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은 목사(왼편)
바람의 시작과 끝, 어느 것이 중생인가? (1)
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요3:8). 중생의 신비에 대해서, 성령님의 중생의 사역의 신비를 강조할 때, 이 구절을 흔히 떠올립니다. 옳은 일입니다. 그 신비는,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음도 또한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선가 바람이 왔다가 어디론가 간다는 것입니다. 곧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가 바람이 불지 않게 되는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시점과 바람이 그치는 시점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기도 합니다. 이 현상은 영적인 현상과 자연적인 현상이 공히 인정하는 바인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그 시점과 그 바람이 그치는 시점, 그 두 시점 중에서 어떤 ‘순간“을 중생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의 중생론은 중생이 ’순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교과서적인 책들에서 이 점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중생을 순간적으로 본다면, 어느 순간에, 곧 성령의 역사의 시작하는 순간인가? 아니면 그 성령의 역사가 그치는 순간인가? 하는 것입니다.
4.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어떤 사람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아니, 그 사람이 생명의 호흡을 그치고 나서도 영원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중생’이라는 것을 말할 때에는, 평생토록 계속되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의 어느 한 순간과 또 다른 한 순간 사이에 부는 성령의 바람, 임의로 불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 바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5. 중생을 어떤 권위나 전통에 의해서 사유하지 않고, 성경에 근거해서 상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진정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를 갖는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의 빛이 더하여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아니, 들어가는 축복도 누릴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손성은 목사 (페이스북 글, 2021년 3월 13일)
중생의 시점에 대한 영미청교도들과 화란신학에서의 견해 차이는 결코 종합될 수는 없는 것일까? (2)
1.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신 예수님, 가장 뛰어나신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중생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이 요한복음3장의 말씀입니다. 그 중간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절)고 하셨습니다.
2. 여기서,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라는 표현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 합니다. “...와서(에르케타이/ερχεται)...가는지(휘파게이/υπαγει)”에서 “에르케타이”와 “휘파게이”는 모두 미완료(imperfect)이지만, 태(voice)에 있어서는 차이가 납니다. “에르케타이”는 수동태거나 중간태이고, “휘파게이”는 능동태입니다(이 점에 대한 신학적 사유에 대해서는 디포넌트동사에 대한 문법의 형성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좀더 보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형태는 수동태/중간태인데 그 내용은 능동적이 되게 하는 헬라적 사유방식의 근원에 대한 검토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람이 분 시점과 바람이 그친 시점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도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3. 흥미로운 것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10장(유효적 부르심)의 2절은 성령의 중생의 사역, 곧 효력있는 부르심의 사역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효과적인 부르심은....성령에 의해서 깨워져서 새롭게 되기까지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로 있다가....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되어진다"(This effectual call is...in man, who is altogether passive therein...until being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he is thereby enabled to answer this call...). 전적으로 수동적이다가, 성령에 의하여 깨어나고 새롭게 되어서 이제는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is thereby enabled to answer)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깨어나고 새롭게 되었다고 해서 그리고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곧 바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곧, “he answer”라고 되어 있지 않고, “he is thereby enabled to answer”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4. 웨신의 효과적 부르심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죄인이 수동의 상태에 있다가, 능동의 상태로 바뀌는 것이, 요한복음3장의 중생자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바람같이 불어"오는 것과 "가는 것" 그 사이에 벌어집니다. 바람같은 성령님의 신묘한 역사는 죽어있는 영혼의 수동적 상태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성령(바람)의 역사하시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이러한 변화인 것입니다. 웨일즈복음주의신학교의 로버트 니썸(Robert Letham)교수는 [웨스트민스터총회의 역사](P&R,2014)라는 책에서, 이 유효적 소명을 설명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부르심에서의 두 단계를 가정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수동적인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들은 능동적으로 된다.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고 새로워졌기에, 그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복음 안에서 제공되는 은혜를 받아들인다”(p.421)라고 합니다.
5. 중요한 것은, 이 두 단계, 곧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인 상태로 변화되어 있는 기간이 얼마 동안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인 상태로 변화되자 마자, 부르심에 응답하여, 곧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능동적인 상태의 변화, 곧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곧 바로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주저하고 의심하고 혹은 반응을 미루게 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은, 아직 성경본문(요3장8절)이나 웨신(10장2절)에서 분명치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람이 부는 시점과 그치는 시점 그 사이가 순간적이지만은 않은 것처럼, 능동적으로 변화되었지만 능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다가 반응하게 되는 그 사이가 순간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믿음과 회개의 고투의 "과정"을 통해서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6. 이런 점들을 감안해보면, 합리적 특성을 강도하는 화란신학의 강조점(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가에 강조하는)과 경험적 특성을 강조하는 영미신학의 강조점(어디로 불어가는가에 강조하는)이 이 중생의 문제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두 특성을 종합해서 보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마땅한 바라고 하겠습니다.성경은 둘 모두를 계시하는데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외눈박이(사이클롭스)신학이 될 것입니다.
6.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달의 차고 기우는 역사도 신묘하기만 합니다.
이상은 손성은 목사의 "연속적 중생론, 연중론"의 핵심인 듯하다. 구원론이 다루는 구원의 서정(순서)은 시간적인 차례가 아니라 논리적인 구분이다. 중생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인 기적의 한 논리적인 측면이다. 개혁신학은 중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리포르만다>는 이 글을 게재함은 중생론에 대한 신학적 사고의 폭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할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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