으로써 이전 상태가 끊임없이 극복되는 구조를 ‘역사성’이라고 부른다.13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다머는 이 역사성의 구조로부터 얼핏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한편으로 가다머는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완결되지 않은 역사로 인해 ‘역사성’의 구조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유한성(finitude)’을 발견한다.14 앞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타자적 언어가 다가오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상태로 남겨져 있으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점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결코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다머는 바로 이 역사성의 구조가 언어들 사이에 역동적인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역사가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적 언어들에 대해 언제나 개방되어 있으며, 그 언어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 자신의 언어를 더욱 확장시키고 변형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15
이렇듯 ‘역사성’은 언어게임을 제약하는 동시에 개방시켜준다. 언어게임은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언어게임과 대면하는 가운데 점차 새롭게 형성된다. 역사성의 제약으로 인해 우리의 언어게임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결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타자적 언어게임의 도래 앞에 열려 있을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방성 속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타자적 언어게임과의 대화하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언어게임을 점차 만들어나간다. 우리의 언어게임은 타자적 언어게임과의 만남 속에서 점차 새롭게 형성되고 성장하며 깊어진다.
만일 우리의 언어게임을 보다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하려 할 경우, 우리는 타자적 언어게임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대화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성이 레비나스(E. Levinas)가 말한 ‘환대로서의 주체성’이라 할 수 있다.16 우리의 언어게임은 결코 미리부터 주체성을 지닌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적 언어게임을 환대함으로써 비로소 진정으로 그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역시 바로 이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변선환은 진리를 파악하는 일이 언제나 제약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진리에 대한 표현 역시 ‘상황화’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는 이를 통해 기독교 전통이 타종교에 비해 진리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고백과 신앙은 기독교의 언어게임 규칙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모든 언어게임이 역사성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상, 기독교의 언어게임 또한 자신의 완결성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완결되지 않은 언어게임의 일종으로서 기독교 전통은 끊임없이 자신을 타종교와의 대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는 기독교의 언어게임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밝아 오는 대화의 시대에서 진리는 더 이상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이거나 독백적이거나 배타적일 수 없다. 진리는 비절대적(상대적)이며 역동적이고 대화적이며 관계적이다. 경험된 진리, 개념으로 명제화된 진리(교리)는 역사성과 언어의 한계성, 사회와 문화의 하부구조에 의하여 제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화의 시대에 살아갈 수 있는 개방적인 새 사람, 진리의 역사성과 함께 진리 체험과 그 표현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종교인은 타자를 적으로 보지 않고 진리의 길에 나선 길벗(道伴)으로 보며, 서로 배우고 이해하며 자기 생각을 비절대화하고, 인간 관계를 가질 줄 아는 대화적 사고, 비판적 사고의 세계에서 살아갈 줄 아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17
변선환은 개방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타종교의 신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변선환에 따르면, “타종교는 서구 신학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신학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이며 신학의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주체가 되므로 ‘타종교와 신학’이 아니라 ‘타종교의 신학’이 새로운 주제가 되게 된다.”18
이러한 그의 주장은 대단히 급진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전까지의 기독교 신학이 타종교를 기독교와 무관하거나 기독교가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면, 변선환은 오히려 타종교가 기독교의 내용을 근거 짓는다고 이야기한다.19 그는 타종교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그 힘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기독교 신학은 타종교와의 만남 속에서 자신을 갱신시키고 수정해나갈 수밖에 없다.
이질적인 맥락 안에 들어온 기독교 신학은 결코 자신을 본래 모습 그대로 남겨 둘 수 없으며, 그 맥락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 자체를 새롭게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이라는 술을 어떠한 그릇에 넣을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술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이다.20 따라서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배우고 성장함으로써 비로소 기독교 자신이 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타종교는 기독교 신학의 주체이며, 기독교 자신의 주체성은 타종교와에 대한 개방적 환대를 통해 형성된다.
종교간 대화에서 타종교를 기독교 신학의 주체로서 주목하는 변선환의 입장은 포스트모던적 논의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한스 큉을 비롯한 종교다원주의 반대 진영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이 무차별적인 혼합주의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합주의에 대한 우려는 ‘기독교’라는 신앙이 마치 애초부터 완성된 형태로 고정되어 있다는 식의 허구적인 믿음을 전제할 때에만 제기될 수 있을 뿐이다.
언어게임이 역사성의 구조 속에 놓여 있는 이상, 변함없는 형태로 지속되는 언어게임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실제 세계사 속의 기독교도 끊임없는 문화의 충돌을 거치며 오늘날의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 기독교는 고대근동 문화권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로마 문화권을 만나는 과정에서 이들 문화권으로부터 수많은 영향을 받으며 지금까지 성장한 것이다. 이 때문에 변선환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이질적인 문화에 접목하여 토착화시키는 과정을 강조한다. 타종교를 비롯한 이질적인 문화적 맥락과의 대화란 본래부터 기독교 내부에서 항상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 이러한 변선환의 생각은 그가 자신에게 제기된 기소장에 대해 쓴 해명의 글 속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혹자는 인도 신학자 토마스, 사마르타, 파니카(M.M. Thomas, Stanly Samartha, Raymond Panikkar)의 신학을 힌두교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며 정죄합니다. 그러나 희랍철학이나 독일철학을 사용하여서 만든 서구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유독 힌두교나 불교나 유교와 같은 동양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비판하는 이유를 본인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21
Ⅳ. 신중심적 다원주의의 문제점: 언어게임,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를 철저히 주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들 사이의 관계를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각각의 언어게임들이 서로 엇비슷하게 닮아 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개별적인 언어게임들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언어게임을 찾을 수가 없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언어게임들 사이의 어슴푸레한 근친성 밖에 없다. 한 게임은 다른 게임과 특정한 측면에서만 닮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게임에 대해 맥락초월적인 공통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축구게임과 농구게임은 ‘공’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농구게임과 카드게임은 ‘손’을 통해 게임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축구게임, 농구게임, 카드게임은 모두 게임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게임들은 서로 엇갈리게 닮아 있을 뿐, 이들 모두를 묶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론되는 게임의 종류가 더욱 많아질수록 그 게임들에서 어떠한 보편적인 특징을 찾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유사성을 ‘가족’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이러한 유사성들을 ‘가족 유사성’이란 낱말에 의해서 말고는 더 잘 특징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몸집, 용모, 눈 색깔, 걸음걸이, 기질 등등 한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유사성들은 그렇게 겹치고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게임들’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22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힉(J. Hick)은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종교들 사이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시킨다. 힉은 “아마도 종교라고 불리는 어떤 것의 모든 속성을 포함하는 한 가지 특성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종교는 ‘가족 유사성’처럼 일련의 유사한 속성들의 모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3라고 말한다. 가족 유사성을 통해 종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힉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개별 종교 전통들로부터 보편적인 공통점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종교들 사이의 위계질서와 경쟁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개념 아래에 모든 개별 종교 전통을 포괄할 수 있는 본질이 제시될 경우, 그 본질을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느냐가 각 종교들을 평가하는 척도로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힉은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 C. Smith)의 주장을 수용하여 ‘종교’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개별 종교들의 이름과 ‘종교’라는 단어는 18세기에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이전의 개별 신앙의 전통들은 그들을 서로 경쟁하는 대립적인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종교’라는 이름 아래 각 신앙전통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고 그들 사이에 우열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여러 종교들에 대해 “그들 중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 ”와 같은 사이비 물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힉에 따르면, 이러한 물음은 마치 한 문명을 참된 것이라거나 거짓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처럼 그 시작에서부터 잘못 방향 잡혀 있다.24 이 때문에 힉은 ‘종교’라는 임의적인 범주에 의해 잘못 설정된 경쟁 관계를 비판함으로써 개별 종교들을 상호배타적 체제로 이해하는 관점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종교를 그 각각의 특성을 가진 상호 배타적인 체계로 생각하는 이 개념은, 비록 지금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렸지만, 좋은 의미의 형용사를 나쁜 의미의 명사 상당어구로 변환시키는 부정적인 구체화의 한 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유럽의 사상이 빠지기 쉬운 좋지 않은 경향이며, 현대철학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서 경고해왔다. 이 경우에 강력하지만 왜곡시키는 개념화, 즉 세계의 종교들이 서로를 적대적인 이념 공동체로 간주하는 개념화가 그것에 대답할 수 있는 현상들을 만들어내도록 도와주었다.25
그런데 힉은 이와 같은 분석과 동시에 ‘신중심적 다원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다시금 일종의 보편성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힉에 따르면, 모든 종교들은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절대자(the Absolute)’, ‘영원한 일자(Eternal One)’라고 불리는 대상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개별 종교들이 저마다 다른 전통 속에서 이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들 모두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궁극적 실재를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힉은 모든 종교가 초월적인 ‘실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같이 올바르며 진리라고 이야기한다. 인간 경험의 한계 때문에 실재 그 자체를 완벽하게 그려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개별 종교들이 실재의 여러 측면들을 나타내주고 있다면 이들 모두는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힉은 바로 이 신중심적 특징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근거를 찾고자 한다.26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기독교가 배타적 절대성으로부터 벗어나 타종교와의 긍정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교리에서부터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교리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27
변선환은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를 수용하여 자신의 ‘신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한다.28 즉, 한편으로 변선환은 힉을 따라 신앙의 무게중심을 ‘그리스도’에서부터 ‘신’ 혹은 ‘실재’로 옮긴다.29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기독교 신학은 선불교와의 만남에서 계시신앙의 배타적 절대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동양의 인간화를 위하여 저들과 열려진 대화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30 바로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의 궁극성에 대한 근거를 기존 기독론의 사변적 규범에서가 아닌, 구원과 해방을 위한 실천(praxis) 속에서 두고자 한다.
변선환에 따르면, 구원의 규범이란 유일회적인 역사의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게 제약되어 있지 않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예수를 통해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과 만나지만, 실재와의 만남이 반드시 역사의 예수라는 배타적 규범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선환이 인용하는 레이몬드 파니카(R. Panikkar)의 입장대로,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명제는 그리스도는 예수이다라는 명제로 전도될 수가 없다.”31 오히려 그리스도의 궁극성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 체험이 이루어지는 실천이다. 역사의 예수가 유일회적인 구세주로 고백될 수 없는 것도,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투쟁한 그의 실천 가운데서 우리가 ‘실재’로서의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선환은 종교간 대화의 근거로서 ‘신 중심’과 함께 ‘실천 중심’을 이야기한다. 신중심적 전회는 해방을 위한 실천이 수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실천은 신중심적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변선환의 ‘신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은 종교간 대화를 모색하는 ‘타종교의 신학’인 동시에, 그 대화가 해방의 경험을 근거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해방신학’인 것이다.32
그러므로 지구윤리의 비전과 과제는 기독교의 철저한 자기비판과 죄책고백(회개)을 동반하는 상호변혁의 길을 통한 교제의 진리, 대화의 진리로서 추구되는 신 중심, 실천(praxis) 중심 대화가 되어야 한다.33
그러나 ‘신중심적 다원주의’에 대한 표방이 과연 종교 다원주의의 패러다임을 철저하게 견지할 수 있는 것인지는 상당히 의문스럽다. 개별 종교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다시금 그 종교들을 포괄할 수 있는 추상적인 ‘실재’로서의 신을 상정하려는 시도는 결국 모순에 빠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도들은 포괄주의적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무너뜨리려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슬그머니 수용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과 가족 유사성 개념을 일관되게 견지한다면 개별 종교들을 설명하기 위해 ‘실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실재’를 상정하는 일은 단지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게임을 만드는 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언어게임을 통해 다른 언어게임들을 모두 해명하려 하는 것은, 한 언어게임의 규칙을 다른 언어게임의 규칙을 이용하여 억지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가 지닌 모순은 분명해진다. 힉이 비트겐슈타인과 스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종교’라는 개념이 인위적임을 비판하였다면, 그는 ‘신’이라는 개념 또한 인위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근대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만들어진 ‘종교’ 개념에 실제로는 어떠한 개별 종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그가 제시한 ‘신’ 개념에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힉의 ‘신’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야훼도, 이슬람교의 알라도, 불교의 부처도, 힌두교의 브라흐만도 아니다.34
이때의 신은 힉이 창안해 낸 새로운 종교 언어게임에서 사용되는 한 단어일 뿐이며, 소위 ‘철학자의 신(God of the philosophers)’이라고 불리는 대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 신을 상정한 채 개별 종교들이 모두 이 신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감춰진 폭력을 낳을 수 있다. 힉의 주장은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아무 종교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힉 자신이 제안하는 새로운 언어게임의 법칙을 암묵적으로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계신학(a world theology)’, ‘하나의 지구신학(a global theology)’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힉의 주장은 따라서 매우 의심스럽다.35
힉의 ‘신중심적 다원주의’를 수용한 변선환의 신학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모순에 빠진다. 변선환은 신중심주의를 해방신학적 관심과 결합시킴으로써 힉보다 더 세련된 형태의 종교 다원주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역시 힉이 봉착한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종교들이 동일한 신적 실재를 향해, 동일한 인간 해방의 관심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주장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인간 해방 운동이 과연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과정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인지, ‘범아일여’를 최상의 경지로 보는 힌두교의 신앙과 과연 합치될 수 있는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인간 해방’이라고만 제시되는 막연한 종교적 중심은 개별 종교들의 관심을 포괄하기에는 너무나도 피상적일뿐더러, 더 나아가 각 종교들의 고유한 언어게임을 왜곡시켜 드러낼 우려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종교 다원주의 패러다임을 철저하게 견지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의 언어게임을 넘어서는 ‘실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타종교에 대한 존중은 그 종교들이 우리와 동일한 ‘실재’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실재’를 상정하고서 타종교를 바라보게 될 경우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어느 쪽이 더 그 ‘실재’에 가깝고 먼지에 대한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미 ‘실재’가 상정되었을 때부터 새로운 종류의 언어게임이 만들어졌으며, 그 언어게임의 규칙을 통해 다른 언어게임들을 평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정한 존중과 대화는 개별 종교들이 그 종교 내부의 언어게임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타나야 한다. 상대 종교의 교리와 제의들은 그 종교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맥락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참과 거짓을 평가할 수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달리기 선수와 수영 선수를 비교하는 사례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종목이 다른 두 선수 중 어느 선수가 우수한지 질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수영 선수와 달리기 선수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이유는, 두 선수 모두가 공통된 게임의 규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서로의 게임 규칙이 다르다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타주의의 극복 역시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각 종교들 사이의 공통점이 아닌 차이를 자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Ⅴ. 나가는 말
본고는 ‘언어게임’, ‘포스트모더니즘’, ‘종교 다원주의’ 사이의 관련성을 밝히고 이에 근거하여 변선환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이해해 보았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명칭으로 대표되는 메타서사에 대한 불신에서 유래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언어 화용론’에 의해 학문적으로 지지되고 있다. 변선환의 종교 다원주의 신학 역시 포스트모던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배타적 절대성을 의심하며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완결된 형태로 고정된 신앙이 아니라 타종교들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변화하고 성숙해 나가는 종교라는 점에 주목하여 ‘타종교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기독교의 주체성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형성된다는 변선환의 이러한 생각은 종교간 대화에 대한 다른 종류의 패러다임들에 비해 급진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선환은 ‘신중심적 다원주의’ 모델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신학적 급진성을 철저하고 일관되게 전개하지 못하고 말았다. 개별 종교들을 근거 짓는 ‘실재’로서의 신을 상정함으로써 그 자신이 비판하였던 포괄주의적 입장을 암묵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직면한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타종교에 대한 존중의 근거를 타종교의 언어게임 자체로부터 찾는 일이 필요할 것이라 여겨진다. 개별 종교들이 진리를 품고 있는 이유는, 이들 모두가 공통된 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게임 각자가 지닌 고유한 규칙들 때문이다. 다른 언어게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 고유한 규칙들을 존중하며 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종교 다원주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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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본 논문은 ‘일아 변선환 학장 20주기 기념 논문 및 독후감 공모’에서 장려상으로 입상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2. “위 자(변선환)는 [……]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여 기독교가 타종교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나 구원이 타종교 속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고 피력하여, 지난 19회 특별총회(1991. 10. 29~31. 광림교회)에서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의 입장은 감리교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결의하고 동시에 이와 같은 신학을 주장하여 교회확장사업에 장애물이 되는 이에 대하여 의법조치하자는 결의사상에 의거하여 명백히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교리와 장정 제17단 9조, 교리와 장정 제13단 5조)에 위배되는 중대한 범과를 자행하였다.”(최대광, 「변선환을 위한 변증」,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 신앙과지성사, 2011, 222쪽 재인용.)
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영철 역, 책세상, 2006, Ⅰ, §65 원저자 강조.
4.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이삼출·민승기 역, 민음사, 1995 49-54쪽 참고.
5. Ibid., 156쪽; 161쪽.
6. Ibid., 34쪽.7.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홍병룡 역, IVP, 15-59쪽.
8. 변선환, 「종교간의 대화 백년과 전망: 세계종교대회를 중심하여서」, 『종교간 대화와 아시아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9, 23-24쪽.
9. Ibid., 45쪽.
10. Ibid., 39쪽.
11. Ibid., 24쪽.12.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Ⅰ, §23.
13.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제2권, 임홍배 역, 문학동네, 2013, 261쪽.14. Ibid., 266-267쪽.15. Ibid., 290쪽.
16. 강영안, 「레비나스:타자성의 철학」, 『철학과 현실』, 제25권, 철학문화연구소, 1995, 164쪽.
17. 변선환, 「종교간의 대화 백년과 전망: 세계종교대회를 중심하여서」, 23쪽.
18. 변선환, 「타종교와 신학」, 『종교간 대화와 아시아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9, 181쪽.
19. 이찬수, 「“타종교의 신학”: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다시 본다」, 『변선환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 145쪽.
20. 변선환, 「동양종교의 부흥과 토착화신학」, 『변선환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 84쪽.
21. 최대광, 「변선환을 위한 변증」,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 244쪽 재인용.
22.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Ⅰ, §67.
23. 존 힉, 『종교철학』, 김희수 역, 동문선, 2000, 14쪽.
24. Ibid., 209-210쪽.25. Ibid., 208쪽.26. Ibid., 219-223쪽.
27. 존 힉,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이찬수 역, 窓, 1991, 41쪽.
28. 이찬수, 「“타종교의 신학”: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다시 본다」, 158쪽.29. 변선환, 「타종교와 신학」, 203쪽.
30. 변선환, “나의 신학 수업”, 『종교다원주의와 한국적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2, 29쪽.
31. 변선환, 「타종교와 신학」, 202쪽.
32. 이찬수, 「“타종교의 신학”: 변선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다시 본다」, 151-155쪽.
33. 변선환, 「종교간의 대화 백년과 전망: 세계종교대회를 중심하여서」, 53쪽.
34. 김기현, 「존 힉(John Hick)의 종교 다원주의 인식론 비판」, 『기독교와 인문학』, 제3권, 백석대학교 기독교철학연구소, 2005, 69쪽.35. 존 힉,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23쪽.]
위 글은 사이버공간에서 옮겨온 것이다. ‘일아 변선환 학장 20주기 기념 논문 및 독후감 공모’에서 장려상으로 입상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저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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