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일치 신조 (1675), 헬베틱 신조
Formula Consensus Ecclesiarum Helveticarum Reformatarum
작성 : Johann Heinrich Heidegger(1675)
영역 : Martin I. Klauber(1990)
중역 : 박동인(2016)
제1조 : 최고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롬 1:16)”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되었을 당시부터 현재까지 말씀을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보존하신다. 그 말씀은 사탄의 궤계나 인간의 기만으로 인하여 오염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할(마 5:18)” “올바른 지혜의 말씀”과 “성경(딤후 3:15)”을 주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은혜와 선하심에 속해 있고, 세상 끝날까지 그래야만 한다(벧후 1:19).
제2조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롬 3:2)”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옴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구약의 히브리어 원전은, 단어(의 의미) 뿐만이 아니라 자음들과 모음들, 모음의 강조점(다게쉬)들 - 적어도 강조점의 설명력 - 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구약 원전은 신약 원전과 함께 우리 믿음과 생활의 유일하고도 온전한 법칙을 이룬다. 또한 시금석과도 같은 이러한 기준은 어느 곳을 막론하고 현존하는 다양한 역본들에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제3조 :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히브리어 원전이 오로지 인간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었다고 보고,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히브리어 독법을 70인역 및 다른 그리스어 판본, 사마리아 오경, 아람어 탈굼들, 또는 다른 자료들로부터 수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견해를 인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견해는 그들이 확보한 (구약) 히브리어 원전의 여러 판본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하고, 이성을 통해 이를 교정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구약) 히브리어 원전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다른 고대 역본들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이 전제하는) 이와 같은 역본들의 존재는 고대 (구약) 히브리어 원전들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성경의 권위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다.
제4조 : 하나님께서는 기쁘신 뜻대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원죄에 의하여 다함께 정죄된 인류 중 일부를 어떤 행위 또는 믿음에 대한 예견 없이 구별하여 건져내시기로 하고, 창조 이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셨다(엡 3:1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유일한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정확하고 분명한 수(數)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을 확실하게 지명하셔서 거듭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이시기로 결정하시고, 인간을 온전하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다만 타락한 이들 중 일부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으며 나머지는 부패하도록 남겨두어 영원한 멸망을 주기로 작정하셨다.
제5조 : 그리스도 자신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으셔서 은혜로운 결정에 포함되셨는데(벧전 2:4,6), 이는 선택에 앞선 공로의 원인으로서나 (만유의) 기초로서가 아닌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 선택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창세 전에 알리신 바 되셨으며, 선택하심의 첫 번째 필요조건으로서 (유일한) 중보이자 우리들의 맏형/오라버니로 선택되셨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로 결정하신 그리스도의 귀한 공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데에 필요한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어떠한 흠도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정이 이루어질(마 11:26; 엡 1:5,9) 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시겠다는 언약을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열정적인 사랑에 의해서도 예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증거한다.
제6조 :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다음 견해들에 동의할 수 없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박애라든지, 타락한 인류에 대한 이른바 조건적 의지를 드러내시는 특별한 사랑 또는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을 동기로 삼으셔서, 예를 들자면 그들이 믿는다는 조건 하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타락한 인류 모두와 개개인의 중보자로 삼으셨다는 견해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첫째 아담으로 인해 죄인으로 간주하시는 대신 둘째 아담을 통하여 구속받았다고 여기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구원하시는 선물인 믿음을 주시기로 결정하셨고, 이와 같은 결정만으로 인하여 소위 예정이 완성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들 및 이와 유사한 가르침들과 신적 예정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의 차이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도외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모든 개개인에게까지 미친다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는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될 뿐, 에서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름을 특정하기까지 영원히 미워하신 이들은 예정으로부터 배제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롬 9:11). 성경의 다른 부분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다(사 47:10; 시 115:3).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애정과 소망, 경솔한 회개와 회심 등 모든 인간의 결함으로부터 온전히 구별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보자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동일하며 (하나님의) 예정을 따르는 약속은 구원을 입은 자들에게는 빼앗기지 아니할 소유와 기업이 된다.
제7조 : 결국 하나님의 모든 일이 예로부터 알게 하심과 같이(행 15: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지혜, 선함, 영광을 따라 창조의 완성으로써 의로움, 명철함, 공의로우신 스스로의 형상을 본떠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행위 언약 아래 두셨으며, 인간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 은총, 생명을 (행위) 언약을 통하여 기꺼이 약속하셨다.
제8조 : 행위 언약에 따른 약속은 이 땅에서의 생명과 행복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온전히 순종한다면 얻게 될 것, 즉,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함께 하게 될 천국에서의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생명나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오셔서 율법의 권능과 요구를 정확하고 의롭게 이행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에서의 삶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신 바이기도 하다. 율법은 육적이고 영원한 사망(을 그 삯으로 삼음)으로 인해 인류를 위협한다.
제9조 : 따라서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조건을 따랐을 때에 하늘로부터의 복을 그 보상으로 받았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또한 행위 언약의 약속이 모든 면에 풍성하고 영원하며 완전한 본성 속에서 누리게 될 영육간의 생명과 지상 낙원에서의 기쁨에 대한 약속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건전한 판단에 위배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제10조 :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을 아담뿐만이 아닌 그로부터 난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셨다. 만약 아담이 선천적인 복된 선함을 계속 유지하였더라면, 인류는 아담과 동일한 온전함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담이 죄에 떨어지고 언약이 약속한 유업을 잃게 된 바, 이러한 상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육으로 난 모든 인류에게도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의 죄가 하나님의 기이하고도 공정한 심판에 의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됨을 인정한다. 사도(바울)는 “아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에 이르렀다(롬 5:12,19)”,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1-22상반)”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가 물려받은 어떠한 죄들에 따라 (영적) 사망의 벌이 야기되지 않는다면, 유전적 타락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의하여 온 인류에게 영적 사망과 같은 결과로 적용될 수 없다. 온 땅의 최고의 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만을 처벌하시기 때문이다.
제11조 : 인류는 어떤 (고범)죄를 범하기 이전에 자연적으로 그 출생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 노출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모든) 인류는 아담의 허리에 있을 때에 죄와 불순종을 저질렀으며, 둘째로 그 결과로 (모든)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 타락이 뿌리내렸으며, 이로 인하여 본성 모두가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이중으로 전가된 죄이자, (인류에) 내재하는 유전적인 죄이다.
제12조 : 따라서 아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류 모두를 대표하였으며 그의 죄가 즉시 그 후손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은 신적 진리에 대한 훼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접전가설은 원죄의 전가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유전적 타락의 교리를 큰 위험에 노출시킨다.
제13조 :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부터 예정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이들의 머리와 지도자와 주(主)가 되신 것와 같이, 영원부터의 예정과 그만의 의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 혈통, 그리고 상속자로 삼으신 이들에게만 새로운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정하신 계획과 뜻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끔찍한 죽음을 맞으셨고, 그 대신 하나님과 화해하고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품 안으로 인도되어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고(마 1:21), 그의 목숨을 자기 목소리를 듣는 많은 양들(마 10:27,28)의 대속물로 주셨으며(마 20:24,28; 요 10:15), 세상이 아닌 오직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지명하신 제사장으로서 탄원하시기 때문이다(요 17:9).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속받도록 예정받은 이들에게만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도록 계획하셨으며, 그들은 (예수의) 속죄의 희생을 따라,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로부터 의롭게 여김을 받았고(고후 5:17), 성령께서는 그들을 성화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살아있는 소망을 인치셨다. 온전한 조화 속에서 순종하시고 원만하게 (다른 삼위들과) 교통하심으로써 죽으신 그리스도의 뜻은 곧 성부의 예정하심과 성자의 구속, 그리고 성령의 성화이며, 이 (셋)들은 하나이고 동일하다.
제14조 : 나아가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자리에서 택하신 자들에게 구원의 수단을 제공하셨음과, 구원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중생(重生)시키시는 성령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믿음이라는 선물을 그들에게 제공하셨음을 드러낸다. 성경이 증거하듯이 주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오셨으며, 그 자신과 동일하신 중생시키시는 성령을 보내셨다(요 16:7,8).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이자 보증으로서 이루신 새 언약의 더 좋은 약속들 가운데 탁월한 점은 그 백성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믿음의 법을 기록하실 것이라는 점(히 8:10),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그 백성이 믿음으로써 확실히 받을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고 흠 없이 선택받았다는 점(엡 1:4-5)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인 우리의 존재는 오직 믿음과 중생시키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개선된다.
제15조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신 대신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속죄에서 의로움과 순종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평가 기준을 만족시키셨고, 그리스도께서 온 생애동안 율법의 기준에 맞추어 종과 같이 행하신 모든 일과 고통은 순종으로 부르기에 마땅한 것이었다.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생애는 순종, 겸손, 끊임없는 자기 비움,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스스로 낮아지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빌 2: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편에 서셔서 그의 지극히 거룩하신 삶을 통해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정의를 충족시키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뿐만 아니라 율법(의 기준)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대가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점을 성령께서는 분히 선언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고난을 통하여 완성하실 수 있었던 죽으심 또는 보혈이 우리를 구속하셨음도 (또한) 밝히셨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그 명칭에서 표현되는 최후의 확정적이고 복되지 않은 죽으심(의 과정)과 구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제16조 : 이 모든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그리스도께서 믿음이라는 조건을 갖춘 개인과 그들 모두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이었다는 (우리와) 반대되는 신조를 승인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셨지만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을 뿐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과 믿음을 개인에게 획득하게끔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였을 뿐이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다다를 수 있는 은혜의 새 언약으로 들어갈 자유를 얻게 하셨다는 가르침도 승인할 수 없다. 그들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의를 구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인 의를 그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반면 택하신 자들에게는 수동적인 의를 제공하고 전가하신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견해들 및 이와 유사한 견해들은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바와, 우리 믿음과 구원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배치된다. 그 견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효과 없는 것으로 만들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찬양을 실제로 약화시킨다.
제17조 :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그 정해진 때에 합당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은 때때로 더욱 제한되고(딤전 1:6), 때때로는 더욱 확장되고 보편화되었으나, 결코 완전히 일반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으며, 이스라엘에게 규례와 심판의 말씀을 내리셨으나 다른 나라들에게는 이와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다(시 147:19-20).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중간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졌으며,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외적 부르심이 전파되는 한계를 확장하셨고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차별을 더 이상 두지 않으심으로써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동일한 주가 되셨지만(롬 10:12-13), 이러한 부르심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이들을 부르셨지만(마 20:16), 이는 전부를 부르신 것은 아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 성령께서는 그들을 막으셨다(행 16:7). 그리고 그리스도를 소문으로도 들어보지 못한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제18조 :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한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거절한 이들에게도 증인을 보내주셨다(행 14:7).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긴 수고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늘과 별들을 증거로 보여주셨고(신 4:19), 자연의 작동과 섭리마저 그들에게 나타내셨다(롬 1:19). 그러나 자연의 작동과 하나님의 섭리들은 외적 부르심의 기능을 만족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한 기쁨과 자비의 신비를 그들에게 드러내신 것일 뿐이다. 사도(바울)가 곧 이어서 덧붙인 것과 같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이(롬 1:20)”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식들을 적확하게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변명의 여지없이 구원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는다.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다(마 11:25). 한편 사도(바울)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대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고 가르친 바 있다(엡 1:9).
제19조 : 복음 전파에 의한 외적 부르심은 신실하고 거짓 없이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극히 신실하고 진실하고 확실하게 밝히신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은 개개인의 구원과 멸망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책임과 의무를 순종하거나 외면할 경우 일어날 일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분명하게도, 이는 큰 구원을 외면하는 이들이 아닌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이들(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신실하게 약속하신다. 사도들이 선포하듯이, “우리가 주를 위해 죽었으면 또한 주와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께서도 또한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주께서는 자신을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에 항상 신실하시다. 이는 믿을 만한 말씀이다(딤후 2:11-13).” 이 부르심은 반드시 불순종한 이들에 대한 결과를 동반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의무의 본보기에 있어서까지 항상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그 뜻을 따라 자신의 책임을 다한 택하신 이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의무를 간과한 이들을 용납하실 수 없음 또한 그들 앞에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외부에서 제공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쓰인 바에 따라 믿음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결코 결정한 바 없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의 경륜을 따르는 모든 진리를 승인하시기 때문에(요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하지만 비록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를 어떤 경우에라도 보편적으로 참되게 의도하셨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제한적인 목적을 따라 택하신 자들에게 한정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선택 없는 보편적 구원을 계획하신 바 없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예정하심을 받은 이들을 위해서만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타락한 이들은 버림받는 반면, 택하신 자들만이 보편적으로 제공된 외적 부르심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의 차별적인 은혜, 즉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것과 동일한 은혜에 의한 선택을 따르지만,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그들 자신의 죄에 머무르는 타락한 이들은 심판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그들 스스로에게 쌓는다.
제20조 : 따라서 우리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 복음의 선포뿐만 아니라 자연의 작동이나 섭리에 의하여서도 드러난다는 의견이 틀렸다는 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의견을 주장하는 이들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은 제한적이지 않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직감을 올바로 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의 빛을 주심으로써 간접적으로 부르심을 입는 방법으로든지 또는 직접적으로 부르심을 입는 방법으로든지, 객관적으로 최소한 그리스도와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충분하게 입지 않고 사망하는 이는 없다는 논의를 덧붙인다. 그들은 마침내 은혜의 절대적 보편성을 주장하지 않고, 외적 부르심의 진지함과 진실됨, 또는 하나님의 정직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한 방어를 부정한다. 이와 같은 신조들은 성경과 모든 세대의 경험에 반하며, 명백하게도 은혜와 자연을 혼동하고,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혼란스럽게 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성의 빛과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혼동한다.
제21조 : 복음 전파를 통하여 구원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어두운 데 빛이 비치라고 명령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의 마음에 비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4:6) 영적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워지지 않고서는 그 부르심과 믿음에 복종할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으며 깨닫지도 못하는데, 성령의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2:14). 성경은 수많은 직접적 증거와, 기타 다른 부분들에서 좀처럼 더 확실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모자이크들을 통하여 이러한 전적 무능을 보여준다. 확실히 이러한 전적 무능은 도덕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심지어 도덕적 주체 및 객체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인류는 본래부터, 그리고 태중에 형성되는 방법으로 인한 출생부터 불순종의 자녀이기 때문(엡 2:2)에 전적 무능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전적 무능은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전능하신 회심의 은혜 없이는 뿌리칠 수 없다.
제22조 : 따라서 전적 무능을 도덕적 무능으로 여길 뿐 자연적 무능으로 보지 않고, 인간은 자신이 처한 조건과 무관하게 스스로가 원한다면 믿을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믿음은 어떻게든 저절로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부정확하고 위험한 것이다. 사도(바울)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하게 선언한다(엡 2:8).
제23조 : 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칭의의 두 가지 방법을 약속하셨다. 하나는 스스로 율법을 준수하는 방법이고, 하나는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순종 또는 의를 통하여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방법이다. 전자는 온전함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는 방법이지만, 후자는 타락한 죄인을 의롭게 하는 방법이다. 성화의 두 가지 방법에 따라 성경은 두 가지 언약을 밝히고 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아담의 후손 개개인이 맺은 언약이지만 죄에 의해서 효력이 상실된 행위 언약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이들만이 맺은 영구한 언약인 은혜 언약이다. 행위 언약은 폐할 수 있는 반면, 은혜 언약은 결코 깨어질 수 없다.
제24조 : 그러나 때에 따라 은혜 언약은 다른 경륜을 지닌다. 사도(바울)가 때가 찬 경륜, 즉 마지막 때의 경륜(엡 1:9)에 대하여 매우 명징하게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작정하신 때까지 구별된 경륜을 갖추고 계신다. 그러나 은혜 언약의 경륜 안에서 택한 자들은 하나님 앞의 사자(사 63:9)이시자, 창세 때부터 죽임 당하(심이 계획되)신 어린 양(계 13:8)이시며 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성자와 성부와 성령을 믿는 믿음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시다(히 13:8).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구원받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구원받았음을 믿으며, 선조들과 우리에게 적용되는 언약 속에서 이와 같은 원칙은 변경되지 않고 동일하게 남아있음도 믿는다. “(성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복이 있(시 2:12)”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요 3:18)”으며, “하나님을 믿은 것 같이 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요 14:1)”는 원칙이 그것이다. 다만 믿음의 선조들이 주 예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점은, 그들이 또한 성령을 믿었음을 의미한다. 선조들의 믿음과 행위 언약 및 은혜 언약 안의 믿음의 필요성에 대하여는, 누구도 일부러 의도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정말로 수많은 명확한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경륜에 따라 그리스도와 성삼위에 대한 구원의 지식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림자들, 형상들, 신비들로부터 나온 것으로써 신약(시대)보다 도출되기 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지식이었고, 택하신 자들이 하나님 은혜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의) 신적 계시의 양에 준하여 구원과 양심의 평안을 얻기 충분한 지식이었다.
제25조 : 따라서 우리는 전체적인 본성과 본질에 있어 차별적인 자연 언약, 율법 언약, 그리고 복음 언약의 세 언약이 있다고 주장하여 그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스스로를 난항에 빠뜨림과 동시에 견고한 진리와 경건의 핵심을 크게 모호하게 만들고 훼손하는 이들의 신조를 승인할 수 없다. 그들은 구약(시대)의 경륜 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 희생 및 성삼위일체를 믿는 믿음의 필요성에 관하여 지나치게 느슨하고 위험하게 판단하는 일에도 전혀 주저함이 없다.
제26조 :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속하여 현재의 경륜을 맡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아래에 머무르며 우리의 책무를 계승할 이들 모두는, 각각의 장소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무서운 분열의 불꽃에 휩싸여 다양한 방법으로 훼방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의 충실한 감시자인 이방인의 사도(의 말)와 같이, 세상의 타락 가운데 망령되고 허한 말을 피하고(딤전 6:20) 신앙에 전념하는 일에 충실하여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짝인 사랑과 믿음에 끊임없이 밀착하여, 경건함에 대한 지식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치밀하게 방어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이도 공적 또는 사적인 의심, 또는 지금껏 우리의 교회에서 들은 바 없는 믿음을 포함하고 있거나, 하나님의 말씀, 헬베틱 신앙고백, 일치서, 도르트 신조에 반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행되는) 성도들의 공회에서 입증되거나 인정되지 않은 새로운 신조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주일에 이루어지는 성화의 특별한 필요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준수를 인상적으로 가르치고 강렬하게 충고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우리의 교회들과 학교들에서 되도록 빈번하게,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의심의 여지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추론된 이 조항들에 포함된 진리를 충실하게 보존하고, 가르치고, 주장하여야 한다.
평강과 진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온 영혼과 육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존귀와 찬양과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출처 : 박동인 중역, Formula Consensus Ecclesiarum Helveticarum Reformatarum (스위스 일치신조)
헬베틱 신조라고도 불리는 스위스일치신조는 개혁주의 신학사에 큰 비중이 있는 신조는 아니다. 한 세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용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당시 제기된 각종 신학 논쟁의 경향을 엿볼 수 있고 특유의 철두철미함과 엄격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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