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사본학 이야기
제1장: 사본학! 왜 필요한 것인가?
사본학(정확하게 말하자면, 본문비평학=textual criticism)은 왜 필요한 것인가? 메쯔거의 신약사본학 책을 읽다보면 지겨워 성질이 나기 시작하고 드디어 책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사본학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잡아 죽인다는가? 괜찬혀(괜찮아)...! 그래서 많은 신학도나 신학자들은 "네슬판의 본문=원문"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신학을 한다.
하지만, 서양학자들에게는 네슬판 신학이 자기들의 사본학적 결과 위에서 출발하는 신학일지 몰라도, 우리 한국 학자들에게는 이 네슬판 신학은 종속 신학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굳이 그런 종속 신학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 어쩔 것인가? 메쯔거나 알란트의 신약 사본학책을 다 읽는다고 네슬판보다 더 좋은 본문을 복원할 재주가 생기는가? 그런 재주가 책 한 권 읽고 생기면 누가 네슬판을 붙들고 있겠는가?
이러한 틈에 비집고 들어와 세상을 온통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으니, 이른바 네슬판의 본문보다 "다수 본문" 또는 "공인 본문"을 원문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현대 사본학의 비정규군(비주류파) 즉 게릴라들이다. 이들은 네슬판을 심지어 "마귀의 성경"이라고 몰아붙이며, 목청을 높혀 킹제임스 역본 뒤에 있는 헬라어 본문인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나 이와 유사한 "다수 본문"(The Majority Text)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 게릴라들의 주장은 옳은가? 네슬판 종속 신학이냐? 게릴라 야전 신학이냐?
이 게릴라들은 한국에까지 상륙하여 소위 "말씀보존학회"를 만들었다. 한국에 상륙한 게릴라들은 꽤 용감하게 전투를 벌여 많은 성도들을 혼란에 몰아 넣었다. 사본학자가 거의 없는 한국은 이 게릴라들이 전투하기에는 대단히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헬라어 "공인본문"도 아닌 영어 킹제스임스 역본을 번역한 성경이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사서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하며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사본학 논쟁은 따분한 알란트나 메쯔거의 사본학 입문서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것이다. 또한 이 현대 사본학 논쟁을 구경하다보면, 사본학에 입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수 본문 논쟁"을 다루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본학 입문이라 믿는 바이다. 과연 대부분의 성경의 아버지인 네슬판은 악마의 성경인가? 과연 킹제임스 역의 아버지인 다수 본문은 우월한가? 이러한 질문으로 고민해본 적이 있는 분은 이미 사본학에 입문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신약 사본학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킹제임스역을 신봉하는 말씀보존학회에 사본학자가 있을 리 있겠는가? 이러한 현상은 해외에도 매한가지이다. 다수 본문 지지자들이 만든 학회에는 사본학자가 거의 없다. 혹자는 Sturz를 언급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엄밀히 따지면 중립파이다. 네덜란드의 반 브루헌과 그의 제자 비셀링크는 이 진영에서 언급될 수 있는 사본학자이지만, 그들도 실은 중립파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니, 한국의 상황은 어떠하겠는가? 사본학은 커녕 헬라어도 잘 모르는 자들이 킹제임스역을 운운하며 개역성경을 악마의 성경이라 매도하는 있는 기가 막힌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본학은 단지 네슬판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성경을 복원하기 위한 거창한 작업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 상륙한 킹제임스의 파르티잔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 파르티잔도 감당 못하는 전투력으로는 저 뮌스터의 네슬판 정규부대와의 대결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킹제임스의 비정규부대들과의 실전적 전투훈련은 저 나찌 독일군과의 전투를 위한 좋은 준비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킹제임스의 비정규부대원들이 만든 말씀보존학회에 감사하는 바이다. 그들은 한국 사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자들도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학문은 도전과 응전에 의해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파르티잔과 같은 적군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본학! 왜 필요한 것인가? 단지 말씀보존학회와 대결하며 네슬판을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네슬판을 변호하느니 차라리 말씀보존학회에 지원사격을 하며 네슬판을 박살내는 것이 더 통쾌할 것이다. 아니면, 왜 사본학이 필요한 것인가? 네슬판을 박살내고 에라스무스가 장사 속으로 급히 출판한 헬라어 성경에 뿌리를 둔 이른 바 공인 본문을 변호할 것인가?
아니다.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이나 킹제임스 역본을 변호하느니 차라리 이들이 네슬판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더 통쾌할 것이다. 그러면, 사본학은 왜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원본의 본문(즉, 원문)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 천 개의 사본이 있지만, 남아있었으면 1900년도 더 묵었을 신약성경의 원본들은 이미 낡아서 사라졌다. 우리가 가진 사본들은 그 원본의 자손들이지만, 모두 조금씩 달라서, 조상의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사본학은 잃어버린 "원문"을 찾아내는 숭고한 작업이다. 그 "원문"이 다름 아닌 인류 최고의 베스트 셀러인 성경의 원문이고, 그 성경이 교회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되는 거룩한 책일진대, 그 숭고한 작업은 참여하는 이의 피와 살을 떨리게 하는 엄숙한 사역인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며 밤을 지새우며 연구에 심취하듯이 사본학자들이 사본들의 기원을 연구하며 경건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필자도 수많은 밤들을 사본학 연구을 위해 뜬눈으로 새웠다. 하나님 말씀의 원문을 찾는 작업은 긴 밤을 지새우고는 지치지 않는 영감에 찬 열정으로 사본학자의 정신을 사로잡는 것이다.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영글어 가는 발견들이 그 긴 밤을 몇 초처럼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독일학자 티쉔도르프가 시내산의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주후 4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내산 사본(Codex Sinaiticus = 알렙)을 처음 만났을 때, 밤을 지새우며 그 사본을 읽으며 사로잡힌 희열은 오늘도 모험에 찬 젊은 사본학자들의 가슴을 경건한 기쁨으로 불타게 한다. 모세가 보았던 불타는 가시떨기처럼 ...
성경 사본들은 인쇄술이 없는 시절 필사자들이 손으로 일일이 적는 인고의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고, 성경을 불사르는 로마황제의 박해의 과정을 견디며 전수되어 왔고, 성경의 원문은 지난 수백년간 사본들을 모아 비교 검토한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복원되어 왔다. 네슬판처럼 작은 헬라어 성경 판본이 나오기까지는 실로 수 백 년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그래도 아직 네슬판을 원문이라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사본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 동안 수 백 년의 세월을 이 거룩한 사역에 헌신한 수많은 학자들 덕분이다. 아울러, 수도원에서 사본을 필사하며 보존한 수도사들, 성경을 불태우는 로마 황제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성경을 보존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없었다면, 신약 사본학은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제2장: 네덜란드 캄펜에서 봉기한 현대 신약 사본학의 반란군
네덜란드에는 세 개의 신학대학이 있다. 그 중에 두 개는 캄펜에 있고, 다른 하나는 왕의 사냥터와 궁전이 있는 아펠도른이라는 도시에 있다. 캄펜은 무역 도시로서 저 유명한 한자 동맹에 가입한 도시들 중에 하나로서 지금도 옛 성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한 때는 로테르담과 경쟁할 정도로 왕성한 무역활동을 전개했었다.
캄펜(Kampen)이란 지명은 아마도 군인들이 친 캠프에서 유래한 듯한데, 에이셀 강 하구에 위치한 이곳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무역과 군사의 중심지였던 캄펜은 지금 그 과거의 위치를 상실했지만, 아직 신학의 중심지 중의 하나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 5만 정도의 도시에 국제적인 신학대학이 두 개나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우더스뜨라트(옛 거리라는 뜻)에, 다른 하나는 부르더벡(형제의 길이란 뜻)에 위치해 있어서 한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가는 데는 고색창연한 성안의 길을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하다.
필자와 무관한 학교를 이렇게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브루더벡의 신약학 교수인 야콥 판 브루헌 때문이다. 이 교수야말로 한국에 들어온 말씀보존학회의 할아버지 벌되는 영감이다. 미국의 킹제임스 역본 내지 다수 본문 신봉자들은 판 브루헌을 그들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완전히 한물간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을 다시 부활시킨 것은 캄펜신학대학(브루더벡)에서 1975년 12월 8일 학교창립기념일에 행해진 이 교수의 강의였다.
그 강의안은 1976년에 네덜란드어(De Tekst van het Nieuwe Testament)와 영어(The Ancient Text of the New Testament)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네슬판의 신빙성에 의문을 달기에 충분한 영감이 가득찬 작품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남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 후 4반세기 동안 20세기 후반은 브루헌에 의해 개종한 이 다수 본문 지지자들이 사본학에 일대 반란을 일으킨 아이러니컬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주류를 형성하는 사본학 이론은 백여년전에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에서 활동한 호르트 교수와 그의 제자 웨스트코트로부터 기원한다. 물론 판 브루헌에 의해 시작된 반란(또는 혁명) 사본학은 그가 부활시킨 영국학자 존 윌리엄 버곤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반란 사본학은 작고한 옥스퍼드 대학의 위대한 사본학자 킬패트릭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킬패트릭은 그의 제자 엘리엇(J.K. Elliott)과 함께 독자적인 별개의 학파를 구성하며 다수본문학파 자체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현대 주류 사본학의 시조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에 의하면, 신약사본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비잔틴 사본들이 가진 본문(다수본문이나 공인본문과 대개 일치함)은 4세기의 루시안(Lucian)의 개정작업에서 기원한다. 그래서, 비잔틴 사본들은 비록 수가 많아도 믿을 게 못된다는 얘기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교부 제롬의 글을 인용하면서 증거를 댄다. 고대 라틴어 역본들을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본들과 대조하면서 개정한 위대한 언어학자, 신학자, 사본학자인 제롬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루시안과 헤시키우스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사본들을 간과한다.“
판 브루헌은 이 진술이 루시안의 헬라어 성경 개정 작업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제롬은 여기서 신약 사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 정경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신약 성서에 어떤 책이 포함되어야 할 지 말아야 할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멋진 반론이지 않은가? 루시안의 개정작업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추종자들 중에 탈영자나 귀순자들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판 브루헌의 반론은 과연 옳았는가? 라틴어 본문을 계속 읽으면 진상이 드러난다.
"분명히 구약에서 그들은 70인의 번역자들의 [작업들] 후에 무언가 개정할 수 없었다. 또한, 신약에서 [어떤 독법들을] 개정하는 것은 무용했다. 이미 많은 나라 언어들로 번역된 성서 [역본들]은 추가된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롬은 분명 정경의 재편성 작업이 아니라, 본문의 "개정"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제롬은 2세기경부터 번역이 된 고대 역본들을 그가 루시안 본문들을 거부하는 사본학적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비잔틴 본문 지지자 중에 또 한 명의 위대한 사본학자인 Sturz는 의문을 제기한다. 라틴어 역본을 개정하는 작업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어찌 헬라어 본문을 개정하는 작업이 이처럼 침묵 속에 이루어졌을 수 있겠는가?
비록 루시안이 개정작업을 했다손 쳐도, 과연 그의 개정작업이 본문을 망치는 작업이었을까? 주류학자에 속하며 네 문서설로 유명한 영국학자 스트리터의 지적대로, 루시안은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다양하고 좋은 동방사본들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개정작업의 결과물은 오래된 사본들을 여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 참 전투를 하다보면,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네슬판 지지자들의 주장대로 과연 비잔틴 본문은 열등한 것이 확실한가? 루시안의 개정 작업이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 개정작업이 비잔틴 본문의 열등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킹제임스역본이나 다수본문, 공인본문이 열등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비잔틴 본문은 말씀보존학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들은 지금 간신히 소탕작전에서 전몰되는 것을 미국의 스터르즈와 영국의 스트리터의 덕분에 모면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이 사용하는 성경을 네슬판, 나아가 바티칸 사본, 시내산 사본에 토대하고 있다고 해서 마귀의 성경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시조인 판 브루헌이나 그의 제자 위셀링크, 또는 Sturz 등의 학자들은 그런 저급한 논법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들은 열심히 사본학적 증거들을 대면서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신학은 미국으로 건너가 한 번 단순 과격해 진 후, 다시 한국으로 가서 더욱 무식 용감해지는데, 그 현상을 말씀보존학회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단순성은 네슬판 내지 UBS판을 옹호하는 분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바, 이 사본학 논쟁에서 두 편 중에 한 편이 옳다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정반합에 의해 발전하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제3장: 대서양을 넘어 형성된 사본학 연합반군의 참패
네덜란드 캄펜의 브루더벡에서 판 브루헌 교수에 의해 시작된 현대 사본학의 일대 반란(혁명)은 같은 해에 미국 달라 신학대학원의 Z. C. Hodges 교수와 힘을 합치게 된다. 대서양을 건너서 네덜란드의 반군과 합류하여 이후 사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문제의 작품은 Hodges의 달라스신학대학원 강의안인 "A Defense of the Majority-Text"(1975년)이다. 이 강의안에서 Hodges는 복잡한 통계 분석에 기초하여 다수의 사본들이 지지하는 독법(reading)이 원문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잠시 인용해 본다:
"정상적 상황에서는 오래된 텍스트일수록, 이 후의 어떤 시기에서든지 많은 또는 다수의 텍스트들 속에 보존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본문은 원문이다. 그래서, ... 다수 본문은 소수 본문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원문을 반영할 것이다" (강의안, 9쪽).
통계학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 주장은 별로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1세기에 시작된 원문의 복사본들은 11세기에 시작된 어떤 사본의 복사본의 수보다 대개 1000년의 시간이 허용하는 만큼 수가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야곱의 자손보다 수가 많다는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주장이 함축하는 결과는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약 사본의 대다수는 비잔틴 사본들인데, 이 사본들은 16세기에 에라스무스가 편찬했던 헬라어 신약성경에 근거를 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에 대개는 일치하고, 따라서 공인본문을 직역한 킹제임스역본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본들이 지원하는 독법을 따르는 것은 새로운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교부 어거스틴에 의해 사용되었던 방법이며, 18세기의 사본학자 벧쉬타인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그의 책에서 주장한 이론이다. 1752년에 제기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더 많은 사본들과 일치하는 독법은 .... 더 적은 사본들에 의존하는 독법보다 선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도 전문가들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는 주장이다. 학문에는 증거의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증거의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1명의 파수꾼의 주장을 들은 1000명의 증언은 1명의 증인이상의 효력을 지니지 않지만, 예수 부활을 동시에 목격한 수 백 명의 증언은 실로 수 백 배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 현장에 있었던 한 파수꾼이 제자들이 예수 시체를 훔쳐갔다고 수 천 명을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어도 증인 수는 결국 한 명에 불과하므로, 정직한 판사는 수 백 명의 독립적 증언이 옳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사본학은 이러한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현대사본학의 시조들인 캠브리지 학자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많은 수의 사본들이 소수의 불량한 사본들로부터 복사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다수 사본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현대 구약 사본학의 거장인 이스라엘의 사본학자 임마누엘 토브는 소수의 지원을 받는 독법들이 종종 더 우수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역시 다수 사본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많은 현대 사본학자들은 그래서 다수 사본의 지원을 운운하는 저 비주류 사본학계를 사본학을 모르는 무리로 생각하며 대개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지금은 캐나다 뱅쿠버의 리전트 칼리지에 있는 북미 최고의 사본학자 고든 피를 비롯한 소수의 학자들이 상대해 주었을 뿐이다. 이들 중에는 홈즈(M.W. Holmes)라는 미국학자가 있는데, 미네소타주의 베델 칼리지에서 성서학과 초대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명탐정 홈즈를 떠올리는 그의 이름답게 그는 기막힌 증거들로 저 반란군(혁명군)의 최고 무기인 다수 사본들의 증거를 박살을 내었으니 이것은 1983년에 일어난 일이다.
홈즈에 의하면, 신약사본들은 "정상적 상황"에서 필사된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 상황에서 필사되었다. 그래서, "정상적 상황"을 조건으로 하는 Hodges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비정상적 상황이란 다음과 같은 일그러진 역사 공간을 가리킨다.
- 많은 초기 사본들이 로마 황제 Diocletian의 칙령에 의해 파괴되었다.
- 그나마 가이사랴에 남은 도서관 마저 주후 638년에 모슬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따라서, 소장된 초기 사본들이 함께 파괴되었을 것이다.)
- 주후 7세기에 모슬림들의 정복전쟁은 북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기독교 인구를 극감시켰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사본필사도 줄어들게 되었다.
- 주후 6세기에 이르러서는 헬라어는 비잔틴 제국이외에서는 거의 이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헬라어 사본들이 비잔틴 제국에서 주로 필사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신약사본들은 진공 속에서 필사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필사된 것이다. 그 역사 공간은 비잔틴 제국에서 헬라어 사본이 많이 필사되도록 일그러진 공간이다. 그래서, 이변이 없는 진공 같은 정상적 상황을 전제할 때만 타당한 Hodges의 통계학적 이론은 신약 사본학에 제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말씀보존학회는 Hodges의 통계학적 이론보다는 "하나님께서 많은 교회들이 성경 원문을 사용하도록 어찌 보존하지 않으셨겠는가?"라는 교리적 주장에 입각해서 전개되는 듯하다. 이러한 교리적 주장은 이미 사본학을 벗어난 주장이라 여기서 논할 필요조차 없지만, 굳이 논하자면,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자살 논리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네슬판에 토대한 번역성경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현대 교회들이 원문을 사용하도록 섭리하지 않으셨겠는가?“
저 비정규군 중에는 킹제임스역이 소위 공인본문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본학적으로 논의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헬라어 성경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자기 집안마저 망신을 시키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아마, 네슬판에 대항하여 The Greek New Testament According to the Majority Text를 펴낸 사본학 반군 지도자 Hodges나 판 브루헌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어라 말할 것인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제4장: 사본학 어떻게 할 것인가?
비잔틴 사본들은 현존하는 신약 사본들 중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약사본학자들은 비잔틴 사본들을 열등한 사본들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비잔틴 사본들은 대개 뒤늦게 필사된 사본들이기 때문이다. 2세기 3세기의 파피루스들이나 주후 4세기에 필사된 시내산 사본, 또는 바티칸 사본을 신뢰하겠는가? 아니면, 5세기 이후에 필사된 비잔틴 사본 군단을 신뢰하겠는가? 고대 사본을 믿을 것인가? 다수 사본을 믿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풀 때, 대개의 주류사본학자들은 고대 사본을 따르는 것을 정답으로 고른다. 이러한 사본학자들의 군단에 저항하는 소수의 비주류 사본학자들은 "사본의 수를 믿을 것인가? 사본학자의 수를 믿을 것인가?" 하며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사본의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미 드러난 바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수의 사본학자의 의견을 따라가야 하는가? 천만에! 학문에는 다수결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학설이다"하며 윽박지르는 인간들은 학계에서 추방해야 마땅하다. 그러한 자들은 기존 학계의 주장에 반대하는 소수에 의해 발전해 온 학문 발전의 역사를 망각하는 몰역사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역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대 사본학의 게릴라들의 주장이 혹시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심스레 그들의 학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판 브루헌 (Van Bruggen) 교수에 의하며, 사본의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본이 담고 있는 본문의 나이가 중요하다. 주후 10세기에 필사된 사본이 2세기 사본을 정확히 필사한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비록 나중에 필사된 사본이지만, 우습게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주후 4세기에 필사된 사본이 3세기 사본을 필사한 사본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4세기 사본이 저 10세기 사본보다 더 우수할 필연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적군이라고 해서 늘 나쁜 놈인 것은 아니다. 판 브루헌은 주장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단지 후에 필사된 사본이라고 해서 비잔틴 사본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면, 비잔틴 사본에 토대한 공인본문이나 이를 번역한 킹제임스 역본들도 무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 누가 나쁜 놈인가? 우리가 아군이라고 생각한 저 뮌스터 사본학 연구소의 독일군과 국제성서공회(UBS)의 사본학자들이 아닐까? 그런데, 둘 중에 한 쪽은 나쁜 놈이라고 하는 그런 흑백논리의 주장을 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우리 편도 상대편이 모두 조금씩 옳고 조금씩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킹제임스 역본이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개역성경이나 NIV가 무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무시되는 것을 면한다는 것은 곧 우월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전몰을 면한 빨치산 부대가 대승했다고 선전한다면 어찌 우습지 않겠는가? 그런 논법을 사용하는 저 현대 신약 사본학의 반군들은 학문적 논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후기에 필사된 사본이 오래된 사본을 필사한 사본일 가능성이 있기에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면, 초기에 필사된 사본은 더 오래된 사본을 필사한 사본일 수 있기 때문에 더더구나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사본학자들은 "더 오래된 사본"을 따르는 판단기준(criterion)을 세워놓고 사용하는 것이다. 가능성보다는 개연성(확률)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확률이나 통계는 표본이 믿을 만해야 신빙성이 있다. 조선일보 독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설문조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여론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의 강남지역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는 국민의 여론을 균형 있게 반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오래된 사본들은 과연 믿을 만한 표본인가?
현존하는 4세기 이전 고대사본들을 대개는 이집트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알렉산드리아 계열사본들이다. 킹제임스역 지지자들이 좋아하는 비잔틴 사본계열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약 사본학에서는 고대사본을 따른다는 것은 곧 고대 알렉산드리아 계열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4세기 이전에는 비잔틴 사본들이 없었겠는가? 아니면 있다가 사라졌겠는가?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있었다고 주장할 증거가 없지만, 없었다는 증거도 없는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확률적으로 현존하는 고대 사본들이 현존하는 후기 사본들보다 더 믿을 만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사본을 보존하는 지리적 상황은 균질의 상황이었는가? 고대 사본들이 어느 지역에서 더 오래 보존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의 산악인가? 이집트의 사막인가? 당연히 건조한 사막에서 책이 더 오래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판 브루헌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계열 2 - 3 세기 사본(파피루스)들은 건조한 이집트 기후 때문에 보존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옳으신 말씀이다. 아마 그리스 지역에서는 2 - 3 세기에 비잔틴 사본들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오래된 사본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하는 사본학의 기본원칙은 과연 쓸모 있는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네슬판 난하주를 보며 파피루스나, 바티칸 사본(B), 시내산 사본(알렙)을 무조건 따라 다니는 것이 얼마나 용감무식한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용감무식은 말씀보존학회의 단순과격보다 결코 차원이 높은 것이 아니다. 그라문(그러면) 우얄꼬(어떻게 할까)? 사본학 우째(어떻게) 할 것인가? 메쯔거의 사본학 입문책을 보면, 고대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들(파피루스 66, 75, B. 알렙 등)과 서방 사본들(베자 사본, 고대 라틴역 등)이 일치하면, 이를 따르라고 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계열이나 서방 계열이나 초기의 독립된 사본계열이므로, 이들이 일치하면 더욱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메쯔거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들에 담긴 본문(text)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2-3세기 사본이라 여겨지는 P66, P75 때문이고, 서방 계열 사본들의 본문도 2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마르시온, 타티안, 이레니우스, 순교자 저스틴 등에 의해 서방 본문이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대 알렉산드리아 계열과 비잔틴 계열이 일치하거나, 비잔틴 계열과 서방 계열이 일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비잔틴 계열은 과연 한 표 던질 수 있는 투표권이 있는 독립적 사본 계열인가? 주류 사본학자들은 비잔틴 계열에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이에 분통이 터진 비잔틴 사본 지지자들은 열을 받다가 못해서 게릴라 부대를 형성해서 날뛰고 있는 것이다. 수 천 개의 비잔틴 사본들을 합쳐도 한 표의 투표권을 받지 못하니 화가 날 법도 하다. 이 분노한 무리들을 대변해서 비잔틴 사본계열의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가 미국의 H. Sturz이다. Sturz에 의하면 비잔틴 사본은 독립적인 사본계열이다. 즉,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열등하다고 할 수도 없으며, 비잔틴사본들이 서방사본들과 일치할 경우에는 신뢰할 만 하다는 것이다. Sturz는 도대체 어떤 증거를 대고 있는지, 그 주장은 과연 타당한지 다음 시간을 기대해 주시기 바란다.
제5장: 나사렛에서도 선한 것이 나온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종이의 역할을 한 것은 이집트에서 고안된 파피루스였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하구의 얕은 물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의 줄기를 얇게 썰어서 마치 합판을 만들듯이 붙여 만든 것이었다. 신약사본들의 경우, 파피루스로 된 사본들은 송아지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로 된 사본들보다 대개 오래된 것들이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신약사본학 중에서도 파피루스학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 현대 신약 파피루스학 연구의 한 장을 한국 학자가 장식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미국학자 Sturz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한국학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파피루스(P) 46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일약 세계 사본학계를 발칵 뒤집은 한국인이 바로 김영규 교수이다. 20세기 최고의 사본학자 메쯔거도 그의 사본학 입문서 3판 부록에 김영규 교수의 논문을 다루고 있다 (영문판, 265-56 참조).
김영규 교수의 논문은 로마에서 발간되는 세계 정상급 성서학 저널인 비블리카(Biblica) 69호에 1988년도에 실렸다. 그의 주장은 P46을 주후 200 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믿는 국제학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김 교수에 의하면, P46은 필체상 1세기 파피루스 필체로 쓰여졌으며, 따라서 주후 1세기(주후 80년경)에 필사된 것이다.
물론 자존심이 센 서양의 신약사본학계가 동양에서 온 한 유학생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주후 200년경을 고집하기를 그치고 반세기 이상 앞당겨 주후 2세기 초중반 정도로 절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국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한국에는 신약사본학계가 형성되어있지 않아서 사람을 알아 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인들은 TV 동양학 강의로 일약 유명해진 김용옥만 좋아하지 말고 서양학으로 서양학자들의 숨을 죽인 자랑스런 한국학자들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이제 미국학자 Sturz로 넘어가자. 역사가 고작 200년 남짓한 미국에서 고대 파피루스학에 관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라고 질문하겠지만, 우리는 이런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한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라는 선입견 때문에 김영규 교수가 받은 피해는 엄청나게 크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라는 선입견이 바리새 서기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게 했다. Sturz의 책 "비잔틴 본문형태와 신약 본문비평학" (The Byantine Text-Type and New Testament Textual Criticism)은 1984년에 출판되었지만, 그의 책은 1967년에 Grace 신학대학원에서 쓰여진 그의 박사논문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실로 네덜란드의 판 브루헌이나 미국의 Hodges보다 먼저 비잔틴 사본들을 변호한 사본 변호사였던 것이다.
Sturz는 비잔틴 사본들에만 담긴 독특한 독법(reading)들이 고대 파피루스의 지원을 받을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약 150 경우를 증거로 제시했는데, 이것은 비잔틴 사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쾌거였다. 2 - 3 세기의 고대 파피루스들이 뮌스터의 사본학자들이 좋아하는 알렉산드리아 사본들도 아니고 영국의 매튜 블랙이 좋아했던 서방사본인 베자사본(D)도 아닌, 비잔틴 사본을 지원하는 이 증거들은 비잔틴 사본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어 부수었던 것이다. 비잔틴 사본에서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Sturz는 변호사가 되었으면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었을 것이다.
그런데, Sturz는 과연 옳았는가? 독자들은 Hodges의 통계학적 주장을 아작 낸 우리의 명탐정 홈즈를 기억할 것이다. 이 Holmes는 Sturz마저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Sturz가 자신이 제시한 증거를 가지고 비잔틴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사! Sturz는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비잔틴 사본들이 보존하고 있는 본문 (이제부터, 비잔틴 본문)이 알렉산드리아 본문이나 서방 본문처럼 독립적인 본문이라고 주장하며 결론을 내렸다. 즉, 비잔틴에서도 가끔 선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 비잔틴은 선하다고 주장한 셈이다. 우리의 명탐정이 이것을 놓칠 리 없다.
Holmes는 독법(reading)과 본문형태(text-type)를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독법이란 사본들간에 발견되는 차이들이지만, 본문형태란 이러한 차이들이 함께 모여 형성하는 독법들의 패턴이다. 몇몇 비잔틴 독법들이 오래된 것이라 해도, 비잔틴 본문형태가 오래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150 여개의 비잔틴 독법들은 신약사본들이 가진 수십만 개의 독법들 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은퇴 교수인 사본학의 노장 메쯔거도 Sturz가 제시한 파피루스 중에 하나도 비잔틴 본문형태를 지닌 것은 없다고 지적했다. 부분의 진리를 전체에로 비약시키는 오류를 Sturz는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침략을 참회하는 사람 150명을 발견하고, 일본인 중에도 선한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일본인은 대개 한국침략을 참회한다고 비약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인 한 두 명의 실수를 보도하며 기독교 전체를 매도하는 것과 다름없는 비겁한 논법이다.
탁월한 복음주의 주석가이며, 매우 경건한 신약학자이며, 북미 최고의 사본학자인 고든 피(Gordon Fee)는 친절하게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해 준다. P66은 비잔틴 독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잔틴 독법의 수는 많지 않기 때문에 P66은 전체적으로 비잔틴 사본계열에 속하는 파피루스가 아니다. 필자도 밤을 며칠 세며 검토해 보았는데, Sturz가 제시한 파피루스들 중에 비잔틴 사본계열에 속하는 파피루스는 하나도 없었다.
이리하여, Sturz는 억울하게 매도당해 눈물을 흘리는 비잔틴 사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는 있었지만, 비잔틴 사본들이 존경받도록 할 수는 없었다. 의혹을 면하는 것과 존경을 받는 것은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다. 법정에서 의혹을 면한 피고인이 곧 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본학자들이 비잔틴 사본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좋은데, 아직도 "비잔틴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며 비웃고 있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것이다. 이러한 비웃음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하며 예수를 비웃은 유대인 율법학자들의 냉소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도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따지는 것이 학벌이요 학위이다. "그 학교에서 뭐 대단한 학자가 나오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확률상의 근거는 있겠지만, 역사의 현장은 확률에 의해서만 움직여 가지 않는 변화와 창조의 세계이다. 비잔틴 사본들에서도 선한 것이 나온다. 그 속에 감추인 진주를 발견할 줄 아는 눈이 없이는 네슬판 종속 신학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제6장: 교부들의 보물지도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을 교부(Church Fathers)라고 부른다. 어거스틴, 오리겐, 터툴리안, 제롬 등 잘 알려진 교부들 외에도 수많은 교부들이 주로 헬라어나 라틴어로 저술을 남겼다. 이들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으며, 다양한 신학적 문제들을 다루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조직)신학은 이 교부들과의 대화 없이는 제대로 전개되기 힘들 것이다. 또한, 교부들에 대한 연구 없이는 그들을 인용하며 신학을 전개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에 대한 이해 없이 칼빈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사에 대한 연구나 교부들을 연구하는 개혁교회 신학자들이 극히 적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교부들의 저술을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분야를 교부학이라 부르는데, 로마 카톨릭은 이 분야에 매우 강하다. 오스트리아의 비인(비엔나) 대학이나 불란서의 스트라스부르그 대학, 벨기에의 루뱅 카톨릭 대학 등은 교부학 연구의 중심지 중에 꼽힐 만한 장소이다. 특히, 비인 대학에는 최근에 라틴어 문체 연구를 통해 어거스틴의 진짜 서신들을 발견해 낸 디프약 교수가 있다. 그래서, 미국학자들은 이 서신들은 "디프약 서신"이라고 부르는데, 어거스틴 연구 관계로 디프약 교수를 면담한 교회사가에 의하면 디프약 자신은 그것들을 "어거스틴 서신"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어거스틴 서신"의 발견은 어거스틴 연구의 새 장을 열게 되었음을 물론이다. 독일의 모든 대학들이 생기기 전에 설립되었고,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낸 비인대학에 디프약 같은 교부학자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벨기에의 루뱅 카톨릭 대학이 신약학이나 교부학의 중심지 중에 하나인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습게 보이는 작은 나라에도 세계 최정상의 명문대학이 있다. 그것이 루뱅 카톨릭 대학이다. 신약학에서는 20세기 공관복음 문제 연구의 최고의 석학인 Frans Neirynck가 이 대학의 은퇴교수이다.
루뱅대학은 카톨릭 대학이면서도 현직 교황을 싫어하는 곳이다. 교황이 방문을 할 때는 교황 반대 데모를 할 정도라고 한다. 로마 카톨릭 내에는 전통주의, 현대주의, 은사주의 등의 다양한 색깔들이 있다. 한 때 로마 카톨릭에 의해 박해받은 바 있는 존경받는 로마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주장에 의하면 신약성경이 허락하는 범위 속에서 어떠한 방향도 포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카톨릭이다.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 안에 다양한 색채들의 그룹들이 공존하는 것은 한스 큉의 (포스트 마던한!) 카톨릭에 대한 이해가 수용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다양한 그룹들 중에 루뱅은 학문적 개혁파 내지 자유파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Neiynck는 공관복음 연구에서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 입장인 마태우선설을 따르지 않고 마가우선설을 설득력있게 입증한다. 불어를 구사하는 그에 의해 불어권에 난립하던 각종 학설들이 마침내 아작이 나고야 말았다. 소국 벨기에의 거장 한 명이 대국 불란서의 내노라 하는 학자들을 루뱅에서 마구 쏘아 대는 발칸포로 격추시켜 버린 것이다.
교부에 대한 연구는 이처럼 신학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사본학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헬라어로 저술을 한 초기 교부들은 헬라어 신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신학을 전개하기 때문에, 그들의 성서인용은 사본학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헬라 교부들 중에서도 특히 많은 저작을 남긴 초기 교부인 오리겐은 사본학적으로 중요하다. 네덜란드 최고의 사본학자 바르다 교수의 지도하에 오리겐의 신약성서인용으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쓴 학자가 라우께마이다. 그는 네덜란드 캄펜(아우더스뜨라트)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교부들의 신약성서인용연구의 중심지인 불란서 스트라스부르그의 교회사 교수로 활동하다가 올 가을에 다시 캄펜의 신약학 교수로 불려오는 젊은 학자이다.
한국에도 교부들의 신약 인용을 사본학적으로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신학의 중심축은 바야흐로 유럽의 황혼에서 극동의 아침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지난 세기에 독일이 한 역할을 21세기에는 한국이 하기를 바란다면 과연 지나친 기대일까?
대개의 신약사본학자들이 비잔틴 본문을 우습게 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초기 교부들의 인용들 속에서 비잔틴 본문이 발견되기 않기 때문이다. 만일 비잔틴 본문이 오래된 것이라면 초기 교부들의 성서인용에서 발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과연 남아있는 초기 교부들의 작품들은 잘된 표본인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찾다가 물고기가 없다고 "물고기는 없는거여!"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투지와 예지가 번득이는 현대 사본학 반군의 지도자 판 브루헌이 이러한 문제를 놓칠 리 없다.
그는 서방의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 동방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으로 대변되는 초기 교부 지도에서 안디옥의 교부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비잔틴 본문을 어찌 발견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한다. 미국학자 Sturz도 그의 박사논문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그에 의하면, 4세기 동방교부 크리소스톰 이전에는 비잔틴 본문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주류학자들의 주장은 그 이전에 인용을 검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을 저술한 안디옥 교부가 없다는 것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옳으신 말씀들이다. 우리가 가진 지도에 보물의 위치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한 귀퉁이가 날아가 버렸다. 그 귀퉁이에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른다. 있다면, 얼마나 귀중한 보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안디옥이 빠진 초기 교부 지도에서 보물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안디옥에는 보물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어쩌겠는가? 우리가 가진 교부 지도가 완벽하다고 믿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안디옥에 보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저 사본학 반군들을 치라!
더구나, 사본학 반군 지도자 Sturz에 의하면 이러한 흠 있는 교부 지도에서도 비잔틴 독법들(readings)이 발견된다. 초기 서방 교부들과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신약인용에서 비잔틴 독법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비잔틴 사본들 속에도 오래된 독법들이 담겨 있다는 증거가 된다. 나사렛에서도 선한 것이 나온다! 비잔틴 독법도 원문일 수가 있다!
그러나, 몇몇 비잔틴 독법들이 오래되었다는 것에서 비잔틴 독법들의 모여서 이루는 패턴인 비잔틴 본문이 오래되었다는 것으로 비약하지는 말아야 한다. 기존의 번역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게 고도로 정밀한 번역성서인 NET 성서의 편집자로 유명한 미국학자 월리스에 의하면, 크리소스톰 이전에 비잔틴 본문을 사용한 교부는 안디옥의 4세기 교부 Asterius 뿐이다.
따라서, 비잔틴 본문은 최소한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어쩌면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결국, 비잔틴 본문이 최소한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본문이나 서방 본문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잔틴 본문에 토대한 킹제임스역이 주로 고대 알렉산드리아 본문에 의존하는 NIV보다 사본학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다.
비잔틴 본문이 우월한가? 알렉산드리아 본문이 더 우월한가? 하는 문제는 파피루스나 교부 연구만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알렉산드리아 본문과 비잔틴 본문이 차이 나는 부분들을 하나 하나 비교하면서 더 원문에 가까운 것을 고르고, 통계를 내서 비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라진 원본의 본문(즉, 원문)이 우리에게 없는데, 어떻게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작업 즉 본문비평학(textual criticism) 또는 원문복원학(the quest for the original text)은 원문에 더 가까운 독법을 가리는 판단기준(criterion)들로 독법들을 저울질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만일 저울이 정확한 것이기만 하다면, 이러한 저울질은 킹제임스 논쟁으로 불리우는 현대신약사본학의 논쟁에서 어느 편이 이길 지 알려 줄 것이다.
제7장: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건 본문조화(harmonization)여!" 신약학자들간에 논쟁이 붙었는데, 한 쪽이 이렇게 외쳤을 경우, 다른 쪽은 변명도 못하고 아작나고 마는 것이 오늘날의 신약학의 판이다. 이 판을 갈아치우기 전에는 본문조화를 시도하는 해석은 무식한 근본주의자들이나 하는 유치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럼, 본문조화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본문을 해석하면서 마가복음에서 증거를 끌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로 성서를 해석하는 원리에 맞을 지는 몰라도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에는 어긋난다. (성서는 성경 66권 전체를 지시하고, 성경은 그 각권을 지시한다. 즉, 마태복음은 성경이고, 마가복음도 성경이다. 그리고, 성서란 성경전서 즉 66권으로 묶여진 1 책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서란 말을 쓰면 자유주의자라 의심하거나 성경이란 말을 쓰면 보수주의자로 비웃는 것은 매우 웃기는 것이다.)
본문조화의 예를 들어보자. 마태복음 15:26-27에서 예수님은 이방인 여인에게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는데,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개들"은 자녀와 대조된 이방인을 가리키는 용어임이 문맥상 분명한데, "주인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려고, 마가복음 7:28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를 인용하며 "주인들"은 곧 "아이들" 즉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야말로 기가 막힌 "본문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은 곧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주인들이라는 무식 용감한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 양반, 말씀 잘 쪼개네!" 하며 나자빠지는 분들은 사이비나 이단에게 넘어가지 아주 쉬운 분들이다. 마태(= 마태복음 저자의 약어)가 과연 이런 무식한 신학을 의도했을 리 없다.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술한 마태는 아마도 유대인들을 유치한 "아이들"로 표현하기를 피하고 어른들과 아이들을 다 포함하는 "주인들"로 바꾸었을 것이다.
성서 안의 한 책으로 성서 안의 다른 책을 해석하는 것, 특히 서로 모순이 되어 보이는 구절들을 잘 조화시켜 모순을 해소시키는 것을 본문조화라 하는데, 전통적인 조직신학은 이러한 방법론을 따라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학을 포기하고 성서의 각권, 즉 성경을 그 각권의 범위 내에서 연구하여 신학을 전개하는 것이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인데, 이것은 새로운 방향의 조직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체를 조화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다양성 내지 모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유체계를 전제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정서에 성경신학이 전통적 조직신학보다 더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성경신학을 성서학(Biblical Studies)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서학은 성경저자의 신학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각권의 원문복원(사본학), 문체연구, 구조연구, 역사적 배경, 문헌간의 상호관계 (예를 들어, 공관복음 문제), 역사적 진정성 (예를 들어, 역사적 예수 연구), 저자의 상황, 본문 주해 등을 진행하는 기초학문이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성서학의 연구는 쓸데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성서학 연구가 없이는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본학 없이 전개된 신학은 원문에 근거한 성경신학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네슬판 신학이나 킹제임스 신학에 불과하게 되고 만다. 생활에 불필요 한 것처럼 여겨지던 자연과학이 기술과 연결되면서 과학기술로 발전하여 인류의 생활에 기여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성서학은 교회에 필요없다고 발언하거나 성서학자를 종교재판함으로써 자연과학자 갈릴레오를 박해한 로마카톨릭의 오류를 다시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동설을 인정하면 기독교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던 로마카톨릭이나 성서학을 허용하면 복음주의가 무너질 것이라고 믿는 전통주의자들은 그들의 교권으로 마녀사냥에 성공할 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하여간, 본론으로 돌아와서, 성경신학자들이나 성서학자들에게 "본문조화"란 가치평가가 담긴 용어이다. 그런데, "본문조화"란 성경해석에서만이 아니라 사본학에서도 악명 높은 용어이다. "본문조화"라는 딱지는 "원문이 아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이 통하는 것이다. 사본 필사자들은 때로 마가복음을 필사하다가 마태나 누가와 차이가 나는 본문을 마태나 누가와 일치하도록 바꾸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복음서끼리 서로 일치되는 독법들을 의혹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고, 서로 상이한 독법들을 선호한다. 그런데, 비잔틴 사본들은 바로 이러한 "본문조화"를 범하는 웃기는 사본들로 비웃음 당하고 있다. 그래서, 비잔틴 사본들을 반영하는 공인본문이나 킹제임스역은 유치한 사본 내지 역본으로 정죄된다. 이러한 정죄는 합당한가? 말씀보존학회를 비롯한 비잔틴 반군들은 이러한 재판 결과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한다. "불법이요!“
이러한 항의에는 일리가 있다. 저울의 정확성은 둘째치고라도, 저울질을 하려면 다른 사본들도 저울에 달아서 비교한 후 결론을 내려야 한다. 물론 비잔틴 사본들에는 소위 "본문조화"가 일어나지만, "본문조화"는 비잔틴 사본들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속하는 존경받는 고대사본인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사본학 반군의 지도자 판 브루헌의 부지런한 제자 비셀링크 박사의 통계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비셀링크의 통계는 비잔틴 사본들에 "본문조화"가 더 많이 일어나는 것도 보여주지만, 동시에 대표적인 서방사본인 베자사본(D)에는 더 많은 "본문조화"가 일어나는 것도 폭로한다. 그러니. 유독 비잔틴 사본들만 "본문조화"라는 죄명으로 돌에 맞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비셀링크의 스승인 판 브루헌은 반군 지도자답게 한 수 더 뜬다. 그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본문조화"(harmonization)는 원문이 아닌 증거인가? 판 부르헌은 우리에게 원문이 없기 때문에 어떤 독법이 본문조화를 범하는 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판 부르헌이 비록 근본주의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이것은 옳으신 지적이다. 원문이 서로 일치했는지, 나중에 필사자들이 일치시켰는지 (즉 본문조화시켰는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본문조화"라는 저울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 부른다. 그래서, 공관복음서들이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은 사본학에서 당연히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일치하는 독법이 "본문조화"로 정죄되기 보다는 유사성을 잘 보존한 것으로 선택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성경신학에서는 "본문조화"가 무식의 대명사로 통하는지 몰라도, 공관복음 사본학에서는 "그건 본문조화여"라고 함부로 외치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본문조화라고 몰아붙인다 해도, 지구는 본래 돌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은 본래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제8장: 사라지는 "본문조화"(harmonization)의 신화
네슬판을 보면 누가복음 6:5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로 되어있다. 이것은 네슬판이 좋아하는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따른 것인데, 비잔틴 사본들을 비롯한 베자사본, 고대 라틴 역본, 및 소문자 사본의 여왕이라 불리우는 코덱스 33 등 거의 대부분의 사본들은 이 대목을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로 읽는다. 우리는 이 대목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도(kai)"인가 "-도(kai)"인가?
네슬-알란트 27판은 "+도"를 "본문조화"로 간주하고 있다. 즉, 이것은 사본필사자들이 마가복음 2:28에 일치하도록 원래 "도"가 빠진 누가복음의 본문을 "도"를 추가 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째 이런 일이! 마가우선설을 따른다는 네슬판 편집자들이 어찌 이런 실수를 범했단 말인가?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자료로 사용했다면, "도"는 원래 마가복음을 통해 누가복음의 원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슬판은 그가 사랑하는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에 홀려서 "도"가 없는 독법(reading)을 선택한 후, "도"가 추가된 독법을 "본문조화"라고 유죄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누가 본문비평학을 과학이라 했는가? 누가 본문비평학을 예술이라 불렀는가? 이러한 본문비평학은 과학이라면 사이비 과학이요, 예술이라면 추한 예술이다. 성서의 원문을 복원하는 거룩한 작업이 추한 예술과 사이비 과학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도"가 추가된 독법이 "본문조화"라고 정죄하는 것은 오판이다. 이것은 마태우선설을 주장하는 Farmer와 그 추종자들로 인해 다시 논란 가운데 있는 마가우선설을 굳이 도입하지 않아도 사본학적으로 입증이 될 수 있다. "도"가 빠진 독법이야말로 마태복음에로의 "본문조화"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8절을 보면, 바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서처럼 "도"가 빠진 본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필사자들이 본문조화를 시켰다면, 과연 고대교회에 별로 각광을 못받은 마가복음을 따라갔겠는가? 아니면 존경받은 마태복음을 따라갔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마태복음이다. (비셀링크는 마가복음을 따라갔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통계는 표본선택에 있어서 마태-마가-누가 공통자료가 아닌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다. 마태-마가, 마가-누가 등의 자료를 넣어서 마가를 더 많이 세도록 된 표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누가 6:5 "+도, -도"의 경우, 둘 다 "본문조화"라고 볼 수 있고, 더구나 마태복음 쪽으로 본문조화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면,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더 "본문조화"를 범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사본들의 지지를 받는 독법을 본문조화라고 몰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눈이 삐었기 때문이다! 바티칸 사본이 원문으로 보이거나, 비잔틴 사본이 조작으로 보이게 하는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이다. 과연, 아랍사람은 모두 테러범이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가? 과연 가나안족을 멸하라는 구약의 명령에 따라 웨스트뱅크의 이방인들을 다 탱크로 몰아내어야 하는가? 과연 웨스트뱅크에는 모슬렘근본주의자들만 사는가? 그 곳에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 살고 있는지 아는가? 이 기독교인들도 구약의 불레셋족과 동일시되어야 하는가? 모슬렘들마저도 예수님을 선지자로는 인정하고 믿는다. 그러나, 정통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요, 신성모독자로 믿고 있으며,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을 개보다 못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들이 모슬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탁월한 오순절 신학자 고든 피는 사본필사자들이 "역본문조화"를 시켰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원래 원문상 본문이 일치하고 있었을 경우에는 사본필사자들이 필사를 하다가 틀리면 서로 차이가 나게 되어, "역본문조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본문조화를 범하는 것처럼 보이는 독법이 실은 원문이 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를 다루면서 함부로 "본문조화"를 운운하며 마태, 마가, 누가는 서로 다르게 읽는 독법들을 선택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자기의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다. "본문조화이다!"라는 주장은 최소한 공관복음 사본학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의 교리적인 독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단적 교리(도그마)를 사용하며 만들어진 네슬판을 어찌 무조건 따라 갈 수 있겠는가?
영국 최고의 사본학자라 할 수 있는 리즈 대학의 엘리엇은 "본문조화"라는 판단기준을 마구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지혜롭게 주장한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그를 가르친 스승 킬패트릭과 함께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하여 주류사본학계에 의해 왕따당하는 사본학자인데, 물론 비잔틴 본문 지지자는 아니다. 그는 어떤 사본의 권위를 믿기보다는 독법들이 보여주는 내적 증거를 잘 관찰하여 경우 경우마다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엇에 의하면, 서로 일치하는 독법들이 나타날 경우에 어느 독법이 어느 독법에로 조화되었는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독법에 x와 y가 있고 마가복음에 병행구절에 x와 y가 있을 때, 마태의 x가 누가의 x에로 조화되었을 수도 있지만, 마태의 y가 누가의 y로 조화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누가의 x가 마태의 x로 조화될 수도 있고, 누가의 y가 마태의 y로 조화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엇은 이 모든 변화의 방향을 잘 고려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한다.
"본문조화"라는 판단기준은 사본학자들이 사용하는 무슨 도깨비 방망이가 아닌 것이다. "본문조화"는 판단기준은 이 칼을 사용할 줄 아는 검객에 손에 들려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칼을 제대로 사용하면, 폐기 처분된 많은 비잔틴 독법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비잔틴 사본 속에 담긴 진주를 찾아내기 위한 전투는 사본학 검객이 한 번 해 볼 만한 것이다.
필자는 본문조화의 가능성들을 비교하고 통계를 낸 결과,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비잔틴 사본들에보다 훨씬 적은 수의 본문조화 독법의 후보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후보들의 수를 고려할 때,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진짜 본문조화 독법이 적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비잔틴 사본들보다 우수한 사본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우수한 사본이라고 100% 옳은 것은 아니며, 열등한 사본이라도 언제나 틀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 비잔틴 사본들 속에도 본문조화처럼 보이지만 본문조화가 아닌 독법이 있고, 시내산 사본 속에도 실제로 본문조화인 독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가려내는 본문비평학 작업에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비잔틴이나 바티칸이냐? 하는 소위 킹제임스 역본 논쟁이라면, 이 논쟁은 좋은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제9강: 케임브리지 하르방들의 병합(conflation)시험에 퇴장 당한 비잔틴 사본들
나중에 필사된 사본도 매우 오래된 사본을 필사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사본(manuscript)의 나이는 그 사본이 보존하고 있는 본문(text)의 나이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사본들의 나이만으로 사본들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성서원문복원을 하는 마당에 오래된 사본이니 고대사본이니 하며 따지는 것은 유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대학입학시험을 치루는데, 입시생들의 나이로 합격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나이가 많은 수험생들의 성적이 평균적으로 더 높겠지만, 그렇게 할 바에야 시험은 왜 보는가? 다시 본문비평학(textual criticism)으로 돌아 와서 말하자면, 고대사본을 무조건 따를 바에야 본문비평학은 왜 하는가? 본질적인 질문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원문을 잘 보존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사본들이 보존하고 있는 본문(text)의 나이를 평가하는 좋은 시험 과목이 있다. 그것은 누가 병합(conflation)을 많이 시키는가 측정하는 것이다. 병합이란, 사본을 필사하다가 여러 가지 독법들은 모두 보존하려고 합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13에서 시내산사본, 바티칸 사본, 베자 사본 등은 "광야에서"라고 적고 있는데, 어떤 사본들은 "거기에서"라고 적는다. 이러한 두 가지 독법들(readings)을 알고 어느 쪽이 원문인지 고민하던 사본 필사자갑돌이는 선택을 포기하고 "거기 광야에서"라고 필사한다. 그 후에 많은 필사자들이 갑돌이의 사본을 따라서 "거기 광야에서"라고 필사한다. 비잔틴 사본들은 "거기 광야에서"라고 적고 있는데, 위의 시나리오대로라면, 비잔틴 사본에 나타난 "거기 광야에서"는 "거기에서"와 "광야에서"의 병합으로서 비잔틴 사본의 본문은 나중에 형성된 것임을 증거 한다.
바로 이러한 시험과목으로 사본들을 테스트한 학자들이 영국 케임브리지의 사본학자인 웨스트코트와 그의 스승 호르트이다. 이들은 현대사본학의 시조 할아버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1882년에 출판된 그들의 사본학책은 실로 현대사본학의 고전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 이 할아버지들은 비잔틴 본문이 병합시험에서 우승했다고 선언했다. 이 우승선언과 함께 이 하르방들은 비잔틴 본문을 후기 본문이라 낙인찍고 본문비평학이 무대에서 퇴장시켜버렸다. 우승컵을 들고 좋아하던 비잔틴 사본들은 영문도 모르고 역사의 무대 밖으로 퇴장 당한다. 시험은 누가 열등한가를 뽑는 것이었고, 우승컵에는 "축 퇴장"이라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케임브리지의 하르방들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본학의 총잡이가 케임브리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옥스퍼드에서 나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킬패트릭은 케임브리지의 하르방들이 시험이 공평하게 치게 하지 않았다고 일격을 가한다. 하르방들은 비잔틴 사본들만 잡아다가 시험을 치게 하고는 우승컵을 주고 "축 퇴장"시킨 것이다. 왜, 고대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나 서방 사본들은 시험을 면제받았는가? 이 사본들은 귀족사본들이라 그런 시험을 안 보고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단 말인가? 사본학 월드컵의 개최지는 알렉산드리아였던가?
때는 1965년, 킬패트릭은 저 귀족사본들도 병합을 범한다고 하며 증거들은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28에서 비잔틴사본들과 서방사본들은 "즉시"라고 적는데, 일부 사본들은 "도처에"로 적는다. 그런데, 바티칸 사본(B)을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은 이 독법들을 합쳐서 "즉시 도처에"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자, 공평하게 시험을 보면 누가 퇴장 당할 지 어찌 알겠는가? 케임브리지 하르방들이 좋아하는 귀족사본들이여, 계급장 떼고 한판 붙으면 우터케(어떻게) 될 거인가?
미국으로 건너가면 총잡이들의 도전은 더욱 거세어진다. 총잡이 이야기를 하자면 아무래도 미대륙 서부의 황야의 무법자들을 빼고는 재미가 없다. 미국학자 Sturz는 저 귀족사본들이 시험을 면제받은 것은 둘째치고, 케임브리지 하르방들이 사본들을 평생 테스트 한 결과 비잔틴 사본들이 병합을 범했다고 제시한 증거가 전부 8 개뿐이었다고 지적하며 쌍권총을 뽑는다. 만일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9개의 병합을 범한다면 어찌 할 것인가? 누가 "축 퇴장"의 우승배를 받을 것인가?
케임브리지 하르방의 후예들이 볼 때는 Sturz를 따르는 무리들은 분명 "율법을 모르는 무리"로서 사본학 광야의 무법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을 잘 쏘고 다닌다. 그들 중에 Pickering같은 총잡이는 1980년에 사본들이 재시험을 보게 한 결과 무승부를 선언한다. 그리하여, 퇴장 당한 비잔틴 사본들을 다시 본문비평학의 무대로 등장시키고자 한 것이다.
시험을 다 함께 치루고 면제받는 귀족들이 없게 한다고 해도 문제는 아직 남는다. 채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귀족들이 쓴 것은 정답이요, 서민들이 쓴 것은 오답으로 채점하면 시험을 함께 봐도 소용이 없다. AB가 과연 A와 B의 병합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본래 AB가 원문인데, 필사자들이 적다가 A나 B를 빼먹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렇게 실수로 빼먹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옥스퍼드의 사본학자 킬패트릭이 지적한 것이다. 필사자들은 자주 빼먹는 데, 특히 비슷하게 끝나거나 시작하는 곳에서 착시를 일으켜 한 줄이나 몇 자를 건너뛰게 된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던 고대에는 더구나 그러했을 것이다.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신주나의생명이되신주"를 베껴 적을 때, 졸다가 "나의소망되신주나의생명이되신주"로 적기 쉽다. 눈이 첫 번째 "나의"에서 바로 두 번째 "나의"로 넘어가는 것이다. 또한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신주"로 적을 수도 있다. 첫 번째 "되신주"에서 두 번째 "되신주"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 경우에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신 주 나의 생명이 되신 주"를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신 주"와 "나의 소망되신 주 나의 생명이 되신 주"의 병합이라고 채점하면 부당하다.
채점을 하는 시험관은 왜 그렇게 채점을 하는 지 논증해야 한다. 무조건 AB는 A와 B의 병합이라고 정답을 만들어 놓고 채점하는 것은 부당하다. 어떤 성서 기자(예, 마가)는 문체상 "저녁, 해 질 무렵에" 등으로 한 가지 사태를 두 가지 언어로 반복해서 기록한다. 이런 것은 일종의 평행법(parallelism)이지 사본학적 병합(conflation)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저자의 문체, 여러 독법들의 발생 요인(예, 본문조화) 등을 고려한 본문비평을 거친 후에야 어떤 독법이 병합인지 알 수 있다. 즉, 병합은 본문비평학을 거쳐서 결과적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지 본문비평학을 위해서 독단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증거는 아니다.
필자는 몇 달 동안 밤을 새며 공관복음 사본들에서 56개의 병합 독법의 후보들을 찾아낸 후, 다시 이들은 조사한 결과, 그중 25개에 대해서 개연성 있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것은 필자의 박사논문에서 발표될 것이다.) 그래서, 사본들의 병합율을 채점을 하라고 하면 이 25개만 가지고 채점을 할 수밖에 없는데, 비잔틴 사본들은 이중에서 총 9개의 병합을 범한다. 반면에 바티칸 사본은 총 5개, 시내산 사본은 총 2개, 베자사본은 총 1 개의 병합을 범한다. 역시 우승은 비잔틴 사본들이다. "축 퇴장"까지는 안가더라도 비잔틴 사본들은 비교적 후기 본문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아마 케임브리지의 하르방들이 이것을 알면 "봐라! 내가 뭐랬나?"하며 기분 좋아할지도 모른다. 비잔틴 본문의 병합(conflation)을 둘러싼 서부극의 한 장면은 황야의 무법자들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아 불쌍하도다! 하르방들의 지팡이에 혹 투성이가 된 비잔틴 패잔병들이여! 이것이 킹제임스역 지지자들의 종말이런가?
제10장: 짧은 독법이냐? 긴 독법이냐?
신약 사본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은 누구나 짧은 독법이 긴 독법 보다 우월하다는 원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원리를 한 번쯤 의심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괜히 왜 그런지 이유를 묻다가는 그런 사본학의 기본도 모르느냐고 망신당하기 쉽다. 그래서, 의심이 머리 속에 일어난 천재들도 저 똑똑해 보이는 바보들에게 혼자 왕따 당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게 된다.
짧은 독법을 선호하는 원리는 1752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된 Wettstein의 책에서 주장된 이후, 많은 학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은 왜 짧은 독법을 더 선호하는가? 필사자들이 사본을 필사하면서 무언가 덧붙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짧은 독법을 선호하는 과학 뒤에는 이처럼 종교적 신념이 숨어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학문은 어떤 믿음을 바닥에 깔고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학자들이 공유하는 그러한 종교적 확신을 어설프게 공격하다가는 한 시대의 또라이(돌아이)로 낙인찍혀 학자의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 속에는 용감한 과학의 혁명가들이 등장하여 거룩한 학문의 전당에서 비둘기나 팔고 돈이나 바꾸고 있는 장사꾼들의 판을 뒤집어 없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너희는 왜 만인이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어야 할 학문의 전당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느냐? 저 장사치들의 뒤에 숨어 이익을 챙기는 제사장들이 이 혁명가들을 그냥 둘 리 없지만, 한 시대에 왕따당한 선구자의 이론은 다음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판이 바뀌어지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네문서설로 유명한 Streeter는 사본학에서 일어나는 과학혁명의 역사에서도 언급되어야 마땅한 학자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어려운 전문용어의 옷을 입고 상아탑에 숨어 있으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리의 발견은 평범한 상식에서 시작된다. 1924년에 출판된 후 신약학도들의 교과서가 된 그의 유명한 복음서 연구책자에서 제기된 스트리터의 주장을 인용해 본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수고를 타자수에게 보낸 적이 있는 사람은 단어들이나 행들, 또는 문장들이 실수로 빠지는 현상이 늘 일어나지만, 무언가 첨가되는 법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난외주나 각종 독법들, 등등이 지속적으로 고대 사본들의 본문 속으로 기어들어 가지만, 의도적인 삽입은 꽤나 예외적인 반면, 생략은 주로 실수로 때로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일어나는 지속적인 현상인 것이다" (131쪽).
이러한 상식적인 주장에 그럴듯한 옷을 입혀 1973년에 네덜란드 레이든에서 출판되는 세계 최정상급 신약학 학술지인 Novum Testamentum에 출품시킨 학자가 영국 Leeds대학의 신약 사본학 교수 Elliott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본문의 확장은 의식적인 노력을 요하지만, 본문의 축소는 필사자들에게 더 쉬운 작업일 뿐 아니라, 종종 순전히 실수로 생겨난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엘리엇이 학계에서 왕따 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엘리엇의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열역학 제 2 원리를 생각나게 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원리이다. 엔트로피란 에너지의 무질서도를 가리키므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사용 가능한 질서 있는 에너지가 점점 줄어든다는 뜻이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이면 물은 식게 마련이다. 사용 가능한 열이 한 쪽이 모여 있다가 방 전체의 온도와 균일하게 될 때까지 열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것을 사본학에 적용하면, 사본필사자가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필사를 계속할 경우 사본이 보유하는 본문은 점점 짧아지게 된다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리터나 엘리엇은 사본 필사자들을 비서역할을 하는 타자수 정도로 보는 종교적 신념을 뒤에 깔고 그들의 사본학적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사본 필사자들은 과연 기계적으로 생각 없이 베껴 쓰는 이들이었던가? 아니면, 이들이야말로 고대나 중세의 지성인들로서 사본필사를 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본문 속에 집어넣는 것을 즐겼던 문필가들이었던가?
실수로 빠져나간 독법이 재생될 길이 없기 때문에 사본은 짧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추가된 독법들은 계속 필사되어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사본은 계속적으로 길어질 수 있다. 사본 필사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방향의 힘의 종합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기계적으로 빼먹고 의도적으로 더하는 지그재그가 만들어낸 사본필사의 최종 산물은 원문에 있는 일부분을 빼먹고, 원문에 없는 일부분을 추가한 본문을 가진 사본들일 것이다. 다만, 필사자의 성격이나 필사자가 사용한 선본(Vorlage)의 성격에 따라, 빼먹고 추가한 비율이 사본마다 서로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짧은 독법을 선호하는 사본학적 원리로 긴 독법을 폐기 처분하면, 우리의 사본학은 원문보다 더 짧은 본문을 생산할 것이다. 반대로, 긴 독법을 선호하면서 사본학을 하면 원문보다 더 긴 본문에 도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짧은 독법이냐? 긴 독법이냐? 따지는 사본학의 원리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lectio brevior potior 라는 멋진 라틴어 딱지를 붙이고 이 원리가 무슨 사본학의 대명사처럼 돌아다니는 것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라는 시조를 다시 읊조리게 한다. 라틴어로 된 문장을 쓰면 과연 학문적인 것인가?
짧은 독법이냐 긴 독법이냐를 둘러싼 게임에서 이처럼 무승부가 났다는 것은 주로 짧은 독법을 가진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과 주로 긴 독법들을 가진 비잔틴 사본들 간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투에 참여하는 진영은 저마다 도그마를 가지고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좋아하는 진영은 짧은 독법이 우월하다는 도그마를, 비잔틴 사본들 내지 킹제임스 역본을 좋아하는 진영은 긴 독법이 우월하다는 도그마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결은 원문에 가깝다고 믿는 사본들을 미리 정한 다음에 그 사본들의 특성을 원문의 특성이라고 우기는 순환논법에 입각한 이데올로기 싸움일 뿐이다.
짧은 독법이냐? 긴 독법이냐? 이러한 질문은 사본학에서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다. 만인들이 원문을 찾는 성스러운 구도의 기도를 올려야 할 거룩한 신약사본학의 전당이 이데올로기를 학문으로 위장하고 등장한 장사꾼들에 의해 더러워지는 것을 보라. 이 장사꾼들은 판 위에 짧은 독법이냐 긴 독법이냐를 고르라고 한다. 그러나, 짧은 독법을 계속 고르다가는 원문을 감하게 되고, 긴 독법을 계속 고르다가는 원문에 추가하게 된다. 원문을 감하는 죄를 택할 것인가? 원문에 추가하는 죄를 택할 것인가? 보라, 이제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 사본학의 전당에서 장사하는 저 장사꾼들의 판을 뒤엎을 것이다.
제11장: 무너지는 옛 이데올로기
지난 시간에는 짧은 독법을 선택하는 원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론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실제의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활동한 신약 사본학자 킬패트릭은 짧은 독법이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생겨났을 법한 경우들을 예로 제시한다. 그가 든 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비잔틴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은 마가복음 11:26에서 "그러나,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저 존경받는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은 이 구절을 빠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인가? 비잔틴 사본들이나 서방 사본들이 원문에 첨가한 것인가? 아니면, 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원문을 감한 것인가? 킬패트릭은 여기서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원문을 감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25절과 26절이 모두 헬라어 ta praptwmata humwn (너희들의 잘못들)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사자들은 25절까지 필사한 후 26절까지 필사한 것으로 착각하고 27절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학계에서 왕따당하는 것을 각오한 학자다운 주장이다. 그는 학계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당당하게 그의 제자 엘리엇과 함께 내증을 외증보다 더 중요시하는 본문비평학파를 형성하고 현대 신약사본학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이다. 우리 한국신약학계도 서구학계의 동향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식민지 신학의 신세를 면하고 한국신약학파를 형성하려면 이러한 용기를 필요로 할 것이다.
혹자는 마가 11:26은 마태 21:15에로의 본문조화(harmonization)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본문조화란 그렇게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마태복음 기자의 약어)가 마가를 자료로 사용했다면, 마태 21:15절은 마가 11:26과 유사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태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결과는 매 한가지이다. 마태를 마가가 자료로 사용했더라도, 마태 21:15와 마가 11:26은 원래 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마가 11:26이 필사자들의 본문조화로 생겨난 것이라면 왜 마태 21:15와 다른가? 더구나, 마태가 ei (만일) 다음에 가정법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필사자들은 왜 본문조화를 시킬 때 문법적으로 어색한 직설법으로 바꾸었는가? 그러나, 마가 11:26이 원문이라고 가정하면, 마태 21:15의 변화는 문법적으로 다듬은 것으로 설명이 된다. 그러므로, 네슬판이 마가 11:26을 빠뜨리고 있는 것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신봉하는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시내산 사본(알렙)과 바티칸 사본(B)이 일치하는 것을 보고는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가 합의하면 정신 못 차리고 따라가도 되는가?
네슬판에는 누가복음 23:17이 빠져 있다. 이것은 고대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인 파피루스 75, 바티칸 사본(B) 등을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틴 사본들이나 서방 사본들은 이곳에서 "그런데, 그는 명절에 한 사람을 그들에게 석방시킬 필요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킬패트릭은 이 구절이 원문에 있었으며, 고대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의 17절 생략은 이 구절이 시작인 anagke:n de와 18절의 시작인 anekragon de의 유사성으로 인해서 필사자의 눈이 17절 앞에서 18절로 건너뛰면서 생긴 것으로 본다.
네슬판은 난하주에서 17절 추가를 본문조화라고 정죄한다 (네슬-알란트 27판, 238 쪽; T라는 표시는 "추가"라는 의미이도 p)라는 기호는 "본문조화"라는 의미이다). 마태 27:15나 마가 15:6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들에로 조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마태 27:15가 마가 15:6에 유사할 수 있듯이 누가도 원래 마가와 비슷하면 안 되는가? 도대체, 왜 본문조화라는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가? 3세기경으로 연대 매겨지는 고대 파피루스인 P75와 최고로 신봉 받는 대문자 사본 바티칸 사본(B)이 17절을 생략하는 것을 보고 확신에 차서 17절은 원문에 없었다고 미리 결정한 후에 내린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네슬판의 이러한 판단을 과연 옳은가? 아니다. 누가복음 23:17은 마태나 마가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구절은 누가의 문체에 일치한다. anagke:n ... eichen ("... 필요가 있었다")은 마태나 마가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누가는 이미 14:18에서 쓴 표현이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고전 7:37, 히 7:27, 유다 1:3에서 이러한 표현이 발견됨). 사본 필사자가 마태와 마가에 조화시키기 위해 누가 23:17을 첨가하면서 오직 누가 14:18절에서 암시된 누가의 문체를 이처럼 흉내낼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억지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누가복음 저자 자신이 이 구절을 처음부터 기록했는데, 저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17절과 18절의 초두가 비슷해서 실수로 17절을 빼먹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낫다.
네슬판은 원문에 매우 근접한 본문을 제공하고 있지만, 완벽한 원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위의 예들에서 드러난다. 비록 네슬판이 비잔틴 사본들에 토대한 소위 공인본분(Textus Receptus)보다 우수한 본문을 제공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공인본문이나 비잔틴 사본들이 네슬판과 다를 때 언제나 네슬판이 옳은 것은 아니다. 네슬판은 분명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 대한 신뢰와 비잔틴 사본들에 대한 불신을 이미 작업 가설처럼 전제하고 만들어진 작품인 것을 고려한다면, 앞으로의 사본학적 작업은 비잔틴 독법들을 여기저기에서 부활시킬 가능성이 높다.
1965년에 영국 옥스퍼드에서 킬패트릭에 의해 제기된 짧은 독법 선호 기준에 대한 반란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서 1975년에 그 혁명의 꽃을 피운다. 그 혁명의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제임스 로이즈였다. 그는 고대 파피루스들이 추가하기보다는 빼먹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로이즈가 증거로 제시한 파피루스들은 P45, P46, P47, P66, P72, P75 등 쟁쟁한 고대 파피루스들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파피루스들이 실수로 빠뜨린 짧은 독법을 따라가다가는 원문보다 짧은 본문에 도달할 것이다.
킬패트릭이 옥스퍼드에서 던진 공은 미대륙으로 건너가서 마구 날뛰다가 1990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케임브리지로 날아간다. 복음주의자들이 케임브리지에 세운 틴델 하우스에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신약학 강사를 겸하는 젊은 신약학자 헤드(P.M. Head)는 로이즈가 제시한 파피루스외에 다른 파피루스들도 더하기보다는 빼먹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는 (다른 요인들이 동일하다면) 짧은 독법을 선호하지 말고, 차라리 긴 독법을 선호해야 한다"고 까지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짧은 독법을 선호해야 한다는 수백년된 사본학의 원리는 킬패트릭-로이즈-헤드의 속공에 무너지고 만다.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4지 선다형의 문제에서 가장 짧은 것을 찍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 그래서 마칠 수 있는 것은 잘해봐야 반타작이요, 대개 25%밖에 못 건질 것이다. 정답을 고르려면 답의 길이를 잴 것이 아니라 내용을 살펴야 한다. 수 백 년간 사용되어온 짧은 독법 선호의 원리는 객관식 시험에서 공부 않고 답을 맞추는 비법처럼 사본학도들을 유혹하지만 이제는 폐지되어야 할 구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제12장: 뽑혀지는 옛 푯말
비잔틴 본문이 원문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매끄럽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오랜 필사 과정에서 다듬고 다듬어진 본문은 원문보다 더 매끄러워질 수 있기 때문에 사본학자들은 매끄러운 비잔틴 본문을 후기 본문으로 간주한다. 사본 필사자들이 선본(Vorlage)의 문체를 다듬는다는 생각의 기원은 최소한 18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가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토대로 하여 편집된 것이라는 내용의 그리스바흐 가설(the Griesbach hypothesis)로 인해 공관복음 문제 연구자들에게 꽤나 유명한 그리스바흐는 사본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796년에 거친 독법이 매끄러운 독법보다 선호되어야 한다는 판단 기준(criterion)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과연 비잔틴 본문은 늘 다른 사본들이 간직한 본문(text)들보다 더 매끄러운가? 아니다! 비잔틴 본문은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옥스퍼드의 신약 사본학자 킬패트릭은 비잔틴 본문이 "대답하여 말했다," "대답하여 말한다" 등의 그리스어로서는 어색한 표현들이 고급스런 "진술했다(efe:)"로 고쳐지지 않고 보존된 것을 지적했다. 그는 마가 9:12, 9:38, 10:20, 10:29, 12:24, 14:29 등을 예로 든다. 미국의 사본학자 스터르즈는 예를 추가한다: 마태 24:2, 26:63, 마가 5:9, 7:6, 8:28, 10:5, 11:29, 11:33, 12:17, 13:2, 13:5, 14:20, 누가 5:22, 14:5, 20:34. 비잔틴 사본 필사자들은 분명 이러한 표현들을 고급표현으로 교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지만 손을 대지 않고 보존한 것이다. 그렇다면, 비잔틴 사본들이 후기에 마구 고쳐진 사본이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킬패트릭과 스터르즈는 설령 그리스바흐가 제시한 판단 기준대로 매끄러운 독법이 후기의 것이라고 해도 비잔틴 본문에도 오래된 독법들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바흐의 주장대로 과연 필사자들은 문체를 더 다듬는가? 18세기말에 제기된 그리스바흐의 주장과 완전히 상반된 주장이 벧쉬타인에 의해 18세기 중순(1752년)에 제기된 것은 기억할 만하다.
벧쉬타인은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한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두 개의 상이한 독법 중에, 한 독법이 더 읽기 좋고 더 명확하고 더 고급 그리스어로 되어있다고 다른 독법을 바로 선호해서는 안 된다. 더욱 자주 그 반대의 경우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들어도 학문의 자유가 느껴지는 속시원한 발언이다. 대부분의 필사자들이 과연 문체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만큼 헬라어에 정통했겠는가? 분명 어떤 필사자는 문체를 더 나쁘게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바흐는 분명 당시 지식인들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출판된 벧쉬타인의 책을 읽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후에 벧쉬타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더욱 거친 독법을 선택하는 원리를 세우고야 만다. 그 후 사본학의 거장들인 옥스퍼드의 킬패트릭, 프린스턴의 메쯔거 등이 그리스바흐가 세운 푯말만을 보고 따라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한편, 킬패트릭은 2세기 필사자들이 신약본문 속으로 다량의 애틱(Attic) 그리스어 표현들을 투입했다고 주장하였다. 애틱 그리스어란 기원전 4-5 세기 경에 아테네 사람들이 사용한 그리스어로서 간결하고 우아한 고전 그리스어이다. 신약성서는 이런 고전 그리스어가 아니라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코이네 그리스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을 중동지역으로 확장하면서부터 그리스어가 널리 전파되어 형성된 그리스어로서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에서 공용어로서의 사용되던 말이다. 킬패트릭의 주장에 의하면,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문체를 2세기 필사자들이 고전 그리스어로 열심히 고쳤다는 것이다.
스터르즈는 이러한 고전 그리스어 열풍이 세게 불었던 지역은 알렉산드리아였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고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보유한 고급 표현들은 원문에서 유래하기보다는 필사자들의 교정에 근거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면에 비잔틴 사본들이 보유하고 있는 고전풍이 아닌 평범한 헬라어는 원문에 기인할 수 있다. 킬패트릭이 제시한 예를 살펴보자. 고린도후서 13:4에서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고전풍인 능동태 ze:somen를 사용하지만, 비잔틴 사본들은 중간태 ze:sometha를 사용한다. 만일 고전풍을 흉내내는 것이 2세기 사본필사자들에게 인기였다면, 비잔틴 사본에 나타난 비고전풍의 독법인 ze:sometha가 원문을 반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킬패트릭과 스터르즈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그들이 따라간 푯말은 과연 옳았는가? 가다가 벼랑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과연 2세기 필사자들은 고전 그리스어에 정통한 자들이었는가? 과연 그들은 신약성서의 문체를 고전풍으로 바꾸려고 한 복고주의자들이었는가? 오히려 그 반대라면 어쩌겠는가?
현대신약사본학의 최고의 거장 중의 한 명인 고든 피(Gordon D. Fee)가 이러한 푯말은 쓸모가 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 것은 참으로 학자들의 명예를 높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저 쓸모 없는 푯말을 없애서 후학들을 더 이상 현혹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가 때로는 투박하고 어색한 표현을 쓰다가 때로는 고급 그리스어를 쓰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모국어가 그리스어가 아닐 경우 또는 저자가 사용한 자료가 그리스어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 아람어일 경우) 이러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신약성서의 경우에는 이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이다. 피가 든 예를 살펴보자. 요한복음에는 고급 그리스어 표현인 "대답하였다" (apekrithe:)와 (21 회) 어색한 표현인 "대답하고 말했다" (apekrithe: ... kai eipen)라는 표현을 (19 회) 모두 사용한다. 그래서, 비록 어색한 표현인 "대답하고 말했다"를 필사자가 "대답하였다"로 고칠 가능성이 많지만, "대답하였다"가 본래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저자의 문체가 투박한 경우에는 투박한 독법이 선호되어야 하지만, 저자의 문체가 고급스런 경우에는 고급스런 독법이 선호되어야 한다. 저자의 문체가 때로 투박하고 때로는 매끄러울 경우에는 투박하냐 매끄러우냐 하는 것은 전혀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원문복원작업을 위해서는 필사자의 경향만이 아니라 각각의 저자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비록 100% 완벽한 원문이 없지만, 거의 모든 사본들이 일치하는 부분들을 통해서 저자의 문체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비잔틴 사본들이 매끄러운 표현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나중에 다듬어진 것이라고 단정하거나,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고급스런 그리스어 표현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복고풍으로 변질되었다고 단정하기 전에 각 성경 기자들의 문체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경 각 권을 따로 연구해야 하는 것은 성경신학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사본학에서도 마땅히 취해야할 방법론일 것이다.
제13장: 셈어적인 문체와 사본학
신약성서는 헬라어(헬레니스틱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헬라어가 모든 성서기자들의 모국어였던 것은 아니다.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이 영어로 논문을 쓸 경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어색한 표현이 여기저기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헬라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들이 기록한 신약 성서 이곳저곳에서는 어색한 헬라어 표현이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어색한 표현들은 종종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모국어였을 아람어 표현을 반영할 것이다. 마치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미국인이 한국어로 말을 할 때, 종종 영어식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는 것처럼 ...
고전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다가 신약성서를 읽으면 표현이 어색한 것을 곧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어색한 표현은 대개 히브리어/아람어를 알아야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신약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헬라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아람어를 알아야 한다.
고전 헬라어에 비해 신약성서의 헬라어의 문체가 떨어진다고 비웃는 사람은 비웃게 버려 두라. 그의 고전 헬라어 실력은 신약이해에 별 도움을 못 줄 것이다. 위대한 신약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후학들이여! 열심히 히브리어를 공부하라! 네덜란드 최고의 신약학자가 누구냐고 네덜란드 신약학자들에게 물어보면, 서슴지 않고 은퇴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교수인 바르다를 언급할 것이다.
바르다는 헬라어, 라틴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 아람어, 아랍어, 시리아어, 콥트어, 페르시아어 등에 달통한 학자인데, 신약성서를 읽으면 머리속에서 아람어로 번역이 떠오르는 천재적인 학자이다. 서구 신약학자들 중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는 학자들은 이처럼 히브리어/아람어에 뛰어난 학자들이다.
일찍이 김세윤 교수님은 한국에서 강의하실 때 학생들에게 이처럼 헬라어를 아람어로 번역할 수 있는 학자들이 한국에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그때, 필자도 강한 도전을 받고 열심히 히브리어, 아람어를 공부했지만 아직 저 신약학 신선들의 경지에는 근처에도 못 도달했다고 고백한다.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 그러한 경지는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에나 간신히 도달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신약학 신선들의 경지에 젊은 시기에 도달하는 신약학자들이 후학 가운데서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복음서 연구의 경우에는 아람어 실력의 필요성이 특히 심각하다. 예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는 군중들을 상대로 사용하신 언어는 아람어였을 것이고, 유대서민들은 아람어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승했을 것이다. 그 전승들은 헬라어로 번역되어 전승되다가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결집/편집되어 복음서를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승 과정은 헬라어로 기록된 복음서에 아람어적 표현들이 나타나도록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표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아람어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람어/히브리어적 표현을 신약 헬라어에서 발견해내는 실력은 신약사본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아람어 내지 히브리어 표현이 헬라어에 반영되어 있을 경우, 사본 필사자들은 문체를 다듬고자 그러한 표현을 정상적인 헬라어 표현으로 고치곤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가정은 사본학자들이 아람어/히브리어적 독법과 헬라어적 독법 중에서 아람어/히브리어적 독법을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선택하도록 한다.
한국에 와서 살던 미국 사람이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의 가을 하늘 아름답습니다 참"라고 원래 적었을 경우에 필사자들은 "한국의 가을 하늘은 참 아름답습니다"로 고치려할 것이고, 이 두 가지 독법이 전승되어 필사본들에 나타날 경우, 현명한 사본학자는 저 어색한 "한국의 가을 하늘 아름답습니다 참"을 원문에 가까운 것으로 선택할 것이다.
사본학의 신선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우리의 킬패트릭은 바로 이러한 사본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비잔틴 사본들에서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가 든 예를 몇 개 살펴보자. 마가 1:27에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은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적고 있다. 네슬-알란트 판은 물론 그들의 흠모하는 애인들의 미니 스커트(짧은 독법)에 반하여 이 독법을 따라간다. 한편, 비잔틴 사본들은 여기서 "왠 새로운 가르침이냐, 이것이?"(tis he: didache: he: kaine: aute:)라고 적고 있는데, 이 독법은 어순이 헬라어로서는 어색하지만, 주어가 뒤에 나올 수 있는 히브리어(또는 아람어)에서는 정상적이다.
그래서, 이 어색한 헬라어를 다듬지 않고 보존한 비잔틴 사본들을 여기서 신뢰할 수밖에 없다. 저 어색한 헬라어 표현은 비록 투박해도, 예수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왠 새로운 가르침이냐, 이것이?" 짧은 독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새로운 가르침"이란 독법을 선택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의상을 복원하면서 미니 스커트를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우스꽝스런 일이다. "왠 우스꽝스런 선택이냐, 이것이?“
마가 10:51에서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대답하시며 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적고 있는데, 비잔틴 사본들은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그에게 예수께서"라고 어색한 순서의 헬라어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가 동사 뒤에 나오는 어순은 히브리어/아람어에서는 정상적인 것이다. 비잔틴 사본들은 이렇게 헬라어로서는 어색하지만 저자가 기록했을 법한 독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네슬-알란트 27판은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따라갈 뿐 아니라 아예 비잔틴 사본들의 독법을 비평주에 소개도 하지 않는다. 우째 이런 일이!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다. 이것은 네슬-알란트판을 표준으로 사용하는 신학자들에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비록, 저 에라스무스가 장사 속으로 출판한 공인 본문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게릴라 부대에 합류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최소한 네슬판 종속 신학에 종언을 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 신학의 서구로부터의 독립은 네슬-알라트판으로부터의 독립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서구 학자들이 만든 네슬-알란트판을 그대로 사용하는 몰사본학적인 신학계는 서구신학으로부터 철저한 독립을 할 수 없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으로 무조건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말씀보존학회 역시 서구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수입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신학도들에게는 이제 이러한 수입품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따라갈 의무가 없다. 그러나, 우리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것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엄밀한 사본학적 노력을 통해 발굴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것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미래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한신학독립만세!
제14장: 70인역과 신약 사본학
신약성서 사본들에 나타난 헬라어적 표현과 히브리어/아람어적인 표현이 함께 나타날 경우, 히브리어/아람어적인 표현이 원문일 가능성이 많다.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는 관계로, 필사자들이 히브리어/아람어적인 어색한 표현을 헬라어적인 표현으로 고쳤을 가능성이 그 반대로 고쳤을 가능성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리를 개개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도그마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한 사본학은 더 이상 학문이 아니라 독단일 뿐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는 바르트가 한국의 일부 교계에 자유주의신학자로 소개된 것처럼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다. 바르트 만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운 사람도 없을 터인데, 바르트를 자유주의라니! 사람을 죽인 강도와 격투하여 강도를 때려잡은 용감한 시민이 경찰에게 살인죄로 체포당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다. 그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제대로 항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목격자는 그 경찰관의 정체를 알 것이다. 제복을 입은 사이비 경찰관이요 강도들의 앞잡이인 것이다. 바르트 신학은 오늘날의 한국상황이 아니라 당시 유럽 상황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셈어적인 문체를 고려할 때에는 신약 저자들과 필사자들의 당시 언어 환경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아람어적 표현이 언제나 원문을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구약의 헬라어역인 70인역(LXX)이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 때문이다. 70인역은 히브리어/아람어로 된 구약의 번역인 관계로 비록 헬라어로 되어 있지만 그 표현들이 상당히 히브리어/아람어적이다. 그러한 셈어적인 헬라어는 오래도록 회당을 중심으로 70인역을 읽으며 종교생활을 한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인 헬라어 내지 유대적인 헬라어로 느껴지게 되었으며, 후에 신약성서를 기록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거룩한" 헬라어로 성서를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셈어적인 헬라어는 단지 성서기자들만이 아니라, 사본 필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본문을 더욱 종교적인 헬라어로 기록하고자 여기저기서 70인역적 헬라어로 바꾸도록 했을 것이다.
그래서, 셈어적인 헬라어를 무조건 선호할 것이 아니라, 혹시 70인역적인 헬라어가 아닌지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70인역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셈어적 표현은 원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사본 필사자들이 70인역의 문체를 흉내낸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든 피는 비잔틴 사본들의 셈어적 문체는 70인역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비잔틴 사본들이 더 많은 셈어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 더욱 우월한 사본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다.
70인역의 헬라어가 종교적 헬라어로 정착되어 회당 헬라어로 사용된 현상과 유사한 현상이 한국에서도 나타났다. 개역성경의 한국어는 한문을 번역한 듯한 역어체로 되어 있지만, 오래도록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면서 종교적 한국어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언어의 의미는 그 활용에 있듯이, 문체가 주는 느낌도 그 문체가 사용되는 사회적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 기자들, 특히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저자들이 70인역적 헬라어, 즉 종교적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성서 번역을 할 때, 특히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시사점을 준다. 종교적인 한국어로 굳어진 개역성경적인 한국어의 문체를 반영하는 것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헬라어 문체를 살리는 길일 수 있을 것이다. 현대한국어의 문체를 따라간 표준새번역이 교회들에 의해 예배용 성서로 사용되지 않는 데에는 표면상 제기된 신학적인 문제보다는 이러한 언어적인 문제가 내면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언어심리에 대한 고려가 좀더 있었더라면, 원어 반영에 있어서 진일보하여 성경공부를 위하여 권할만한 번역본인 표준새번역은 일찍이 예배용 성서로서도 자리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70인역 문체에 대한 고려는 비잔틴 사본들을 조심스럽게 평가하게 한다. 셈어적인 표현을 잔뜩 지닌 비잔틴 사본들은 열등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셈어적인 표현들은 필사자들에 의해 다듬어지지 않고 남은 원초적인 표현들로서 원문을 반영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셈어적인 표현들 때문에 비잔틴 사본들이 다른 사본들보다 우월하다고 간주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셈어적인 표현들의 상당수가 실은 70인역적 역어체 헬라어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셈어적인 문체가 70인역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필사자들이 70인역의 영향으로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본래 셈어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표현은 원문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70인역 문체의 영향을 고려하면서 사본학을 할 때, 과연 비잔틴 사본들은 어떠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70인역적인 헬라어를 70인경의 영향을 받은 필사자들 탓으로 돌리는 것이 언제나 안전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문체가 본래 70인역적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의 문체로 저술을 한 작품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원문을 복원할 때에는 70인역적인 헬라어 표현이 필사자에 의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저자의 문체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70인역적이지 않은 셈어적인 문체는 오직 70인경적이지 않은 셈어적 문체로 저술된 성경,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원문복원에서 사용될 수 있는 원리이다.
신약사본학을 위해서는 문체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셈어적인 헬라어 문체, 70인역적인 헬라어 문체, 각 저자의 헬라어 문체에 대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약사본학도는 우선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등에 탁월한 실력을 연마해야 함은 물론 성서 각 저자의 문체를 면밀히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은 Bible Works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덕분에 이러한 관찰이 쉬워져서 우리는 이제 사본학이 재미있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제 신약 사본학을 위해서 "마태복음의 헬라어 문체," "마가복음의 헬라어 문법," "누가복음의 헬라어 구문" 등과 같은 책들이 저술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원문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통계를 위해 네슬판이나 공인본문(TR)을 사용할 수 밖에 없지만, 네슬판이나 공인본문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이 원문을 90% 이상 반영하는 것은 분명하므로, 이러한 각 저자의 헬라어 문법, 문체, 구문 연구는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헬라어 연구는 신약 사본학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일 뿐 아니라, 성서번역, 성서주석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제15장: 사본학에서의 바알세불 논쟁
성서학에 기초하지 않은 교의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시대가 바뀌면 바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신약사본학과 신약헬라어 연구 없는 신약학도 토대가 약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신약 연구에는 고등비평이 주된 방법론으로 사용되어왔고, 사본학이나 신약헬라어 연구 등의 기초분야는 하등비평이라고 무시된 것인지 관심을 끌지 못해 온 것이다.
고등비평은 그 용어 때문인지 매우 고등한 학문분야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과연 고등비평은 하등비평보다 우월한가? 고등비평은 하등비평을 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서학이라는 집의 상부에 위치할 뿐이지 더 고차원적이거나 더 어려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등비평분야에 해당하는 공관복음 문제 연구의 경우, 세 복음서의 상호관계 연구인데, 그 중에서 어느 복음서가 우선하는지 찾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어렵기는 어렵지만 공관복음 문제는 풀릴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반면에, 신약원문을 복원하는 본문비평학은 수천개의 사본들의 숲 속에서 사라진 원문의 조각들을 찾아 복원하는 일이라 어렵기 그지없다. 더구나, 100% 원문을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비평학(textual criticism)은 하등비평이라 불릴 것이 아니라 기초성서학이라 불려야 더욱 합당할 것이다.
기초과학이 약하면 다른 과학분야가 발전할 수 없다. 과학분야가 약하면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없다. 그래서, 과학 분야에서는 기초과학이 매우 고등하게 여겨진다. 신학분야에서도 성서학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성서학 내에서, 최신비평이론들이 선호되는 가운데 기초성서학분야들이 경시되는 것은 성서학 발전을 위해서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도외시된 사본학 분야에서 열심히 설치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다수 본문 또는 킹제임스 역본 지지자들이다. 이들이 사본학에 대중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 것은 다행스럽고,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증거는 숨기고 자기들의 증거만을 제시하는 부정직한 논법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다른 본문이나 역본들을 마귀의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히 성경 모독죄가 아닌가 염려된다. 또한, 어쨌든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경을 마귀의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마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려다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논법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면서 사용한 논법과 흡사하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게서 귀신을 좇아내시는 것을 보고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님이 혹시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동요하는 무리를 보고 시기심이 일어났는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즉 사탄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하게 된다 (마태 12:24). 결국 예수님을 반대하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넘지 못할 선을 넘게 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한 번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했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사람을 사탄의 능력으로 사역한다고 주장한다면 성령을 사탄이라고 모독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차서 예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성령을 사탄이라고 여기는 성령모독죄를 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는 율법의 파괴자로 보였던 것이다. 바리새 전통이 확실한 진리라고 믿었던 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어기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결국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석한 것이다. 결국 자기들과 다르다고 하여 예수님을 정죄하다가 하나님의 성령마저 모독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확신이 하나님을 모독하는데 까지 가고만 것이다.
킹제임스 역본이 토대한 공인본문 또는 다수 본문이 옳다고 믿은 나머지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다른 본문이나 역본들을 마귀의 성경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저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다시 범하고 있다. 그들이 개역성경이나 네슬-알란트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반대하는 데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들을 마귀의 성경이라 부르며 성경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참으로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마귀의 성경"이라는 악의에 찬 표현은 사본학을 모르는 대중을 현혹하는 표현일 뿐 아니라, 결국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모독이요, 나아가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성령께 대한 모독이다.
킹제임스 역본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며, 그 뒤에 놓인 공인본문도 매우 우수한 본문이다. 그것은 원문을 열심히 필사하며 전수한 결과로서, 비록 약간의 변경이 있어도 원문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본문이다. 그러나, 네슬-알란트판이나 표준새번역도 역시 매우 우수한 본문이요 매우 좋은 번역이다. 어찌 한 쪽이 천사의 성경이고 다른 한 쪽은 마귀의 성경이겠는가?
확신에 차서 어떠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주장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는 100% 옳은 이론도 없고 100% 틀린 이론도 없다. 조금 더 옳고 조금 더 틀릴 뿐이다. 사본들 중에도 100% 원문을 보존하고 있는 사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00% 틀린 사본도 있을 수 없다. 좀더 나은 사본, 좀더 못한 사본이 있을 뿐이다. 공인본문을 택하건 네슬판을 택하건 어느 쪽도 원문을 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해도 원문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공인본문과 네슬판은 사실상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를 과장하여 한 쪽은 마귀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성경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마귀는 약간의 변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한다고 하지만, 미세한 차이를 과장하여 순수한 성도들을 속이는 것은 부정직한 것이다.
우리에게 성경의 원문을 없다. 그리고, 사본학을 통해 100% 원문을 복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끝없이 원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100% 원문이 있어도 성경을 다 해석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석학을 통해 성경을 100% 다 알 수는 없다. 한 걸음씩 평생 성경을 좀더 알아 갈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을 다 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다. 저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이 창조주 하나님이다. 성서는 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안내판이다. 우리는 안내판을 신뢰하지만 그 안내판을 믿음의 궁극적 대상으로 섬기지는 않는다. 그 안내판을 좀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하려는 노력은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현일 뿐이며, 안내판을 보고 따라가는 성도들과 그 안내판을 곧 접하게 될 인류에 대한 작은 봉사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봉사로서의 사본학은 안내판을 닦는 청소에 불과한 일이더라도 바로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값지게 바뀌는 것이다.
제16장: 킹 제임스의 최후
"공인본문" 또는 킹제임스역의 우월성 내지는 무오성(!)을 주장하는 사본학의 반군들은 한국에도 상륙하여 꽤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이들은 항체가 개발되지 않은 한국에 침투하여 한동안 승리의 행진을 거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활약은 사본학이라는 항체를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에 성서가 있다면, 이 성서의 원문의 형태를 복원하는 사본학적 작업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도외시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새로 등장한 강력한 병균에 의해 사본학이라는 약품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에 학문적인 사본학이 발전하게 된다면, 그 일차적 공로를 상륙한 반군부대인 말씀보존학회에 돌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로를 돌리기 전에 우선 말씀보존학회의 그럴듯한 주장의 허구성을 요약 정리해 보자.
1. 정상적 상황에서는 다수의 사본들이 원문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가 모슬림들에 의해 정복되고 헬라어 사용이 비잔틴 제국으로 줄어든 상황 때문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지역인 비잔틴 지역에서 대부분의 헬라어 사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잔틴 사본들의 다수성은 원문성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제3장).
2. 하나님께서 많은 교회들이 성경 원문을 사용하도록 보존하셨다는 말씀보존학회의 교리적 주장은 자살 논리이다. 더 많은 교회들이 네슬판에 토대한 개역성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교회가 원문에 토대한 성경을 사용하도록 섭리하지 않으셨겠는가? (제3장)
3. 고대 파피루스들은 비잔틴 본문에도 초기 독법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독법들은 비잔틴 본문 전체를 재평가하게 하지는 못한다 (제5장).
4. 본문조화일 가능성을 가진 독법들을 검토한 통계는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비잔틴 사본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본문조화 독법의 후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고려할 때,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에 진짜 본문조화 독법이 더 적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비잔틴 사본들보다 우수한 사본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제8장).
5. 비잔틴 본문에는 더 많은 본문 병합이 나타난다. 본문 병합은 본문의 후기성의 증거이므로, 비잔틴 본문 형태는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9장).
6. 교회 일반이 사용하는 성경은 비록 100%는 아니더라도 원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성경을 단지 비잔틴 본문 내지 에라스무스의 본문 (소위 공인본문)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마귀의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마귀라고 간주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제 15 장).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본들을 옹호하고자 신성모독죄를 짖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잃은 것이 얻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킹제임스역 지지자들 또는 말씀보존학회는 이제 과거의 단순한 주장에 종말을 고하고 이제 상대를 존중하는 학문적인 태도로 사본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비잔틴 사본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열등한 것은 아니다!"라는 겸허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1. 공인본문이나 킹제임스역 뒤에 놓인 비잔틴 본문은 4세기의 루시안(Lucian)의 개정작업에서 기원한다는 추측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개정작업이 우수한 고대사본을 토대로 되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루시안의 개정 작업이 비잔틴 본문의 열등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제 2 장).
2. 비잔틴 사본들의 후기성은 열등성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더 오래된 사본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주장될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 사본도 매우 초기의 사본을 필사한 사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된 이집트 사본들은 건조한 사막 기후로 인해 더 오래 보존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4장).
3. 초기 교부들의 성서인용이 비잔틴 본문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비잔틴 본문의 초기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비잔틴 지역에는 우리가 성서인용을 검토할 만큼 충분한 저술을 한 초기 교부가 없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6장).
4. 본문조화라는 판단기준으로 비잔틴 본문을 열등하다고 규정할 수 없다. 본문조화는 다른 사본(특히 베자사본)에서도 많이 일어나며, 공관복음간의 상호 일치는 본문조화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본래 원문상 일치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독법이 본문조화이므로 원문이 아니라는 판단은 그 독법이 원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가정한 순환 논법이 불과하다 (제7장).
5. 비잔틴 본문이 더 길다고 해서 더 열등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본필사과정에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추가된 독법들이 계속 필사되어 점점 길어지기도 하지만 실수로 생략된 독법이 재생되지 못하여 점점 짧아지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본 필사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변화의 종합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늘 짧은 독법을 선택하면 원문보다 짧은 본문에 도달하게 되고, 늘 긴 독법을 선택하면 원문보다 긴 본문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특히 고대 파피루스들은 빼먹는 경향성 때문에 이들을 따라 짧은 독법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하다 (제10장).
6. 비잔틴 본문이 매끄럽다고 해서 후기 본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잔틴 본문은 어색한 헬라어 표현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매끄러운 독법이 나중의 것이라는 판단기준은 신빙성이 없다. 저자 자신이 때로는 투박한 표현을 때로는 매끄러운 표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투박하냐 매끄러우냐 하는 것은 저자의 문체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체에 대한 고려 없이 어느 한 쪽을 원문에 가깝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제12장). 또한, 비록 셈어적인 표현들이 실은 70인역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제14장), 비잔틴 본문의 셈어적인 표현들은 원문의 반영일 수 있다 (제13장).
공인본문이나 비잔틴 본문은 말씀보존학회나 그 동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한 본문은 아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대개의 사본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히 열등한 본문도 아닐 것이다. 비잔틴 본문의 실상은 이 양 극단의 어느 중간 지점에 위치할 것이다. 그렇다면, 원문복원을 열심히 하다보면 현재의 네슬-알란트판을 공인본문에 조금 더 가깝게 고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보존학회의 독단적 주장의 종말(철회)은 동시에 네슬-알란트 26-27판의 종말(개정)과 함께 예견되는 것이다. 그 때 겸손한 자들은 눈물을 닦고 오만한 자들은 고개를 떨굴 것이다.
신현우 박사/ 총신대학교
위 글은 신현우 박사의 <사본학 이야기: 잃어버린 원문을 찾아서> (서울: 웨스트민스터출판부, 2003)의 일부로 추정된다. 편집자가 의도적으로 긴 문단의 경우는 짧은 문단으로 나누었다. 사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자는 원본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리포르만다>는 이러한 문헌이 있음을 알리는 의도로 게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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