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chard of WormsㅡBishop of the Imperial City of Worms (재위 1000-1025)
지적 폭군
최덕성 해석학 강의록 1: 머리말
"자기가 본문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본문이 자기를 해석하게 하라"(어거스틴)
우리 사회의 증대되고 심화되는 양극화는 사람들을 지적 폭군으로 만들고 있다. 정치에 대한 대립적 시각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분위기는 도를 넘어섰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했던가. 좌파 대 우파, 사회주의 대 자유민주주의, 여당 대 야당, 진보 대 보수, 자유주의 신학 대 정통신학, 맥락적 이해와 규범적 이해 등에서 드러나는 선이해, 아집, 편견, 무지가 지적 폭군을 양산하고 있다.
언론매체와 사회소통매체에 올라오는 글을 보노라면 우리가 지적 폭군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멀쩡한 지식인이 정신병자같은 주장을 펼친다. 주장과 근거가 일치하지 않거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교회 변두리에는서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단자들이 설쳐댄다. 거짓말 모략 방식의 전도를 정당화 하고, 기존 교회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산 옮기기'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한다. 최근에는 "감옥에 계신 하나님의 재판장이 심판한다"며, 이 이단 교주를 "보혜사"로 일컫는 황당한 유튜브 동영상이 페이스북 스폰서 영상으로 올라오고 있다.
해석학과 기독교 성경 해석학은 구분된다. 이 둘은 관련이 깊다. 성경 해석자와 주석학자는 모두 해석학적 토대 위에서 활동을 한다. 자신이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일련의 전제, 원리, 해석 작업을 동원한다. 해석과 전제-관점-환경-선이해 등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해석학자도 한계를 지니고 있다. 지적 능력의 한계를 간파하지 않으면 지적 폭군으로 전락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점에서 인류에 공헌한 바 크다.
지적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팩트나 텍스트 생산자와 해석자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의 이해, 전통, 자기 시대에 대한 논의가 필수적이다. 해석학은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생산한 저자 그리고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관계를 비평적으로 규명한다. 텍스트가 가진 언어학적, 회화적, 기타 인간 표현 형태들에 대한 적절한 해석방법들을 고찰한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개인의 해석학적 사고 발전에 끼친 영향들과 해석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해석자의 중요한 특징 등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현대 인문과학은 해석학적 질문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해석학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는 어떤 학문 활동도 불가능할 정도이다. 이 같은 경향에 걸맞게 현대 신학은 두 지평 곧 과거의 본문과 현재의 해석자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좁히는 해석학적 논의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기독인이 섬기는 교회의 역사 또는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해석의 역사이다. 복음을 전수받아 그것을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적용하는 일은 기독교 본문 곧 성경과 그것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을 요구한다.
이 작업은 항상 새로운 긴장을 수반해 왔다. 기독교 공동체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 차이를 보여 왔다. 오늘날에도 성령세례와 은사, 여성안수, 교리의 본질과 권위, 교회교육의 내용과 형식, 교회의 구조와 제도, 교회전통, 동성연애자 문제 등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보인다. 본문과 그것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교회의 기존 입장을 비평적으로 검토하려는 사람들과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그것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학도의 임무는 가능한 문제가 되는 쟁점들을 밝히고, 신앙적 공동유산을 비평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적합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성경, 교회전통, 신앙고백, 교리, 신학, 역사 등 신앙의 낸적 외적 요소들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을 필요로 한다.
성경적 신앙을 수호하려는 신학도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우상성은 자신의 신념을 유일한 ‘성경적’ 견해로 여기며 그것을 절대화 하는 경향이다. 타성적으로 지금까지 다루어 오던 내용을 같은 방업으로, 같은 형식 속에 집어넣어 판단하면서, 오히려 자기는 모든 입장을 초월한 것같이 생각한다. 자신을 자연과 우주의 중심에 두고, 자신을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며, 자기의 주관적 견해를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자들조차 자기 견해를 말하면서도 자주 “객관적으로 말해서...”라고 말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패러다임을 가진 진본주의 신학 전통 하에 있는 신학도들도 자신의 견해와 다른 신념, 특히 정통적 견해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선 무당 사람 잡는다"고 하는 태도일 때가 많은 것은 피차일반이다. 이러한 현상은 상호이해의 결여와 본문 이해에 수반되는 해석학적 조건과 과정을 무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정황과 관련을 갖고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특별계시라는 신적인 영역 외에는 인간이 무오한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상상적, 형이상학적, 초역사적 또는 초인간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합리적으로 절대적이거나, 명제적으로 무오한 진리를 알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까닭에 건전한 지식인은 진리 이해에 대한 해석학적 조건과 제한성을 깨달아 항상 배우고 겸허하게 진리의 확실성을 탐색하려는 노력한다.
지적 폭군이 아닌 지식인은 자신에게 있을 수 있는 왜곡, 편견, 실수에 대해서도 비평적이어야 하며, 해석학적 활동에서 본문을 자기의 선 이해에 밀어 넣어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동시에 타인의 견해를 기꺼이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 본문에 의해 자기의 선이해가 검토되고, 해석학적 검토의 결과에 따라 자기의 해석학적 통찰을 기꺼이 교정하려는 선비적 태도를 지닌다.
지적 폭군이 아닌 사람은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자기가 본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자기를 읽고 자기의 요구와 성령의 역사를 자기 속에서 의식하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자신이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이 자신을 해석하도록 하는 자기 비평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말씀과 성령에 종속시킨다.
바람직한 해석자는 본문에 대한 해석과 해석자의 세계에 대한 해석과 해석자 자아에 대한 해석에 동시에 관심을 가진다. 본문을 읽을 때 작용하는 인간 이해의 한계 곧 해석학적 조건들에 대한 통찰이 독해활동을 증진시킨다. 해석학은 사변적 신학자들이나 씨름해야 하는 선택적 작업이 아니라 진리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모든 신학도의 필수 과업이다. 어느 신앙전통, 신학전통, 교회전통도 해석학적 임무, 비평적 사고의 의무를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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