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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글쓴이의 체취


허헌기, 다음 브런치에서 옮겨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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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에는 글쓴이의 체취가 묻어있다. 그래서 간혹 글과 사람을 등치시키는 위험한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글이 글쓴이의 인격을 완연히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도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노래를 잘 하는 것과 그 사람의 인격이 무관하듯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꼭 심성이 선한 것은 아니듯이, 글도 그 글을 쓰는 사람의 성정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바른 말을 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공명정의한 문장을 쓴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허접한 문장을 구사하더라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정 부분 타인의 정신과 감정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행간을 따라 읽는 이의 정신은 조작된다. 육체의 하중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언어의 하중으로 누른다. 글은 내밀한 지배욕의 소산이다.


예전에 페이스북에 이런 멘션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생각을 떠올릴 계기들이 매년 생겨왔습니다. 요즘 글쓰기의 팁, 글쓰기의 노하우 등 글쓰기의 테크닉적인 내용이 담긴 칼럼이니 강좌가 많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미 텍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인 소고입니다.

 

1.

물론 글이나 말에는 글을 쓴 주체의 세계관이나 태도가 반영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계관과 태도를 그저 견지한다고만 해서 삶과 행위의 영역에 있어서도 순간순간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내면의 힘까지 담보되진 않습니다. 그건 따로 길러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문단의 누구누구가(혹은 어떤 노랫말을 부르는 뮤지션이, 맨날 페북에 이런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실은 어쨌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아울러 그에 대한 환멸의 감정들을 저 역시 여러 루트로 들어왔지만 이제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습니다. 일정 수준의 경험치가 축적되면 다들 압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공명정대한 말을 입에 물고 살아도 자신이 순간순간의 욕망, 충동, 이해관계 등 등에 의한 시험에 던져졌을 때 본인의 세계관이나 자아가 있는 힘껏 흔들리기도 한다는 것을요.


자신에게 날카로운 지성과 윤리 감각이 있다고 해서 안심하면 안 됩니다. 그걸 극복하는 건 지성으로만 되는 건 아니고, 내면의 강함을 따로 길러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글과 그 주체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견제하는 것은 읽는 이만이 아니라 쓰는 이도 유의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 했습니다. 삶의 건강에 있어서요. 어지간히 똑똑한 사람들도 본인이 쓴 글이나 말과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뒤섞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글이나 말과 삶을 일치시키는 형태면 좋을 진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쓴 글을 자기 자신 성정이나 자아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요.


저 자신 대단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텍스트와 비교적 가까이 사는 바, 그 심정이 뭔지 대충은 압니다. 매력적이고 좋은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고자 하는 인정욕구는 누구나 갖고 있을 진데, 삶의 양태와 행위로 그걸 쌓아 충족하려면 뭔가 통제해야 하는 것도 많고 번거로우며 꽤 지난하거든요.


헌데 말과 글은 종종 그 간극을 메우는 착시효과를 일으키게 해줍니다. ‘~하기 위해 야부리를 턴다.’는 말 괜히 나온 소리 아닙니다. ‘윤리적이고 지성적이며 아름다운 언어를 생산한다’고 ‘윤리적이고 지성적이고 매력적인 행위’가 자연히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그것만으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3.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선배들에게 사석에서 물은 적이 있습니다. “논박하다가 자기주장이나 의견에 오류가 드러나면, ‘그냥 듣고 보니 제가 그 부분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냥 그러고 마는데) 하고 대화를 이어가면 될 문제를 지식인(?)들은 왜 쓸데없이 열 올려서 대화를 교착 상태에 일부러(?) 빠뜨려놓고 잘 소통이 안되면 적당히 눙치다가 나중에 가서 패배(?)를 시인(?)해요?” 하고요.


그러자 그러려면 자존감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걸 인정하면 면이 상한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이야기를 예전에 저를 학회에 막 초대해서 공부시키려고 했던(결국 안 했지만) 교수님께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뭐, 이런저런 사람들과의 이런저런 대화의 양상을 떠올려봤을 때, 꼭 지식인만 그런 게 아니라 보편적으로도 많이 그러는 거라 여기곤 있습니다만, 제 준거집단 기준으론 유독 지식인들이 그런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유독 담론의 세계에 발을 조금이라도 담그고 있는 사람들(꼭 대중에게 지식인이라 평가받는 사람이 아니더라도)이 자존감이 약한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되레 자의식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작문의 기술적인 영역에서 자기 글을 냉정하게(낯선 시선으로) 다시 읽어 볼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태도의 영역에서 자기 글을 건조하게 보거나 냉소적으로 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이나 견해나 감정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불식 간에 그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내지는 자기 성품이나 삶의 양태, 자신의 본질의 대단한 부분을 차지하는 구성물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이 뻘소리 좀 할 수도 있지 그걸 인정하는 게 뭐가 그리 큰 대수라고, 자기 말과 글에서 오류가 발굴되거나 논파되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동요할 게 뭐가 있습니까. 글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냥 글일 뿐인데.


자기 글도 건조하게 대하려고 의식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4.

당신이 글을 어느 정도 잘 쓰기 시작하다 보면 칭찬하는 사람들이 막 생길 것입니다. 그 글들을 촉발한 당신의 번뜩이는 촉(觸)과 예민한 감(感)과 정의로운 분기(憤氣)와 날카로운 통찰력과 그것들을 아울러 정제할 수 있는 문장력과 말주변이 자랑스럽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울 만한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 입에서 나온 말이나 제 손 끝에서 나온 글들이 자기를 구성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글과 글쓴이의 실제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면 그 말들과 글들이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 믿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속해야 합니다. 자기 글의 세계관으로 실제의 자신을 구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훌륭한 글과 말을 보고 당신에게 매료된 사람들이-혹은 팬덤들이- 당신의 글과 말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더라도, 당신조차 거기 도취되어서는 안 됩니다. 테크닉은 연습하면 늡니다. 데이터베이스는 공부하면 쌓입니다. 소재는 찾아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소위 섹시한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문재를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달리, 대개는 남들이 다른 데다 시간을 쓸 때 그들은 글을 쓰고 발전시키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한 결과값일 확률이 높습니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기술적인 영역 못지않게 외려 태도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쓸 때의 태도, 본인의 글을 대할 때의 태도, 본인의 글을 읽는 사람들과 평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등.


글에도, 독자에게도, 더 나아가 팬덤이나 당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도 부디 도취되는 것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박수에도, 손가락질에도 도취되지 마십시오. 글은 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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