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증학과 변증학의 퇴조
내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배운 학과목에 험증학(驗證學, Evidences)이란 것이 있었다. 과학 지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기독교 신앙의 옳음을 증명하는 학과목이다. 이 과목은 미국 구프린스톤신학교의 영향 아래 있는 학교들 사이에 유행했다. 이성주의(理性主義) 신학 분위기는 신의 존재와 기독교 신앙의 참 됨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열성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신학교(신학대학원)가 개설하는 학과목에 변증학(辨證學, Apologetics)이란 것이 있다. 기독교 진리의 참됨을 신학적 논리와 철학으로 변론하고 규명하는 학과목이다. 타종교인이나 비기독교인들과 논쟁을 하는 내용을 담으면서, 동시에 기독교 복음을 위협하는 자유주의 신학 또는 신신학 등 시류를 따르는 신학 사조들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나도 이 과목을 수강했다.
나는 엘렝틱스(Elentics)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한 어느 선교사가 가르쳤다. 이 과목명을 한국어로 딱히 번역하기 어려워 영어 발음 그대로 부른다. 선교학 관련 과목으로, 비교종교학과 달리, 타종교인과의 대화는 오로지 선교접촉점을 찾으려는 목적 뿐이며, 우월한 종교가 열등한 타종교인들에게 선언적인 자세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모 대학교의 구약학 교수는 이러한 학과목 내용의 의미를 살려 이 단어를 "종교경책학"이라고 번역하고, 자신의 책 이름으로 삼았다.
아마도 오늘날에는험증학, 변증학, 엘렉틱스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모르는 신학도들이 많을 것이다. 되돌아보니 나는 참 고루한 신학 과목들을 이수한 셈이다. 그것들이 나의 신학 작업에 날을 세우고 단호함을 갖게 하고 분명한 사고를 하도록 도왔을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험증학과 변증학을 개설하는 학교가 매우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엘렝틱스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주목 할만한 변화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타종교를 경책하는 일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고압적인 태도로 선교-전도를 하라고 가르칠 학교가 있겠는가?
기독교 복음을 선전, 파수, 변증하는 노력은 무엇이든지 환영할만하다. 한 사람의 험증학자, 변증학자, 신학자를 배출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따른다. 엄청난 시간, 물질, 에너지가 필요하다. 학자 자신은 자기의 일생을 그 일에 바쳐야 한다. 과학 방법이나 철학으로 기독교의 참 됨과 복음진리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분들은 존경을 받을만하다.
험증학, 변증학을 가르치는 대학, 신학교들이 대폭 줄어든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과학적 사실 또는 진리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사변적 이론에 따라 계속 변한다. 변화무쌍한 학문 세계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 다음 세대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의 논증이 필요하다.
둘째는 철학적, 사변적 방법으로 기독교 복음의 진정성을 확보하가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 중세 중기의 안셀무스와 중세 말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은 이 주제를 다루는 신학도, 철학도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그들의 증명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안셀무스와 아퀴나스의 증명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신학자는 없다.
자연인이 험증적, 변증적 노력의 결과로 예수를 믿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나는 험증학적, 변증학적 노력으로 설득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복음을 제시하는 인간의 책임 활동이다.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전한 복음 메시지는 변증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바울 전도의 초점은 변증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깊고 높은 차원의 신학을 공부하여 복음을 변증하는 학자가 필요하다. 험증학적, 변증학적인 접근은 복음의 진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1) 전도현장에서 논쟁적인 태도를 삼가야 한다는 것이고, (2) 자연인이 신앙인으로 변화하는 데는 험증, 변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전도자와 함께 하신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영혼을 중생시키는 분은 하나님,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허히 기도하면서 복음진리를 단순한 방식으로 제시, 선포, 소개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 복음의 핵심을 단순한 형태로 겸손한 자세로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전하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된다”(행 13:48). 복음전도자의 핵심 과업은 복음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는 것과 성령님이 피전도자 안에서 은혜를 베풀고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바울이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니,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다(행 16:14). 이것이 복음전도와 영혼 구원의 영적 메카니즘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도는 어렵지 않다. 부담스런 과제가 아니다. 전도자가 사도직 직무 곧 입을 열어 복음진리를 전하는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면 된다. 그 결과가 당장 일어날 수도 있고 더디 올 수도 있다. 여러 해 뒤에 이뤄질 수도 있다.
전도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듣든지 아니 듣던지' 복음진리를 외쳐야 한다. 복음은 대화와 소통의 주제가 아니다. 복음은 선포를 해야 할 주제이다. 복음은 변증적 험증적 설득으로 교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피전도자를 무시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이야기만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본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개요를 선포하면, 성령이 피전도자 안에서 역사하고 감화 감동시키고,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뜻이다.
전도현장에서 상대방의 높은 지위 때문에, 어색한 분위기 때문에, 삶의 서로 다른 정황과 정신세계 때문에 복음진리를 전하기에 머뭇거리는가? 복음전도자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도자를 피전도자에게 보내시고, 임마누-엘, 임마누-그리스도를 약속한 그 분은 신실한 분이다. 항상 함께하겠다고 한 그의 약속도 신실하다. 어찌 파송자가 자기의 가장 큰 관심사를 수행하고 있는 전도자를 내버려두겠는가?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으며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라. 동시에 그 영혼을 변화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들이 복음진리를 단순명료하게 전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을 받도록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존경스런 신학자는 철저한 전문성과 신학적 역량을 지니고 자기 시대의 교회가 제시하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도, 바울처럼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영혼을 낚고 있는 전도자이다. 신학자의 사명과 전도자의 사명을 이원화하는 경향은 교회를 병들게 한다.
나는 '사도행전 30'(ATCS30)운동'을 펼치고 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난다.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사도행전 30장으로 간주하면서, 하나님은 새로운 기독교운동을 펼치시기를 원한다. 오늘날의 복음전도 현장은 과거 2000년의 텃밭과 아주 다르다.
'사도행전 30 운동'은 성령님께서 사도개혁주의 전통에 기초한 단순한 기독교, 단순한 복음전도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적극적으로 우리들 가운데, 이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운동이다. 단순한 교리, 단순한 신학, 단순한 복음전도, 단순한 순종, 단순한 삶을 강조한다.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생명을 부여하는 성령님의 역사는 단순한 복음전도 활동 마당에서 더욱 왕성하게 일어난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겸손히 입을 열어 복음진리를 말하고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전도자를 귀하게 여긴다. 성령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는 전도자, 하나님의 눈이 머무는 곳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전도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는 전도자를 존중한다.
비영리 단체 유유미션 우산 아래에 있는 신학회 리포르만다, 신학저널 '리포르만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브레드티비, 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리포르만다홀, 부산에 있는 브레드티비 스튜디오 등은 모두 사도행전 30장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시선은 복음전도 사역자에게 머물리라.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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