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철의 고신 총회 문건 능동적 순종에 대한 비판
원제: 2023년 총회, 합동을 고신 같이 되게 할 수도 개혁신학 교단으로 남게 할 수도
최근 <도르트신조> 라틴어 본을 한국어로 번역하신 어떤 원로 신학자는 칼빈주의 선조들이 도르트신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을 이단으로 정죄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 분은 <도르트신조> 라틴어 원문을 다 번역하고 난 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에 대해 화란의 칼빈주의 선조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다 파악한 후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그러므로 회심 준비론과 능동적 순종은 다 배척될 이단들이다”.그리고 지금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도르트신조>가 알미니안들의 주장했던 오류들을 청교도 개혁신학이라면서 전파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정통교리에 반대되는 오류를 바른 진리로 인정해서 교리로 주장하면 그것은 오류를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이단이다”.23년 예장 합동의 총회는 9월 19일부터 23일까지 대전의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에서 열린다. 청교도주의자들이 이미 비성경적인 것으로 결론이 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21, 22년 총회)과, 교류금지 대상으로 결정된 회심준비론(22년 총회)을 다시 살려내려고 기도하고 있다. 만일 이번 총회를 통해 임종구 목사(신학부 서기), 박의서 목사(신학부 총무) 등이 추진하는 대로 총회에서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이 성경적인 신학이라고 보고되면, 큰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특히 임종구 목사, 박의서 목사 등이 <도르트신조>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된 사안들을 다시 살려내어 합동의 정통신학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총회에서 실제로 벌어지면, 그것은 합동의 생명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사활의 문제이다. 그래서 단단히 벼르고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들이 많아 이번 총회는 매우 어려운 총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특히 신학부 서기 임종구 목사는 현재 교단의 주요 인물들과 행보를 같이 하면서 '주님을 위해 장래의 큰 뜻'을 마음에 품고 있는 분이므로 신학적 진리보다는 정치적 해법에 더 많은 관심와 재능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학부 총무 박의서 목사는 한국의 청교도신학의 아버지뻘 되는 서창원 목사가 시작한 ‘개학개혁주의 설교연구원’의 실행이사이고, 이 단체의 집회가 늘 벌어지는 세곡교회의 목회자이다.만일 이번 23년 합동 총회에서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이 정통 신학으로 합동에서 다시 그 자리를 회복하면 합동은 어떻게 될까? 그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상한 교단의 길로 들어선 예장 고신과 같아지고, 총신은 이미 신학교로서 제 기능을 잃어버린 합신과 같아질 것이라고 예상된다.22년 고신 총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칭의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주는 유익한 교리’라는 제목의 고신교수회의 연구 보고서를 수용함으로 능동적 순종을 고신의 공식 입장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보고문 속에는 각종의 괴이한 이단사상이 들어있다.
첨부파일 :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pdf 이를크릭하면 볼 수 있는 능동적 순종에 대한 고신교수회 보고서의 1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는 구원의 사역이며”이 보고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는 구원 사역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준수를 의미하는 능동적 순종이다. 이 보고서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와 십자가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순종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측면, 즉 율법에 대한 순종과 십자가의 희생제라고 구분한다. 보고서 4항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보자.“비록 그리스도의 순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순종이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될 수 있 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하고 후자를 수동적인 순종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이 보고서가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 순종(능동적 순종)인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수동적 순종)인지는 문맥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는 구원의 사역이라는 이 문구가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뜻하는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뜻하는지는 문맥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이 문구의 앞 뒤를 함께 보도록 하자.“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는 구원의 사역이며 그리스도의 피는 구약의 희생제물의 피보다 훨씬 더 탁월한 속량의 가치를 지닌다”.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순종(율법준수)과 수동적 순종(십자가 희생제사)로 구분하는 문장 속에서 나오는 문구이다. 이 보고서는 작성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 준수를 통해 아담의 죄를 대속하였고 또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도 아담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신학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이 세상 어느 나라의 기독교에 율법준수가 아담의 죄를 대속하는 구원 사역이라는 신학이 있는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고신교수회’라는 단체의 명칭으로 이런 이단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자이다. 1) 고신의 교수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 2) 고신의 많은 교수들이 이런 자에게 보고서 작성을 맡겼다는 것, 3) 이런 내용의 심각성을 모르고 ‘고신 교수회’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도록 다수의 고신 교수들이 동의했다는 것, 그리고 4) 이런 내용의 글을 그대로 받은 고신 총회(목사들)는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다.그런데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 문구의 바로 그 다음의 내용은 더욱 더 심각한 이단사상이다.“그리스도의 피는 구약의 희생제물의 피보다 훨씬 더 탁월한 속량의 가치를 지닌다”.고신교수회라는 단체의 이름을 빌려 보고서를 작성한 자는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능력이 더욱 더 크고 위대하다고 한다. 얼핏보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약의 소와 염소의 피에게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하는 신학을 가진 자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엄청난 속죄의 능력을 지니고 소와 염소의 피는 작은 속죄의 능력을 지닌다고 한다.만일 구약의 소와 염소의 피에도 작을지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하면 이단 사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소와 염소의 피를 받으시고 구약의 성도들의 죄를 용서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와 염소의 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시하는 일만 했다.구약의 하나님은 친히 우리 사람의 몸을 자기의 몸으로 가지고 세상에 오시어 자기의 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실 작정 안에서 구약의 성도들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 훗날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효력을 소급하여 적용하심으로 구약 백성들의 죄가 사하여 졌다. 소와 염소의 피는 단지 훗날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할 뿐이었다.고신 총회에 올라간 보고서를 쓴 익명의 교수는 이런 진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래서 구약의 소와 염소의 피에게는 속죄의 작은 능력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피에는 속죄의 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였다. 이런 사람을 통하여 어려운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문제는 고신교수회에 이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교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고신 총회에도 이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허접한 보고서가 고신교수회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그리고 고신 총회에 의해 공표된 것이다.다행스러운 것은 합동이 운영하는 총신의 교수들의 수준은 고신의 교수들의 수준을 능가하고, 합동의 목회자들의 수준이 고신의 목회자들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보고서가 총신의 교수회의 이름으로 나왔다면, 진즉 작성자와 그 내용에 동의한 교수들 모두 큰 망신을 당하고 스스로 교단에 망신을 초래한 죗값을 받겠다고 겸손하게 나섰을 것이다. 능동적 순종에 대한 고신교수회의 보고서에는 이것 외에 또 다른 이단사상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으로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는 못한다는 괴이한 내용이다. 그 보고서의 결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오직 율법에 대한 수동적 순종이었다면 죄인인 인간이 구속받아 의인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준비론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처럼 신학적 논리가 부족하거나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를 모르는 상태이다. 그렇지 않은 그것을 주장하고 지지할 수가 없다. 정이철 목사의 글로 추정
출처 :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바른믿음
입력 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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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 (2022.09.22.)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1.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구원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8-19)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대속하는 구원의 사역이며 그리스도의 피는 구약의 희생제물의 피보다 훨씬 더 탁월한 속량의 가치를 지닌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루고 순종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마 3:15, 20:28, 26:42, 요 4:34, 5:30, 6:38, 롬 5:19, 갈 4: 4-5, 빌 2:7-8 등)
2.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주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그리고 영원하신 성령으로 하나님께 단번에 바친 자기 자신의 희생제사로 성부 하나님의 공의를 충분하게 만족시키셨다.”(제8장 5항)
“이는 그들에게 의를 주입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게 간주하시고 용납하심으로써 이루어지며, 그들 안에서 이루어졌거나 그들이 행한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다. 또한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 혹은 다른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전가함 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하심으로써 이루어지며,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한다. 이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제11장 1항)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순종하심과 죽으심으로 그와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모든 자들의 빚을 모두 갚아 주셨고, 그들을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의 공 의를 합당하고, 실재적이고, 완전하게 만족시키셨다.”(제11장 3)
제8장은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순종과 희생제사(죽음)가 우리의 구원에 왜 필수적인지 설명한다.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만족되어야 하는데 그 유일한 방식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제사이다. 그리스도께 성취하신 이 사역이 믿음으로 죄인들에게 값없이 전가됨으로 죄인을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속량과 이신칭의의 교리는 모두 복음의 정수이다.
3.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빌립보서에 따르면 십자가는 순종의 최고 정점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도 순종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4. 비록 그리스도의 순종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순종이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될 수 있 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희생제사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하고 후자를 수동적인 순종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모든 순종은 자발적 순종이며 수동적 순종을 마지못한 순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 리스도의 순종을 오직 수동적 순종인 십자가에만 적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5.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에 대한 성경과 고백서의 가르침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친 바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정된 그의 의(그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피동적 순종으로 성립된 의로움)로만 성립된다.” “그의 고난은 벌을 담당하는 것과 동시에 율법의 완성이며, 그의 행위도 율법의 완성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의 벌을 담당함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의 언약을 신실히 지키심으로 얻으신 의를 신실히 지키 심으로 얻으신 의를 그가 대표하는 그의 언약 백성에게 다 돌려주십니다. 여기에는 그의 ‘적극적 순종’으로 얻으신 의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으로 얻으신 의, 그리고 부활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의의 인정,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6.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은 행위언약을 통해서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은 아담 및 그의 후손과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제7장 2항) 하지만 우리의 조상 아담은 순종하는 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율법의 심판과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죄인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의 형벌을 다 받아야 하고, 또한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를 다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다 성취하셨다.
6.1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며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 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범한 죄악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신 일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라 고 한다. 이 순종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될 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
6.2. 만약 그리스도의 순종이 순전히 수동적인 측면만 있다면 우리는 단순히 아담의 상태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 구원받은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다시 율법의 형벌을 또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무를 완전히 순 종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을 단지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마 5:17) 그는 나셔서 죽으실 때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고전 1:30) 이 완전한 순종이 믿음으로 우리가 전가가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의를 소유하게 된다. 이 순종을 수동적 순종과 구분하기 위해서 능동적 순종이라고 한다.
7.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량 사역을 더 정확 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두 용어 자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개념 자체는 성경에 분명히 있으며 무엇보다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언약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을 다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구분에 모든 이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 극소수 개혁파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고 지속적으로 여러 방식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반대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은 스콜라주의가 만들어 낸 사변적인 개념이다.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는 말은 주의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스콜라주의란 중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이 방법은 단어의 개념을 분명히 하여 혼동을 방지하고 올바른 신학을 변증하는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물론 로마교회 신학자들도 이 방법을 사용하여 거짓된 교리를 옹호하였으나 그것은 방법 자체가 아니라 방법의 사용이 문제이다.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탁월한 인문주의(humanism) 교육을 받아서 성경 원어에 매우 해박하였고 성경 주석에 매우 탁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경건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스콜라주의에 빠져서 사변적인 신학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일부 그런 신학자가 있을 수 있으나)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수동적 순종은 사변적 신학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2)능동적 순종은 회중파 신학의 산물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17세기 중엽 잉글랜드의 노회파 신학자들과 회중파 신학자들은 교회정치에 대해서 극심하게 대립하였지만 그 외의 다른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운 보편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능동적/수동적 순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회중파 지도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약간 수정한 사보이 선언(1658 년)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수종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회중파 신학자들만 이 구분을 사용하였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0년 뒤에 작성된 사보이 선언이 이 주제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정리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3) 능동적 순종을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이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단순히 율법의 형벌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도 완전히 순종하셨다는 주장에 따르면 중생한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반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주장을 반대로 적용하면,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만 인정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의 형벌을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의 의무를 완전히 순종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전가 받은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하며 불변한다는 확신을 준다. 이와 같은 확신은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순종하게 한다. 신자들은 더 이상 영생을 얻기 위해 억지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확보된 영생을 확신하고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기 위해서 순종하게 된다. 능동적 순종이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며, 이 잘못된 적용의 책임을 능동 적 순종에 돌려서는 안 된다.
4)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만 의존하고 있다. 칼빈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엄청난 주석도 참고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설교문이나 신학논문도 살펴야 한다. 칼빈에게서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용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그 개념은 나타난다. 칼빈과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차이를 너무 강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칼빈의 개념을 보다 발전시켜서 보다 정교하게 개혁신학을 변증하였는데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분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칼빈의 시대보다 17세기 중엽에는 이 전에 보지 못했던 여러 교묘한 이단들이 많이 생겼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들에 대해서 신 학적인 응전을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
능동적 순종이란 용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고, 개념에 있어서도 수동적 수동에 비해서 비교적 적게 성경에 나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같은 논리라면 능동적 순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행위언약도 마찬가지로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능동적 순종을 거부하는 이들은 대부분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인 행위언약의 개념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을 제외하면 구원의 풍성함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나신 이유를(갈 4:5) 단지 수동적 순종을 위해서라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만약 그 목적이 오직 율법에 대한 수동적 순종이었다면 죄인인 인간이 구속받아 의인은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선포하였다.(삼상 15장 22절) 이것은 제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순종과 제사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제사를 분리하기 쉽다.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훨씬 더 풍성하게 이해하게 하고, 칭의에 대한 보다 강력한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교리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았을 때 능동적 순종은 신앙고백에 암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신실한 개혁파 신학자들이 가르쳤으며 총회의 신학교에서도 가르친 교훈이기 때문에 계속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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