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개신교를말하다 2013. 11. 4. 10:54
WCC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한국 교회의 대응 방향
양낙흥 (고신대 신대원 교수)
개인이나 단체나 대부분의 경우 양면성을 가진다. 하나님과 천사들 외에는 온통 장점만 가진 존재도 없고 사탄과 그의 부하들 외에는 온통 단점만 있는 존재들도 찾아 보기 어렵다. 따라서 개인에 대해서든 단체에 대해서든 그 평가에 정직성과 공정성을 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의 빛과 그림자, 공과 과를 모두 논해야 한다. 한 쪽 측면만을 말하는 것은 그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태도이다.
WCC의 출발 동기는 선하고 공감할만한 것이었다. 1910년 에딘버러 국제선교사대회(IMC)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개신교파들의 협력 필요성에 대한 선교사들의 공통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즉 세계 선교라는 지상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 분리된 여러 개신교회들의 경쟁과 중복적 투자가 영혼 구원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함에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 일선 선교사들이 먼저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이 WCC 출발의 한 동기였다.
또 하나 WCC 설립과 관련된 동기는 1, 2차 세계 대전을 목격한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전쟁과 폭력을 막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일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감을 느낀 것이다. 죄더블롬 같은 교회 지도자들은 국제 연맹이나 국제 연합과 유사한 국제적 교회 협의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의 창설에 착수했다. 즉 양차 대전의 파괴와 폐허 속에서 무력감을 느꼈던 개신교회들이 세계적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교회 단체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WCC를 구상하게 되었다. 요컨대 WCC의 설립은 당시 교회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 선교의 상황과 시대적 현실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하고 이해할만한 동기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WCC와 에큐메니즘
?본래 WCC를 구성한 세 기구들 중 “삶과 일” (Life and Work), “국제선교사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와 함께 그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믿음과 직제”(Faith and Order: 이하 F&O로 표기) 위원회의 목적은, 정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하나됨(oneness)을 선포하고, 교회들을 불러 한 신앙과 한 성찬의 교제 안에서의 가시적 통일성의 목적(the goal of visible unity)에 이르게 하는 것인 바, 그것은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 생활(common life)을 통해 표현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다.”1)이다. F&O는 신학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그 목적 달성의 교리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 그것이 추구하는 교회의 “가시적” 하나됨을 이루고자 한다. 1950년 WCC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토론토 성명서는 WCC가 추구하는 일치는 불가시적인 것이 아님을 천명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교회, 오직 영적인 교회, 비록 신앙상의 문제에서는 분열될지라도 보이지 않는 끈을 통해 하나가 될 교회를 상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
?그 일치의 개념과 성격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F&O 위원회는 이미 연합을 이룬 교회들과 현재 이루어 가고 있는 교회들(united/uniting churches)을 위해 정기적 자문을 제공하고 “교회 일치를 위한 협상의 개관”(Survey of Church Union Negotiations)을 격년으로 발행하는 것을 볼 때 기구적 통일을 그것이 추구하는 일치의 내용들 중 하나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배와 성찬, 그리고 봉사에 있어서의 연합 뿐 아니라 기구적 연합이 교회 일치의 완성이요 최고봉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기구적 일치를 이룰 때 예배, 성찬, 봉사와 삶에 있어서의 하나됨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에큐메니칼 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실현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기구적 일치를 그 운동의 궁극적 목표, 혹은 이상적 상태로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요,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달성하고 싶어 할 것임에 틀림없다. 교회의 완전한 일치란 단지 신앙고백과 봉사에 있어서의 일치 뿐 아니라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의 연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가지 필수적이고 포기할 수 없는 조건들의 확보가 전제된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그러한 일치는 성경이 명하는 바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명하는 성경 본문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됨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 소위 “대제사장적 기도” 중에 가장 강조된 주제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요소, 즉 전도의 효과를 위해 필요한 핵심적 사항이기 때문이다. 1954년 WCC 총회에 올라온 제1분과 보고서에 나타난 말처럼, 그리스도인들의 “나누어진 증거는 틀림없이 불완전한 증거가 될 것이며, 또 비기독교 세계 앞에서 하나의 추문”이 된다는 것이다.3) 그리스도인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한 세상 앞에서의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중요했다(요17:11, 21-23).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고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됨을 애써 유지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부도 한 분, 성자도 한 분, 성령도 한 분, 세례가 하나, 믿음도 하나, 소망도 하나,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라는 사실에 근거했다(엡4:1-6).
WCC가 추구하는 교회 일치
?교회의 일치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 기구적 통일도 있고 사업상의 연합도 있고 친교 수준의 일치도 있다. WCC는 어떤 식의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가WCC가 생각하는 교회 일치란, 토론토 성명에 의하면, “교회들의 대화, 협력, 그리고 공동의 증거”이다. 쉽게 말하면, 전 세계의 여러 교단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전도나 선교를 비롯한 구제와 자선 등의 기독교 사역에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그러나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WCC 총회 시까지도 WCC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일치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제1분과 보고서는 어디까지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전망하지도 못하고 있다. “WCC에서 우리는 아직도 ‘함께 머무르기를 원할(intend to stay together)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는 연합을 추구한다(intend to unite).” 일치의 정도에 대한 명확한 목표를 정하지 말고 일단 모여서 대화해 보자는 것이다. WCC는 일치의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1954년 에반스톤에서 모인 제2차 WCC 총회의 위의 보고서는, “신념의 깊은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별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4) 그처럼 불가피하게 따로 움직여야만 하는 문제들을 제외한 “모든 문제들에 있어 다 함께 행동”하는 것이 WCC가 추구하는 일치이다.5)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린 제4차 WCC 총회는 WCC가 추구하는 교회 일치의 내용에 대해 조금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한다. 제1 분과 보고서는 “하나 되는 것”이 복음 선포, 세례, 그리고 성찬을 함께 함으로써 드러난다고 주장했다.6)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분열된 회중들을 단결시켜서, 서로를 인정케 하고 공통의 예배와 성경 연구, 교회의 에큐메니칼 차원의 헌금, 그리고 인간의 필요에 대한 단합된 응답” (joint response)이다.7)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WCC 총회에서는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는 용어가 부각되었다. 그것은 뉴델리에서의 “유기체적 일치”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거리, 문화, 시간에 의해 갈라져 있는 교회의 하나됨, 또 개교회의 대표들이 공동 모임을 위해 같이 모였을 때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됨”을 표현한다는 것이었다.8)
1983년 카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제6차 WCC 총회의 분과위원회 보고서 “하나됨을 위한 조치”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사도적 신앙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소유해야 하며 그 “메시지를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 함께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사도적 신앙에 대한 수렴된 선언을 발표하려는 공동의 시도”인 소위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BEM)” 문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격려해야 한다.9) 적어도 이 때까지는 WCC가 추구하는 일치의 내용 중에 기구적 연합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세계단일교회를 지향하는가?
WCC가 세계 단일 교회를 추구하는가 하는 질문도 있다. 세계 교회의 기구적 일치에 관한 한 WCC의 입장은 수퍼 처치에 대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만일 WCC가 현재로서 세계 교회 실현의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원리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세계 단일 교회가 불건전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러한 수준의 일치 실현이 전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후프트는 WCC가 앞에서 말한 일치의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 현실--복수 교회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이 결코 이상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는 “교회들”이라는 이름부터 WCC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라 고백한다. “궁극적으로 유일한 하나의 교회가 있을 수 있고” 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교회가 여럿이라는 사실은 “심각한 변칙”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후프트는 보다 온전한 수준의 교회 일치의 실현이 WCC의 이상이요 목표임을 선언한다. 복수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을 WCC가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며 “하나의 거룩한 교회의 현현을 향하여 전진해 나갈 것”이라 다짐하는 것이다.
후프트 총무는 WCC가 일종의 임시변통이라 밝힌다. 즉 교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시기와, “이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한 목자와 한 양무리가 있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날 그 때,” 그 시기 사이의 중간기를 살아가는 기구라는 것이었다.10) WCC에 의해 하나의 가시적 교회가 지상에서 이루어질 가능성과 그것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인 것이다. 그는 WCC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표현하고자 하는 교제이며, 또 그 일치를 훨씬 더 충분히, 훨씬 더 깊게 표현하는 길을 모색하는 교제”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11)
애초에 에큐메니칼 운동을 시작한 주동자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의 심중에는 분명 전 세계 교회를 망라하는 기구적 일치까지의 도달을 이상적 목표로 생각한 이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1975년 제5차 나이로비의 WCC 총회 보고서에서도 그러한 때의 도래에 대한 대망이 드러난다. “그리스도께로 회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백적 몸(confessing body)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반드시 수반하므로 우리는 세계적 크기의 공동체를 갈망하며 이를 위하여 노력한다.”12) 냉정하게 말해서, 전 세계 교회가 기구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원리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악한 것이라 말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만일 조직이 커지는 그 자체가 악이라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전국적 조직을 가진 큰 규모의 교회는 모두 악이라는 말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독립 교회제도를 취하는 회중교회제도만 유일하게 올바른 교회 정체라는 말이 될 것이다.
WCC는 “초교회”(Super-church)인가?
교회 일치 (church unity)의 도구로서의 WCC의 성격에 관한 끝없는 논의는 복잡할 뿐 아니라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문제이다.13) WCC가 “수퍼 처치”(super-church)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거듭 제기되었는데 WCC의 공식적 성명은 그것을 명백히 부정한다. 1948년 제1차 암스테르담 총회를 시작할 때에 초대 총무로서 1966년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WCC 총무직을 수행했던 비셔트 후프트 (Visser't Hooft)가 임시위원회를 대신하여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는 “한 가지 지속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계교회협의회가 “초교회 (Super-church), 즉 교회 권력의 중심이 되어 회원 교회들을 통제하고자 한다”는 것이라 소개하면서 그는 그러한 혐의를 전혀 사실무근의 것이라 부인한다. WCC “헌법이 WCC에 그러한 의도가 없으며, 또 그같은 권한을 주장하지도 않음을 가능한 최대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셔트 후프트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라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려 노력했다. 에큐메니칼 분야에서 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같은 통제를 행사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시도”도 “강한 독립 의식”을 소유하고 있는 회원 “교회들로부터 단호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947년에 임시위원회가 이미 선언했던 바, 즉 WCC가 “중앙집권화된 행정적 권위체”가 되려는 생각을 거부한다는 점을 최대한 분명하게 재천명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정했다.14) 이어서 후프트는 WCC의 진정한 역할은 “교회들의 협의회”이지 “하나의 통합된 교회의 유일한 협의회”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 총회는 WCC의 본질, 혹은 그것이 회원 교회들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가에 대한 일반적 합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WCC의 반복적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을 “수퍼 처치”로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 토론토에서 모인 중앙위원회는 그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 교회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라는 제목의 소위 “토론토 성명”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WCC는 무엇이 아닌가, 그리고 WCC는 무엇인가 하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먼저 전자에 관해 성명서는 그것이 초교회가 아니며 결코 되어서도 안 된다 (The WCC "is not and must never become a super-church")고 선언했다. “WCC는 초교회가 아니다. 세계 교회 (the world church)도 아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도 아니다.” 성명서는 WCC가 공식 선언문들을 통해 그러한 혐의를 최대한 명백하게 부인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반복해서 제기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WCC 내의 참된 실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 실정은 원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시 현실적인 것으로, “만약 WCC가 자신의 헌법 원칙, 즉 WCC는 그 회원 교회들에 대해 입법권이 없으며, 그들을 대신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원칙을 어떤 식으로든 위반한다면 회원들의 지지가 중단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아가, 성명서는 WCC 회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결코 “자신들에 대해 어떤 결정들을 내릴 수 있는 기구에 소속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WCC는 각 회원 교회가 원치 않는 다른 교회와 통일을 이루도록 강압하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안심해도 좋았다. “어떤 교회도 WCC가 자신들에게 강제적으로 다른 교회들과의 일치에 관계된 결정들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각 회원 교회는, 당연한 일이지만, “WCC의 말과 행동을 재가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현재로서 WCC는 초교회 (Super-church)를 추구하지 않으며 그 목표를 세계 교회들의 친선과 사업상의 협력 선으로 국한했다는 말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WCC의 권위”에 대해 채택된 결의문에서 WCC 제1차 총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천명했다. WCC는 “회원 교회가. . . 일치된 행동을 요구하는 문제들에 대해 협력할 수 있도록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로 회원 교회를 섬기기를 바란다.” 아울러 그 결의문은, WCC가 “이미 회원 교회들이 담당하고 있는 어떠한 역할도 찬탈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회원 교회들을 통제한다든지 그들에 대해 입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그러한 시도나 작업을 하는 것은 WCC “헌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WCC는 그 회원 교회들과 별도로 “유일한 통일된 교회 기구, 혹은 중앙집권화된 행정권에 의해 지배되는 기구가 된다는 어떠한 생각도 거부한다”는 점이 이 결의문에서 재강조되었다. 또, WCC의 공식 성명서의 권위는 오직 “그 성명서 자체의 진리와 지혜에 의해 지니게 되는 무게”에 있음을 명확히했다. 6년 뒤 1954년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WCC 총회의 제1분과 보고서도 “세계교회협의회가. . . 하나의 초교회(a Super-church)는 아니다”고 못박았다.
교회 연합과 일치에 대해 한국 장로교회들이 취해야 할 입장
세계교회협의회가 추구하는 교회일치 운동이 올바른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일단 차지하고 그것이 옳든 그르든 최소한 한국 교회,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들에게는 교회 일치와 연합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행한 책자 『한국의 종교 현황』에 의하면, 한국 장로교인들은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지도자들이 져야 하지만) 현재 242개의 장로교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가장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칼빈주의자들이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단들의 이처럼 맹렬한 분리와 분열이 과연 그들이 그처럼 입술로 떠받드는 칼빈의 신학에 의해 지지를 받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국 장로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그처럼 자랑하는 칼빈의 교회론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교회의 일치와 분열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조그마한 한 나라에 장로교 간판을 걸고 있는 교단이 200개가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한국 장로교회들 사이에 교회의 하나됨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분리주의적 성향으로 충만한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CC가 과연 수퍼 처치나 세계단일교회를 추구하는가 하는 논의는 우선 접어 두자. 설사 그 기구에 그러한 의도를 가진 인사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난 60년 동안 그 구상은 전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두 세대 동안 진척된 교회 일치의 정도를 볼 때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이미 전적 자치권을 확보하고 있는 각국의 여러 교단 교회들이 WCC든 또 다른 기구든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기구를 인정하려 할 리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CC가 세계단일의 수퍼 처치가 되어 전 세계 모든 교회들을 다스리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는, 현재로서는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단순한 노파심이나 기우에 불과할 것 같다. 거기에 가입한 교회들조차도 만일 WCC가 세계 교회로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조짐을 보이는 순간 아마 대부분 거기서 탈퇴하고 말 것이고 WCC가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WCC 가입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구성되었던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는 이듬해 1957년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 중에는 “단일 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들과, 교회의 “친선과 협조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 있는데 한국 교회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참가하기로 하오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했고 박형룡 박사는 위원회의 그 결정 사항을 부연 설명했으며15) 그에 따라 총회는 한국 장로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친선과 사업 협조에만 참여하고 교파 합동에는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1958년에만 해도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의 수호자였던 박형룡 박사의 WCC 가입에 대한 견해는 “무조건 참여 불가”가 아니라 선택적 참여였다. 1958년 <신학지남>에 쓴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글에서 그는, “우리 교회는 세계적 교회 친선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나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어떤 날 교파 합동의 계획이 구체화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 탈퇴할 것”이라는 노선을 밝혔던 것이다.16) 그러므로 박형룡의 본래 입장은 한국 장로교회가 WCC에 참석하는 자체를 터부시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WCC에 대한 인식에 있어 그의 입장은 그의 추종자들인 정규오 등 소위 NAE측 인사들의 입장보다 훨씬 온건하여 1957년의 장로교 총회가 채택한 입장에 가까웠던 것이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한국 교회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교회 일치 운동은 그 자체로서는 바람직한 것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부되어야 하는 경우는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를 희생하는 댓가로 일치를 추구할 때이다. 즉 우리는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로서 한국 장로교회들에게 꼭 필요한 작업은 WCC가 수퍼 처치인가 아닌가, 혹은 WCC가 세계 단일 교회를 만들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을 두고 두려워하거나 부질없는 논란을 계속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분열과 일치에 대한 칼빈의 신학을 배워서 그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WCC의 선교신학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고백
WCC 속에는 복음주의적 교회들과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교회들이 혼재하기 때문인지 그 문서들의 신학 노선도 때로 보수적인 것과 자유로운 것들이 복합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것의 진정한 입장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종종 있다. 때로 WCC의 신학은 정통적 기독교 교리를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총회 보고서 등의 주요 문서들에는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적 진리들에 대한 고백들이 자주 발견된다.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한 관점에 있어 원죄와 인간 본성의 부패 교리가 인정된다. 제1차 총회 제1분과 보고서는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우리 조상들의 죄의 상속자들”이라 선언한다.17) 제3분과 보고서도 “인간 본성 속의 악의 깊이”를 언급하면서 “죄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상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18) 제2차 총회 제2분과 보고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들을 대할 때 그들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자”라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5년의 총회 보고서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한다. “원죄는 여전히 우리의 죄이며, 우리가 서로로부터 또 자연과 우주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근본 원인이다.”19)
정통적인 기독론에 대한 고백들도 발견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 사도신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 . ”20) 제1차 총회의 기조 연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언급한다.21) 그 총회 제1분과 보고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고백된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 . . ”22) 제2분과 보고서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을 언급한다.23) 제2차 WCC 총회의 제2분과 보고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본받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24)
정통적 종말론, 즉 역사의 종말과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신앙이 발견된다. “인간의 모든 역사와, 인간의 모든 행위에 내려질 마지막 심판은 자비로우신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25) 영생에 대한 소망도 1975년의 총회 분과 보고서에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은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 또 인간 관계의 영광을 기뻐해야 하지만 이 땅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음을 알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영생 속에서만 온전히 알려지는 삶의 질이 있다.”26)
전통적 선교와 전도의 필요성 인정
종종 WCC는 사회 구원에만 관심을 집중하느라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비판을 받는다. WCC는 과연 전통적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신념을 유지하고 있는가단도직입적으로 결론만 말한다면, WCC 선교 신학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회 정의의 구현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혜와 죄용서, 회개와 믿음에 의한 회심 등, 개인의 영혼 구원에 대한 전통적 관심이 없다는 비난27)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WCC의 주요 문서들에서 우리는 전통적 복음 전도의 필요성에 대한 긍정적 언급들을 많이 발견한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제1차 WCC 총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 .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있음을 믿는다.”28) 그 총회 제2분과 보고서는 “복음이 세계 도처의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강조한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서 모든 이가 각각 “예” 혹은 “아니오”라는 인격적 결단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할 특권이 교회에 부여되어 있다.”29) WCC는 복음 전도의 절박한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만약 복음이 죽고 사는 문제라면, 세상 누구라도 복음을 듣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지 못한 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분과는 WCC가 복음 전파를 발전 계획에 포함한 것을 기뻐했다.30)
1954년 에반스톤에서의 제2차 WCC 총회도 복음 전도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과시한다. 제2분과 보고서에 의하면, “복음”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31) 복음전도의 관심사들은 사람들을 “구주되시며 주님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데려와 그들이 그분의 영생을 나누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전형으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보고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모든 복음 전도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32)
1961년의 제3차 뉴델리 WCC 총회도 복음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고수한다.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이다.”33) 총회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전통적 전도에 대한 필요성을 긍정한다. 복음 전도 사역은 “소경된 눈이 빛의 광채를 향해 열릴 수 있도록 이 시대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34)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명령은 그의 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주어졌다.?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은 전 교회에 주어진 위임이다.?복음이 세상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복음의 축복을 만방에 그리고 만인에게 전해야 한다.35)
1968년 제4차 웁살라 총회도 복음전도의 필수성을 언급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계의 수억의 사람들에게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36)1975년 제5차 나이로비 총회는 복음전도의 책임을 지적한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우리만 알고 있을 선택권이 없다. 전파되지 않는 복음은 명백한 자체 모순이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전파할 사명이 있다.”37) 여기서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사죄와 하나님과의 화목 및 영생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드러난다. 복음은 “죄사함을 가져다 줌으로써 우리를 창조주와 화목시키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기쁨에 불을 당기며 영생을 약속한다.” 복음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복음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와 사랑, 은혜와 죄사함, 회개하고 그 분을 믿을 것에로의 초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교제하라는 명령,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증거하라는?명령,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책임. . . .”38)
1982년에 CWME가 작성한 문서인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적 확언”는 선교와 전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교회가 수행해 온 선교의 역사는 계속되어야 한다.”39)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빚진 자들이다.”40) “예수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 .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나누는 일”은 여기서 “교회의 본질적 일”로 규정된다.41) 특히 교회의 사명이 사람들을 회개, 사죄, 하나님과의 화해로 이끄는 것이라는 “확언”의 진술은 아주 복음주의적이다. 교회가 세상으로 부름받은 목적은 “사람과 민족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고, 나아가 하나님과 이웃으로 더불어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42)
2000년에 발표된 “일치를 향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는 1982년의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적 확언”을 보완한 것이다.43) 비교적 최근의 WCC 선교관을 보여 주는 그 글에서도 전통적 선교 및 전도관이 드러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초대해야 한다.
이 문서에서도 전도와 선교의 사명은 명백히 강조된다. 또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 . .”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아 멀거나 가깝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지역에 사는 우리의 이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탁한다.”44) “교회는 열방의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과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선포하라고 세상에 파송되었다.”45)
교회의 사회정치적 책임에 대한 강조
복음주의 교회들의 강조점과 구별되는 WCC의 중요한 관심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 수행이다. WCC는 제1차 총회 때부터 “책임 사회”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책임 사회란, “자유가 정의와 공공 질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들의 사회”요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쥔 자들이 그들의 권력 행사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회”였다.46) WCC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제2차 대전 직후인 1948년에 창립된 단체에게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출범 때부터 그것은 반전주의적이었다. 총회 선언문은 명백한 어조로 선언했다. “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및 본과 양립될 수 없다.”47) 특히 WCC는 핵무기 등 대량 살상 무기의 사용에 반대하고 군축을 주장했다. 제2차 총회 제4분과 보고서는, “모든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정부에게 무기를 제한하고 군비 축소를 진전시킬 수 있는 수단들을 인내하며 꾸준히 찾도록 간곡히 설득해야 한다.”고 권고한다48)
WCC는 일찍이 1954년 제2차 총회의 제6분과 보고서를 통해 기독교를 사적 관심사로만 환원하는 교회들을 비판했다. “교회가 여전히 개인 책임의 윤리만을 다루고 있고 집단 책임의 윤리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49) “교회의 예배는 교회가 처해 있는 사회의 총체적 삶과 분명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 . 교회가 지역 사회를 괴롭히는 현실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50) 동 보고서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선지자적 책임을 강조했다. “. . . 기독교 공동체는 국가를 위한 양심으로 행동해야만 하며 권력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들의 권력 사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51)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1991년의 캔버라 총회도 그리스도인들의 현세적 책임을 선언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새로운 형태의 선교로서 복음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경제, 사회, 정치적 구조들에 도전해야 한다.”52) WCC는 그리스도인의 정치 활동을 권장한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정당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다. “기독교인은. . . 사회적 병폐들과 싸우는 데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정당 내에서 일해야 한다.”53)
그러나 WCC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적이 정치적 좌익과 우익 모두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양 진영에서 투쟁하는 자유의 세력들을 강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54) 제2차 WCC 총회 제3분과 보고서는, “상이한 체제들이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그리스도인들이] 기여”할 것을 권장한다. 한국의 보수 교회는 50년대 말 WCC가 ?“용공”이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1937년 옥스퍼드의 “삶과 일”(Work and Life) 대회 때부터 기독교 신앙과 마르크스주의 및 전체주의 사이에는 여러 갈등의 요소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1954년의 WCC 제2차 대회도 그것을 재확인했다.55) 총회 보고서의 표현들은 WCC가 친공적이라는 주장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산주의의 확산은 사회 불의에 대한 무관심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며 교회도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56) “사회적 영적 건강이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이라는 것이다.57)
WCC는 교회가 경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4년 제2차 WCC 총회 제3분과 보고서는, 교회가 경제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하나님이 경제 활동의 존재 목적이 되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58) 이 보고서는 사회 복지에도 관심을 표명하여 그리스도인의 의무들 중 하나는 “국가적, 지방적 복지 증진 입법을 위해, 또 적절한 의료 보호 혜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 주장했다.59) 많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비기독교적이라 반대한다. 그러나 WCC는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긍정적이다. “노사간 협력을 증가시키는 책임있는 노동 조합들의 역할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60) 평신도들은 “노동 조합, 농민 단체, 전문 직업 단체 등을 통해 전통적으로 교회 일 (church work)이라 인정되는 일 속에서만큼이나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61) WCC는 고용 문제도 교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은 인간의 삶을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도이므로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62)?
WCC는 국제 문제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책임 수행을 촉구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1983년 벤쿠버 총회는 경제의 양극화 현상과 그것을 초래하는 군비 경쟁을 비판했다. 1968년 웁살라 총회 보고서는 국가 간의 경제 정의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1961년 뉴델리 총회는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복음 증거의 일부로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에 의하면, 인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1975년 WCC 총회 보고서는 이렇게 선언했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과 눌림받는 자들이 그들의 완전한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가 교회 안팎에서 그들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도록 이끈다.”그러므로 “인권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근본적 응답”이다.63) 1975년 나이로비 총회에서는 특히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다. 인권 유린의 근원적 원인을 구조악으로 진단하기 때문이었다. WCC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이슈 중의 하나는 인종 차별에 관한 것이다. 1968년 웁살라 총회는 인종차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91년 총회는 성차별의 불의도 지적했다. 자연과 생태의 문제, 과학 기술과 윤리의 문제도 WCC의 관심사들 중 일부이다.
총회 보고서의 내용들을 근거로 평가할 때 WCC의 관심은 분명 복음 전도보다는 사회 윤리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전통 신학의 강조점들, 즉 인간의 죄,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십자가 대속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이신칭의, 종말의 심판, 내세의 영생 등, 소위 영혼의 구원에 대한 언급은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인상이다.
균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그러한 약점을 의식하기 때문인지 WCC가 발표한 문서들에는 자주 복음 전도와 사회적 행동 사이에 균형을 잡을 필요성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에큐메니칼적 확언”에서 CWME는 양자 사이의 “해묵은 이분법”을 극복하고 균형을 잡을 것을 강조한다. “영적 복음”과 “물질적 복음”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뢰와 관련된 이중의 검증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즉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제시하지 않는 선포는 복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향하지 않으면서 정의를?향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 역시 복음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일이다.64)
이미 1948년 WCC 창립 총회의 분과 보고서에서도 양자 사이의 균형을 취할 필요성이 인정된다. 개별적 그리스도인들도 양자를 다 행해야 하는데 그들은 “배고프고 집없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65) 그러므로 적어도 ?그 초기에 있어, WCC는 복음 전도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3차 총회의 제1분과 보고서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고 그리스도가 명한 바를 실천하지 않는 교회에 대해 이 세상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66)
WCC가 이해하는 복음 전파는 말과 행동 양자를 통한 것이다. 단순히 말하는 것(speaking)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이 실천, 혹은 “삶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변의 상황은 가난한 데 우리가 풍요하다면, 또 불의와 고통이 있는데 우리가 이에 무관심하다면” 기독교 전도는 “침묵보다 못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구현되기까지는 진정으로 선포된 적이 없다.”67)
1975년 WCC 제5차 나이로비 총회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행동 양자 모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동시에 우리는 평화와 정의, 그리고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사회 구석 구석에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명령받았다.” 다른 말로, 그것은 신앙고백과 제자도의 실천 양자를 모두 강조했다. “그리스도를 분명히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제자됨은 인정받을 수 없다.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는 제자도(costly dischipliship)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고백을 믿기를 주저할 것이다.”68) 다음과 같은 지적을 오늘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변화가 따르지 않는 값싼 회심을 개탄한다. 우리는 피상적인 ?복음 선포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서 제자가 되라는 요구가 없는 공허한 복음을 개탄한다.”69)
이 무렵 WCC의 공식적 입장은 구원을 단지 사회정치적 차원으로만 해석하는 사회 복음 일변도에 찬성하지 않았다. “자유하게 됨을 개인적 영생의 차원으로 국한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죄와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사회적 정치적 차원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유감으로 생각한다.”70)
1983년 제6차 뱅쿠버 총회에서도 전도에 있어 말과 행동 사이의 균형이 강조되었다. 제1분과 보고서가 그것을 잘 표현한다.
가난한 자들과 복음을 나누는 사명은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며, 우리 는 그것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복음은 말과 행동 모두로 ?선포되어야 한다. 섬김 없는 말씀은 공허하고 말씀 없는 섬김은 힘이 ?없다. 오늘날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증거해야 하는 사명을 통해 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행동 간의 오랜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법을 새 로이 터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 영적인 ?복음과 물질적 복음 모두가 하나로 된다.
1989년 미국의 산 안토니오(San Antonio) 세계선교대회도 증거와 봉사 사이의 균형을 확인했다. “예수의 사역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물질적 복음’과 ‘영적 복음’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연대solidarity없이 전도evangelism할 수 없으며,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소식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 연대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71) 2000년 CWME의 문서 “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에서도 “통전적이고 균형잡힌 접근”을 강조된다. “정통적 전도는 언제나 증거와 무조건적 사랑의 봉사를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었다.72) 그러나 복음 전도와 사회적 행동 사이의 균형에 대한 이러한 잦은 강조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것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한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WCC 선교 신학의 장점들
WCC의 선교 신학에는 복음주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사회 윤리에 대한 WCC의 강조는 주로 피안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복음주의의 이원론적 경향을 보완해 준다. 복음주의자들은 영혼 구원과 전도를 일차적으로 강조하다 보니 현세에서의 책임있는 삶에 대한 강조가 약하다. 인권, 정의, 자유, 인간의 평등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탈사회적, 몰역사적, 현실도피적인 경향을 띤다. 그러면서 그것을 거룩과 참된 영성으로 오해한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개인주의, 추상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거룩, 몇 가지 소시민적 개인 윤리에 대한 충실, 양심을 무마하는 차원의 자선을 진정한 경건의 본질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WCC 제1차 총회 제3분과 보고서가 그것을 지적한다. “교회는 메시지나 자신들의 책임에 있어 자주 순전히 영적이거나 타계적인, 혹은 개인주의적 해석에 몰두” 하는 바람에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를 형성하는 세력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를테면, 교회는 산업화가 농경 사회의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흔히 간과했다.73) 복음주의자들은 현실과 유리될 위험, 교회를 게토화할 위험, 광신주의화 될 위험이 있다. 개인주의적 기독교는, 극단적 경우, 신비주의, 혹은 개인의 현세적 축복과 형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구복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것이 더 타락하면 미신이나 샤머니즘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사이비 종교, 혹은 유사 종교로 전락한다.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의 일부는, 대형교회, 중소형 교회 구분없이, 다소간에 그러한 조짐을 드러내어 왔다.
복음주의자들의 특징과 비견되는 에큐메니칼 기독교인들의 특징은 시야가 넓다는 것이다. 관심이 온통 개인과 교회, 심지어 개 교회에만 고정되어 있는 인상을 주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사회, 국가, 세계로 시선을 돌린다. 기독교 신앙의 적용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모든 문제가 기독교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주로 이해하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기독교의 공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발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복음이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 앞장선다. WCC 역대 총회들의 결정과 보고서들을 보면 그것이 상황(context), 즉 시대의 가장 중대한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기독교적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선명히 드러난다.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태, 인권, 가난, 정의, 평등, 자유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WCC는 시대와 세상에 대한 민감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주로 교회 내적이고 개인적 문제에만 집중하는 인상을 종종 풍기는 보수적 복음주의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과거의 진리를 고수할 필요성을 강조하다가 종종 시대와 문화에 낙후되어 시대착오적이 될 위험이 있다. WCC 제1차 총회 제2분과 보고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세계가 바라보는 교회는) 현대 생활을 지배하는 현실들과의 접촉을 대부분 상실해 버린 교회이며, 여전히 200년 전에나 적합했을 언어나 방법으로 현대 세계와 만나려고 하는 교회” 즉 “인간 상황의 현실들을 다루는 데 무능력해져 버린 교회”이다.74) 사회, 정치적 현실에 무관심하고 그 본질을 꿰뚤어 보는 선지자적 혜안이 부족하다 보니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은 종종 사회의 죄악된 기성 질서마저 보수하려는 퇴행적 모습을 보인다. WCC 제1차 총회의 제3분과 보고서가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 교회들은 종종 지배 계급, 인종, 그리고 정치 집단들의 특권에 대해 종교적 인가를 해 왔기 때문에 사회 정의와 정치적 자유라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변화에 장애물이 되어 왔다.”75)
WCC 신학의 강점들 중 하나는 사랑의 구체적이고 적극적 실천에 대한 강조이다. 영혼 구원의 복음 전도를 주로 강조하는 복음주의는 헬라 철학적 이원론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육신은 없고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심지어 육신은 멸시해야 할 대상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육신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인간의 육신적 고통에 대해서도 연민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약하다. 복음주의자들이 현세적 문제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관심은 주로 피안의 운명에 관한 문제에 있다. 현세의 상황을 외면하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개인적 거룩과 경건, 영혼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약점은, 에큐메니칼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언제까지나 수신제가만 하고 영원히 치국평천하는 시도조차 못하고 끝나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주로 개인적 사적 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구조악 혹은 사회적 모순, 혹은 공적 죄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약점을 가지는 반면 WCC 신학은 사회적 죄와 불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사회적 정의의 구현을 통한 약자의 권익 회복이라는 선행에 매진함으로 종종 현실도피적이 되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다. 만일 WCC가 전통적 선교 및 복음전도와 아울러 그러한 사회적 봉사에 열심이라면 그 선교관이 “통전적”이라 주장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
복음주의는 종종 좁은 의미의 종교만이 하나님의 관심사이고 인간 삶의 총체적 측면이 그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심지어 장로교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실현되게 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적 강조점을 망각하고 있다.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잃어 버리고 그를 단지 골목 대장, 즉 교회 울타리 안의 하나님으로 축소시키는 편협한 신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사도 요한이 경계한 바, 이웃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않고 단지 “말과 혀로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전통적 개혁주의의 위대한 유산들 중 하나인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상기해 준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포되어야 한다.”76) 그러한 의미에서 WCC가 제시하는 구원이 육체와 영혼, 공동체와 자연을 포함하는 “통전적 구원”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지 않다.77)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에 대한 WCC의 관심과 책임감은 온전한 신관을 회복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참된 신앙은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의 원리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명백한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여기서” 성경적 진리를 구현함이 없는 관념적 영성은 진정한 성경적 영성이라 할 수 없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없는 경건은 공허한 것이요 특히 개혁주의 전통의 주된 특징을 결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천과 행동을 강조하는 WCC의 신학은 성경과 개혁주의의 본질적 가르침들 중 하나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자비와 정의의 사역은 효과적 복음 전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선행의 봉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에 마음 문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들의 현실적인 고통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는 불신자들의 마음에 가 닿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의 사랑과 정의의 행동에 대한 강조는 복음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의 예비 단계로 사용될 수 있다. 즉 사회적 행동과 복음 전파는 상호 무관한 별개의 두 작업이 아니다.
WCC 선교 신학의 약점
WCC가 복음주의적 관심, 즉 내세와 영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죄와 용서 등의 전통적 신학의 주제들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WCC는 죄의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이라는 양면성을 다 언급한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죄”는 “지배와 의존의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의 모습, 그리고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기 때문이다.78)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WCC의 관심이 주로 현세적인 이슈들에 경도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 하나님 앞에 선 영혼의 개인적 죄의 심각성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를 통한 죄 문제의 해결이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강조점에 대해서는 다소 둔감하고 사회적 불의와 현세적 모순의 심각성, 그리고 그것의 시정을 통한 이웃 사랑의 긴박성이라는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친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자들은 WCC의 선교관이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관심보다는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더 중요시한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닌듯하다.79)
개인적 경건은 빈약하고 내면의 영성은 부실하면서도 사회적이고 외면적인 활동 위주로 치닫는 기독교에 수반되는 위험성은 사회는 구원하나 자신의 영혼은 위태로와지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 또 육신은 구원하나 영혼은 황폐해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는 거의 단절되는 경우, 혹은 사회 윤리에는 목청을 높이나 개인 윤리에는 문제가 많은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 단지 신앙 없는 사회 운동가나 혁명가와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진보적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가끔 국가, 민족, 인류, 정의, 자유, 평등, 인권 등에 관한 거대 담론에는 능하나 개인적 인격과 성품에 결함이 많은 사람들이 없지 않다. 민족과 국가라는 거창한 명분을 위해 몸바친 이들에게 사사로운 개인 윤리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내면적 경건이나 종교적 계율 따위는 무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영적 교만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수신제가는 생략하고 치국평천하만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이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과 개인의 내면적 수직적 관계에는 무관심하다는 복음주의자들의 비판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WCC의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
WCC와 관련하여 가장 큰 논란은 그것이 점점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에 관한 것이다. 혹자는 WCC가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WCC는 “어디에서도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거나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80) 과연 그러한가WCC의 공식 문서들을 근거로 타종교에 대한 WCC의 관점을 분석해 보자.
WCC의 어떤 문서에는 타종교에 대한 전통적 기독교의 입장,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 및 배타성을 지지하는 분명한 언급들이 종종 발견된다. 이를테면, 197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5차 WCC 총회 분과 보고서는 “그리스도만이 구주요 주님이라고 담대히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증인 (the one witness of God)이라 명시한다.81)
그러나 타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부터 WCC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1961년 뉴델리에서의 제3차 총회 제1분과 보고서는 “하나님이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증거하지 않은 채로 그들을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간의 대화를 촉구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또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과 그리스도에 대해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82)
1975년 WCC 총회의 일각에서 타종교에 대한 급진적 견해가 이미 대두되었다. 제3분과는 타 종교 및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논하면서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다 확대된 에큐메니즘”이라 묘사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당분간”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인들 사이의 대화로 국한하고 그보다 더 확대된 대화는 종교간 (inter-religious) 대화로 부르자고 결정했다.83)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타종교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다고 가정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종교에 관해 일반적으로 말해서는 안 되며 각 종교의 특수한 성격에 주의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84) 종교에도 고등 종교, 하등 종교 식의 수준 차이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필경 WCC 내의 보다 복음주의적인 회원 교회들의 영향력 때문이었겠지만, 타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WCC 내부에 오랫동안 의견 차이가 있었다.85) 1975년 WCC 총회 제1분과 보고서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다른 종교에 나타나고 있는지 아닌지, 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 . .”고 시인한다.8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수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는 점은 인정된다. “하나님은 어떤 세대, 어떤 사회에서도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하지 않은 채로 방치하지 않으셨다고 진정 믿는다.”87)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떻게 다양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1982년 WCC의 세계선교전도위원회(CWME)가 발표한 공식 문서인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적 확언”은 “아직 분명한 입장 정리를 못하고 있다”고 선언했다.88) 2000년에 CWME에 의해 발표된 “일치를 향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지지하는 에큐메니칼 진영”에서조차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사실 하나님이 어떤 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시인한다.89)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이 WCC 전체를 대변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90)
1983년의 제6차 밴쿠버 총회 제1분과 보고서는 전통적 전도에 대한 다소 사시적인 시각과 함께 타종교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에까지 이르는 전도 즉 순교의 경우는 일방통행적 전도의 극단적인 예”라고 비판하면서 타종교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에게로 향하는 “전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그것은 타종교 속에도 신적 계시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문을 연다.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의 출생,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독특성을 확신하고 있지만 동시에 타종교인들 가운데서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을 인정한다.”91) 그러나 WCC가 그러한 주장에 대한 뚜렷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00년의 CWME 문서인 “일치를 향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는 “사실 하나님이 어떤 종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92)
1989년 산안토니오에서 열린 WCC의 세계선교전도위원회는, 하나님이 타종교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그 구체적 방법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의 어떤 다른 길을 지적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한계를 설정할 수도 없다.”(cannot set limits to the saving power of God)93) WCC가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된 계기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주로 선교사들의 체험적 증언이었다. “하나님이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신다는 인식”이 선교사들 사이에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교 현장에서 토착민들을 접촉하다 보면 타종교인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희미한 섬광들’glimpses을 확실히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94)
WCC의 문서들 중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은 1990년 CWME에 의해 작성된 바르 선언(Baar Statement: Theological Perspective on Plurality) 이다. 이 선언을 통해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본격적으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 선언
선언은 먼저 종교적 현상의 보편성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항상, 그리고 모든 장소에서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God)의 임재와 활동에 반응했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증거했다.”(People have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responded to the presence and activity of God among them, and have given their witness to their encounters with the Living God.) 여기서 “사람들”이란 이교도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말을 대문자로 "God"이라 쓴 것을 보면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지칭함에 분명하다. 선언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로서 복수 종교들 속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셨다”고 확신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특정 종교에 제한된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활동”(God's saving activity)이 “어느 특정 대륙, 문화 형태, 혹은 집단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길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이고 개인적 헌신에 국한하는 신학 너머로 진행할 필요를 인정한다.” 바르 선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즉 타종교인들 사이에도 구원이 있음을 명백히 인정한다. “구원의 신비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중개된다. . . 그것은 그리스도의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선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다. 타 종교인들이 “그들을 지도하는 종교적 전통의 틀 안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신실하고 진실된 삶”을 살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언은 행위에 의해 자기 의를 이루는 율법주의적 면모를 드러내면서 명백히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바르 선언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요 인류의 아버지”라는 성경의 증언 때문에 타 종교들 속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창조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믿는다면 “전 세계의 여러 민족들과 백성들 속에서 발견되는 많은 다양한 종교적 증언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르 선언의 성경 해석은 자의적이고 비전문적이고 허점이 많다는 인상을 준다. 타종교인 혹은 불신자들에 대한 구원의 사례들을 제시하기 위해 그것은 고넬료와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非유대인들을 언급한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민족 너머에까지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WCC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 본문들에 나타난 로마의 백부장, 그리고 시리아-페니키아 여인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 본문들의 포인트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구사했다는 데 있다.
WCC의 CWME가 종교다원주의의 근거로 삼는 또 하나의 성구는 사도행전 14장 17절이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바르 선언은 이 본문을 “한 분 하나님이시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어디서도 증거(95) 없이 자신을 내 버려두시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본문이 과연 타 종교나 비기독교인들 속에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함의하는 것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 증거의 방식은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은 모든 인간의 육신적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든 인간에 대한 그의 선하심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그 정도의 “증거”에 의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는 이교도들이 구원을 추구하고 발견했다고 주장한다.95) 그리하여 바르 선언은 종교다원주의를 명백하고도 결정적으로 수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증거를 최대의 심각함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민족들과 백성들 속에 항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임재가 있어 왔음을 인정한다.”("We therefore take this witness with the utmost seriousness and acknowledge that among all the nations and peoples there has always been the saving presence of God."
성령의 역사의 성격
?WCC는 타 종교들 속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믿는다. 타종교인들의 “추구와 발견”(seeking and finding) 속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그들의 “가르침 속에 진리와 지혜, 그들의 삶 속에 사랑과 거룩이 있으며, 그것은 기독교 속에서 발견되는 지혜, 통찰, 지식, 이해, 사랑과 거룩과 다름 없는 “성령의 은사”라는 것이다. 타종교인들이 선한 일을 할 때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이 “정의와 해방을 위해 투쟁할 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
바르 선언은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에 속하는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의 열매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대화에 관한 지침들”(Guidelines on Dialogue, 1979)에 나타난 질문, “교회 밖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령의 견지에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한 일인가?”에 대해 문서는 긍정적으로 답한다. “성령 하나님이 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들 속에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태초에 흑암 중에 수면 위를 운행하셨던 성령께서 온 우주에 걸쳐, 그리고 천지 만물 모든 것 속에 역사하신다는 것은 성경적 진리이다. 칼빈은 인간의 자연적 재능과 지성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일반 은총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했다.96) 그러나 과연 성령 역사의 보편성이 구원이라는 특별 은총에까지 적용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바르 선언은 너무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WCC는 여러 종교들의 존재를 하나님의 역사의 산물로 본다. 세계의 종교들은 “하나님이 여러 백성들과 민족들에게 관계하신 많은 방식들의 결과”(the result of the manifold ways in which God has related to peoples and nations)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독교의 절대성, 최종성, 유일성은 부인되는 것이다.
CWME는 성령이 일하시는 방식의 불가해성과 그것의 지리적 보편성이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게 한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역사의 방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들에서도 성령이 일”하시므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발견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의 이 구절을 종교다원주의의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소개하는 문맥 속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에 관한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측량할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그것이 없는 곳에서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바르 선언은 성경의 자구는 인용하나 그 문맥은 무시하고 있다.
타종교에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WCC의 입장은 그 후에도 WCC 문서들 속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2000년 WCC의 CWME가 연구 문서로 채택한 “일치 속의 오늘의 선교와 전도”(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에 그러한 관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떤 제한을 둘 수 없다.” 자신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만을 체험하지만 하나님이 타 종교를 통해 구원을 이루실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동일한 문서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요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은 “겸손하고 품위 있는 자세”라 규정하면서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주장한다.
새로운 선교적 이해, 형태, 실천은 과거에 기독교를 전하던 교회로?하여금 기독교만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진리라 주장하면서 그 진리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거만한 자세를 포기하고,?자기의 주장이 다양한 종교나 전반적 창조 세계에서 발견되는?많은 진리들 중 하나라는 보다 겸손하고 품위 있는 자세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97)
?WCC의 이 문서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진리들도 비슷한 가치와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개인적 선택이 진리들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만들 뿐”이라 주장한다.98)
혹자는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자기들의 전유물인양 착각하고 자신들이 그것의 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아냥거린다. 2005년 아테네 선교 대회가 발표한 문서에 그러한 뉘앙스를 가진 표현이 나온다.
구원은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겸손히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속한 것이라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소유한 것이?아니라 거기에 참여하며, 우리가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증거할 뿐이다. 누가 구원을 받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결정하신다. 하나님이 구원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이 타종교 속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소유권이나 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단지 결정적 계시의 통로인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믿기에,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이나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성경의 그러한 계시에 근거해서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추론하는 것뿐이다.
혹자는 타종교 속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이 아직 알지 못하는 면에 대해 겸손하게 열린 자세를 취하는” 일이라 주장한다. “인간의 지식을 넘어선 구원에 관한 한 결정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99) 인간이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길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과연 전혀 알 수 없는가? 만일 성경이 그 점에 대해 전적으로 침묵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주제넘게 자신의 지식 영역 밖의 일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의 선언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일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는 다른 길은 없다는 성경의 선언을 존중하는 것과 그것을 무시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겸손”한 태도인가?
구원은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라는 명제는 참이다. 그러나 그 명제가 어떤 맥락에서 선언되는가가 중요하다. 사제나 교회에게 구원을 수여할 권리가 있다거나, 혹은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위한 공로를 이루는 것처럼 가르치는 중세 카톨릭적 전통을 부정하기 위한 종교개혁 전통의 맥락에서 선포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종교에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주기 위한 맥락에서 선포된 것인가?
2006년 2월 14일-23 사이에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되었던 제9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준비 문서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 “종교 다원주의와 기독교적 자기 이해”(Religious Plurality and Christian Self-Understanding)는 기존의 종교간 대화의 이해를 종합하면서 종교간 대화의 원리로 “손님 환대”(Hospitality)를 제시한다. 우리가 타종교인들과의 이러한 환대를 통한 만남에서 우리는 상호변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환대와 환영하는 태도는 상호변화와 심지어 화해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WCC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 평가
긍정적 측면
대화는 항상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종교간 대화도 상호 이해를 깊게 하고 복음 전도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전도자들은 피전도자들을 알아야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다. 타종교인들의 생각과 종교적 신념을 이해할 때 전도를 위한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신사적이며 진지한 대화의 기회라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고 영혼 구원이라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얼마든지 환영해야 한다. 더군다나 전 세계에서 종교간의 분쟁과 갈등이 심지어 전쟁을 유발하고 있는 현대의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의 위험을 줄이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존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다. WCC가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인류의 보편적 선을 위한 종교간의 협력도 얼마든지 환영해야 한다. 사랑, 선행, 인권, 정의, 평화, 자유 등 인류 보편의 가치 실현을 위해 타종교와 협력하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이다.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동일한 신념을 가진 종교인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에 협력하자는 제안까지 거부하는 것은 거룩이 아니라 편협성과 폐쇄성의 표현일 뿐이다. 민주주의, 환경과 생태 보호를 위한 분투에는 심지어 불신자들과도 협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치요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중해야 할 필요성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 외의 다른 구원의 길을 부정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는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전서 3:10-11).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여러 사도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선언을 단지 “인간의 제한된 신학적 인식이나 신앙고백”이라 제껴 버릴 수 있을까이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내용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고백을 표현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100)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의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다. 과연 성경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선언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그 사실의 선포에 바로 이어 성경은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뚫어 줄 구원자가 여럿이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을 부정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4-5). 사도 바울의 이러한 언명 속에는 “익명의 그리스도”니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 등의 가설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성경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비밀”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엡3:1-5)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임을 명백히 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3:5-6).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구원의 계시가 어떤 이방인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같은 신을 섬긴다?
신중심적 모델을 통해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결국 모든 종교들이 섬기는 신은 동일한 “궁극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생각은 다르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5-6).
바로 앞 구절에서 바울은 여러 종교들이 섬기는 신들을 “우상”으로 묘사한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만일 어떤 종교든 결국은 같은 신을 섬기는 것이며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 . ”(행17:23) 만일 모든 종교의 신들이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면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살던 아데네인들을 향해 바울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오 “천지의 주재”시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이”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행17:30)고 명하셨다고 외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에베소인들은 “온 아시아와 천하”가 아데미 여신의 “위엄”을 위한다고 주장했다(행19:27). 그것을 보면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에베소의 종교는 시시한 군소 종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의 에베소인들을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하나님도 소망도 없는” 자들이었다고 규정하고 예수를 믿은 후에야 비로소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자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고 선언한다(엡3장). 만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바울이 아데미 여신을 그처럼 열렬히 숭상하던 에베소 사람들에게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3:8)을 전하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쓸 정도의 고난을(행19장) 감수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름이 중요하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라고 주장한다. 즉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 외의 다른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타종교들 속에 그런 메시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많은 그리스도들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 “그 이름”은 모든 “다른 이름”을 부정하는 유일한 독보적 이름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1-12).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지상의(SUPREME)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 . . .(빌2:9-11)
2000년 전 나사렛이라는 시공간 속에 살았던 예수가 유일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는 예수뿐이다.
나사렛 예수가 인류의 구주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존재와 생애 때문이다.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만유의 “주”로 높이신 것은 이유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 삼위 중의 한 분이셨던 그의 성육신과 자기 부인, 겸손한 낮아지심,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까지 감수하신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 때문이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인정은 필연적으로 기독교 선교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논리적 결과이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굳이 멀리 이방인들에게 가서 많은 어려움과 희생을 감내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타종교들도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유주의 진영의 교회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의 수는 이미 많이 줄었다는 통계가 보고되고 있다.101)
전지구적 복음 전파에의 명령
종교다원주의에 의하면 각 민족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와 믿는 신을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으므로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필요도 없다. 그들의 종교 속에도 구원을 위한 계시와 기독교의 하나님과 궁극적으로 동일한 신적 존재가 충분히 나타나 있으므로 굳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WCC 헌장이 “하나님”으로 그 신성을 인정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에게 예외없이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하셨다. 그들이 기존 종교를 갖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상관없이 그는 사도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다른 어떤 신이라 주장하는 존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마28:19-20). 예수 그리스도가 쓸데없는 명령을 하신 것인가필수적이지도 않은 일을 위해 제자들이 엄청난 수고를 감당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방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인가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전도와 선교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여 우주적이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복음서의 권위를 믿는다면, 그리고 마가복음의 이 구절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임을 믿는다면 “온 천하”와 “만민”이라는 단어를, “기존 고등 종교가 있는 인도, 중국, 일본, 한국 등의 이교 지역과 그것을 이미 믿는 이방 종교인들은 제외한” 나머지 지역과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로 자의적으로 할인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복음 전파와 선교는 거짓 종교와 거짓 신들을 버리고 참 신이신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초청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그 도시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라 생각하여 두 사람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달려 왔다. 그 때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제우스 등의 우상을 섬기는 그런 허망한 일을 청산하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라 외쳤다.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 모든 종교의 배후에 참 신이 있다면 바울이 행한 것과 같은 목숨을 건 복음 전파는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만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계시가 드러난 이후 거짓 종교를 버리고 참 종교로 돌아오라는 회개에의 명령은 이교도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이라 선언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칼빈의 입장
종교개혁자 칼빈은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단호히 부정했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신 성품에 대한 지식과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그는 전면 부인한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중보자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지식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했다.”103)
. . .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떠나서는 결코 옛 백성들에게 자비를 보이신 일도 없고, 그들에게 은혜에 대한 소망을?주신 일도 없다. 율법에 나타나 있는 희생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가 시행하는 속죄 이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신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 . . 교회의 복되고 기쁜 상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한다.104)
칼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필수적이라 주장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구원 얻는 지식이 설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다.”105)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2)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가 모든 이방의 종교들을 거짓된 것으로 정죄하신 동시에, 율법 아래에서 구속주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약속되신 이유를 제시”하셨다고 보았다.106) 그리하여 칼빈은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이방 종교들이 우상숭배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때 자기들이 천지를 지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자랑했으나, 그들에게 중보자가 없었기에,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참으로 맛보지도 못하고, 그리하여 그가 과연 자기들의 아버지이심을 납득하지도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로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덧없이 사라져 가는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 것이다. . . . 오늘날 이슬람교도들 역시, 천지의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힘차게 외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결국 참되신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올려 놓고 그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107)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가 소개되기 전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적이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의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도인 말씀의 선포”가 이방인들에게는 베풀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칼빈이 보기에, 이스라엘 외의 모든 민족들은 그리스도 이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108)
한국 신학교에 타종교에 대한 교과목 개설의 필요성
한국 보수장로교회들은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에 대해 그것이 타종교에 대한 전통적 기독교의 인식이나 성경의 계시와 다르니 들어 볼 필요도 없이 틀렸다고 외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논리와 사상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분석한 후 그것에 대해 학적이고 이론적인 반론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최소한 자기 민족의 전통 종교들에 대한 철저하고도 진지한 연구를 통해 그것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기독교 관점에서 그것들을 평가해야 한다. 수천 년간 불교 유교 도교 등 이교들을 믿고 그 영향 하에 살아오고 문화를 형성한 민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 하는 이들이 그 종교들을 전혀 연구하지도 않고 그것들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인식도 없이 단지 일방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한국 신학교들의 교과 과정에 타종교를 가르치는 과목이 필수적으로 개설되어야 한다. 천 년 이상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였던 서양 국가들의 신학교 교과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여 신학교 교과과정을 작성한 결과 3년간의 한국 신학 교육 과정에 세계의 주요 종교들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전달하는 과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타종교에 대한 초보적 인식도 없이 단지 타종교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태도는 호소력을 가지고 청중들에게 부딪힐 수 없다. 한국의 모든 목회자 후보생들은 좀더 냉정하고 학문적인 근거 위에서 타종교를 평가하는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천, 법정 스님의 입적 등으로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주요 종교들의 위상과 이미지가 크게 재고되고 있는 시대에 개신교가 진지한 학문적 객관적 근거의 제시 없이 타종교를 폄하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기독교회가 독선적 집단이라는 인상을 주어 전도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렇쟎아도 악화되어 있는 개신교의 대국민적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일일 뿐이다.
한국의 장로교 신학교들과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전통 종교를 비롯하여 세계 종교들을 연구 분석 평가할 뿐 아니라 그 연구 결과를 목사 후보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타종교의 교리와 실천, 그 역사적 열매들이 무엇인지 평가하고 그 장단점을 소개해야 하며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에는 왜 구원이 없는지 설득력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을 살피고 그 문제점과 약점들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교회는 WCC의 장점과 약점, 빛과 그림자, 그리고 공과를 정직하고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건, 그것의 장점은 외면하고 단점만 선전하는 것은 덕을 세우는 방식도 아니고 성경적 태도도 아니다.
개인에 대해서이든 집단에 대해서이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자 중 한 쪽 측면만을 부각시켜 말하는 것은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제3자들의 의심을 부추길 뿐이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신뢰를 얻는 길도 아니고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길도 못 되며 심지어 그들의 주의를 끄는 방식도 못 된다. 단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반발만 초래하는 일, 즉 감정적이고 미성숙한 자들의 전형적 행동이라는 멸시만 당하게 하는 태도이다.
WCC의 교회일치적 강조와 관련하여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귀담아 들을 측면이 있다.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된 개탄스러운 상태 회개해야 한다. 장차 한국 교회가 무너지면 가장 큰 이유는 교단 난립의 폐해 때문일 것.
오래 묵은 논쟁
에큐메니칼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의 논쟁의 본질은 상당 부분 결국 정통적 교리와 정통적 실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믿음과 행위, 칭의와 성화, 사이의 오래 묵은 논란의 일부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을 공격할 때 아마도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이용하여 그들이 신약 성경의 유대인들처럼 율법 행위에 의한 구원을 추구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대한 개인적 믿음이 없이 사회 정의의 구현을 통한 선행만 강조하는 것은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단순한 박애주의요 기껏해야 세상 윤리와 도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 에큐메니칼주의자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야고보서를 이용하여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따라서 그 믿음은 가짜라고 비판할 것이다. 형제가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여유있는 물질로 돕지 않는다든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도 요한에 의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양자 모두 맞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정상화가 인간들과의 수평적 관계의 개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거나, 반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및 자신의 내면적 영혼의 상태에 무관심한 것이나 불건전하고 의심스러운 영성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느 쪽이든 극단으로 흐를 때 그만큼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현재로서는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 모두 강조점과 관심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 쪽 측면에 대한 무관심과 미약한 실천은 기독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양 진영 모두 자신들의 취약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 상대방에게서 통찰력을 얻어야 한다.
대계명과 대위임령은 하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과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크냐?” 하는 우스꽝스러운 논쟁을 벌인다. 심지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색하게 하는 것인양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대립시키기도 한다. 복음주의자들은 “대위임령”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사명, 즉 “지상의 명령”이라 생각한다. 반면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대계명” 야말로 “가장 크고 으뜸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과 그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영혼의 영원한 운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믿지 않는 내적 상태의 증거일 것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이 있다면 이웃의 육신적 고통을 포함한 모든 궁지에 대해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이웃의 영혼과 육신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그 양자 모두의 복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온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작업을 한다고 하면서 그 제자의 문제와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두 가지 함께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다. 그리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고자 하게 되어 있다. 대위임령과 대계명은 근본적으로 하나이다.
양극단의 극복
고무적인 것은, 1974년의 로잔 대회 이후 세계 복음주의권에서도 “통전적(holistic) 전도”의 개념이 성경적으로 가장 건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1990년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로잔국제대회가 그것을 선언했다. “진정한 복음은 사랑의 봉사로 가시화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때 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 . 우리는 말씀과 행위의 통전을 위해 부름받았다.” 물론,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그보다 일찍 그러한 개념이 정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아직도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 수행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많다. 신학 교육의 부실 탓일 것이다. 한편 에큐메니칼 진영의 일부는 머리로는 “통전적 전도”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사회정치적, 혹은 현세적 이슈의 해결에만 치중하는 인상이 있다. 머리로 알고 입으로 고백하는 바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주의는 윤리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만 죄짓지 않으면 되지 뭐. . . ” 하는 사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죄에 대한 개인주의적 이해에 치우쳐 개인 윤리에만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즉 욕설, 도박, 탐식, 탐욕, 간음, 도적질, 거짓말, 게으름, 시기, 교만, 미움 등 개인적 죄만 피하면 영성과 성결, 경건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개인적 경건과 성결과 개인 윤리, 즉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는 소홀히하고 오직 사회적 죄와 불의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을 집중한다. 소위 공공 윤리, 혹은 사회 윤리에만 관심을 가져 공공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 행하고 다른 한 가지를 등한히하는 것은 불건전한 신학이다. 양자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양자 모두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신앙의 공적 측면, 즉 사회 윤리에 대한 관심을 보강해야 한다. 반면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신앙의 개인적 측면에 대한 관심을 회복 내지 강화해야 한다. 이미 20년 전에 전호진 박사가 그 필요성을 잘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교회에 이 점에 관한 한 별다른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109)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신학은 “양극화”를 지양해야 한다. 양자 모두 개인과 사회, 개인적 죄와 사회적 죄, 개인적 변화와 사회 개혁,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 양자 중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자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the unreached people)에 집중하고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the under-previleged people)에 치중한다. 양자 모두 균형과 보완이 필요하다. 다행히 로잔 대회와 마닐라 대회 이후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적 책임을 보강하는 쪽으로,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은 개인 전도를 보강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선교 신학에 있어 양자의 간격이 좁아지고 공통 분모가 늘어났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복음의 개인적, 영적 차원에, 복음주의는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 좀 더 관심을 강화해야 한다.110)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적 죄에만 주목하지 말고 죄의 사회적 측면, 즉 구조악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 사회를 위한 시각만으로는 산업화 시대를 넘어 정보화 시대에 들어선 21세기에 유용성을 가질 수는 없다. 한편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은 죄의 개인적 차원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모든 문제가 구조와 제도와 사회와 환경에 있다는 식으로 “책임 전가”를 하고 있다. 물론 환경과 사회와 문화, 즉 구조에도 죄는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죄악에 대한 기독교적 대처가 필요하다. 그 점에서 에큐메니칼의 기여는 분명 인정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국가들 중 민주화와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해마지 않는다. 그러한 성과를 더욱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일수록 지난 반 세기동안의 한국 역사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그리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이 집권자들이 국가를 위해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한 대통령이었다고 찬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두 가지 중 한 가지인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사실상 주로 정의와 인권 문제에 헌신했던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칼적 인사들의 노력과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과 부패라는 기독교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믿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어떤 극단적이고 자유주의적 일부는 자신들이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를 부정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성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오직 선할 뿐이며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잘못된 사회 환경과 제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인식이다. 사회악이 실재하는 것 못지 않게 개인적 악도 엄존한다. 사회가 병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인간의 본성이 병들어 있다. 사회를 치유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치유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의롭게하고 화해시키는 일이 긴요하지만 그와 함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한다. 즉 수평적 관계뿐 아니라 수직적 관계도 그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상호 매도의 중지
분명한 학문적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어떤 신학과 경향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고 건전한 일이다. 건설적이고 신사적인 평가와 지적은 그 대상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111) 그들에게 자성과 반성을 통한 궤도 수정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단지 강조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뿐이라면, 그것을 두고 상대를 전면 부정하고 전적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WCC 전도론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은 그것이 사회 정의 쪽으로 치우쳤다는 이유로 에큐메니칼 전도에는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는데 WCC 회원 교회들 가운데 일부나 거기에 속한 일부 인사들에게는 그 말이 해당될지 모르나 그것을 WCC 회원 교회 전부 혹은 다수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비록 WCC의 관심이나 실천이 사회적 책임 수행 방향으로 경도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러한 비난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오직 영혼 구원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비판과 마찬가지로 공정하지 못하다. 복음주의자들이 비록 영혼 구원 쪽으로 치우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나 사회적 관심이 전혀 없다거나 그 방면으로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다는 비난은 공정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이름으로 개인의 영적 구원에 치중하는 집단들이 있었고 사회의 변혁과 정의 구현에 주력하는 집단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 종합적으로 볼 때 그 어느 것도 없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기독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자 모두 나머지 한쪽을 보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저자가 멜버른 회의에서 WCC에 의해 거듭 확언되었다고 소개한 것처럼, “사회에의 참여 없이 복음 전도란 있을 수 없으며, 또 복음 전도 없이 기독교의 사회 참여도 있을 수 없다.”112)
WCC의 가치와 가변성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 기독교회들 최대의 모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상의 어떤 기독교 단체도 그처럼 세계 100여개 이상의 나라들에서 모인 수 백개의 교단들로 이루어진 것이 없다. 복음주의자들로만 이루어진 로잔 국제 대회가 있으나 그것은 WCC처럼 각국의 교회들을 회원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다. 또 WCC처럼 7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거의 한 세대에 한두 번 모이는 대회113)이며 WCC 같은 상설 기구를 갖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전 세계 기독교회들이 단합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을 때 전 세계의 회원 교회들에게 연락하여 공동의 보조를 취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길이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없다. 반면, WCC는 로잔위원회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상설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WCC는 설령 그것에 다소 교리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될 가치있는 기독교 단체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의를 위해 이 세계적 기독교 단체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진정으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열심을 가진 교단들과 기독교인들이라면 세계 최대의 기독교회 연합 기구인 WCC를 개혁해서 그것이 가진 잠재력을 긍정적이고 건전한 방향으로 활용하겠다는 적극적 목적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밖에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주도력을 발휘함으로 그것을 올바른 신학 노선으로 선도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WCC는 다양한 신학과 경향을 가진 교회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교황과 교황청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달리 WCC는 어떤 의미에서 임자가 없는 단체이다. 거기에는 단지 신학적으로 진보 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단들이 어우러져 있다. 따라서 WCC에는 공식적 신학이라는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의 권위와 삼위일체론을 인정한다는 것 외에는 상세한 신학 체계가 없다. 그러므로 신학적 분위기는 결국 영향력을 가진 회원 교회들이 끌어 가는 데로 끌려 가게 되어 있다.114) 여러 WCC 문서에서 그것이 느껴진다. 때에 따라 전통적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 때로는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 그리고 때로는 종교다원주의적 관심이 WCC 총회의 지배적인 주제들로 나타난다. 결국 그때 그때 목청이 큰 인물들의 목소리가 WCC의 입장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WCC의 신학이,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설적 주도권을 가진 교파나 교단이 없으므로 언제든지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교단들이 리더쉽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곳이라는 말이다. 물론 영향력은 어느 교회 단체에서나 그러하듯, 지적 영적 우월성과 인격적 성숙성 및 재정적 기여도에서 비롯된다.
가입과 회원 자격이 개방된 모든 모임이 그러하듯, 전 세계의 어느 교파나 교단이든 WCC에 들어가서 그것의 강조점과 심지어 신학적 분위기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에서 교회적 역량을 배양한 어떤 교파나 교단이든지 WCC가 특정 시점과 국면에서 어떤 비성경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소극적 태도에 머무르는 대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세계 최대의 기독교 단체인 WCC의 신학과 사업의 방향을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적극적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이 정말 자신들의 신학과 강조점의 건전성을 확신하고 그것에 자신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WCC에 들어가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 WCC의 이탈을 바로 잡는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을 검토할 수는 없을까? 당장 그 정도의 역할을 감당할 실력--신학적, 어학적, 인격적으로--이 구비되지 않았다면 장차 그러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와신상담, 절치부심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것은 어떨까? 그 일환으로 우선 WCC에 업저버로 참석하여 전 세계 최대 기독교 단체가 과연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파악함으로 그것에 대한 한국 교회의 최선의 대처 방안을 연구하는 것은 어떨까?
한국에서 WCC에 대한 논쟁이 처음 발생했던 1950년대에는, 당시의 어느 장로교 지도자가 WCC 가입을 반대하기 위해 자조적으로 인정했듯이, 한국 교회가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교세 면에서 세계 교회의 말석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한가이제는 반 세기 전의 한국 교회가 아니지 않은가? 한국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성장함으로 세계 기독교권에서 최고의 역동성을 보여 주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오순절 교회 등 거의 모든 교파마다 세계 최대의 교회들이 한국에 있다. 게다가 우리가 입버릇처럼 자랑하듯이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선교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신학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무수히 많은 신학도들이 미국, 유럽 등 신학이 가장 발달된 나라들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돌아와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도 수많은 신학생들이 전 세계 모든 신학교에 흩어져 공부하고 있다. 물론 아직 중세 때부터의 1000년 이상 신학 연구 역사를 가진 서양 교회에 비하면 우리의 신학 역사는 짧다. 그러나 앞으로 단기간 안에 얼마든지 그 간격을 좁힐 수 있다. 그리고 지난 1, 20년간 그 간격을 이미 많이 좁혀 왔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세계적 교회 기구들에 참여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기여도 해야 한다. 언제까지 화란의 조그만 교단인 31조파 집안 잔치와 같은 인상을 주는 ICRC 같은 작은 국제기구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학적 자유주의의 교회들은 이제 기독교회의 활동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에딘버러 국제선교사대회 (IMC) 100주년이라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가진 행사를 본 고장 스코틀란드 장로교회는 주최하기를 거부했다. 아마 그것을 개최할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 교회가 그 역사적 모임을 맡았다. 세계교회가 모인 거대한 단체인 WCC 예산이 한국의 조그만 장로교단 하나의 일년 예산보다 작다. 그 때문에 WCC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다. 이러한 형편에 한국의 복음적 교회들이 거기서 리더십을 맡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 즉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의 리더가 될 학문적 신학적 역량, 합리적 사고와 성숙한 인격, 정직성과 투명성이라는 도덕적 자질, 그리고 당장 국제회의를 인도하고 사회해 갈 지도자들의 언어 능력일 것이다.
한국 교회가 WCC에 속한 모든 교회들과 신자들을 완전한 불신자들로 이방인이나 이교도들로 보지 않는다면 외곽에서 욕만 할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말 WCC의 신학적 오류와 복음주의적 신학의 건전성을 확신한다면 불신자들과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러 가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는 형제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다.
주
1)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ed. Nicholas Lossy, Jose Migues Bonino, John S. Pobee, Tom F. Stransky, Geoffrey Wainwright, Pauline Webb (Geneva: WCC Publications, 1991), 412. ?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 교회란 본질적으로 불가시적이라 믿는 교회들을 그 회원권에서 배제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3)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이형기 역, 91.
4) 이 표현은 본래 “신앙과 직제에 관한 룬트회의” (Lun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에서 사용된 것이다.
5)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이형기 역, 89. ?
6)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252. 340.
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258.
8)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41.
9)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34-35. 셋째는, “의사 결정에 관한 공통된 방법과 권위있는 가르침에 대한 방법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하며 “분쟁의 세상에 치유의 빛을 던져 줄 수 있는 하나됨, 참여, 공동체적 책임감 같은 자질들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
10) Ibid.
11) Ibid.
12)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4.
13) Dictiona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254.
14) The First As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msterdam 1948, London, SCM Press, 1949, 217.
15) 《장로회 신학 대학교 100년사》, 368.
16) 박형룡,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 <신학지남> 제25권 1집 (1958년), 11. ?
1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3.
18)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50, 51.
19)『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08.
20)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이형기 역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34. ?
21)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0.
22)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7.
23)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4.
24)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05.
25)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0.
26)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08.
27) 박명수는 WCC가 “사적 영역에서의 복음 전파를 무시 혹은 축소”한다고 주장한다. “ WCC는 통전적 전도를 지향하지 않는다”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68-79.
28)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이형기 역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37.
29)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2
30)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8.
31)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10.
32)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03-4.
33)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82.
34)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81.
35) 그 축복의 구체적 내용으로는 “가난, 질병, 굶주림의 개선”과 “현대 대중 사회의 외로움을 덜어 주는 참된 교제”가 열거된다.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92.
36)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267.
3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34.
38)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35.
39)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61.
40)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62.
41)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30.
42)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30.
43) CWME는 그것을 연구 문서(study document)로 채택했다.
44)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43.
45) 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 14.
46) WCC 제2차 총회 제3분과 보고서,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18. ?
4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61. ?
48)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40. 1983년 벤쿠버 총회도 세계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이를테면 군비 축소를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
49)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68.
50)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19.
51)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19.
52)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513.
53)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69.
54)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27.
55) 1. 역사 속에서 인간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공산주의의 약속, 2. 유물론적, 결정론적 가르침이 기독교 인간관과 대립된다는 점, 3.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배타적이고 무조건적 충성을 공산당이 당원들에게 요구하는 점, 4.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는 공산주의자의 독재적 강제 정책들, 5. 적들을 다루는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방식들 등이 그것이다.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25-26.
56)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25.
5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31.
58)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22.
59) 여기서 우리는 미국 시카고의 진보적 개신교회 소속의 그리스도인인 오바마 대통령이 이번에 미국민 전체가 의료 보험 혜택을 받게 하는 정책을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걸고 추진했던 이유를 발견한다.
60)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24.
61)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69.
62)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69.
63)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76.
64)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56. ?
65) WCC 엮음,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67.
66)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83.
6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89.
68)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2, 324.
69)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4.
70)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5.
71) San Antonio Report 32.
72) “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 53. 여기서 문서는 선교와 전도를 구분한다. “선교”는 통전적인 것으로 “kerygma, diakonia, leiturgia, 기도 및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매일의 증거 martyria를 포함,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누는 포괄적 행위”인 반면, “전도”evangelism는 “선교가 가진 다른 측면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개인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과 제자직으로 초대하는 행위를 포함한 복음 전파에 노골적이고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 7.
73)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52.
74)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3.
75)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52.
76)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44.
77) 금주섭, “WCC는 구원의 통전성과 일치 속의 선교를 지향한다.”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87.
78)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30.
79) 박명수, 목회와 신학, 2010. 4월, 73.
80) 한국일은 “WCC는 어떤 문서에도 예수의 유일성을 상대화하거나 구원의 길을 다양하게 열어 놓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면서 단지 복음주의자들이 선교에서 “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전통적 방식”의 “증거”만을 선교라 생각하고서 대화를 시도하는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고 비판한다고 오히려 복음주의측을 책망한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WCC의 신학적 입장,”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61.
81)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1, 323.
82) 세계교회협의회엮음. 『역대총회종합보고서』, 187.
83)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53.
84)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55.
85)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187.
86)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6.
87)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326-27.
88)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WCC, 2005),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대한기독교서회, 2007), 62.
89)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35.
90)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35.
91) 『WCC 역대 총회 종합 보고서』, 429. 여기서 증거(witness)와 대화(dialogue)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증거는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리스도께 응답하도록 하는 활동과 말씀”이며, 대화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상호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92)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35.
93) San Antonio Report, 32; Salvador Report 62.
94) Mission and Evangelism in Unity Today, 59.
95) 그것은 “온전함” “계몽, 혹은 깨달음”(enlightenment), “신적 인도” “안식” “해방” 등의 용어로 표현된다.
96) 강요, II, ii, 12-17.
97) “일치를 통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138.
98) WCC,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 김동선 역, 『통전적 선교를 위한 신학과 실천』, 38.
99) 한국일,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WCC의 신학적 입장,”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64. ?
100) 한국일,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WCC의 신학적 입장,”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63.
102) 채수일, “세계교회협의회 제9차 세계대회,” 268.
101) 미국 NCC 해외선교분과에 속한 선교사 숫자가 1969년 8,279명이었는데 2009년에는 4,349명으로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안승오,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나타난 인간이해와 선교,”『신학과 목회』31집(2009). 296. WCC 재정도 축소되었다. 1999년 $4,930만이던 총수입이 2006년에는 $3,004만이 되어 7년 만에 무려 30% 가까이 감소했다.102).
103) 기독교 강요, II, vi, 1.
104) 기독교 강요, II, vi, 2.
105) 기독교 강요, II, vi, 4. "Apart from Christ the saving knowledge of God does not stand."
106) 기독교 강요, II, vi, 1.
107) 기독교 강요, II, vi, 4.
108) 강요, II, xi, 11.
109) 전호진 교수는 이러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WCC와 복음주의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한 영국의 존 스토트 같은 인물이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서광선 교수 발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입장,” 한국기독교학회 편, 『종교다원주의와 신학적 과제』 (대한기독교서회, 1990), 288.
110) 혹자는 이미 양 진영이 이미 개인 구원의 중요성,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나라 세 가지를 선교의 공동 기초로 공유하고 있다고 낙관하기도 한다. 금주섭, “WCC는 구원의 통전성과 일치 속의 선교를 지향한다.”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88.
111) 이를테면, WCC의 선교 신학에 대한 로잔 위원회의 비평, 특히 로잔 언약의 초안 작성자인 존 스토트의 비판은 WCC의 선교론 재고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WCC 측에서 인정한다. 금주섭, “WCC는 구원의 통전성과 일치 속의 선교를 지향한다.”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85-86.
112) 『세계교회협의회 40년사』
113) 1974년에 제1회 대회를 치른 후 16년 만인 1990년에 제2회 대회를 열었고 다시 20년 후인 2010년에 제3회 대회를 개최한다.
114) 한국일 교수가 그러한 WCC의 현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WCC에는 한 쪽으로 치우친 신학 입장에 대해 “견제 세력”이 있다. WCC의 어느 한 선교 대회나 총회에서 어느 한 입장이 득세하여 그것을 반영한 문서 내용이 공식적인 것으로 발표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한 편으로 치우쳤다는 비판적 반응이 일어나면 다음 대회에서 보완, 수정된 내용들이 발표될 여지가 있다. 한국일,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WCC의 신학적 입장,” 『목회와 신학』, 2010. 4월호, 65.
출처: https://edsorem.tistory.com/150?[교육, 사회,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