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의 ‘성화론적 구원론’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수학한 것으로 추정되는 A 목사의 구원 강의의 핵심은 ‘성화론적 구원론’입니다. ‘칭의론적 구원론’과 ‘성화론적 구원론’을 구분하고 대립시키면서 전자는 틀렸고, 후자가 옳다고 합니다. 기독인의 거룩한 삶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으나 믿음의 증표 곧 열매, 성품의 변화, 행위,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신칭의 구원’을 부정하며, ‘행위구원’으로 귀결됩니다. 아래와 같은 심각한 교리 오류와 위험을 담고 있습니다.
1. A 목사의 ‘성화론적 구원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 곧 의화론(義化論: doctrine of justification, 1547)과 동일합니다. “천국에 가 봐야 안다,” “누가 구원받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 아신다,” “함부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천국에 도달할 때까지는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 되고, 천국 심판대 앞에 가 봐야 구원을 받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아무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 되고, 심판대 서는 순간까지 행위, 실천, 삶, 성품, 열매로 ‘의로운 변화’를 가져야 하고, 만약 대죄를 지어 구원을 상실하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죄를 보속(補贖)하여 구원을 회복하거나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야 상실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2. ‘성화론적 구원론’은 이신칭의 진리를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아가 기독인의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말합니다. A 목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가 봐야 한다”고 합니다. 비행기, 비행기 표, 미국 도착을 비유로 등장시키면서 표를 가지고 있어도 미국에 도착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고, 땅콩회항, 기타 이유로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3. A 목사는 ‘성화론적 구원론’을 강조하면서 갈라디아서 5:22-23의 성령의 9가지 곧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오래 참음, 충성, 온유, 절제를 믿음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 열매들 곧 성화를 구원과 직결시키고 구원의 조건으로 삼습니다. ‘성화론적 구원론’이라는 표현 그 자체가 행위-성화와 구원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4. 기독인이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조건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완전한 성결, 성화, 열매, 행위, 실천, 성령의 9가지 열매로 구원받을 자는 없습니다.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눈높이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고 선언받은 자이지만 실제로는 죄인입니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위대성(amazing grace)은 이 같은 죄인을 무조적으로 사랑하고 구원한 사실에 있습니다.
5. ‘성화론적 구원론’은 칭의와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동의어로 보는 유보적 칭의론자 김세윤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론(칭의론)과 같습니다. A 목사는 종교개혁 신학자 칼빈과 루터가 ‘성화론적 구원론’을 펼쳤다고 주장합니다. 종교개혁 신학자들은 성화와 칭의가 연결되어 있고, 불가분의 관계이며, 성화가 기독인에게 필수적이라고 가르쳤지만, 이 두 가지를 구분합니다. 성화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6. ‘성화론적 구원론’은 결국 구원이 인간의 실천, 행위, 열매 곧 성화에 달려 있다고 주장입니다. 이를 약분(約分: 맞줄임)하면 ‘행위구원론’입니다. A 목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이라고 말하면서도 ‘성화론적 구원론’이 옳다고 합니다. 믿음 구원은 행위 구원 구도의 들러리 또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7. A 목사는 미국행 비행기 티켓과 미국 도착의 차이를 비유로 들면서 티켓을 가지는 것과 미국에 도착하는 것은 구분하면서 ‘성화론적 구원론’을 설명합니다. 이는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또는 ‘예약 칭의론’(reservational sanctification)과 똑 같습니다. 고급 식당에 예약을 했지만, 내가 그 식당에 가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칭의를 주셨지만 우리 자신이 행위-실천-열매로 믿음을 보이지지 않으면 또는 믿음을 실천으로 완성시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의 나라에는 비행기나 식당이 없습니다. 천국 입성에는 비행기 표나 예약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화론적 구원론, 유보적 칭의론, 예약 칭의론, 의화론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특징을 인간의 구도에 집어넣어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성과 전능성을 간과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고 절대적인 칭의를 비행기와 식당이라는 인간의 경험 구도에 집어넣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완전성을 격하시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왜곡시키고 은혜의 위대성을 인간 차원에 제한시킵니다.
9.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칭의도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과 칭의는 판사의 법정 선언처럼 확실합니다. 취소되거나 반복되지 않습니다.
10. “천국백성답게 똑 바로 살겠습니다”고 고백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은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A 목사는 믿음의 증표를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해 봐야 구원받는지 알 수 있고, 그 때까지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천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러한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자신이 참으로 부정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게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 눈높이에 인간이 자력 행위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결과에 도달합니다.
11. ‘성화론적 구원론’은 복음전도를 방해합니다. 이 구도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확신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다운 성경적 실천을 방해합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죄인에게 베푼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구원받은 확신에 찬 기독인의 삶과 복음전도 활동을 위축시킵니다.
12.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예수를 입으로 진정으로 시인하고 영접하고 주로 고백할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죄, 원죄와 자범죄를 용서받습니다. 이 때 미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확보됩니다. 장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사건-구원이 현재로 앞당겨져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은 현재완료형 사건입니다.
13. 개혁신앙의 선배들은 믿는 자의 종국적 구원을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로 강조했습니다.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중생시키시고, 무죄선언 곧 의롭다고 칭하시고, 양자로 삼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 곧 접붙임 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 호적에 입적시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순간까지 우리를 신앙을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분이듯이 하나님의 구원도 완전합니다. 진정한 기독인의 구원의 상실 가능성은 없습니다.
14. 성경에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행위로 구원을 이루라,” “한 번 비침을 받고 타락한 자” 등 마치 진정한 크리스천도 바르게 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처럼 생각되게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들도 이런 뉘앙스의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맥의 전후를 따져 살펴보면, 이 성경 구절들은 구원론 진술이 아닙니다. 기독인다운 실천을 강조하는 수사적 가르침들입니다.
15. 기독인다운 열매가 없는 ‘크리스천’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형식상 또는 명목상의 즉 이름뿐인 ‘기독인’이며, 실제로는 기독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 명목상의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은혜, 구원, 영생과 무관합니다. 행위-실천-열매가 없는 크리스천은 기독인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무관하며, 구원받은 신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복음진리로 타인을 구원받게 하고도 정작 자신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16. 형식적 또는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예수를 진심으로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설교함이 마땅합니다. 믿는 자다운 실천이 부실한 크리스천에게는 “기독인다운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구분되지만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혁신학은 성화를 강조합니다. 기독인다운 행위와 실천은 구원받는 자의 책무이고 성령의 도움으로 맺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17. ‘성화론적 구원론’은 모순투성이 논리에 근거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는 이신행칭의(以信行稱義) 교리입니다. 결과적으로 행위구원에 도달합니다. 성경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전도에 방해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론,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과 같습니다. 종교개혁신학의 구원론, 칼빈주의, 성도의 견인론에 불일치합니다. 이신칭의 교리의 위협을 받던 고신교단의 2019년 총회가 받아들인 “이신칭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입장” 내용과 상충됩니다. 도르트총회(1618-1619)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사상입니다.
최덕성 목사 (현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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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을 밝혀서 더 이상의 미혹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