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두마차시대
최덕성 교수의 『쌍두마차시대』(2012)를 읽고/ 정태홍 박사
교황과 황제 그리고 중세 망딸리떼
무릇 책이라는 것은 제목을 보면 ‘그 책이 무엇을 말하는가?’하는 답이 나와야 한다. 요즘에 나오는 책들을 보면 너무 감성적인 제목이 많다. 제목만 그런 것이 아니라 표지도 그렇다. 책의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정서와 달리 나의 은사 최덕성 교수의 책은 제목에서부터 확연히 다른 탁월성을 보여준다. 책명 『쌍두마차시대』(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2)는 중세 시대의 망딸리떼(Mentalite)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핵심적으로 나타낸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의 어느 누구도, 세계의 어느 학자도 이런 책 제목의 중세교회사를 내놓거나 간파한 사람은 없다.
지식의 명료성은 학자의 가치를 빛나게 한다. ‘중세는 쌍두마차시대이다’라고 메시지를 명료하게 담아낸 저자의 통찰력은 학자로서의 탁월성을 입증한다. 나의 은사 최덕성 교수의 『쌍두마차시대』를 읽는 독자는 중세의 흐름을 교황과 황제의 두 맥락 속에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쌍두마차시대”란 역사학도에게도 생소한 용어이다. 쌍두마차(雙頭馬車)는 두 마리의 말이 하나의 마차를 이끄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쌍두마차란 어느 한 분야에서 주축이 되는 두 사람, 사물, 세력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세 서양사와 교회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시점(약 410년)에서 동서방교회의 분리(1054년) 사이는 교황과 황제, 교권과 제권이 충돌하고 야합하면서 하나의 종교사회-국가를 이끌었던 ‘교황들과 황제들의 시대’였다. 신학자, 성직자, 경건한 기독인들이 많았지만, 교황과 황제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실력자는 없다.
저자는 『쌍두마차시대』의 집필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양 중세사회를 지배한 사상은 무엇이며 어떤 특성을 갖고 있었는가? 그 시대의 기독인들은 어떤 감수성, 정서, 망딸리떼(Mentalite)를 지니고 살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중세교회가 우리에게 물려준 신앙, 문화, 사상 유산은 무엇인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 책은 하나님이 중세교회 안에서 어떻게 역사했으며, 그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에서 맡긴 일들을 어느 정도로 성실히 수행했는지 탐색한다. 기독교의 로마화, 미신화, 타락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생명력 있게 살아 있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독인들의 삶과 신앙의 흔적을 확인한다. 캄캄한 밤하늘을 밝히는 별들처럼 그 암흑시대를 아름답게 빛낸 신앙운동, 황제의 무례, 교황의 폭력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생명력을 유지한 신앙고백공동체의 활동들을 살펴본다.
역사, 특히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고 평가하는 직임을 맡은 저자의 이와 같은 집필 의도는 남다른 학식과 깊은 열정으로 지나간 중세 교회사의 궤적을 통해 그 핵심을 꿰뚫으려고 했는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서평자가 알기로는, 중세교회사를 저술한 수많은 필객들이 있었지만 중세 사회의 망딸리떼를 이처럼 선명하게 제대로 파악한 저술가는 없었다.
저자는 『쌍두마차시대』의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섯 가지 독자적인 원칙을 적용한다. 첫째는, 예술사로 책을 엮었다. 역사성을 띄거나 망딸리떼를 반영하는 예술품을 소개함으로써 그 시대의 망딸리떼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저자는 예술가의 눈으로 역사를 탐색함으로써 중세교회사를 이해하려고 했다.
둘째, 각 장마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논지를 담았다. 특정 주제와 개론을 다루면서도 독자들이 꼭 숙지해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상론했다. 무엇보다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중세의 사건, 사상, 신앙의 흐름을 유형별로 풀어냈다. 독자들은 신학적으로 조율된 중세 메시지의 진수를 맛볼 수가 있다. 중세교회의 독창적 움직임과 사상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유기적으로 관련지어 평가했다. 사회 · 문화 · 정치 · 환경 · 정신 지식 · 가치 · 강박관념 · 헌신 · 영혼의 갈망 · 제도 따위를 포괄적으로 다루면서도, 신앙고백적인 사건들의 흐름과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셋째,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조망했다. 그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바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표현된 신념들은 모두 신앙고백적인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검토하면서 교회-신앙공동체가 말과 글과 행동으로 또는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로 고백한 신앙 활동에 주목했다. 성경을 역사 평가와 재구성의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이 그 시대의 기독교, 교회, 기독인들에게 요구한 본분(本分)이 무엇이며, 그들이 그것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탐색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시각을 극복하고 개혁주의 관점으로 서술했다.
넷째, 서양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동북아시아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소개하여 시간과공간의 차이로 말미암아 생긴 이해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다. 다섯째, 각장 마지막에 신학도와 목회자를 위한 메시지를 실어 ‘교회를 위한학문’이 되도록 했다. 역사적, 신학적으로 검증되고 조율된 이야기들이효과적인 설교와 교회교육의 소재가 되고, 내용과 관련된 예술작품과 그림들과 더불어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지각의 장을 넓히게 했다.
저자의 따뜻한 배려가 담긴 머리말을 넘어 차례를 보게 되면 중세의 망딸리떼를 파악하기 위한 17개의 주요 제목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시대의 세상이 요동친 만큼 당대의 신학도 파란만장했다. 1장은 쌍두마차 시대의 큰 그림을 그려준다. 국가와 교회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시절에 수도원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교회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성경이 기준이 되어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쌍두마차는 개혁의 거센 바람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러한 세월들 속에 등장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운 사람이었다. 저자는 책 전체 분량 면에서 어거스틴에 대해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만큼 중세 교회사에 어거스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 마니교를 지나 기독교로 회심하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역사의 결과이다. 저자는 어거스틴이 헬라철학을 적대시하지 않고 학문적 방법의 장점들을 수용했다고 하나, 어거스틴의 신비주의적인 면은 방법론만이 아니라는 것은 지적하지 않는다.
저자는 로마의 멸망을 살펴보면서 기독교가 얼마나 문화와 인종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밝히면서, 이 점은 교회사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라고 한다. 교황과 황제가 이끄는 쌍두마차 시대가 되자 기독교는 극심한 도덕적 타락으로 병들었다. 서방교회가 잦은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베드로의 열쇠’를 앞세워 세속정치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동방의 황제는 신학문제에 개입함으로써 교회를 장악했다.
제6장은 세상도 교회도 자기 배를 채우려고 했을 때 기독교가 어떻게 변질이 되었는지 말해 준다. 저자는 그런 시대를 생각하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처신을 생각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가지이지만 세속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세상과 야합한 교회가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을 개탄해 하면서 오늘날 기독교가 성명서만 발표하고 실제로 살아가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서방교회의 교황제도를 안착시킨 그레고리는 헌신적인 목회자였다.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후에 그를 기념하려고 그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던 찬송들을 수집하여 그레고리 찬트(Gregorian Chant)라고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그레고리의 활약상을 많이 진술함으로써 목회자 모범이었다는 것이 강조하는 것은 남다르다.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교리에 관한 논쟁으로 세상은 다시 뜨거워졌다. 칼케돈공의회는 극단의 헬라적 사고양식을 배격하고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고 천명했다. 이것은 헬라문화의 사변성의 유혹과 도전을 물리친 사건이었다. 저자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말하면서 경교의 한국 전래에 관한 과정을 상세히 말했다. 석굴암 석불과 십일면 관음상은 페르샤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기독론 논제의 배후에는 헬라문화 양식의 도전과 위협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보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엿보인다”라고 말함으로써, 멋진 하이라이트를 날린다.
제9장은 망딸리떼를 말하는 저자의 남다름이 나타난다. 중세를 주름 잡은 임자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 임자는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저자는 남다른 점은 화랑도가 신라의 젊은이들의 정신과 생활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을 베네딕트 수도주의운동과 함께 말한 것이다. ‘무엇이 그 시대를 사로잡고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6-12세기의 서양세계는 ‘베네딕트 시대’였다. 저자가 베네딕트에 관해 많이 다루면서도 그 영성이 지닌 문제점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쉽게 여겨진다.
로마의 멸망(410년)에서 샤를마뉴의 대관식(800년)까지 약 400년 동안 일어난 서양세계의 가장 큰 변화는 게르만세계와 로마세계의 점진적 결합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서양중세기라고 한다. 게르만족과 로마 문화가 만나 융합함으로써 쌍두마차의 세계, 곧 기독교제국(Christendom)을 만들어냈다. 교회와 국가의 결탁으로 교회의 정체성은 무너졌다. 저자는 국가교회를 비판하면서 rhyghl가 강압적인 국가권력 아래서 교회다운 기능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보았다.
프랑크 왕국의 국왕에 지나지 않던 샤를마뉴가 교황을 후견으로 삼아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샤를마뉴는 제국을 넓히면서 집단 개종을 강요했다. 저자는 서방기독교의 호전성, 문화적 우월감, 팽창주의가 이 시대에 고착되었다고 보았다. 제11장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기독교와 서양 토속신앙”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기독교가 로마화 되었다’는 저자의 견해는 이 시대의 기독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서방교회는 봉건적 착취수단으로 모은 재물로 웅장한 교회당을 건축했다. 사람들은 저승의 복락을 위해 아낌없이 교회와 수도원에 바쳤다. 단테는 교회의 봉건적 횡포를 안타까워하며 눈을 감았다. 중세암흑 시대의 기독교는 미신화 되었다. 토속신앙은 기독교신앙이라는 겉옷을 입었으나 교회 안에는 미신화 된 종교로 변질되었다. 교황청의 팽창주의에 제공을 건 황제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성직임명권이었다. 교황은 ‘그건 내 권한이야’라고 소리쳤지만 황제는 자신의 정체 생명과 재산유지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는 교황선출과 성직임명에 계속 관여했다.
교황 그레고리 7세(헬데브란트)는 제국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황제, 국왕, 영주들이 교황의 반지와 발에 입맞추라고 규정했으나 헨리는 무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하게 된 헨리는 카놋싸 성채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에게 자비를 구했다. 카놋싸의 굴욕이다. 교만한 교황의 말로는 비참했다. 제4차 레이트란공의회(302년)는 세속권력이 영적 권력에 예속된다는 ‘우남상탐’(Unam Sanctam)을 발표했으나 권력에 마음을 빼앗긴 교회는 타락으로 치닫고 있었다.
라틴 기독교가 암흑기에 접어들고 교황제국 건설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비잔틴 기독교는 성상숭배 논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레오3세는 성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기고 금지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성상문제를 황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교회가 결정할 주제이며 황제는 간섭할 권이 없다고 말했다. 성상숭배가 일단락되자 동방기독교는 수도원 운동과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비잔틴 수도원 운동은 ‘명상적 은둔주의’였다. 신화사상이 시작되었다. 저자는 동방교회가 선교를 통해 모라비아 교회, 불가리아 교회, 세르비아 교회, 러시아 교회로 번져나간 역사를 다룬다. 동서방교회는 교권을 둘러싼 이념 때문에 분열한다.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 하는 싸움에서 증오와 질투가 교회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성상숭배로 말미암은 교회의 타락을 소개하면서 한국교회로 눈을 돌려 말한다. 정교회가 우상숭배로 물들었듯이 한국의 로마가톨릭도 조상숭배 제사와 공자 공경 의식, 신차참배를 허용했다. 오늘날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독교에 제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갈수록 변질되어져 가는 한국교회를 애타는 마음으로 꾸짖고 있다.
쌍두마차의 승자는 누구일까? 오늘날 흐름을 보면 세상이나 교회나 싸움은 여전하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승자가 될 수 없고 내일의 승자가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욕망과 권력욕은 끝이 없고 식을 줄을 모른다. 저자가 안타까워했듯이 마지막 심판을 향하여 달려갈수록 교회의 타락을 지금보다 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쌍두마차에 짓밟혀 고난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있다. 저자의 『쌍두마차시대』는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탁월한 저서 『쌍두마차시대』를 읽고 그 학문성과 창의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정태홍 박사 (계명대학교 철학박사, 가조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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