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 정체성
강영안 교수
1. 교회가 받는 도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제나 안팎으로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밖으로는 박해와 배척으로, 안으로는 잘못된 가르침과 불순종, 왜곡된 관행과 나태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물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만들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와 배척은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게 했지만 오히려 교회를 강건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의 공동체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의 원천이며 그 분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삶과 존재가 유지되고 번성한다는 인식과 고백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불순종, 왜곡된 관행과 나태는 교회를 약화시키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 때마다 신실한 종들을 세우셔서 교회를 새롭게 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게 하셨습니다. 지난 서구 교회의 역사나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를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 때가 그 때인지,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언약 가운데 부르셔서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임을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일깨워 주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둘러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갱신으로 이어질지, 개혁으로 이어질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속에, 또는 우리 바깥에 문제가 발생하고 상황이 벌어질 때, 우리는 신실하게 반응하고 응답해야 할 뿐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이 고신의 장로님들이 모인 자리에 초대받아 말씀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2. 고신 교회 전통의 고유성과 그와 더불어 생긴 그림자
이 자리에서 고신 교회의 역사를 되새김해 볼 여유는 없습니다. 몇 가지만 짚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 우리 고신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민감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 다른 신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우상을 배척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식으로 예배하겠다는 의지가 고신의 설교, 고신에 속한 성도들의 삶에서 강하게 드러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계명도 물론 중요하지만 고신 전통은 1계명, 나아가 1계명부터 3계명을 무엇보다 삶과 신앙과 지표로 삼았습니다. 이 맥락에서 주일 성수라든지 국기경례거부라든지 하는 것들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교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바리새적’으로 보였거나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2) 고신 정신에는 오직 말씀을 내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말씀의 강조는 한국기독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고신은 “말씀이오!”, “성경이오!”라고 외치면 이 앞에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할 뿐 아니라 말씀을 토대로 만들어진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공부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은 전통을 고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3) 여러분들이 모두 동의하실지 모르지만 어떤 일이나 죄짓는 일 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일이고 주님의 일이라는 정신도 고신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학생신앙운동을 통해서 저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이라는 표현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떤 분야든, 어떤 일이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깨우침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목사가 되는 길을 계속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학자로서 사는 것이 나의 부르심이고 나의 사명이라는 인식은 고신 교회에서 제가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고신의 이 전통에는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습니다. 고신은 신사참배를 반대했거나 신사참배에 가담한 과거를 회개한 분들이 참여한 교회이기 때문에 우상 숭배에 민감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릴 때는 국기경례 거부로 나타났고 한참 뒤에는 단군신상건립 반대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우상에는 민감하지만 막상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에는 둔감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더 추구하는 양상으로 고신은 발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저는 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 가운데 고신 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것은 ‘큰 것에 대한 욕망’을 지목해낼 수 있습니다.
저는 고신의 특징을 말씀에 대한 열정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고신 운동은 신학운동이었습니다. 고신의 역사는 1946년 6월 진해에서 열린 신학강좌와 1946년 9월 20일 뒤 ‘고려신학교’ 설립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것이 1955년 ‘칼빈학원’ 설립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1971년 교육부 인정 학사 학위가 수여되는 ‘고려신학대학’이 세워집니다. 고신은 원래 신학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신학교에 머물지 않고 신학과 한 학과를 가진 단과 대학으로, 그리고 다시 종합대학으로 성장합니다. 고신은 다른 교단처럼 대형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일산 베델교회나 부산 포도원 교회 정도가 아마 대형교회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큰 것에 대한 욕망’은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학교를 통해서, 복음병원을 통해서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기총이 그렇게 문제가 많은데도 탈퇴를 못하고 있었던 까닭도 작은 교단이 ‘큰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이 아닌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신 전통의 두 번째 특징을 저는 ‘오직 말씀’, ‘오직 성경’을 내세우는 전통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은 고신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말씀의 엄정성, 말씀의 권위에 대한 존중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고신 전통이 형성되면서 이와 관련해서 만들어진 그림자는 모든 것을 법으로, 규칙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과 그럼에도 규칙이나 법규를 무시하는 두 경향입니다. 새로 나온 고신 헌법을 보면 권징조례 분량이 상당 부분 차지합니다. 그리고 총회에서도 규칙과 관련된 부분이 늘 논란되었습니다. 고신 역사를 보십시오. 규칙에 대한 존중, 그 가운데 안식일과 관련된 규칙 때문에 고신의 신학을 세웠던 박윤선 목사님이 고신을 떠났습니다. 회의 때 ‘법이요!“하면 모두가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 규칙은 쉽게 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사제 이사회’ 사건입니다. 고려신학교를 고려신학대학으로 교육부로부터 허락을 받기 위해 임의로 이사회를 구성해서 서류를 위조해서 보고한 사건입니다. 1973년에는 송사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고소에 반대한 분들이 고신 교회를 떠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토록 내세우면서 세상 법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일이 고신의 역사에 적지 않습니다. 고신언론사 사장 선출과정에 드러난 금품수수도 아마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규칙에 호소하고,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공존하는 상황이 현재 고신 교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8년 고신 하계 목회자 대학원 모임을 가졌을 때 어느 목사님 “오십일 사십구 방식”(“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51%는 하나님 방식, 49%는 세상 방식을 따라야 한다”)이라고 말씀한 적이 있었습니다. 법과 규칙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을 따라 하는 관행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신에서 저는 우리의 일상의 삶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을 저는 고신의 세 번째 전통이라 보았습니다.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므로 정치 지도자가 되든지, 학자가 되든지, 청소를 하는 사람이 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요, 거룩한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좀 더 쉽게 하자면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하는 일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적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고신의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는 이런 귀한 고신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에는 소홀했다고 생각합니다. 총회에서 이런 것을 안건으로 올려 심각하게 토론하고 갈길을 모색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것, 주되심의 삶을 사는 것은 성도들의 삶과 관련한 주제들이라 노회나 총회에서 다룰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정책적인 논의가 총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노회 총대 구성이나 총회의 총대 구성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 방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과 문제가 총회의 관심사일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면 저가 문제로 여기는 것들이 아예 문제조차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에 교회가 무관할 수 없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성도의 삶에 더구나 무관심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더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성도들의 삶의 방향 설정에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시대의 도전과 고신 교회의 미래
이제 이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여러 교회 가운데 특별히 고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신이 걸어오면서 만들어 낸 그림자와 그늘들을 보면 고신 정신이 그로 인해 마모되고 쇠잔해지고 이제는 어쩌면 형해조차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는가, 하는 생각조차 들게 됩니다. 그러나 우상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고(‘우상 거부’) 하나님 말씀만이 오늘의 성도와 교회의 표준이고 삶의 지표이며 걸어가는 길의 등불이며(‘오직 말씀’) 그리스도인의 일상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제사라고 믿고 따르는 전통(‘일상의 성화’, ‘모든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여전히 고신 교회에 남아 있다면 고신 교회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기여할 것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사실은 세계교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지반을 고신 교회는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현실이 아니라 바람이고 희망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교회, 그러한 신앙,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고신 교회가 여전히 원한다면 고신교회는 오늘의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과제를 교단적으로 생각하고 총회에서 심사숙고하고 방향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도전은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도전을 저는 예컨대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고백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과 관련해서 보자고 제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아버지이시고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 다시 말해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들의 사귐을 가능하게 하시고, 죄 용서를 하시고, 육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시고, 영생을 누리도록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 때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고 오직 그 분에게 의지해서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이 표현하듯이 ‘크레도’(Credo) 곧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만일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교회, 오늘의 성도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세 가지 도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의 삶을 주제하고 선하게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에 대한 부정입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시고 주님이신 예수의 유일하고도 독특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세우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도전을 무신론의 도전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도전은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입니다. 세 번째 도전은 오늘 교회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성공주의, 기복주의, 세속주의 또는 다른 이름으로는 소비주의의 도전입니다.
만일 이 도전들을 오늘 한국교회에, 특별히 고신 교회에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게 된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고신 교회는 어떤 문제를 돌아보고 어떤 전략과 정책을 기획해 보아야 할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무신론 문제입니다. 이 때 제가 말하는 무신론은 프로이트(Sigmund Freud)나 라슬(Bertrand Russell) 또는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론적 무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디도서 1장 16절 말씀의 표현대로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이런 의미에서 이론적으로는 유신론자이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실천적, 현실적 무신론입니다. 사람을 뽑을 때, 재정을 관리할 때, 어떤 일을 계획할 때, 선한 목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편법이나 탈법을 선택할 때, 우리는 현실적으로, 실제적으로 무신론자가 됩니다.
참된 신자는 생각과 말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섭리와 주재를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르는 까닭은 세상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인의 현존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증거요, 징표요, 표시여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제도 속에, 우리의 의사 결정 구조 속에, 오늘 우리의 관행 속에 얼마나 많은 무신론적 요소가 들어와 있는지, 지역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와 총회도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도전에 맞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한 종교가 주도적 종교로 지배해왔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945년 이후로는 유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주도 종교로 한국사회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한국사회는 종교 다원 사회 또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서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종교다원주의가 제안됩니다.
여러 종교가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에도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배타적이라 질타합니다. 이런 상황은 분명히 기독교인과 교회에 도전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종교 다원적 상황 또는 다종교 상황뿐만 아니라 갈수록 한국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다른 인종들의 유입으로 인한 다문화의 형성을 강 건너 불 본 듯이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뿐 아니라 전쟁 문제, 지역 간의 갈등 문제, 동성애 문제, 환경 문제, 성차별 문제 등 하나 같이 풀기 쉽지 않은 문제들에 한국교회는 직면해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과감하게 거부했듯이 고신 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타종교를 적으로 배척하고, 타문화 출신들을 외인으로 배격해야 하겠습니까? 고신은 시대적으로 새롭게 주어진 상황과 흐름에 대해서 언제나 거부하는 몸짓을 해야 하겠습니까? 고신 교회는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총회적으로, 교단적으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논의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고백하면서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와 평화로운 삶의 꼴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세 번째 과제는 성령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명백하게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후기 자본주의가 보이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소비주의입니다. 소비주의는 개인과 공동체를 회복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과는 대립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소비주의의 특징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욕구에 입각한 선택과 행동을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 나에게 부족한 것, 그리고 나아가서 내가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의 충족이 여기서는 최선의 가치로 등장합니다. 교회도 이제는 이러한 욕구 충족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욕구는 한번 충족되면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된 대상은 곧장 소비되고 맙니다. 지속적으로 그것이 남아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키워나가지는 못합니다. 신앙도 이렇게 욕구되고 소비되고, 향유된 뒤 사라지고 맙니다. 오늘 이런 상황에서 만일 고신의 정책 과제를 내어 놓는다면 목회의 목적과 방향, 목회의 방법, 그에 어울리는 목회자 양성에 대한 분명한 그림입니다. 저는 신약 성경 가운데서 목회를 가장 분명하게 규정하는 부분이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6절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앞 뒤 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지만 말씀 드리면 목회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세워야 할 ‘목표’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이것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과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품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세 가지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하나된 성도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따르도록 성도들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만일 목회를 이렇게 보면 우리 고신교회가 노력해야 할 과제는 ‘성도를 온전케 할 수 있는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오늘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교육하고 양육하는 방법과 내용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신학대학원 교과 과정에서부터 학생과 교수의 관계, 고신대학교의 존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속에서의 고신 교회의 독특한 위치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맺는말
한국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 교회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 줄로 압니다. 어느 통계를 보았더니 1890년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한창 활동하고 있던 당시 네덜란드는 91%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는 기독교 정치, 기독교 언론, 기독교 교육, 기독교 노동자 운동 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고도 20년이 더 지난 지금 상황을 보면 네덜란드 교회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거의 모든 국민이 기독교인이었던 나라가 어떻게 한 세기만에 탈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교회의 세속화 속도가 그렇게 빨리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유럽 사회의 세속화 과정은 그 자체로 커다란 주제입니다. 한국교회가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공부해야 하고 배워야 할 사례입니다. 아마 미국을 제외하고는 잘 사는 나라 가운데서 기독교가 여전히 번창하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남미나 아프리카 등 못 사는 나라에서는 기독교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필립 젠킨스는 이것을 Next Christendom 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 사이에 끼여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급속하게 쇠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기독교. 이 때 고신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한국의 현실 기독교와 고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냉혹한 성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고신의 장로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 물음과 다시 씨름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좋은 신앙 전통을 살리고 우리 가운데 형성된 악습들을 버리고 말씀을 따라 예수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코람데오닷컴의 글, 페북에서 옮김
강영안 yakang@sogang.ac.kr