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르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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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다

 

 

20세기 설교자 마르틴 로이드존스 목사(영국)의 마지막 설교의 메시지는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피를 토하듯 쏟아낸 설교이다. 그는 구원과 관련하여 인간의 모든 행위와 공로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그가 행한 구속 사역만을 오롯이 드러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면 누구를 본받는 종교인가?

 

기독인의 의무는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다. 특히 윤리적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야 한다. 윤리 부재의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다. 성경 가르침의 많은 부분이 도덕적 삶, 윤리적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아니다. 윤리적 실천보다 더 중요하고 앞서는 것이 있다. 기독교의 존재 의의가 달린 사안이다. 기독교의 최종적 사명을 윤리실천운동으로 이해함은 잘못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삶을 본받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기독교를 윤리공동체로 이해하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제쳐두고 주변적인 무엇에 연연하는 발상이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신앙고백 중심의 기독론적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때부터 그 피조물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섭리하고 계신다.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특별한 일(mission)은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펼치는 인간구원의 역사이다. 오늘날 교회에 깊숙이 들어와 세력을 펼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하나님의 세상 통치만 강조할 뿐 그 분이 하시는 특별한 일, 구원활동에는 무관심하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있다고 보는 신앙운동은 예수 중심의 구원 공동체를 율법주의 도덕주의 윤리 공동체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가 채택한 선교-전도 선언서(함께 생명을 향하여: 지형변화 속의 선교와 전도)가 언급한 지형변화”(Changing Landscape)는 교회의 퇴락과 조종을 의미한다. 복음의 요람이던 지역의 기독교가 조종을 울리게 된 까닭은 주변적은 것을 핵심적인 무엇으로 여긴 결과이다.

 

중세 후기의 수도사 토마스 아켐퍼스가 저술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신학도의 필독서이다. 우리가 많은 신학 지식을 가지고 또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한다고 해도 겸손이 없으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탄식한다. 토마스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닮기, 모방(imitation)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거룩한 과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하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풍성한 삶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윤리 실천 그 자체의 성공적인 수행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죄의 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거듭난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고, 그 하나님과 동행할 때 죄를 멀리할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는 윤리적 삶이 가능해 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낮은 자세, 검소, 겸손, 청빈의 모범을 보인 윤리교사로 여기는 시각은 기독교를 왜곡시킨다.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식의 발상을 조장한다. 그리스도 예수 중심의 구원 공동체를 율법주의, 도덕주의 집단으로 전락시킨다.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안의 티끌을 문제 삼게 한다. 마음을 넓히고 사랑으로 해결해야 할 사소한 인간적 오류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댄다. 침소봉대, 공격, 비판한다. 기독교의 이미지를 추락시킨다. 기독교가 동네 개보다 못하다는 조롱을 받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교회를 흠 없는 천사들의 모임으로 여기게 한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인간의 죄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대속 제물로 바친 대제사장이다. 사탄을 짓밟고 죽음의 권세를 이긴 왕 중 왕이다. “내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다라고 선언한 참 선지자이다.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시다.

 

인간이 예수를 그리스도, 구원자로 믿으면 곧 영접하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쁘게 여겨 사죄(赦罪)를 선언한다. 의롭다고 칭한다. 칭의(稱義)는 법정용어이다. 칭의가 선언되는 그 때 죄인은 하나님과 화목된다.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던 죄악의 장벽이 허물어진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아버지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한 것들을 누릴 특권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시작된다. 성령의 주시는 힘으로 인간은 죄의 습성을 꺾고, 사탄의 역사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하늘의 천군천사가 기뻐한다.

 

인간 구원의 과정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믿음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이다. 인간이 창조주와 화목하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이다. 구원과 칭의는 인간이 자기의 선함과 선행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구원 받은 자는 오늘 눈을 감아도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서 눈을 뜰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까지 유보된다는 이른바 유보적 칭의론또는 유보적 구원론은 얼빠진 주장이다. 콘텍스트의 관점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인간의 상태를 근거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놀라운 사랑과 구원사역을 단정 짓는 모순에 빠진다,

 

기독교의 설교는 교양강좌가 아니다. 설교의 핵심은 윤리실천 강화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교훈에서 멈추지 않는다. 기독교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복음 선포이며 인간에게 준 행복헌장을 제시하는 활동이다.

 

목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교훈, 교리, 진리들을 골고루 설교할 의무가 있다. 장로교회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목사의 설교에서 복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인문학 교양 강좌나 도덕 훈화에 머물고 있지 않는가?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 인간관계에 관한 메시지는 아닌가?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도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을 넘어선다. 윤리 실천 강화(講話)가 아니다. 이는 윤리에 대한 강조와 가르침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지만 삶이 바뀌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 그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거짓이거나 착각이거나 심리적 쏠림이거나 문화적 표현에 지나지 않은 경우일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받은 기독인이 되면 믿음에 합당한 열매 곧 윤리적 삶이 뒤따른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고 성령이 내주(內住)하면 변화와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한다. 바울이 말하는 본받음은 그가 전한 복음, 복음전통을 따름이다(고전 11:2). 교황 프란치스코가 보여주고, 불교의 달라이라마, 이슬람교의 사제, 힌두교의 구루가 보여줄 수 있는 검소, 겸손, 청빈한 삶의 모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독신앙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유일한 중보자 예수를 주, 그리스도, 구원자로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zoe)을 얻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접붙임 되는 일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인류 구원의 복음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도()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제시이다. 마르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은혜의 십자가, 영광스런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무엇이나 윤리적인 것으로 변질시키지 말라고 외친다. 옳은 말이다. 아래의 메시지는 단순한 기독교(Christianity Simplified)를 추구하는 사도행전 30 운동’(ACTS30) 정신과 일치한다.

 

아래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변화되고

더 나아졌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중략)

 

기독교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무익할 뿐입니다.

그러니 중단하십시오.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 멀리 가기 전에 멈추십시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노력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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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4.07.02 21:30

    마르틴 로이드존스의 마지막 영상 인터뷰 http://reformanda.co.kr/xe/index.php?mid=Sermons&document_srl=3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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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zezy 2014.07.03 02:43
    충분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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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노노 2014.08.22 09:30
    사랑이 넘치고 자비가 넘치신다는 하나님이 자기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뜨린다니.. 이게 악덕 사채업지보다 더 악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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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칸모기 2014.08.26 04:07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다니, 당신이야말로 지옥에 엄청시리 가까이 있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 같군요. 말 취소하고 회개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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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2014.08.26 20:06
    공의가 없는 사랑은 집착이나 방치가 될수 있고
    사랑이 없는 공의는 무서운 폭군이죠
    성경전체 맥락을 꿰뚫어 이해한다면 인격적 성품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을 향해 우리가 이해할수 있는 모든 감정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징계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자식에 대한 징계는 징계자체가 목적이 아닌 사랑 그 자체가 아닐까요?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높은 차원이 아니라 상식선에서도 이해할수 있는 문제 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은 멸망받을 자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인간이 고통받고 지옥같은 환경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결코 아니죠. 그것은 단지 자신의 왜곡된 자유의지에 따른 수많은 선택과 그 결과인 것입니다.

    앞뒤 모두 생략하고 예수 천당불신 지옥....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고 폭군 하나님을 연상케 하죠. 님이 혹시 신앙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보다 긍정적이고 넓은 지평으로 성경을 볼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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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사람 2014.08.27 05:04

    희망님께,  은혜와 공의의 통전, 진실 (integrity)입니다. 적극 동조하고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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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4.08.24 20:24

    노노노 님,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성경말씀을 눈여겨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한분뿐이시고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중재자도 한분뿐이신데 그분이 바로 사람으로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4-5, 평양판 번역성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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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휴... 2014.08.26 00:24
    글 되게 못 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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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칸모기 2014.08.26 04:05
    당신이 한 번 써보세요. 비교라도 될랑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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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hr73@hanmail.net 2014.08.27 01:11

    글의 수준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닌 근거있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댓글이 달리면 더 좋으련만...이렇게 글을 쓰시면 '악플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습관되면 비그리스도인으로부터 개독교인이라 욕도 듣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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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yful 2014.08.26 11:22

    글 속의 진의를 봅니다. 무엇을 강조하시기 위함인지를요. 감사드립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게 되면 윤리적인 삶이 뒤따름을 공감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즉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아주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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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경꾼 2014.08.26 13:59
    이 시대를 향한 멋진 글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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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4.08.27 05:41

     

     

    페이스북에 실린 댓글

     

    ▶Pascal Lee 고맙습니다. 아멘입니다.

    ▶남궁윤 아멘!

    ▶김산호 공감하며 공유합니다.

    ▶Kenny Yu 네, 구원이 유보적이라는 주장은 행위구원을 말함과 다름이 아닙니다. 풀러의 김00 교수 칭의 개념이...

    ▶박기주 공유 하겠습니다.

    ▶Samuel Kim 삭제

    ▶Kenny Yu Samuel Kim "구원"과 관련하여 본 글을 읽으시면... 고전 11:1은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구원 받은 자의 삶이겠죠.

    ▶Changil Kim 공감합니다.

    ▶Changil Kim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기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

    ▶이경미 정말 복음이 더 복음되게 하는 말씀 감사합니다. 공유하겠습니다^^.

    ▶장철원 감사합니다. 공유 할께요.

    ▶Sun Ock Kim 아멘! 생각할 숙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요한 이글에 거부감이 생겨도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요?

    ▶홍요한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라는 견해에 동감하면서도,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삶이라고 적어보고 싶습니다.

    ▶조희화 순식간에 조회 수가 2000을 넘었네요. 트래픽 초과로 인해 계속 차단이 됩니다~~.

    ▶문해룡 제목이 완전 반전이네요. 엄청난 파워가 실력 있습니다.(제가 좀 무식한 거였나요? ㅋ) 오늘 리포르만다 홈페이지가 2번이나 트래픽 초과를 하는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했네요

    ▶Samuel K. Park I hope you will be recovered soon. Shal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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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2014.08.27 14:04

    그러면 토마스 아캠피스는 이단인가요? 논지는 알겠으나,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 윤리실천이라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예수님의 삶과 생애가 복음을 따르는 것이었지, 윤리를 따르는 삶이 아니었을진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복음을 따르는 것이지 결코 윤리적 삶이 아닙니다. 복음은 일반적 윤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삶인데, 어떻게 일반 윤리와 복음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나요? 기본적으로 전제가 틀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은 윤리적 삶이 아니며, 복음적 삶이고, 마땅히 믿음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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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송화 2014.08.29 04:53

    글을 잘못 읽으셨네요. 본문은- 복음과 기독교윤리를 혼동하거나, 그리 전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구원은 기독교윤리를 지킴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닌 오직 복음을 믿고 수납함으로 얻는 것이라는 성경의 선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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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4.08.28 12:38

    위 댓글은 흥미로운 여러 가지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안에 만연한 일반적인 기독교 이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포르만다가 언급하는 윤리는 기독교 윤리, 기독인이 실천해야 하는 성경적 윤리를 뜻합니다. 논의를 하자면 먼저 아래의 질문에 대한 귀하의 간명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1)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윤리실천이 아니라는 논리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2) 복음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4) 십계명과 산상보훈은 일반윤리와 구분되는가? (5) 일반윤리란 무엇을 뜻하는가? (6) 윤리적 삶과 구분되는 복음적 삶은 무엇인가? (7) 윤리적 삶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은 의(義) 실천과 윤리(특히 십계명 제5-10계명)을 배격하는가? (8) 실제 상황에서의 '윤리', 예컨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성경의  윤리적 계명들과 무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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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zey 2014.08.29 04:23

    신천지가 이전에, 조용기, 장경동, 김삼환, 목사님께 이를 갈며 덤벼들었교, 5년여 쯤 전부터는 노우호목사님께도 독을 뿜어대고 있는데요 . . . 드디어, 필자께도 눈을 돋우는 모양입니다.

    진실한 천주교인들은- 우리와 교리가 달라도 신랄한 어투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인이라면- 여지껏 '복음'을 잘못 알고 있었더라도, 이 글을 이해하고 수납하는 것이 거북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성실한 불신자나 타종교인들은- 남의 종교사이트에까지 들어 올 시간이 없습니다.

    cirgrimoney교는- 유치하고 공격적인 어법으로, 악플을 유도합니다. 여러분! 무시하십시오. 어차피 그들은 진지한 논리는 감당을 못하므로, 깐죽대도록 교육 받습니다.

    근거가 있으면 이성, 없으면 감정인게 아닙니다. 근거 있는 감정도 있고 근거없는 논리도 있고 또 논리적이 꼭 이성도 아닙니다. 겨우 세 줄 글에도 기초가 부족함이 드러나는데 . . .수준을 논하겠습니까?  안하기를 잘하셨습니다. 이 창의 격을 위하신다면 . . 다음부턴 감정이라도 좋으니 , '근거있고, 논리적인, 또 정체성 있는 평을 명료하고 본 받을만하게 달아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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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태 2014.08.31 14:02

    요즘 실종되어지는 십자가 다시바라보게 하네요
    요즘 하나님께서 주의 십자기를 바라보게하네요
    하나님께 영광돌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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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kHz 2014.08.31 22:10

    잘보았습니다.
    12 '제자'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알게모르게
    예수님을 '스승',  '선생'의 위치로 두고 보게 하는것 같습니다
    뭐.. 적어도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되돌아가 고기를 잡던 당시의 제자들에게 있어선
    '스승'에 불과한 게 사실이었겠지만요.

    그리스도인 중에 훌륭한 삶을 산 이를 본받을 순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말은 이상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속이 뚫린듯한 느낌이 듭니다.

    기독교가 그저
    성인 예수를 사조로 한 마음수양,
    행동가 예수의 행동을 모티브로 사람들에게 동기부여하는 사회운동이
    되지 않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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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4.09.06 19:36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라구요?
    (크리스천투데이 2014.9.5. 기고문)

    8월 29일자로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된 최덕성 교수의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니다”는 글은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 글의 대부분을 이루는 구원관은 칭의=영생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믿으면, 곧 영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사죄(赦罪)를 선언하신다. 의롭다 칭하신다. ‘칭의’는 법정 용어이다. 칭의가 선언되는 그 때, 죄인은 하나님과 화목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하늘의 천군천사가 기뻐한다.”

    그러나 아래 말씀과 같이,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 중의 ‘구원’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구원을 가르치는 것이지 궁극적 구원인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구원이란 죄의 세력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4, 28)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믿는 신자에게, 아직도 죄성과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전가하여 죄가 없는 거룩한 자로 인정해준다는 의미에서의 구원이지, 그 신자가 참으로 거룩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위의 말씀은 대속의 구주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원죄와 그동안 지은 자범죄에서 해방되는 칭의구원을 얻은 신자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내주하시는 성령의 간구와 인도하심(성령님의 성화 사역)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해져가는 현재진행형의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감으로써, 미래에 궁극적 구원인 영생에 이르게 됨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칭의구원은 신자가 성화의 과정을 거처 완성된 구원인 영생을 얻도록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 씨가 말씀과 성령으로 잘 자라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거룩한 자가 되어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거두시고자 하는 열매이며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칭의가 곧 영생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씨 뿌림이 곧 열매 맺음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뿌려진 ‘중생한 영적 생명의 씨알’이 성장하려는 의욕을 저해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성화의 열매를 맺는 일을 방해하고, 신자들의 천국입성에 거침돌을 놓는 일입니다.

    또한 위의 성경말씀(롬 3:24,28)은 ‘행위’가 아닌,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합니다. 루터는 ‘율법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와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혼동을 일으켰습니다. 야고보서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 중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의 행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행위(갈 5:6)임을 이해했다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서라고 혹평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터와 칼빈이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를 분명하게 이해했다면, 성화는 ‘믿음의 행위’이므로 구원의 필수적 과정이만, 가톨릭이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행위’는 인간 자작의 ‘율법의 행위’이므로 그러한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가톨릭의 부패와 율법적 행위구원론이 비성경적임을 더욱 온전하게 비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최 교수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과정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진행된다. 믿음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의 결과이다. 인간이 창조주와 화목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이다. 구원과 칭의는 인간이 자기의 선함과 선행으로 얻어낼 수 없는 무엇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신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음을 주시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칭의구원을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어, 인간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실행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령의 탄식과 간구와 인도와 도우심에 순종함으로써 실행하게 하여 성화를 이루어가게 하심으로, 인간은 영생을 얻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얻는, 하나님과 인간 쌍방이 모두 지켜야 하는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목적이 “자기를 믿는 자들이 거룩한 자,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데 있음을, 피땀의 기도 가운데 고백하셨습니다(마 17:19).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칭의구원을 주는 궁극적 목적은 신자의 성화를 통한 율법의 완성인데, 칼빈 신학은 하나님의 목적보다는 인간의 구원에 집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칼빈 신학은 하나님의 목적과 인간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균형 있게 다루지 못하고,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에만 집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생을 돈으로 사도록 가르치기에 이르도록 타락한 가톨릭이 내세우는 행위구원론에 대항하여 은혜구원론을 내세우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행위인 성화를 균형 있게 가르치는 성경의 통전적인 구원 교리를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떨어트리고 세상의 조롱을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각 교회의 강단에서 온전한 구원론을 설교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하겠습니다.

     <영원한 성공을 주는 온전한 복음> 저자 김병구 장로(바른구원관선교회)

    홈페이지: http://cafe.daum.net/lovevia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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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zey 2014.10.23 03:05

    '바른 구원관' 선교회를 홍보하려면-
    성경에 위배된 구원관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서 교화하거나 물어뜯어야 효과적입니다!


    또 그런 중차대한 교리나 신학적 사안에 대한 운동에 사명감을 느낀다면-
    '장로'라는 직함 대신 신학적 전문인임이 인정되는 공적 직함을 쓰야지요.
    개교회 장로님의 개인적 구원관은 아무 권위가 없으며, 그 선교회의 투명성도 보장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씨, 열매, 천국입성 . . 따위는 '신천지의 중대 교리 용어'란 것을 걸 누구나 알기 때문에,
    마구 쓰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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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usnim 2014.11.22 23:18

    글의 요지는 알겠으나... 윤리문제에 왜 WCC를 끌어들이는지 모르겠고... 성령 어쩌구 하기 전에 스스로를 정결케하는 일이 바로 윤리적인 부분이거늘 이런 것을 무시하고 의미없다고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을 낳습니다.

    윤리적인 부분의 폄하는 구약에 계명으로 주신 것이고 그 계명을 완성 시키신 분의 뜻을 저버리는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것으로만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윤리적인 면을 빼놓고 구원 받는 것도 불가능 합니다. 일단 공의의 하나님에 저촉이 될 뿐더러 진정한 회개에 자연히 뒤따르는 최소한의 것이 윤리적인 삶입니다. 최소한입니다. 혹자는 최대한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으나 - 현 개신교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듯 - 그것은 잘못입니다.

    윤리가 어쩌니 하기 전에 스스로 윤리를 넘어서는 사랑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 쯤이야 주일날 설교 하나 만들듯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빛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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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 2016.02.08 13:33
    a님이 쓰신 댓글이 가장 성경적이고 바르네요. 김세윤교수님을 공격하신다해서. 내용을 몇개 보았는데 참 안타깝군요. 이런분이 한국교단안에 많이 있다는것이요. 일반 신자보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않고. 본인 뿐만아니고 많은 사람을 다른 길로 인도하는 일. 결코 작지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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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ok333 2016.03.05 17:14
    아멘... 윤리적인 종교로 변질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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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노시스 2016.12.16 06: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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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nukus 2019.12.0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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