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에 나타난 능동적 순종 교리
한국장로교신학회(회장 박용규 교수) 제36회 온라인 학술발표회가 20일, 우병훈 교수(고신대)는 ‘교회사 속에 나타난 능동적 순종 교리: 교부시대부터 종교개혁기까지 중요 인물들을 중심으로’를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obedientia activa Christi)’이란 그리스도께서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을 뜻하고, 이와 짝이 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 Christi)’이란 그리스도께서 수난 가운데 그 어떤 저항도 없이 고통과 십자가를 감내하신 것을 뜻한다.
우병훈 교수는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신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측면을 지니고(요 10:18),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복종하신 것은 그의 수동적 순종의 측면을 보여준다(빌 2:7)”며 “17세기 이후 주류 개혁파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뿐 아니라, 능동적 순종이 이룬 의(義)가 신자에게 전가되고, 그 두 가지 순종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고 설명했다.
우 교수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중보자로서의 조건에 합당하게 되셨고, 그로 인해 이루신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보는 견해”라며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의 고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개신교 내에서 칭의론에 대한 논의와 함께 유기적으로 발전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있었다”며 “대표적으로 16세기 루터파 게오르크 카르크(Georg Karg, 1512-1576)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지닌 공로적 성격을 부인해서 논쟁이 됐다. 개혁파 내부에서는 16-17세기 요한네스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가 제기한 논쟁이 유명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논쟁은 오늘날의 스위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지로 퍼져 국제적인 화두가 되면서 여러 총회가 이 문제를 다뤘는데, 피스카토르의 지지자들도 있었지만 다수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의 의견을 반대했다”며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프리바 총회(Synod of Privas, 1612)와 토냉 총회(Synod of Tonneins, 1614), 그리고 네덜란드의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19)는 피스카토르를 반대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 역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긍정했다”고 전했다.
우병훈 교수는 “최근에도 논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와 다니엘 컬크(Daniel Kirk)는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신 것은 맞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자신이 속죄 사역을 행하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이들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이 재반박했다”며 “이들의 답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교리는 칭의론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우 교수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에 속하는 톰 라이트(N. T. Wright)와 제임스 던(James D. G. Dunn)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며 “라이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런 생각은 율법주의로 귀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라이트는 능동적 순종 개념도 거부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던 역시 예수께서는 안식일법 준수가 언약적 신실함과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했으며, 정결법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지니셨다고 주장한다”며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다고 보는 던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위와 같은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왔다. 물론 능동적 순종 혹은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 자체는 1560년대 이전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개념마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가르침과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가르침은 교부시대부터 종교개혁기까지 늘 있어왔다”고 강조했다.
우병훈 교수는 “주류 개혁파 신학에서 인정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의 특징적 요소는 두 가지인데,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출생부터 수난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루신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보는 것”이라며 “반대로 이 교리에 반대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두 가지인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대속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과,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수난만이 대속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 교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17세기에 볼 수 있는 발전된 형태로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이미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적어도 그 교리의 ‘맹아적 형태(embryonic form)’가 이미 교부시대부터 있었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점차 발전해 갔음은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며 교부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기 주요 신학자들의 입장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는 “2세기 교부 이레나이우스의 총괄갱신설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필수적이었음을 가르쳐 준다. 그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확장하고 성취하는 분이실 뿐 아니라, 성취하신 율법의 의들을 우리에게 심으신 분이시라고 주장한다”며 “4세기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이 율법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로고스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고,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율법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고 했다.
우 교수는 “5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갇힌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율법 아래 들어오셨고 율법과 함께 계시면서 율법의 성취자가 되셨다(갈 4:4-5)고 주장한다. 그의 ‘전체 그리스도’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신자들이 행한 일이 되기에,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신자들도 율법을 완성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중세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공로사상에 의해 왜곡되긴 했지만,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11세기 안셀무스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단지 십자가에만 국한돼선 안 되고, 오히려 전 생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안셀무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자들에게 구속적 효과를 발휘하는 순종이 된다”고 밝혔다.
12세기 베르나르두스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구원을 이뤄내시면서, 삶 가운데 수동적 행위를 가지셨고, 죽음 가운데 능동적 수난을 견뎌내셨다”고 설교했다. 17세기 능동적 순종 교리를 다뤘던 신학자들은 이 표현을 좋아했다. 베르나르두스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그에게 그러한 순종은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범으로만 작용하는 것이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 나기를 원하셨는데,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였다(갈 4:4-5). 또 ‘율법의 칭의(justificatio legis)’가 그의 지체들에게 영적으로 성취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신 일이 지니는 다양한 의미를 가르쳤다. 로마서 4장 25절에 대한 그의 설명은 17세기 개혁신학에서 ‘능동적 순종’ 교리를 지지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우 교수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3명의 중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공로주의적으로나 모범적으로만 해석했다”고 지적했다.
우병훈 교수는 “종교개혁기 신학자들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가르침은 교부들의 사상보다 구체적이면서, 중세 신학보다 더 성경적이었다”며 “루터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 때로 칭의의 근거가 된다고 볼 때도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여 각각이 우리를 위한 순종의 행위임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우 교수는 “특히 대(大) 『갈라디아서 주석』 갈라디아서 4장 5절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행하신 능동적 순종이 신자들의 공로가 된다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며 “‘아빠, 아버지(갈 4:6)’라는 표현에 대해,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이유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죄와 사망을 폐하시려 함이었다고 주석한다”고 했다.
칼빈은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롬 3:22 주석),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의를 가진 분으로 묘사하며(롬 3:31 주석), 그러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칭의가 일어나며 성화가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그는 『기독교 강요(2.12.3)』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따로 강조하고 있다(롬 5:12-21).
16세기에 우르시누스가 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해설』 중 제16문답 해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신 것과 형벌을 받으신 것이 각각 율법을 성취하신 것을 지시한다고 가르친다. 제60문답 해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현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우 교수는 “비록 이 해설에서 우르시누스가 일차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따른 의이긴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의가 된다고 사실도 역시 말하고 있다”며 “제60문답 해설의 파레우스 판 이전 버전에는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비록 17세기에 최종적으로 발전된 형태는 아닐지라도, 그 핵심적 요소들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주요한 신학자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며, 특히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 성경적이고 건실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정리했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3.21.) 기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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