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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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근삼 출생 백주년 기념으로 이근삼 신학을 주제로 한국개혁신학회가 고신대 개혁주의 학술원과 함께 공동 학술대회를 열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주의 학자들이 각자의 관심있는 영역과 관점에서 이근삼의 신학사상을 연구조명하고 토론하게된 것은 고신교단의 개혁신학사상의 토대를 닦은 이근삼의 정통개혁주의 신학사상을 학문적으로 조명하고 널리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필자는 숭실대 재직시에 이근삼이 번역한 헨리 밴틸(Henry R. Van Til)의 『개혁신학의 문화관』(The Calvinistic Concept of Culture)을 통해서 이분이 문화신학에 깊은 관심과 연구를 하신 것으로 알고 필자 자신의 학문적 관심과 일치함을 알게되어 존경과 아울러 이분의 개혁신학에 큰 관심을 갖게되었으나 학계에서는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이분의 출생 백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계기로 이분의 신칼빈주의적 문화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이분의 신학사상을 조명하고자 한다.
I. 신학적 배경
이근삼은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목사의 외조카로서 설립자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현재 동아대학교 전신인 남조선대학에 다니다가 1946년 9월 20일 개교한 고려신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제1회 고려신학교 입학생이 되었다. 이근삼은 32년간 교수생활의 은퇴를 앞두고 1994년 교단 언론 「월간 고신」 편집인 서창수 목사와의 대담에서 신학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질병을 심하게 앓던 어느날 밤에 고통 중에 하나님을 부르심을 받았다고 피력하였다: “내가 처음 신학을 시작하게된 동기는 어느날 밤에 심하게 앓게 되었는데 그 고통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 한상동 목산님을 찾아가서 의논하고 고려신학교 개교 때에 입학시험을 치루고 신학을 시작했습니다”제5회로 졸업한 후 미국과 화란의 유학을 거쳐 1962년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32년간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 고신대학, 그리고 고신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장으로, 총장으로 한국교회와 신학교를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의 초석을 놓았다.
이근삼은 고신에서 2년 예과와 3년 5년동안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신학생들 중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감옥에 갔다온 신앙의 용장들도 있었고, 신사참배로 더러워진 신앙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위해 사명감에 불탄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고신에서 5년 동안의 배움 가운데서 학생 이근삼에게는 박윤선, 한부선, 두 분의 외삼촌 한상동, 한명동 목사는 그의 신앙적 모범상이었다: ”박윤선 목사님이 신학의 전반적인 과목들을 가르쳤고, 한상동 목사님이 기도와 실천신학을, 한부선 선교사님이 선교적 신학교육과 살제적 생활을, 한명동 목사님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는 박윤선에게서 칼빈주의와 성격해석학을, 한부선에게서 교회사를, 한상동에게서 목회와 실천신학을 배웠다. 그는 피력한다: ”박윤선 교수님을 통해서 칼빈주의를 배우고 성경과 해석학을 배우고 조직신학도 배웠다. 한부선 선교사님을 통해서 교회사와 설교학을 배우고 한상동 목사님의 로마인서 읽기와 분해, 실천신학을 배워서 확신을 갖게 됐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교회와 성도, 목회와 설교를 배울 때마다 나에게는 항상 새롭고 감격적이고 새 생명을 주는 감동적 배움이었다.“
이근삼은 자신을 “외골수 칼빈주의자”로 자칭한다. 평생 동료 오병세도 “그는 칼빈주의를 강의할 뿐 아니라 실천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이근삼의 칼빈신학은 탁상 공론에 머물지 않고 생활에 구체화되도록 강조했으며, 칼빈주의 문화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소개하였다. 그는 1948년 학생시절 오늘날 학생신앙운동(SFC)의 모태인 학생신앙 수련회에 오병세와 홍반식과 함께 청년신앙운동(YFC)의 모태인 청소년신앙수련회에 봉사하였다. 미국에서는 미국 보스턴 고든대학(Gorden College)에서 학사를 하고,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M. Div.)와 신학석사(Th. M.)를 마쳤다. 미국에서 5년간 공부할 때는 후원하는 교회도 없이 학비를 직접 벌어서 공부하였다.
▲故 이근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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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웨스트민스터에 있을 때 반틸 박사로부터 세계적 칼빈주의 학자들, 특히 화란(和蘭)계통의 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화란 자유대학교의 법철학자 헤르만 도이어베르트(Herman Dooyeweerd. 1884-1977), 자유대학교의 기독교 철학자 디르크 폴렌호픈(Dirk Hendrik Theodoor Vollenhoven. 1892-1978), 남아공 포체프스트롬대학의 칼빈주의 철학자 스토꺼르(Hendrik Gerhardhus Stoker. 1899–1993)였다.
이근삼은 미국에서 5년간 석사과정을 끝내고 1958년 대서양을 건너 화란으로 유학을 떠났다.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4년을 공부하였다. 그는 요한 바빙크, 벨카우어 교수 밑에서 칼빈주의를 배웠다. 그는 도이어베르트의 강의 시간에 찾아가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그의 대표적 저서 ”이론 사상에 대한 선험적 비판‘(Transcendental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에서 영역의 주권사상을 배우고 개혁사상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렌호벤은 은퇴했기 때문에 집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의 서적 “칼빈주의 철학과 철학사”를 읽으면서 칼빈주의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이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이런 일들은 이근삼으로 하여금 개혁주의 세계관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시야를 넓혀 주고 도움을 주어서 더욱 확신을 얻게 해 주었다. 이들 미국 및 화란 학자들은 칼빈주의자들로서 동시대에 각각 연구하는 중에 일치된 정통개혁주의 신학사상을 얻게 된 분들이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유학 시절에서는 교의학 담당 교수 베르카우어르(G. C. Berkouwer)가 석사 지도교수였으며,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 박사(Johan Herman Bavinck, 1854-1921)의 조카, 개혁주의 선교학의 선구자요 조직신학자인 요한 헤르만 바빙크 박사(Johan Herman Bavinck, 1895-1964)가 박사 지도교수였다. 박사과정으로 선교학자와 조직신학인 요한 바빙크에게서 선교변증인 엘랭틱스(Elenctics)를 전공했다.
엘렝틱스(Elenctics)라는 용어는 헬라어 동사 엘렝케인(elengchein)에서 온 것이며, 이는 ‘부끄럽게 하다’라는 의미로 죄 확신과 죄의 증거를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엘렝틱스는 죄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이교(異敎)의 가면을 벗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화란(和蘭) 교의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조카, 개혁주의 선교신학자 요한 바빙크(Johan Herman Babinck, 1895-1964)가 성경적 선교 이론을 수립하는 학문적 공헌을 끼쳤으며, 특히 그는 이방종교를 기독교신앙으로 대결하려는 선교적 변증학인 엘렝틱스(Elenctics)라는 용어를 만들고 이 이론을 확립시켰다. 엘렝틱스는 직접적으로 설득하는 기독교 선교 방법이기보다는 교차시험(cross-examination)을 통한 기독교 명제를 변증하는 간접적 선교방법이다.
신학박사(Th. D.)논문은 ”신도 국수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결“(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이다. 이 논문은 변증학과 문화신학에 관련된 조직신학 분야의 논문이다. 이 논문은 ”메이지 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1868-1945) 일본에서 기독교와 신도의 충돌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 A Historical and Critical Study of the Conflict of Christianity and Shinto in Japan in the Period between the Meiji Restoration and the End of World War II (1868-1945)이다. 이근삼은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 학자요, 네덜란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학위논문은 당시 자유대학교에서 유명한 두 학자 베르카우어르 교수와 묄러만(Meuleman) 교수의 극찬을 받았다. 이 논문은 1962년에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출간되었고, 1966년에는 미국에서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er에 의해 재출판 되기도 했다. 이 논문은 <이근삼 전집>의 제9권에 한글 번역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근삼은 화란에서 공부 끝내고 돌아와 고려신학교 교수가 된 후 1975년에 남아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스톡의 자택을 찾아가서 역시 칼빈주의 기독교철학에 관하여 담화를 나누었다. 이근삼은 1983년 3월에서 1985년 1월 기간동안 Edinburgh University, Free Church College at Edinburgh, Yale University에서 연구교수로 지내면서 끊임없이 세계교회와 현대기독교 사상과의 교감을 하였다.
II. 서양 현대 신학을 전공
필자가 이근삼을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자로 특히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연구과정과 그의 글의 성격에 기인한다. 그는 석사학위 논문을 불트만의 비신화론적 케리그마신학, 박사학위 논문을 일본 신도주의에 대한 썼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변증학(apologetics) 내지 선교변증학(Elenchtics)으로서 문화신학적 성찰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이근삼은 미국과 화란에서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전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의 현대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하였고,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일본의 신도주의에 대한 비판논문을 씀으로써 현대신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하였다. 그가 전공한 조직신학과 변증학, 특히 그의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논문은 문화신학적 성찰을 동반한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과정은 칼빈주의를 오늘날 현대신학의 흐름 속에서 살아 있는 교회를 지키고 현실에 해답을 주는 변증신학으로 정립하고 오늘날 당면한 현실에 문화변혁적으로 적용시키는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에 많은 지식과 방법을 제공해주고 있다.(계속)
I. 현대신학 연구, 비판.
1. 석사학위 논문,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 비판
이근삼이 정통개혁신학을 추구하면서도 미국에서 현대신학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의 분리
독일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은 19세기 독일 복음주의 신학자 마르틴 캘러(Martin Kähler, 1835-1912)의 주장, 말하자면, 복음서는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초대교회의 증언이지 결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는 사상을 양식비평을 통하여 극단화시켰다. 캘러는 1896년 그의 저서 『소위 사실적(史)實的) 예수와 역사적 그리스도』(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Christus)에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를 분리시켰다. 하지만 캘러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와 후대의 양식사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트만은 캘러와는 다르게 역사적 비평을 양식사 비평에 따라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19세기의 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등이 수행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 반 브레데(Van Brede), 헤르만 궁켈(Herrman Gunkel), 유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양식사 비평,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등의 실존철학을 수용하면서 복음서를 후대 교회의 자기 이해에 기반한 다양한 신앙 양식의 산물, 곧 케리그마 단편의 모자이크로 해석했다.
불트만은 복음서가 현대인들에게 의미있는 참된 케리그마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비신화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트만은 예수의 역사성을 한 초점으로 모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케리그마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비신화화의 작업을 통하여 수행된다. 그리하여 불트만에 이르러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그리스도 사이에 모든 연결 다리가 파괴되었다. 역사적 예수는 텅빈 사실이라는 영지주의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을 불트만은 ”지성적 책임성“(intellektuelle Verantwortlichkeit)이라고 말했다.
2) 이근삼의 불트만 비판: 역사와 케리그마의 이원론
이근삼은 불트만의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가 역사적 예수의 역사성 배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불트만은 ...신앙에서 모든 역사적 요소를 배제하였다. 따라서 불트만 사상 양식에서 케리그마는 거의 역사적 내용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여졌다.“ 불트만은 역사적 연구의 비평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케리그마에 대한 실존적 결단의 차원으로 도피하고자 했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은 기독교신앙을 역사적 사실에서 실존적 결단의 영역으로 도피시키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불트만의 비신화론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사실 근거를 허물어 뜨렸다고 이근삼은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 연구에서 신앙의 독립을 지키고자한 그의 노력은 기독교의 역사적 내용들(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기적,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립 등)을 모두 부정하거나 또는 일부 긍정하더라도...단순히 그 실존적 의미만 추구하는...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불가지론에 빠졌다.
이근삼은 불트만의 시도가 그의 제자, 캐제만(Ernst Käsemann), 보른캄(Günter Bornkamm), 푹스(Ernst Fuchs), 에벨링(Gerhard Ebeling), 콘젤만(Hans Konzelmann), 로빈슨(John Robinson),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등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회복하고자하는 후기 불트만 학파 학자들에 의하여 수정되었다고 서술한다.
이근삼은 후기 불트만 학파(the post Bultmann School)의 역사적 예수론이 케리그마의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인정했으나 여전히 불연속성에 있다고 비판을 시도한다: ”이 모든 새로운 역사적 예수가들의 공통된 치명적인 약점은 그들의 연구방법론에 양식비평을 취함으로 성경적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근삼은 구속사란 한갖 실존적인 의미적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요, 이 구속사는 성경을 통해서만 바로 알 수 있다고 피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는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감된 성문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바로 알 수 있다.“ 이근삼은 정통개혁신학적 케리그마 이해를 제시한다. 좁은 의미에서 케리그마는 ”사도적 설교“요, 넓은 의미의 케리그마는 ”전 신약성경을 포괄한다.” 이근삼은 신약 복음서가 케리그마이며, 이 케리그마는 역사적 예수의 실재성을 포괄하고 있다고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다.
2. 박사학위 논문, 기독교와 신도주의와 대결
이근삼의 박사학위 논문은 “신도 국수 민족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에 대한 연구논문으로서 개혁주의 신학의 삼위일체 하나님 신관에 입각하여 일본 신도주의와 천황주의의 맹목성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제1부 ‘고대신도’에서 고대 신도의 형성, 자연신들인 태고(太古)신들 가운데 태양여신(sun-godess, 아마테라수-오미카미)이 일본 신화의 중심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2부 ‘전근대 신도와 신도 국수주의’에서 헤이안 시대에서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신도가 국수적 민족주의로 발전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제3부에서 ‘초기 기독교(로마가톨릭)의 도전과 일본의 대응,’ 제4부에서 ‘개신교 선교와 일본 국가교회의 성립,’ 제5부 ‘개신교와 신도 국수적 민족주의의 만남’(1)와 제6부의 ‘개신교와 신도 국수적 민족주의의 만남’(2)에서 개신교의 국수적 민족주의 대한 타협,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굴복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제7부 ‘회고와 전망’에서 저자는 일본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근원적 구별이 저멈 사라지게 된 것을 지적하고, 저항력이 약화딘 일본교회가 국수적 민족주의 경향으로 나아가, 교회와 국가에게 그리스도 주권을 불성실하게 증언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일본 내에서 기독교 저항과 신앙고백,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 저항과 박해의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고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故 이근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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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神道, shindo)의 신들은 만물 속에 신성이 존재한다는 범신론적 애미니즘의 종교체계다. 창조신 개념이 없고, 죄와 도덕성에 대한 관념이 없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 신도주의(shindoism)는 국가를 신성한 조직으로 보고 최고의 신, 태양신이 천황이 정점이 되는 국가 조직을 통하여 현신한다고 믿었다. 저자는 신사참배와 같은 신도의식이란 전쟁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는 답변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신도주의를 일본신화로부터 일본 막부 역사, 일본의 종교와 학문의 역사, 난학, 일본근세사의 맥락에서 그 허구적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도 일본 신도 신자들은 역사를 착각하고 자민족 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신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어리석은 신앙행보를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도주의는 일본 백성에게 최고신인 태양 여신은 천황 가문의 조상신으로 숭배하는데 이것은 신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허구적인 신화다: “고대 신도 초기의 것이 아니라 보다 후기의 고대신도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천황씨족은 일본 지배적인 권력으로 승화”된 신도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이 이러한 신도우상숭배를 극복하고 참된 기독교 삼위일체 신학을 수립하는 것이 향후 미래 일본교회의 구원처가 될 것으로 논문의 결말을 짓고 있다.
3. 바르트 신학의 성경관과 창조론 비판, 몰트만 신학 및 과정신학, 신죽음신학 등 비판
이근삼은 개혁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바르트, 몰트만, 과정신학, 신죽음의 신학 등을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바르트는 성경관에서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분리시킨다. 그는 정통주의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의 주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비를 떠남으로써 성경을 종이교황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바르트는 성경무오성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성경에는 인간 말의 과오성, 역사적, 신학적 부정확성, 신학적인 대립, 계통의 불안정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성경에서 정확무오성을 찾으려는 하는 것은 인간의 자의요 불순종”이라고 정통주의를 비난한다. 이에 대하여 이근삼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지 않는다고 하여, 성경 영감설을 믿는 개혁신앙을 정죄한다.” “바르트는 겸손하게 말하나 사실은 그의 이론은 인본주의적 교만의 교본이다”이라고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비판한다.
이근삼은 바르트의 창조론을 비판한다. 바르트는 창조기사의 사실성을 부인한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신화도 아니고 전설도 아니다... 사람은 이것을 오직 사가(Saga)형식으로만 알 수 았다.” “사람이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으로만 되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신탁과 시적 형식으로만 제시될 수 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에덴 동산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이스라엘 역사의 반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 교제를 말하는 상상력의 산물로 본다: 그리하여 바르트의 창조론은 원죄와 타락의 사실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창조의 교리와 구속의 교리 사이에 타락교리와 원죄교리와 그 결과를 개입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이렇게 바르트는 원인 아담, 그의 원상태, 죄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이근삼은 고린도 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를 인용하면서 바르트의 기독론적 사고방식이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그의 사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근삼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외에 현대신학에서 큰 영향을 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과 정치신학, 현대과정신학, 신죽음의 신학, 혁명의 신학, 흑인신학 등을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소개하였다.(계속)
III. 칼빈주의로서의 개혁주의
이근삼은 개혁신학의 성격을 거룩한 공교회의 신학, 정통주의로서의 개혁사상, 계약신학으로 규정하고 미 프린스턴의 핫지와 워필드의 구학파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 브릭스의 신학파 상의 신학논쟁, 오번선언(Auburn Affirmation), 1967년 신앙고백의 바르트주의 로선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I. 개혁신학의 성격 규정
이근삼은 개혁주의 신학은 사변적이거나 이론적 신앙이 아니라 삶과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개혁신학을 하는 가장 합당한 자세는 겸손과 절제다. 교만과 호기심은 가장 큰 장애요소가 된다. 개혁신학은 이성적 사변적 신학이 아니라 마음이 중시되는 겸허한 교회 친화적인 영적 신학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근삼은 부정과 긍정의 언어로써 개혁신학을 특징지우고 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을 논하는 것이 아니며, 헛된 교만과 부질없는 호기심이 아니라, 귀를 즐겁게 하는” 신학이 아니다. 개혁신학은 “겸손과 절제로 섬기는 신학”이며, “경험이 중요시되는 신학,” “영적 유익, 마음의 확신과 평화, 생의 변화를 가져오는 목회적 신학, 교회의 신학”이다. 대사회적으로는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가져오고 사회적 선에 이바지하고, 문화적 발전에 이바지하는 문화신학이다. 이렇게 기술함으로써 이근삼은 개혁주의 신학을 교회친화적인 겸손과 절제로 섬기는 경험을 중시하는 신학으로 성격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규정은 개혁신학이 사변적 신학에서 벗어나 겸손과 절제의 영적 신학이 되도록 하고 있다.
2. 거룩한 공교회의 신학, 정통주의로서의 개혁사상
이근삼은 개혁신학을 거룩한 공교회의 신학으로 규정한다. 개혁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조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피력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고대교회의 저작들 위에 세었다. 이 저작이란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서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등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칼세돈 신조 등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천명하였다.” ”종교개혁은 고대 공교회의 대신앙고백들,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칼세톤신조를 별 수정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근삼은 정통신조의 결정판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고 삼위일체를 천명한 니케아 신조였다고 본다: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계시의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성격을 정의하고 있다.“ 이근삼이 개혁사상의 원조를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에서 찾는 것은 구약 선지자들과 신약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의회의 신앙전통을 계승하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이근삼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원리를 수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귀중하게 다룬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1517년 루터의 95개조 선언문과 종교개혁 이후 125년간 신학적인 노력의 산물“로 평가한다.
3. 계약신학: 언약은 개혁신학의 핵심
이근삼은 개혁신학을 계약신학으로 이해한다. 17세기에 와서 개혁신학은 계약신학으로 갱신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설명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다. 그것은 행위언약이다.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복종의 조건으로 복을 얻는 언약이다. 이 행위언약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깨어졌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은혜 언약을 주셨다.
이근삼은 피력한다: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인간의 조건으로 낮추심으로 행위 계약을 세우셔서 완전복종의 조건으로 복을 얻게하셨다. 이 언약의 조건이었던 도덕율은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이었다. 그런데 이 언약이 인간의 죄로 깨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둘째 언약 즉 은혜 계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다.“ 개혁신학은 은혜 언약을 인간 구원의 중심으로 제시함으로써 율법을 무시하는 반율법주의(anti-nominianism)와 인간의 자유의지와 공로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를 배격한다. 개혁신학의 구원의 길은 칭의와 성화를 균형있게 이루어가는 것이다.
4. 미 장로교의 구학파와 신학파의 신학논쟁, 오번선언(Auburn Affirmation), 1967년 신앙고백의 바르트주의 로선 비판적 성찰
1) 미 프린스턴의 핫지와 워필드 등의 구학파와 뉴욕 유니온 신학교 브릭스 등의 신학파 사이의 신학논쟁
이근삼은 정통주의 개혁신학의 로선을 지키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대한 미국장로교회의 좌경화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미국 장로교회는 19세기 성경고등비평 이슈로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로 나누어진다. 구학파는 프린스턴대의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핫지(Charles Hodge), 아치볼드 핫지(Archibald A.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패턴( F. L. Patten) 등이 대표했고, 신학파는 뉴욕 유니온신학교의 로빈슨(Edward Robinson),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 스미스(Smith), 맥기퍼트(McGiffert) 등이 대표했다.
1891년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는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수 취임강연에서 ”성경의 권위“ 라는 제목 아래 프린스턴 구학파를 ”중세적 보수주의“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사도적 저작설에 의한 성경의 정경성, 성경의 정확무오설을 부정하고, 이성, 교회, 성경 삼자가 신적 권위의 진리에 대한 동등한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1893년 미장로회 총회는 성경의 정확무오설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브릭스를 장로회 목사직에서 정직시켰다. 핫지와 워필드는 신학파의 공격에 대하여 포틀랜드 선언(Portland Deliverance)을 발표하여 ”우리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감된 말씀은 무오하다”고 천명하였다.
2) 오번 선언 비판: 성경무오교리 및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교리 부정
1927년대 장로교의 일부 신학파(new school) 목사들은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을 하여, ‘성경 무오설은 해로우니 거부되어야 하고, 동정녀 탄생, 이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은 참일 수도 아닐 수 있으니 목사에게 신앙으로 요구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미북장로교 목사 13%가 이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1927년 장로교 총회는 그 보고서를 교회의 공적 보고서로 채택하였다.
이 때 프린스턴신학교는 오번선언 서명자들로 이사진이 개편되어 좌경화되었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라는 저서로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전혀 다른 종교다”(“The Christian Religion is certainly not the religion of the modern liberal Church.!")라고 갈파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신학논쟁을 하였다. 메이첸은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사임하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1936년 정통장로교단(OPC)을 세웠다.
3) 1967년 신앙고백서의 바르트주의 로선: 비판적 성찰
1967년 미연합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7세기 문서로 너무 오래되었고 성경무오설과 영감설을 주장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했다. 프린스턴대 조직신학교수 조지 헨드레이(George S. Hendry)는 1960년에 『오늘을 위한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신앙』(The Westminster Confession for Today, 1960)을 출판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4가지 특징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① 율법적이며 형식주의적이다. ②하나의 정답만 주장하고 다른 것들은 다 잘못으로 간주한다. ③회색은 없고 흑백 논리로 갈라치기하고 있다. ④구속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보고 이웃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신앙고백서 1967년 신앙고백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프린스턴 신대 조직신학 교수요 바르트주의자 에드워드 다위(Edward Dowey)가 중심이 되어 성경 중심의 칼빈을 그리스도 중심의 바르트로 대체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신정통주의 신학은 정통주의 성경관에서의 이탈을 보여주고 있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성경은 그리스도 계시에 대한 증거이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본다: “성경의 기능은 산 교회에서 말씀의 계시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고 한다. 이근삼은 바르트 성경관에서 주관주의가 야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근삼은 정통신학에서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은 분리되지 않고 일치된다고 천명한다. 이근삼은 성경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계시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계시요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정통주의 성경관을 확언한다. (계속)
[김영한 칼럼] 고신대 신학거장으로 개혁신학의 초석을 놓은 이근삼 박사 출생 백주년을 기념하며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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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빈주의의 특징
1)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
이근삼은 “새 천년의 신학적 전망”이라는 글에서 칼빈주의의 신학적 전망으로 카이퍼가 1899년 프린스턴 스톤강연에서 행한 참 종교의 네 가지 시금석을 제시했다:
첫째, 그 종교가 하나님을 위해 있느냐 아니면 사람을 위해 있느냐?
둘째, 그 종교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는가? 아니면 간접적인가?
셋째, 그 종교가 인생 전체를 말하는가 아니면 부분인가?
넷째, 죄 속의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가 아닌가?
이 네 가지 기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이근삼은 이에 대한 카이퍼의 대답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참 종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예배여야 하며, 인생 전체가 종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고, 죄에서 해방, 구속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어야 한다.” 그는 참 종교는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칼빈주의는 참 종교의 원리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을 핵심 축으로 본다. 이근삼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자,” “만물과 만사를 미리 계획 작정하신 자,” “작정대로 무에서 유로 만물을 창조하신 자,” “그것들을 통치, 지배하시며, 선악 간에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살아계신 참되신 자”이시다. 칼빈주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God’s absolute sovereignty)에 대한 고백이다.
이근삼은 절대적 주권 사상의 근거를 사도 바울과 이사야에게서 찾는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사 40:13-14).
사도 바울과 이사야의 고백은 칼빈주의 우주관의 기본 원리다. 우주관이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홀로 주권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기획하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와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통달의 도(the path of understanding)요, 그분의 경륜이시다.
2) 은총 사상
이근삼은 개혁신학은 철저히 은총의 신학이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사상체계(the theocratic thought system), 말하자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서 인간을 보게 될 때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타락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의 교리로 본 인간관과 그 구원관은 인간의 죄성, 타락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가지므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 외에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신학이 믿음과 선행, 은혜와 자유의지 등을 인간 구원 수단으로 여기는데 반대하여 오로지 믿음(sola fide)과 오로지 은총(sola gratia)를 천명하였다. 이근삼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을 따라서 은총의 사상을 강조한다: ”주님이 재림시 까지 우리가 믿고 전해야할 교리는 ‘오직 은혜로만’을 주장하는 은총의 신학이어야 한다“
3) 계시의존 사상: 신학은 이성의 이론 아닌 믿음의 교리
이근삼은 개혁주의 원리로 계시의존 사상을 말한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 사상과 구원관은 하나님의 계시말씀인 성경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존 사상은 화란(和蘭)의 개혁신학자 바빙크(Herman Bavinck)가 말한 것이다. 차영배 교수는 한국신학계에 헤르만 바빙크를 소개했으며 바빙크의 <개혁 교의학>에 근거해 <신학의 원리와 방법>과 <삼위일체론>을 소개다. 박윤선과 차영배는 바빙크의 강조점에 따라서 계시의존사색과 계시의존신학을 강조한 개혁파 신학자다. 바빙크, 카이퍼를 따라서 이근삼은 계시말씀인 성경을 통한 사색, 계시의존 사상을 천명한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성경에서 깨닫게 될 때 부패된 인간의 이성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계시 의존 사색(啓示依存思索, the revelation-relied thinking)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믿을 수 있다.“
계시의존 사상이란 성경에 의한 사색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유일한 원천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령의 학교다.“ ”성령의 내적 증거로 영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안에서는 내적 증거로, 밖에서는 객관적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일하신다. 말씀은 외적 도구, 성령은 내적 일꾼이다. 하나님은 말슴과 성령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신다.“
이근삼은 개혁주의 신학이란 인간 이성보다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신학이란 믿음의 교리이며 이성의 이론이 아니다.“ 믿음의 지식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의 지식은 이성 사용의 합리적인 논증보다는 성령의 설득에 의해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확신이다.
4) 전인적 사상
개혁신학은 인간을 하나님 형상으로서 전인적으로 파악한다. 전인성(全人性)이란 인간을 영혼과 신체 두 가지의 구성요소로 파악한다: ”성경은 인간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한다. 그 본질적 의미는 영혼의 순전성(의, 거룩, 지)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 순전성도 고려해야 한다. 즉 인간의 모든 구성요소를 망라한 총체적 순전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근삼은 인간의 어떤 기능이나 활동 영역의 부분적인 것(영혼, 신체 등)이 아니라 인간 총체적인 것(영혼, 신체, 감정, 기술, 일과 시간 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고 천명한다. 인간은 이러한 삶의 총체적인 영역에서 지식, 감정, 기술, 예술, 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피력한다: ”인생과 문화는 곧 종교다. 전인적 인생은 곧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이다.”
2. 개혁주의를 칼빈주의와 동일시
이근삼은 화란의 3대 칼빈주의자 카이퍼, 워필드, 바빙크의 칼빈주의 이해에 따라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를 동일시하였다. 칼빈주의의 원리와 개혁주의 원리가 둘 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영광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드러나는 두 가지 양상이다.
이근삼은 17세기 도르트(Dordt) 총회 신조에 따른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수용한다. 5대 교리(TULIP,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견인)의 중추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리이다. 이근삼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피력한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거부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대한 송영을 인용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οτι εξ αυτου και δι αυτου και εις αυτον τα παντα αυτω η δοξα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αμην,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이 송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이근삼은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의 칼빈주의 이해의 영향을 받았다. 칼빈주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칼빈과 어거스틴주의로부터 물려받아 발전시킨 교리 체계이며, 따라서 루터파와 구분된다. 개혁주의 유산으로서의 칼빈주의에 대한 워필드의 관점은 네 가지 주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첫째, 칼빈주의 교리 체계는 예정론과 같은 특정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신학적 사상의 영향 가운데 경건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발전한 경건 체계를 의미한다.
둘째, 칼빈주의는 메마르고 구세대적이라는 사상이 아니다. 이는 그동안 잘못 이해되어 왔던 오해다. 워필드는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며, 모든 발생되는 일에서 그의 뜻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인식하는 사람이며, 기도로서 하나님의 대한 영적 태도를 가지며, 구원의 모든 역사에 인간 자신을 의지하는 태도를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셋째, 칼빈주의는 협소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개신교교파들과 연관성을 가지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칼빈주의는 가장 넓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칼빈주의는 신학, 윤리학, 철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교육학적인 관점들에 연관된다.
넷째, 칼빈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의 형식적 원리를 제공하여 현대의 만연한 무신론과 기독교 윤리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안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칼빈주의는 신학과 실천의 관계에 있어서 개혁주의 유산이 남긴 탁월성을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워필드의 칼빈주의 이해가 이근삼의 개혁주의 신학 이해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이근삼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하나님 중심의 신학, 성경의 신학, 거룩한 공교회의 신학, 예정 교리,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구별, 실제적 학문, 지혜로서의 신학 등 7가지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워필드의 칼빈주의 사상이 녹아 있다.
고신대 교수요 개혁주의 학술원장인 이근삼 제자 이환봉도 스승 이근삼이 평생 학교와 교회 강단에서 역사적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로 가르쳤다고 피력한다: “이근삼 박사님은 한국의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선구자이셨다. 박윤선 박사님은 한국에 개혁주의 신학의 씨앗을 심으신 분이시라면 이근삼 박사님은 한국에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꽃을 피우신 분이시다. 이 박사님은 일찍이 미국과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을 연구하고 귀국하신 이후부터 평생토록 선지자적 열정으로 학교와 교회의 강단에서 역사적 개혁주의 곧 칼빈주의를 가르치시고 외치셨다. 이 박사님이 남기신 모든 책과 글 속에는 교회와 시대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 가슴으로 쏟아내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열정이 가득 넘쳐나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오늘 우리 교회의 신앙으로 뿌리내리고 또한 우리 학교의 교육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2007년 1월 29일 고신대에서 고 이근삼 박사님을 추모하며 유가족과 함께 드린 예배 시에 낭독한 추모사 전문)(계속)
3. 개혁신학의 실천
1) 성경신앙의 인격화: 신자는 성경적 인격자로 성숙되어야
김영한 박사
이근삼은 전집 제7권 제1부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에서 “성경신앙의 인격화”를 강조한다:
“우리 신자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대로 믿고 산다고 할 때 한번 더 강조되고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신앙의 인격화(人格化)이다.” “성경적 인격자는 주위의 강요를 받지 않고, 자연적으로 성경에서 말한 선행이 자연스럽게 나나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성경적 인격자(人格者)에 대하여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자연스럽게 선행이 나타나는 자이다. 그는 누가복음 10:30-36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면서 강도 만나 죽게된 자에 대하여 보고도 못본채 지나갔으나 선한 사마리안인은 그를 구해주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는 계명을 알고 있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연스럽게 선을 행했다.
두 번째,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가진 자이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책망하였다. 사도 바울은 아데네에 우상이 가득찬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느꼈다: “아덴에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찬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행 17:16). 바울은 유일하시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에게만 드려야할 예배를 우상에게 드리는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가졌다.
세 번째, 인간관계에 있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황금율: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2)을 실천하는 자다.
네 번째, 이웃에게 즐거히 베푸는 자이다. 예수님이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가르치셨다. 이근삼은 피력한다: “하나님은 항상 주기를 기뻐하시며, 이 기쁨은 또한 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원받은 성경적 신앙에 선 사람은 주고도 기뻐할 수 있고, 항상 행복을 소유할 수 있으며, 죄인에게 복음을 주고, 사랑을 주고,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동정을 주고, 눈물을 줄 수 있다”
이근삼은 단지 설교만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신앙의 인격화를 구현한 학자로 평가된다. 제자 이환봉은 스승 이근삼의 삶에 있어서 나타난 “성경 신앙의 인격화”에 대해 다음같이 증언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가능한 선의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쉽게 양보하시며 자신의 뜻과 달리 결정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시던 선생님, 부당한 일을 당하시고 상기된 얼굴로 돌아오셔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끝내 비난의 말을 입에 담지 않으시고 항상 은인자중(隱忍自重)하시던 선생님이셨다.” 이근삼은 제자 신학생들의 어려운 학업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교회 청중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또한 추석 명절에 고향에 가지 못한 기숙사 제자들에게 사과상자를 보내고, 제자들을 위하여 귀중한 책들을 도서관에 기증하고 제자들의 유학의 길을 열어준 사랑이 많은 스승이었다고 한다.
이환봉은 다음같이 추억한다: “옛날 가르치던 한 신학생이 기숙사 식권을 살 돈이 없어 집에서 싸온 꽁보리밥 도시락을 숨어 먹으면서 학업을 계속하던 이야기를 교회 앞에 전하시면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시던 선생님, 추석 명절에 교회봉사로 고향에 가지 못하고 기숙사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맛있는 사과상자를 보내어 주시던 선생님, 평생을 두고 강사비 등으로 푼푼이 모아 구입하여 친히 연구하시던 손때 묻은 귀중한 수많은 책들을 제자들을 위해 학교 도서관에 모두 다 기증해주신 선생님, 세계 어느 곳으로 가시든지 후진 양성의 일념으로 남달리 애써 부탁하고 그토록 힘써 호소하여 제자들의 유학의 길을 사방으로 열어주신 선생님이셨다.”
2) 개혁신앙의 제자를 길러냄
이근삼은 제자들이 해외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개혁신학의 유산을 체험하도록 대학의 학장으로서 교수와 학생들이 “화란의 캄펜신학교, 남아공화국의 포체스트롬대학교, 미국의 리폼드신학교, 보스턴의 고든 콘웰신학교 등지에서 유학하여 공부하고 연구하도록 길을 열었다.
그의 직계 제자 이환봉은 이근삼으로부터 받은 신앙과 학문의 영향을 대하여 2007년 1월 29일 고신대에서 고 이근삼 박사님을 추모하며 유가족과 함께 드린 예배 시에 낭독한 추모사 전문에서 다음같이 표명하고 있다: “저가 이 박사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뵌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산골 합천에 도제직사경회 부흥강사로 오셔서 막연히 목사의 꿈을 키어 오던 저에게 말씀으로 분명한 소명감을 불어 넣어주셨고 특별히 강사실로 불러 좋은 목사가 되도록 축복기도까지 해주셨습니다. 그 후 저는 마침내 고신대에 입학하였고 교수님의 각별한 보살핌과 지도를 따라 교수님의 전공인 조직신학 전공 학생으로, 교수님의 뒤를 이은 조직신학 담당 교수로, 총장으로 수고하시는 교수님의 총장사역을 보좌하는 교무위원 등으로 계속하여 30여 년 동안 늘 가까이서 교수님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따를 수 있는 과분한 사랑을 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을 가진 정말 행복한 제자였습니다.”
3)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대학 건설
이근삼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970년 12월 22일 고려신학대학인가 전후가 아니라 의예과를 증설하기 위해 고려신학대학 교명이 “고신대학”으로 변경된 1980년 10월 2일 이후였다고 한다. 당시 학교 책임자였던 그는 대학의 세속화를 우려하여 의대 증설 교명 변경 반대 교단 내 인사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근삼은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대학 건설”이라는 그의 문화신학적 입장을 학장의 입장에서 실천에 옮겼다. 그는 기독교 대학 설립의 이념을 학자요 행정가인 학장과 총장으로 구현하였다. 고려신학교는 그의 재직 시에 신학대학과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고신대의 양적 발전이 아니라 기독교대학으로서의 학문성과 신앙적 인격성을 갖는 신앙과 학문의 인격 공동체로 내실적 발전하도록 노력했고, 그 배후에는 그의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의 이념이 있었다.
그는 1994년 2월 은퇴에 즈음하여 월간 고신과의 대담에서 기독교대학의 건학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연구와 수업과 함께 신앙인격과 사회적 책임, 자기분야에 대한 연구심과 확실성을 강조하였다: “기독교대학은 학문으로만은 안 됩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인격과 성실성있는 사회적인 책임을 지고 갈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관계나 자기분야에 대한 철저한 연구심과 정확성이 동반되어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1993년 고신대학 교명을 고신대학교로 변경하여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고신대학교 초대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개혁신학의 학문의 폭을 세계적으로 넓히고자 남아공화국 포체스트룸대(Potchefstroom University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와 유대관계를 맺었다.
1994년 고신대학교 총장으로서 은퇴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에반겔리아 대학교(Evangelia University)를 설립하여 췌장암으로 투병하기 전까지 12년간 미국에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따라서 “이근삼의 한평생은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의 전수를 위한 아름다운 생애“로서 평가되고있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30690#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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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차 한국개혁신학회 학술심포지엄이 2일 부산고신대학교에서 ‘이근삼 박사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로 진행됐다.
1부 경건회에서는 정태진 목사(고신 부총회장, 진주성광교회)가 ‘영향력 있는 삶을 살자’(마 13:33)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이정기 총장(고신대)과 안민 장로(고신대 전 총장)가 축사,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소기천 박사(예수말씀연구소 소장)가 인사를 전했다.
소기천 회장은 “산이 있으면 피하지 말고 넘어가야 한다. 고신은 신사참배라는 큰 산을 넘고 옥에 갇히고 출옥하신 분들이 만든 귀한 신학의 순수성을 가진 교단으로 평상시 존경을 해 왔다. 특별히 이근삼 박사님께서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개혁신앙의 전통을 세워 주셨는데, 오늘 재조명하게 돼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날 ‘이근삼의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을 제목으로 기조강연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는 “고신 교단의 조직신학을 대변하는 신학의 거장 이근삼 박사의 신학을 조명하는 일은 의미 있다. 이분의 신학적 사상은 한국 신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근삼전집편찬위원회에 의해 10권의 전집이 출간되며 그 정통개혁신학 사상이 알려지게 됐다”며 “저는 이분의 신칼빈주의적 문화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분이야말로 정통주의 신학자로, 칼빈주의를 문화적으로 확대시킨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을 잘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이근삼의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을 제목으로 기조강연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개혁주의학술원 K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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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이근삼 박사는 박형룡, 박윤선, 한상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개혁신앙 선조(先祖)로서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신앙을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이근삼 박사는 고든칼리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등 미국에서 5년, 화란에서 4년 변증학을 공부했며 기초를 쌓았다”며 “이근삼 박사는 불트만, 바르트, 몰트만, 과정신학 등 여러 신학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면서 변증학적인 접근을 했다. 이근삼 박사는 자유주의신학이 시작하는 때에 전통신학을 방어하는 학문적 기초를 놓았다”고 했다.
그는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는 동등적인 의미로 해석돼 왔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근삼은 개혁신학을 계약신학으로 이해했다. 이근삼은 개혁주의 신학은 사변적이거나 이론적 신앙이 아니라 삶과 실천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사변적 신학에서 벗어나 겸손과 절제의 영적 신학이 되도록 했다”며 “특별히 이분의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을 추구한 것의 하나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 기독교 종합대학이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근삼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 사상을 수용한다. 지나치게 특별은총만 강조하고 일반은총을 강조하지 아니할 때 기독교는 변두리가 될 수 있다. 종교개혁적 신학을 계승한다는 것은 세상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반립 사상이 나온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으로 잘못된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마르크스 등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의식을 갖는 것”이라며 “일반은총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총을 예비한다. 물론 특별은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반은총을 등한시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문화의 열쇠다. 단순히 기독교적인 음악만이 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세속주의가 밀려들어 오는 가운데, 교회가 하나님의 일반은총 속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주권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라며 “개혁주의적 문화의 영역은 크게 세 가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다. 참된 개혁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고, 사회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직접 주권하시는 영역주권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김 박사는 “오늘날 미래세대인 MZ세대를 위해 개혁주의 문화신학을 가르치며 문화적 사명을 역설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탁월한 인문, 사회, 자연 과학적 진리, 음악, 미술, 건축, 조각 등의 예술적 표현 등이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개혁신학은 단지 교의학으로서 교회 내의 신앙고백으로 머물지 않고, 문화신학으로서 4차산업혁명시대에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시대적 적합성과 규범성을 드러내는 데 귀중한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근삼은 개혁신학을 문화신학으로 정립함으로써 고신교단 신학을 교리 수호에만 집착하고 지성적 성찰과 학문적 교류, 시대적 소명을 소홀히 하는 근본주의 비난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과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와 사회에 대한 문화적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라며 “이근삼의 신학은 개혁주의적 문화신학의 이념을 카이퍼의 신칼빈주의로서 정립한 오늘의 시대에 가장 적합한 신학으로서 그의 탄생 백주년을 계기로 연구발표되고 계승발전되어야 할 위대한 신학적 유산”이라고 했다.
▲이근삼 박사의 생애와 신학’을 제목으로 기조발제한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 현 백석대). ⓒ개혁주의학술원 K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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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이상규 박사(전 고신대, 현 백석대)가 ‘이근삼 박사의 생애와 신학’을 제목으로 기조발제했다. 이 박사는 “저는 학생으로 혹은 휘하의 교원으로 23년간 이근삼 박사의 직접적 가르침을 받았다”며 “이근삼 박사는 고신의 제 2세대 조직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칼빈주의 신학자였고, 이눌서, 구례인, 함일돈을 이어 박형룡- 박윤선의 신학을 계승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행일치 혹은 학행일치의 모범을 보여 준 학자였다”고 했다.
그는 이근삼 박사의 출생부터 교육 과정, 교수 활동 및 은퇴 이후의 활동부터 『신도민족주의와 기독교의 대결』, 『칼빈, 칼빈주의』, 『현대성경관 비판 Modern Struggle Against the Truth』, 『칼빈주의 문화관 The Calvinistic Concept of Culture』 등 연구와 저술활동들을 소개하면서 “이근삼 박사는 기독교종합대학에 대한 이상을 가진 학자였고, 기독교 문화와 문화적 사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기독교대학운동을 지지했다. 그의 사상 혹은 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신학을 해명하고 발전시키고 확산하는 것이 그의 일생의 과제였다”고 했다.
그는 “그는 칼빈주의를 가르치고 해설했을 뿐 아니라 이 신앙의 터 위에서 일생을 살았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기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문화적 사명을 중시한다. 이근삼 박사는 이런 삶을 살고자 했다”며 “그의 신학은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벤자민 워필드의 신학을 수용한 신학이라 할 수 있고, 유럽과 영미의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학’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더불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발원하여 19세기 화란에서 개진되고 미국으로 전파되어 재 진술된 그 신학 전통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이근삼은 자신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 중심’ 사상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이것이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전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종합적인 특징”이라며 “이근삼 박사는 하나님 주권, 곧 하나님 중심을 칼빈주의 신학의 요체로 파악하고 또 자신의 신학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보민 박사는 이근삼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 신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이근삼 박사는 진정한 의미의 칼빈주의자였고, 함일돈·박윤선·이상근 교수를 이어 고려신학교에 조직신학의 체계를 확립했던 고신의 제2세대 신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믿는 바대로 살고자 했던 신행일치, 학행일치의 삶의 모본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일생을 살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사변적이거나 이지적이지 않고 실천적인 칼빈주의자였다”고 했다.
▲‘이근삼 박사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현장. ⓒ개혁주의학술원 K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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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승구 박사(합신대), 소기천 박사(장신대), 이경직 박사(백석대), 기동연 박사(고려신학대학원), 우병훈 박사(고신대), 권호 박사(합신대), 류길선 박사(총신대)가 각각 ‘칼빈주의와 개혁신학 정착을 위한 이근삼 박사님의 기여’, ‘신토의 변천사에 관한 연구’, ‘이근삼 박사의 신학서론과 신론’, ‘이근삼 박사의 하나님의 창조 이해’, ‘이근삼 박사와 기독교 신앙고백’, ‘설교학의 명료성과 연관성 관점에서의 인근삼 박사의 설교 분석’, ‘이근삼 박사의 개혁신학 연구: 교회의 상징과 세상의 변화라는 이중적 모토를 중심으로’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