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의 위기에 대한 신학의 응답 (에큐메니안)
출처: © 에큐메니안 정연복 승인 2008.02.22
연구자료로 인용, 옮겨 게재하오니, 에큐메니안의 이해를 바랍니다)
이 글은 K.C. Abraham, A Theological Response to the Ecological Crisis, in: Ecotheology: Voices from South and North, ed., David G. Hallman, Orbis Books, Maryknoll, New York, 1994, pp.65-78의 완역이다. 아브라함은 남아시아 신학연구소(SATHRI) 소장이며, 인도 뱅갈로의 연합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강의하는 비상근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남인도 교회의 안수장로로서 아시아 기독교협의회(CCA), 세계교회협의회(WCC), 그리고 그 밖의 에큐메니컬 단체의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제3세계 신학자 에큐메니컬 협회(EATWOT) 회장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말
우리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생태계 위기는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우리 문제는 가난과 경제 착취일 뿐, 환경 문제는 산업화된 나라들의 “사캇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의 사회행동 단체와 대중운동들은 생태계 문제에 비교적 무관심을 보여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가 전체 세계, 즉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모두에게 얼마나 긴박한 것인가를 깨닫고 있다. 지구의 전체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 생태계 위기는 생존 그 자체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환경 파괴와 사회·정칟경제 불의 사이의 유기적 연관에 대한 인식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사회 갱신과 땅의 갱신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음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주변부 단체들의 투쟁 속에서 분명히 보인다. 토착민들(미국과 캐나다의 원주민들, 뉴질랜드의 마오리인들, 호주의 토착민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의 부족들)과 전통적으로 땅과 바다에 의존해온 사람들(소농민들, 어민들, 농업노동자들)은 해방을 위한 그들의 운동에서 이 두 차원을 결합시켜왔다.
가난한 사람들 대부분은 또한 토지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농업 발전은 부유한 지주들을 도와줄 뿐 가난한 사람들은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한다. 우리의 도시들에 널려 있는 빈민가 사람들은 작은 오두막들로 내몰리며,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의 투쟁은 그저 주거공간을 확보하려는 데 그친다. 다른 한편, 부자들은 자신의 안락함을 더욱 높이고 확대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파괴하는 일을 계속한다.
그들의 마을, 그들의 산림, 그들의 가족. 그들의 거주지를 광산 지역으로 변경하려는 인도 정부의 결정에 맞서 유명한 치프코(Chipko) 운동을 벌였던 가난한 부족 여인들의 완강한 저항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투쟁과 생태계의 문제들 사이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인도 나마다(Narmada) 계곡의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은 그들 자신의 거주지를 보존하려는 것은 물론 전 세계 산림이 무차별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진실로 생태계 위기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며 눈물이다. 박탈과 착취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환경 파괴와 연관된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우리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학자들, 혹은 자기 집 둘레에 나무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일 수 없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다. 그것은 정의와 해방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필수이며, 기본으로 그것은 창조세계를 원상 그대로 보전하는 것에 관한 문제다.
물론 헌신적인 과학자들과 그 밖의 생태학자들은 우리가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왔다. 과거에 “개발주의자들”(developers)과 과학자들은 자연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착취해도 좋은 하나의 객체로 간주했다. 환경 파괴 위험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연을 길들이는 과학의 능력에 대한 낙관주의 태도가 우세했고, 그 위험에 대해 어떤 우려의 목소리라도 내는 사람들은 “파멸의 예언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과학자들이 생태계의 재앙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촉구하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은 대규모 대기오염, 수질오염, 토양오염으로 말미암은 환경 파괴는 지구의 생명 그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설득력 있는 과학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들의 급속한 고갈, 종(種) 자체의 전멸, 날로 얇아지는 오존층, 오존층 파괴로 모든 생물이 방사선에 노출된 위험성, 온실효과를 가속화시키는 가스 축적, 날로 증가하는 해안 침식, 이 모든 것이 과학적 조사를 거쳐 문서화된다. 이것과 결부하여 급속한 인구 증가, 영양실조와 기아의 만연, 여자와 아이들의 욕구가 남자의 욕구에 종속됨, 전쟁의 참화, 만성 가난과 낭비적인 풍요라는 스캔들 따위 문제가 또한 쌓여 있다.
이런 문제들은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는 여기에 관한 많은 문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나의 목적은 생태계의 위기와 연관된 신학적·윤리적 쟁점들을 강조하며, 그리고 교회 대중운동 쪽에서 가능한 응답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생태계 문제에 대한 몇 가지 관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1. 생태계의 문제들에 대한 몇 가지 관점
성장모델은 수정되어야 한다. 생태계 위기는 현대의 산업·과학기술적 성장과 현대적 삶의 방식 때문에 야기되었다. 서구 산업화 과정에서 나온, 경제발전의 한 패러다임인 성장모델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막대한 자본을 사용하고 특히 재생 불가능한 천연자원들을 착취하는 과정이다. 이런 발전모델의 불가피한 결과는 자연과 인간 존재들의 가혹한 착취다. 생산되어야 할 물건의 종류와 사용되어야 할 과학기술의 형태에 대한 결정은 소비자 중심주의 경제의 요구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데, 이 경제의 지배적인 성장 논리는 필요(need)가 아니라 탐욕(greed)이다.
이 성장모델은 상이한 부문들 사이에 불균형을 초래하며, 지배계급들의 이익을 위해 농촌과 자연환경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착취를 눈감아 준다.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이런 이익지향 성장의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음모가 꾸며지고 통제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다국적기업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그밖에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산림과 천연자원을 닥치는 대로 파괴한다. 이로써 일본은 자신의 산림과 나무들은 별 문제없이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일본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나라들이 일본식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산업공해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되었다. 보팔에서 가스 누출로 인한 끔찍한 참사는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비료 과다 사용은 농지를 황무지로 바꿔놓고 있으며 우리의 바다와 강의 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식량과 에너지에 대한 인간의 수요는 자원들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사실 자원들은 감소되고 있다. 사람들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한 영향은 다음 세 가지 요인의 결과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엄청난 세계 인구, 1인당 에너지 소비량, 그리고 각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환경 파괴. 이 셋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부자들의 낭비적인 생활방식과 천연자원의 무책임한 사용은 생태계에 특별히 부담을 주고 있다.
생태계와 발전을 주제로 인도에서 열린 한 협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생태계의 위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부 사람들의 삶은 이 위기로 말미암아 더욱 빈궁해진다. 연료와 물 부족은 여자들의 삶에 더 무거운 짐이 된다. 부족들은 그들 자신의 땅에서 환경의 포로가 되고 만다. 여러 세대 동안 사회문화적 억압에 종속된 삶을 살아왔던 불가촉 천민들(Dalits)은 자연환경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로 말미암아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만약 우리 인도인들이 “현재 정부 정책들이 우리가 이런 형태의 발전을 수정하도록 도와줄 것인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대답은 “지배적인 발전 모형을 배척하고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형태의 발전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현재의 위기를 역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가 될 것이다.
정의의 문제로서 생태계 위기. 우리는 생태계 위기를 정의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은 생태계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를 “정부 당국” 및 “전문갚의 견해와 구별해 주는 근본적인 관점이다.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듯이, 정치 사회 정의는 생태계의 건강과 연관된다: “우리는 자연환경에 대한 정의가 없이는 사회정의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는 사회정의가 없이는 자연에 대한 정의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생태 정의(eco-justice)의 몇몇 차원들이 주변부 사람들의 투쟁의 경험으로 크게 부각되고 있다.
첫째, 경제 착취와 환경 파괴 사이의 연관이다. 이것은 산림 황폐화에서 명백해졌다. 욕심과 탐욕에 기인한 대규모 산림 파괴는 생활환경 변화를 초래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발전”을 위해 그들의 거주지 밖으로 내몰린다. Kerala 지역의 어민들의 노동조합에서 준비한 한 보고서에서 그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살충제 다량 살포에서 비롯된 수질오염으로 많은 물고기들이 몹쓸 병에 걸린다는 것을, 그 결과 사람들은 물고기를 사지 않으려 하고 어촌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동시에 기계화된 저인망 어선들의 무분별한 사용은 모든 물고기 생명을 위협하며, 전통적인 어민들은 그것으로 인한 손실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정의는 정의로운 관계들 속에서 실현된다. 불평등한 협력관계, 불평등한 지배 형태들은 불의한 것이다. 오늘날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대등한 파트너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착취 관계임이 분명하다. 인간이 지구라는 혹성을 불공평하게 다루는 것은 생태계 위기의 주요 원인들 중 하나다.
셋째, 불공평한 분배, 천연자원의 불공평하고 무절제한 사용은 심각한 정의의 문제다. 예를 들어, 미국인 하나가 자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천연자원은 200-300명의 아시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과 맞먹는다. 만약 북미인들의 이런 생활방식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확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
넷째, 재생 불가능한 천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은 미래 세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만일 우리가 최고급 문화를 모든 나라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퍼뜨린다면, 이 자원들에 가해지는 압력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생태계 균형을 혼란시키는 일이 없이는 바다 깊은 곳을 계속 개발하지 못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누군가는 깊은 바닷물의 역할을 우리 몸의 균형 유지를 도와주는 중이의 유동체(fluid in the middle ear)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천연자원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돌봄과 빈곤의 경감 윤리. 서구에서 발전된 대로 정의의 논리학에서는 권리, 규칙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그것은 아마도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의 균형점을 찾으려 한다. 우주가 정의로운 질서 속에 놓이려면, 우리는 돌봄의 윤리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정의는 돌봄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룩될 수 없다. 성경에서는 동정(자비)을 드러내는 정의를 강조한다. 예언자들은 이해관계와 권리의 균형을 이루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상처받기 쉽고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우리의 연약하고 말없는 파트너인 지구를 보호하는 것도 아울러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자연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라고 여길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정원사, 관리인, 어머니와 아버지, 청지기, 피신탁인(trustees), 연인, 사제, 공동 창조자, 그리고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 이 자연, 이 하나의 세계는 우리에게 생명과 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주며, 아울러 자기 자신과 우리 인간 둘 다 계속해 존재할 수 있도록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고 있다.”
가난 역시 생태계 파괴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가난을 경감시키는 것은 생태학적 관심사에서 빠질 수 없다. 우리는 이 둘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과 연료 같은 기본적 필요들을 얻기 위한 대안적 방법들을 갖지 못하는 한, 그들 역시 자기 주변의 어떠한 자연환경이든 무차별 파괴할 것이다.
생태계와 관련하여 정의는 포괄적 의미를 지닌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정의는 경제착취와 천연자원의 불의하고 무절제한 사용에 반대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정의는 인간의 책임성을 확증한다.
상호의존에 대한 새로운 의식. 생태계 위기는 우리가 땅에 의존하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 주었다. 우리는 땅에 속한다. 우리는 땅과 공동운명체다. 이런 인식은 실재에 대한 현대적 견해에 날카로운 도전장을 던지며,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가치 척도를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엄청난 침투력을 가진 서구 이성의 영향을 받아, 실재에 대한 현대의 인식은 기계론적 모델을 따른다. 그것은 기능적이며 이분법적이다: 정신/육체, 객체/주체, 이성/감정, 초자연적/자연적. 반면에 생태학적 견해는 유기적이어서 상호 연관과 상호 의존을 강조한다. 그것은 마틴 부버의 유명한 구별인 나-너, 그리고 나-그것의 관계에서 잘 포착된 세계관을 채택한다. 모든 실재는 공생적으로 결합된다.
샐리 맥패그(Sallie McFague)는 이 도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생태학적 관점은, 우리는 가장 심원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not our own) 존재라고 주장한다. 우리 몸의 세포들로부터 우리 정신의 가장 섬세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에 속한다.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는 전체로서 하나이다. 바위와 파도, 대기와 흙, 식물들, 광물들, 그리고 인간은 역동적이며 상호 지지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한다. 여기에서 원자론적 개인주의에 대한 모든 주장은 아무런 변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본질과 불변성, 그리고 완전이 아니라 관계와 상호 의존, 변화와 변형이 우리 시대를 위한 신학이 그 안에서 제 몫을 감당해야 할 범주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다소 도발적인 주장의 의미 깊숙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이것은 너무도 인간 중심적 신학에 대한 비판을 훨씬 넘어 신학에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까지도 요구하는 주장이다.
윤리에 대한 도전. 이러한 신학적 전환을 요구함과 아울러, 생태학적 관점은 윤리에 대한 우리의 전통 개념들에도 도전한다. 사실 상호 의존적 생태학적 모델은 인간 갱신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윤리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에게서 뭔가 배우기를 요청하신다. 생명 존속에 필수인 것은 지배와 조작의 가치들이 아니라 돌봄과 나눔의 가치들이다. 지배와 착취의 모형은 다만 자연의 고요한 죽음, 자연과 인간 모두의 생태학적 죽음을 낳을 뿐이다. 새로운 관점은 인간 상호간,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 연관을 확증한다.
이런 본질적 연관과 피조 세계의 전체성 유지에 필수적인 가치 척도는 현대사회에서 지배적인 가치체계와 다르다. 우리는 생태학적 가치 척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소비주의가 아니라 보전.
*탐욕이 아니라 필요.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가능케 하는(enabling) 힘.
*자연의 착취가 아니라 피조 세계의 원상 보전.
우리는 이런 가치들을 양육하는 구조들을 건설하고 새로운 생활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지배와 굴종을 뒷받침하는 가치들을 대체하기 위해 참된 상호 의존을 격려하는 사회적 메카니즘들과 정치적 구조들을 고안하는 것은 인류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다.
통합적 실재(holistic reality)와 연대성의 윤리 혹은 공동사회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인도의 문화와 종교들에서 대단히 뿌리가 깊다. 그러나 서구의 이성과 과학의 맹공격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토착적 지혜의 차원들에 둔감하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비전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 형태와 관계들 속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생태계의 위기는 지속 가능한 형태의 발전을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그것은 생태계의 정의를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에 헌신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을 인식하게 하며, 이 방법은 우리의 신앙을 또렷하게 고백하는 데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2. 교회의 응답
몇몇 두드러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인도의 교회들의 신학과 실천은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 그 결과, 적어도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신앙과 생태계를 연관짓는 데는 거의 생각이 못 미쳤다. 실로 우리는 신학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그 어떤 논의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교회들이 우리의 자연환경에서 상징들과 관습들을 채택하는 일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교회의 사고나 실천의 주된 흐름 속에 통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경력이 전적으로 음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도전할 만한 잠재력을 지닌 대담한 실험과 응답들이 나름대로 이어져왔다. 우리는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중 우리에게 유용하고 적절한 것을 가려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1990년 한국 서울에서 열렸던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회에서는 계약이라는 관점에서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확증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생태계 위기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교회 역사상 최초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창조질서 보전과 관련해서 교회가 따를 수 있는 최소한 세 가지 모델이 있다.
1) 금욕주의 모델. 아마도 이것은 자연환경의 남용이 빚어낸 위기 및 생태계와 관련된 어떤 관심사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응답일 것이다. 이 모델에서 핵심적인 것은 최대한 절제된 삶이다. 탐욕은 생태계 문제의 근원으로 간주되며, 소박한 생활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이 탐욕을 억제하는 길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슬로건은 금욕주의적 삶의 모델에 깊이 감명을 받은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욕구를 최소한의 것만을 필요로 하는 금욕주의적 공동체들의 수준에 묶어두려는 그들의 시도에서 우리는 지구는 주님의 것이라는 메시지, 그리고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구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이것은 자연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낭비적인 생활 방식에 대한 강력한 항의다.
생태계에 대한 관심들과 관련된, 인도나 아시아의 특징적인 모델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응답을 발견한다. 힌두교의 탁발승들과 은둔자들의 암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의식적으로 장려되는 중심지다. 우리는 카리다사(Kalidasa)의 사쿤타람(Sakuntalam)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사쿤타라가 두시얀타 집안으로 시집을 가려고 캔버 무니의 암자를 떠나야 할 때, 그곳의 식물들과 기어다니는 곤충들, 또한 새들과 짐승들이 그녀와의 눈앞에 닥친 이별을 슬퍼한다. 그녀와 이제 헤어진다는 생각에 그것들의 마음은 저리도록 아프다.
교회에서, 이 모델은 자연과 조화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키는 도구 역할을 감당해왔다. 이 모델의 문제점은, 그것이 오직 개인적 생활방식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 깃들인 가치들은 중요하지만, 이 가치들은 구조적 변화들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부적절하다. 또한 구조적 성격을 띤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도 부적절하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들의 탐욕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구조들 안에서 조직화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 구조들은 자체의 논리에 따라 작용하면서 사회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일단의 권력들-이데올로기, 다국적기업들, 시장과 매체의 엄청난 위력-이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개인들은 고작해야 항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집단행동과 결집된 대응력만이 이런 경향들의 흐름을 차단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금욕주의 모델은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하도록 고무시켜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2) 성례전적 모델. 삶과 삶의 모든 관계들은 예배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로 이끌려지며, 이 임재 안에서 그것들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성찬식에서 잔은 제공되고 축복되고 나누어진다. 시편 148편은 우리 예배의 우주적 배경을 확증하는 아름다운 시다. 우리는 모든 피조 세계 앞에서, 또 피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한다.
교회 전통에서, 사람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우주적 존재를 깨닫는다. 우리는 우주적 힘을 우리 안에 흡수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개신교 전통에서, 우리는 갱신의 근원으로서의 이런 우주적 묵상의 전통을 소홀히 다루어왔다.
이 모델의 문제점은 실천의 차원에서 드러난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찬식의 의미는 그저 의식의 준수 정도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성찬식은 이 세계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방식으로 파악되지 못한다. 부서진 빵이 나눔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다. 우리는 성찬식의 역동적인 성격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성찬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에 대해 개방적이 되도록 자극하고 격려한다.
3) 해방적 연대 모델. 이 모델에 따르면, 교회는 전체 피조 세계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과 연대해야만 한다. 이 현대적 모델은 성경에 뿌리박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기와 다른 성경 구절들에 나오는 해방의 모티브를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구원은 해방이다. 시급한 해방의 상황 때문에, 해방신학자들은 주로 정치 경제적 해방을 강조해왔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해방은 피조 세계의 해방을 아울러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의 사역인 자유는 전체 피조 세계의 갱신에까지 확장됨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히 밝힌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은 우주 전체를 포괄한다(로마서 8:19-23). 역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적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변형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에베소 1:1-10; 골로새 1:15-20). 하나님의 자녀들의 내적인 해방에 대한 소망과 전체의 물질세계가 속박과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에 대한 소망, 이 둘은 견고히 통일되어 있다. 성령의 사역은 이 땅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피조 세계로 번역되는 희랍어 크티시스(ktisis)에는 남자와 여자는 물론 모든 피조물이 포함된다. 악마적 세력들까지도 포함한다. 인간 삶의 모든 측면, 즉 역사, 문화, 그리고 자연환경의 해방을 추구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진실로 구원은 피조 세계의 온전함(wholeness)을 의미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출애굽에서의 해방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과 로마서에서 피조 세계의 해방 과정 사이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억눌린 자들의 외침과 관련된다(출애굽 3:7 이하). 후자는 우리와 피조 세계 안에서의 신음과 진통에 대한 응답 속에 약속된다(로마서 8:22 이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외침을 들으셨고 또 그들 편에 서 계신다. 똑같은 방식으로, 이 땅의 갱신은 가난한 자들, 그리고 말을 못하는 피조물과 침묵한 자연의 외침에 대한 응답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기로 결심하셨을 때, 그것은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 이만이나 되고” 또 “가축도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다(요나 4:11). 하나님은 하늘을 치르는 고층빌딩들과 엄청난 규모의 슈퍼마켓들, 그리고 거대한 컴퓨터들을 위해 큰 도시들을 보존하는 데는 관심이 없으시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자연(우주)과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비전에로 부름을 받았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 초라한 몰골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너무도 착취당하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투쟁에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신앙에서 전도(mission)와 영성은 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의 계약(covenant) 개념도 이 해방적 모델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의 틀 속에 있는 아브라함과의 계약, 그리고 인간의 구조들과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과 참여를 확증하는 시내산 계약은 우리의 신학과 성경 해석에서 중대한 의미를 띠어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계약, 그리고 이 계약의 우주적 배경은 종종 망각된다. 하나님은 전체 인간과 자신의 모든 피조물에게 하신 약속을 충실히 지키신다.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90년 개최한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세계대회에서는, 이 보다 넓은 의미의 계약에 모든 교회가 주목할 것을, 전체 피조 세계의 복지와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약에 기초하여 교회 역시 하나의 계약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대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그들의 응답을 계약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헌신의 행동으로 구체화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 구체적인 “계약의 행동들”을 위한 네 가지 영역이 제시되었다:
* 정의로운 경제질서 수립과 외국의 채무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일한다.
*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참된 안전을 위해 일한다.
* 손상되지 않은 피조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문화를 건설한다.
*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국가적 및 국제적 수준에서 일체의 인종차별과 차별 대우를 근절한다.
인도에서 교회들은 계약의 행동에 들어서서 주변부화된 사람들-불가촉 천민들, 부족들, 여성들-을 위해 싸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즉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수립함은 물론 인도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지속 가능한 발전, 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일해야 한다.
3. 새로운 영성
우리는 지구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성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폭스(Matthew Fox)는 “창조의 영성”(creational spirituality)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서구 교회들 사이에서의 새로운 운동을 주창하기도 했다. 이 영성의 핵심은 피조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다양한 선물과 임재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두려움, 그리고 이와 함께 놀라움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이 놀라운 우주의 일부라 는 두려움.... 이 두려움은 한 국가나 정당에 대한 거짓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 다. 그것은 우주 그 자체 안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실존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탐욕과 욕심을 속박의 근원으로 여긴다. 물질적 진보는 무욕(無慾)과 나눔과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피에리스(Aloysius Pieris) 신부에 따르면, "아시아의 상황에서는 '부'의 반대말은 가난이 아니라 욕심과 탐욕이다. 이것은 부를 반종교적인 것으로 만든다. 주된 관심사는 가난을 근절시키는 게 아니라 '맘몬'에 맞서는 투쟁이다. 이 맘몬은 모든 사람, 또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규정할 없는 힘으로 작용하여 물질적 부를 반인간적, 반종교적, 그리고 억압적인 것으로 만든다."
불행히도, 아시아의 영성은 개인들의 도덕적 행실 혹은 배타적 공동체의 형성, 즉 영적 귀족주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 둘 중 어떤 경우든, 참된 아시아적 영성의 핵심인 무소유와 나눔의 영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영성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땅과 바다와 친밀하며 또 공동체적 실존 방식에 매우 익숙하다는 데서 바로 이 영성이 샘솟는다. 그것은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들을 지켜 준다. 폭력적 힘들의 맹공격을 받아 끊임없이 박살나면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 주변부화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 영성 말고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행동주의자의 삶을 살려고 애쓰면서도 이 사실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래서 이 사실로부터 뭔가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오늘날 우리는 창조의 영성에 관한 성경의 통찰력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인간의 책임을 우리가 경축하고 배우도록 도와줄 성경연구 자료들, 예배와 기독교 교육이 늘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 피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청지기” 모델을 연구해야 한다. 많은 시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언자들은 피조 세계의 충만함으로서의 “샬롬”(shalom)에 대한 환상을 펼친다. 이 환상에서는 조화가 모든 존재의 두드러진 실존 방식이 된다. 야수와 인간이 함께 거주하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뒹굴고, 칼은 보습으로 바뀐다. 사람들 사이에 피를 흘리는 것은 땅에 폭력을 범하는 것이라고 예언자 아모스는 주장한다. 이 모든 증언들이 사회적 불의와 생태계의 파괴 사이의 연관을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 주님 그 자체에 귀기울여야 한다: 땅과 몹시도 밀착해 계신 그분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에서 우리가 뭔가 배우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한 알의 씨앗처럼 싹트고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다. 그분은 굶주린 자들에게 사랑의 응답을 하신다. 그분은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쏟아 부으신다. 궁극적으로 그분이 성취하신 구원은 모든 것의 해방을 포함하며, 이로써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다. 모든 것의 완전한 파멸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파멸 그 자체를 위한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인간 상호간에 그리고 자연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의 길을 거절하고 배척하도록 도우려는 의도에서 말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운명론적 방식으로 읽으면 복음의 핵심적인 도전을 놓치게 된다.
4. 새로운 가치척도
신학과 영성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은 우리의 현재의 가치체계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가치 척도를 채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나눔의 삶”(Sharing Life)에 관한 세계교회협의회의 한 문서는 이런 방면에서 몇 가지를 제안하는데, 그것들은 우리가 아래 사항에 헌신할 것을 요청한다:
*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우리와 동등한 파트너로서 모든 결정과 행동의 중심에 놓는 일.
* 우리 자신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조직화된 운동들과 일체화하는 것.
* 상호적인 책임과 힘(power)을 누리는 것.
새로운 가치체계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결정적인 질문에서 제시되는 지침을 따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책 입안자들, 정부 관료들, 그리고 전문가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있는가? 거주지에서 내쫓긴 가난한 부족민들의 말을 듣고 있는가? 어민들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수출시장과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재정 문제에 관한 한 도사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의 달콤한 말에 넋을 놓고 있지는 않은가?
가치 형성에서 기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억압적인 힘이 연대적인 힘으로 변형되는 것을 목격한다. 예수께서 힘에 대한 두 적대적인 견해와 마주했다는 것을 신약성경은 분명히 보여준다: 자기 확대적인 힘, 그리고 남이 뭔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enabling) 힘.
전자는 지배하고 조작하고 착취하는 힘이다. 이것은 독재자들의 힘이다. 이것은 열렬한 복음의 십자군의 힘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이익에 눈먼 산업주의자들, 그리고 자신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 정당 우두머리의 힘이다. 이것은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주교들이나 성직자들의 힘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힘을 떠들썩하게 사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교묘하게 사용한다. 일부는 이 힘을 악한 목적에 사용하고, 또 일부는 어쩌면 고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대조적으로, 남이 뭔가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은 남을 섬기고 돌보는 힘, 사람들이 스스로 서도록 돕는 힘이다. 이 힘의 전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들, 제자들과의 끊임없는 갈등,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 이 모든 것에서 예수님은 남을 지배하고 조작하는 힘을 의식적으로 거절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섬기고 봉사하며 우리의 연대를 견고하게 하는 힘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런 연대적 가치들은 현실에 대한 생태학적 관점에서 필수적이다.
가치들은 생활방식, 관습과 구조들에서 표현된다. 우리가 획일적인 생활방식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천연자원을 무절제하고 낭비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신중하게 거절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선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에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 중심주의 경제가 생산하고 시장(market)이 명령하는 모든 것을 굴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책임적인 삶과 정반대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자기 재산을 책임적으로 사용하도록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중요하다. 재산이 늘어나는 것은 많은 도시 교회들이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발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말하는 그 어떤 지침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교회 건물의 미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분야에서도 우리가 더 훌륭하게 처신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교회 재산을 불리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움으로써, 우리는 생태학적으로 해로운 영리 추구를 재촉하는 논리와 가치체계를 승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해 전 우리는 뱅갈로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성(聖) 마가 성당에서 이 문제를 건드렸다. 영리 추구에 안달이 난 많은 개발업자들은 교회에 속한 이 값비싼 땅에 눈독을 들였다. 우리는 목회자 협의회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 셈인데, 협의회에서는 건축가들과 개발업자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이 중대한 고비에서 나의 한 동료가 “건물의 신학”에 대해서도 토의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모임에 참석했던 회사 경영진과 유력한 사업가들은 그의 제안을 비웃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행동에 돌입할 때 기독교인으로서 증언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그는 물었다. “이런 행동으로써 우리는 영리 추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착취 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 않나요?”
이 논의에서 생태학적 차원이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교회 재산 “증식”을 논할 때 그의 이런 주장을 첨가해야만 할 것이다. 교회 재산을 불리는 일에서도, 개발 곧 교회 재산 증식 그 자체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이 내쫓기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런 문제들에서도 우리는 이익에 눈먼 개발주의 논리를 맹목으로 받아들이는듯하다는 것이다.
5. 모든 종교의 관심사
생태계에 대한 관심은 모든 종교인들의 공동 대의(大義)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우리 모두의 가정인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종교의 영적 자원들을 동원해야 한다. 유엔 환경 프로그램에서는 모든 종교가 함께 “환경 안식일/지구 휴식일”(Environment Sabbath/Earth Rest Day)을 지킬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또한 불교와 기독교, 힌두교, 유대교, [힌두교의 일파인] 시크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끌어온 예배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각 종교 대표자들이 작성한 선언문으로 시작되는데, 그들 모두는 “자연계 보전과 생태계 조화를 위한 종교적 관심은 우리 공동의 유산이며 타고난 권리이며 의무”라는 데 동의한다. 각 종교의 기도문들 가운데 몇 개를 추려 보자:
지고하신 신이시여,
하늘과 대기에 평화가 깃들게 하소서.
식물계와 산림에 평화가 깃들게 하소서.
우주의 신들(cosmic powers)이 평화롭게 하소서.
브라마에게 평화를 베푸소서.
넘치도록 충만한 평화가 모든 곳에 깃들게 하소서.
(아타르바베다; 힌두교 경전의 하나/역자 주)
만물이 행복과 평화로 충만하게 하소서.
살아있는 모든 것,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작은 것이나 중간 크기의 것이나
천한 것이나 위대한 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태어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소서.
(불교의 기도)
오 하나님! 만물을 지으신 이여!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다!
우리가 뭔가 필요할 때면,
당신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나이다.
우리가 아플 때면,
당신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나이다.
우리가 아무런 먹을 것이 없을 때면,
당신은 은혜 가운데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이슬람교의 기도)
찬양 받으소서, 나의 하나님!
우리의 형제인 바람과 공기,
그리고 흐리거나 청명한 모든 날씨를
당신은 우리에게 베푸시나이다.
이로써 당신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나이다.
찬양 받으소서, 나의 하나님!
우리를 지탱해주고 다스리며,
온갖 다채로운 꽃들과 잎들을 가진
열매를 낳는,
나의 자매인 어머니 땅을 인하여.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신앙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 모든 예배자료를 함께 나눌 수 있다. 사람들은 지구를 위한 기도에서 환경의 날(Environment Day)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예배는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취할 수 있는 공동의 행동이다. 또한 모든 종교인은 산림의 황폐화, 그리고 호수와 강과 바다와 그 밖의 것들의 오염으로 말미암은 생태계 파괴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굳게 결합할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은 자기 지역의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과 협력하여 환경보호를 위한 특정 과제들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도전을 받고 있다.
정연복 pkom54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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